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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룰 이야기는 충청북도 청주(淸州)에 있었던 충청병영(忠淸兵營), 즉 충청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에 관한 내용입니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조선시대 팔도(八道) 각 지역에 배치되었던 종2품 품계의 군사 지휘관 관직입니다. 병마절도사는 크게 겸임(兼任)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와 전임(專任) 병사로 나뉘는데, 겸병사라고 하는 겸임 병사는 각 도(道)의 최고 행정관인 관찰사가 예겸(例兼, 자동 겸임)으로 겸직하는 병사를 의미하고, 단병사(單兵使)라고 하는 전임 병사는 출신부터 무관(武官) 또는 무반(武班)인 전문 군인(軍人)이 임명된 병마절도사였습니다. 충청도에는 겸병사 1원(員), 단병사 1원이 있었습니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조선 후기 기준으로 수군절도사까지 겸임했던 겸병사인 관찰사는 공주(公州)에, 단병사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에 있었죠. 또 충청도 수군(水軍, 해군)에 단수사(單水使)가 있었는데 수군절도사는 보령(保寧)에 위치했습니다.


청주 소재 충청북도 도청 건물 배치도 및 운주헌 평면도 추정
1번 그림 - 충북 청주 충청북도 도청 건물 배치도 (1914년 무렵)


위 1번 그림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1914년 무렵의 충청북도 도청(道廳) 건물 배치도입니다. 중앙에 있는 '신축 본관'의 건축 일자가 1914년 12월이기 때문에 도면 작성 시점을 1914년 하반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설계 및 공사 기간 참작). 도면 각 건물에 표기된 적색 숫자는 평수(坪數)입니다. 국제단위계(SI)인 미터법에 따라 제곱미터로 표기해야 하지만 당시 자료에 평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그대로 준용하였습니다.

본래 도면에는 건물 이름 또는 용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1917년 작성 충청북도 도청 건물 목록과 비교한 각 명칭을 표기하였습니다. 건물 면적을 참작한 추정 건물명입니다. 당시 도청은 신축 본관, 제1청사, 제2청사, 제3청사, 제4청사, 제5청사, 회의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청사'라고 이름이 붙은 건물은 도청의 권업(勸業), 재무(財務), 회계(會計) 등 각종 부서가 입주해 있던 업무용 건물이었습니다.

1) 도청 본관 : 1914년 12월 20일 신축 일본식 기와지붕[瓦葺] 및 목조(木造) 건물
2) 제1청사 : 한옥 기와지붕 목조 건물 - 운주헌(運籌軒)
3) 제2청사 : 1912년 9월 신축 일본식 기와지붕 및 목조 건물
4) 제3청사 : 한옥 기와지붕 목조 건물 - 헐청(歇廳)?
5) 제4청사 : 한옥 기와지붕 목조 건물, 일부 2층[一部二階建] - 통군루(統軍樓)
6) 제5청사 : 한옥 기와지붕 목조 건물
7) 회의실 : 한옥 기와지붕 목조 건물 - 내아(內衙)
8) 제8창고 : 한옥 기와지붕 2층[二階建] 목조 - 폐문루(閉門樓)
9) 1914년 당시 청주경찰서 본관 (1919년 4월 충북도청 증축 도면) - 비장청(裨將廳)
10) 압각수(鴨脚樹) : 오리 발가락 형태를 닯은 추정 수령(樹齡) 900년의 은행나무 (중앙공원 현존)

위 주요 건물 목록에서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건물로 이름 및 용도가 특정되는 것은 적색 글자로 건물명을 표기하였습니다. 운주헌, 통군루, 내아, 폐문루(원문), 비장청 등이 비교적 확실하게 구분되며, 물음표가 있는 헐청(휴게 건물)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수록 충청병영 지도를 참작한 추정입니다.


운주헌은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중심 건물입니다. 이 건물의 외형은 1918년 5월에 작성된 도면에서 확인되는데, 1번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수록한 도면 '편집 이미지'가 바로 운주헌의 추정 정면(正面)과 평면(平面)입니다.

충청북도 행정 중심지가 기존 충주(忠州)에서 청주로 이전된 날짜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6월 5일입니다. '도청(道廳)'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날짜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인 1910년 10월 1일이기 때문에 1908년 시점에는 도청 이전(移轉)이라고 하지 않고(도청이라는 명칭 사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님), 관찰도(觀察道) 또는 관찰부(觀察府)를 옮겼다고 하였습니다(공식 명칭은 관찰도이며, 관찰부는 관례적 명칭). 관찰도가 청주로 이전될 때 입주하였던 공간이 바로 예전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었고, 이 자리는 1937년에 새로운 부지로 도청을 신축 이전할 때까지 청사로 계속 사용됩니다.

관찰사(觀察使)를 비롯한 관찰도(도청)의 관리가 병마절도사영 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중심 건물인 운주헌에서 사무를 보았으며, 관찰사 사저는 운주헌 북쪽 건물에 있었고 관찰도 서기관(書記官, 奏任官)은 통군루에 거주하였습니다. 이후 1910년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도정(道政) 체제가 수립되어 운주헌에 지방(地方) 및 권업 부서, 운주헌 동쪽 건물에 재무, 인근 통군루에 회계, 압각수(은행나무) 아래[下] 건물에 학무(學務) 부서가 들어섰습니다. 운주헌 동쪽 건물을 비장청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비장청 지역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청주경찰서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1번 그림의 제3청사 자리에 재무 부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무 부서가 있었던 은행나무 아래 건물은 거입정(去入亭) 또는 폐문루로 판단됩니다(사무실로 개조된 폐문루 유력). 참고로, 당시 부서명 뒤에는 계(係)가 또는 과(課)가 붙었습니다(권업계, 학무계 등 전자 유력).


위 그림에서 아래쪽 89.98평 창고는 옅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고,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41.61평 규모의 창고가 더 있었습니다. 예전 병마절도영 부지를 둘로 나눠 왼쪽을 도청, 오른쪽을 경찰서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행랑(行廊) 창고는 병마절도영 시기의 건물이라기보다는 병마영 폐지 이후에 들어선 진위대(鎭衛隊) 제2연대 제2대대 병력을 수용하기 위해 나중(1900년 전후)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청주 소재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운주헌(運籌軒)
2번 사진 -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본청 건물 운주헌 (충북도청 시기)


위 2번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 관찰도 또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충청북도 도청 건물입니다. 바로 앞의 1번 그림에서 살펴본 제1청사 건물, 즉 병마절도사가 공무를 보던 운주헌입니다.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전면 기둥 사이에 벽을 세우고 유리창을 달았습니다. 정면 8칸[間], 측면 4칸으로 된 전체 32칸의 상당히 큰 규모이며, 왼쪽에서 5번째 칸이 중앙 대청(大廳, 마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쪽 사진은 대청 칸에 편액(扁額, 현판)이 걸려 있고 전통 한복을 입은 사람 보이기 때문에 대한제국 때 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아래쪽 사진은 1913년 출간된 책에 수록된 것이고, 이와 동일한 사진이 다른 책(1912년)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이 두 장 이외에도 운주헌을 찍은 사진이 몇 장 더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 건물 앞쪽이 탁 트여 있는 것을 볼 때 모두 도청 본관이 신축된 1914년 연말 이전에 촬영한 것 같습니다. (만약 운주헌을 찍은 사진에 1번 그림의 제2청사가 어렴풋하게라도 보이지 않는다면 1912년 9월 이전 촬영 사진일 것입니다.)

병마절도영에 있던 수많은 건물 가운데 이 운주헌과 폐문루가 가장 마지막까지 존재하였습니다. 다른 한옥(韓屋) 건물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충청북도 도청을 증축 및 개축하는 과정에서 전부 철거되었고, 1937년에 다른 곳(현재의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으로 도청 자체를 신축 이전할 때 이 운주헌마저 철거되고 지금은 2층의 폐문루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이 폐문루가 바로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영문(營門)'입니다. 청주읍성의 문을 여닫는[閉] 것을 알리는 북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폐문루(閉門樓)라고 불렀고, 군영(軍營, 군부대)의 정문 역할을 하였기에 원문(轅門, 軍門) 또는 영문(營門)이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 폐문루에는 정곡루(正鵠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1937년 10월 2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에 따르면 청주에 있던 사찰인 용화사(龍華寺)에서 당시 금액으로 350원에 운주헌 건물을 낙찰 받아 불각(佛閣)으로 개축 이전하였다고 하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항공사진을 관찰해도 용화사 주소지에는 운주헌과 동일한 규모의 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 건물로 개축되었기 때문에 건물 규모나 외형에 큰 변형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1960년대 항공사진에서 보이는 건물이 지금 건물과 완전 다른 것을 볼 때 적어도 현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위쪽 운주헌 사진에 보이는 편액 글자는 거의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대략 '親民和館(친민화관)', '친무병영(親武兵營)' 정도로 보이는데(둘 다 극히 낮은 확률의 정확도), 해상도가 높은 원본 사진을 보면 아마도 정확한 글자 식별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 글자가 '民'이면 관찰도 청사로 사용된 이후에, '武'라면 진위대 청사 시절에 제작한 편액일 것 같습니다. 1923년에 일본인이 편찬한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를 보면 운주헌을 근정전(勤政殿)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편액 이미지를 아무리 봐도 근정전 세 글자는 아닙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한자의 편액을 대한제국 관리들이 관찰부 청사에 달았을 가능성이 없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작 이후에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겠지요.

운주헌이 문헌 기록상의 병마영 동헌(東軒, 鎭軒)인 청진당(淸塵堂)인지는 충분한 검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청진당이 곧 운주헌으로 판단됩니다. 건물 자체는 사라지고 없지만, 운주헌(도청) 사진과 도면 자료가 일부나마 전해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통군루(統軍樓) 건물
3번 그림 - 충청도 병마절도영 통군루(統軍樓)


위 3번 그림은 현재 남아 있는 폐문루와 더불어 병마절도영에 있었던 또 하나의 2층 문루(門樓)인 통군루(統軍樓)입니다. 문(門)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라 병마영 군사를 통솔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니, 문루가 아닌 누각(樓閣)이라고 해야 하겠죠. 1917년 건물 목록에는 도청 내 모든 한옥이 개국373년(1764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어느 특정 건물을 기준으로 편의상 일괄 기록한 것이고, 실제 통군루는 1688년(숙종14)에 병마절도사 한근(韓根)이 창건(剙建)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왼쪽 위 이미지는 1번 그림에 있던 1914년 도면의 제4청사 부분입니다. 보라색으로 채색된 ㉠ 부분이 통군루, 분홍색의 ㉡ 부분이 통군루와 연결되어 확장(증축)된 청사 일부분으로 판단됩니다. 1914년에는 ㉢ 부분까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1918년 7월 및 1919년 4월 도면에서는 노란색 실선으로 표시된 부분으로 청사 면적이 확장되면서 ㉢ 부분은 제외됩니다. 2칸 규모의 ㉣ 건물은 1910년 10월에 지어진 아연판 지붕[亞鉛葺, 함석지붕]의 일본식 목조 건물이며, 소사실(小使室)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사(小使)는 관청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고용인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를 보면 통군루 북쪽에 몇 칸 건물이 보이는데, ㉡의 분홍색 증축 청사 부분이 기존 건물(한옥)을 토대로 확장한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 지은 건물인지에 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제4청사 도면에서 한 가지 의문은, 1917년 건물 목록에서 제4청사의 건물 면적이 12.15평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도면 자체만 놓고 면적을 측정하면 ㉠ 면적이 약 12.5평 + ㉡ 면적이 약 12.1평으로, 통군루로 추정되는 ㉠보다는 ㉡이 목록상의 면적인 12.15평에 가깝습니다. ㉠과 ㉡을 합치면 약 24.6평이고, ㉢ 부분과 ㉠의 출입문 부분을 더하면 28.4평 정도가 됩니다. 다만 건물 목록을 작성하던 1917년 시점이 통군루인 ㉠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철거하고 다시 노란색 실선 규모로 제4청사 전체를 개축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면 이러한 의문은 대체로 해소됩니다.


오른쪽 위 이미지는 청주시청 사진DB 사이트에 수록된 '1920년대(?) 충청북도 도청 구내 은행나무[銀杏樹] 사진'의 일부입니다(1920년대 자료에 수록된 1910년대 사진으로 판단됨). 은행나무 뒤쪽으로 멀리 양성마루(양성바름) 지붕을 갖춘 통군루 일부가 보입니다. 빨간색 화살표가 통군루, 파란색 화살표가 1번 그림의 도면에 있던 제1창고(추정), 노란색 화살표가 은행나무(압각수)입니다. 여기에 싣지는 않았지만 같은 사이트에 있는 충청북도 도청 사진에도 통군루가 등장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의 출입구와 1914년 도면의 출입구 존재가 ㉡가 아닌 ㉠를 통군루로 추정하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통군루의 원래 모습과 사무실로 개조 후의 형태를 추정한 그림입니다. 관찰도(도청) 이전 직후에 서기관이 통군루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누각을 벽체로 개조한 시점은 진위대 사용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병마영의 구식 군대가 아닌, 근대 무기를 장비한 신식 군대가 주둔하면서 누대(樓臺)에 올라 군사를 호령하던 건물 용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사무 또는 거주 용도로 변경하였을 듯합니다.

관찰도 시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초기에도 줄곧 활용되던 통군루 건물은 1920년에서 1923년 사이에 철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1923년에 간행된 『청주연혁지』에 '最近取拂(최근 철거)'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 상편을 마칩니다. 본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1914년 및 1917년 당시 충청북도 도청 건물 배치도 및 각 건물 용도 확인 (추정)
ㄴ)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중심 건물인 운주헌의 위치, 도면, 사진 확인
ㄷ) 통군루 위치, 사진 확인 (13.77평 규모의 폐문루 영문에 비해 약간 작은 12.15평 면적)


하편(링크)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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