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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과 9월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10월초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이렇게 올려봅니다. 몇 번 예고한 대로 이번 글은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동헌(東軒) 등 건물의 배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지난 2024년 연말에 올릴 계획이었는데, 이런저런 안팎의 사정으로 차일피일 지체되다 보니 거의 10개월 정도 늦어졌습니다.
최근 다시 작업을 하려고 각종 자료를 점검하다 보니, 본문에서 다루고자 했던 내용과 거의 비슷한 부분에 초점을 둔 논문(신웅주, 「사진 기록을 통해 본 나주목 동헌의 위치와 구조」, 2025)이 올해 봄 발행된 건축역사학계 학술발표대회 논문집에 수록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지난달 15일에는 논문 저자로 추정되는 분께서 직접 운영하는 추정되는 블로그(새창 보기 링크)에 해당 논문의 주요 내용을 담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애초 계획대로 작년 연말에 포스팅했어도 최적 시기를 놓친 글이 되기 쉬웠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여간, 어쩌다 보니 관련 논문을 간단하게 직간접적으로 보완 내지 보충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시작합니다.

이번 글은 위 지도 하나가 대부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A부터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A는 1913년 작성된 나주 지역 지적원도(地籍原圖) 위에 현대 항공사진으로 촬영된 현존 건물인 나주목 내아(內衙) 금학헌(琴鶴軒), 동헌 외문루(外門樓) 정수루(正綏樓), 객사(客舍) 금성관(錦城館)의 외문루 망화루(望華樓) 등을 겹친 것입니다. 내아와 내아 문을 포함하는 문간채가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고, 동헌 정문인 외문루가 객사 방향의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헌은 내아에 인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가' 지점에 동헌(東軒) 대청(大廳)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B는 1916년 당시 일본 육군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 의해 측도(測圖)되고 1917년 제판(製版) 및 인쇄, 발행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10,000 축척 지형도(地形圖) 일부입니다. A와 동일한 범위이며, 주요 건물 가운데 진한 색으로 가득 채색된 부분은 지명 주기(注記)로 표시된 헌병파견소, 잠업전습소, 지방법원출장소, 면사무소 등 건물입니다. 동그라미 나무는 활엽수(闊葉樹), 세모 나무는 침엽수(針葉樹, 鍼葉樹)이며, 동헌 외문루인 정수루와 관청 건물을 감싸는 담장 형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C는 서두에 언급한 논문에서 동헌 건물을 추정한 내용을 비교하기 위해서 1913년 지적원도 위에 1917년 지형도 건물을 강조 표기한 것입니다. 논문에서는 바로 아래에 첨부한 2번 사진 '나주군청' 건물을 서향으로 추정하였습니다. 하늘색 화살표 방향에서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죠. 일단 나주군(羅州郡) 군청(郡廳) 추정 사진을 살펴봅니다.

위 이미지는 1910년 전후에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회엽서(絵葉書, 사진엽서) 사진인데, 제목이 '조선나주군청(朝鮮羅州郡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건물 기단부가 다른 동헌 건물들과 비교할 때 다소 약해 보여서 위엄있게 보이지는 않지만, 건물 정면이 6칸[間] 이상에 달하고 측면은 3칸에서 3칸 반(半)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느 고을의 동헌 규모에 걸맞은 큰 건물입니다(논문에서는 정면 7칸으로 추정). 향토지 문헌 기록상으로도 예전 사또가 공무를 보던 동헌 자리에 근대식 군청이 소재했고, 나중에 더 넓은 공간을 찾아 객사 금성관 자리로 옮겨가기 때문에 이 사진의 건물을 동헌 '제금헌(制錦軒)'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논문에서는, 위 사진에서 노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추녀마루 2곳의 모양 때문에 건물 뒤쪽으로 날개채가 확장되었을 것이라 보고 1번 지도의 C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위 사진의 초록색 화살표 나무를 1번 지도 C의 ㉠ 위치 활엽수 2그루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지리적 환경에 제약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서향으로 건축된 동헌, 객사는 거의 없으며(일반적으로 남남서 방향 정도가 최대치), 내아가 남향이므로 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집니다. 따라서 1917년 지형도는 이미 동헌(제금헌)이 철거된 이후에 측량 및 작성되었을 수 있으며, 지형도 제작 당시까지 동헌 건물이 남아 있었다면 동헌 본청과 동헌 서남쪽의 부속 건물(사진의 빨간색 화살표 부분)이 지붕을 갖춘 복도, 통로 등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지형도에 수록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미리 밝히지만, 후술할 당시 기록 내용을 참작할 때 전자(훼철 후 신축 건물)는 그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철거 시점을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22년경까지는 동헌 본청 건물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1번 지도 C에서 '지방법원 출장소' 글자 왼쪽 위에 있는 보라색 화살표 방향으로 사진이 촬영된 것이며, 건물 뒤쪽의 나무는 ㉡ 지점에 식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입니다. 1917년 지형도(B)에서는 '지방법원 출장소' 글자가 누에치기인 양잠(養蠶)을 가르치던 잠업전습소(蠶業傳習所) 건물(=동헌) 남쪽에 표시되어 있지만 법원 출장소 건물은 전습소 동쪽의 ㄴ자 건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방법원 출장소' 글자 위쪽, 잠업전습소 건물 동쪽에 있던 직사각형 네모 형태 면적의 건물일 수도 있겠지만 제반 정황상 가능성이 낮습니다. 참고로, 몇몇 자료에는 군청이 제금헌에서 객사로 옮겨간 후, 그 공간을 1921년대부터 잠업전습소로 활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위 지형도에서 보는 것처럼 1917년경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1921년 당시 군청은 나주객사에 소재).
1번 지도의 D는 여러 자료, 사진, 도면 등을 종합하여 동헌 건물 위치를 추정한 것입니다. 내아 남쪽에 남향으로 동헌인 제금헌이 있었다고 봅니다. 외문루에서 동헌 대청까지의 유력한 진입로는 c입니다. 1872년(고종9) 제작된 지방 지도인 〈나주지도(羅州地圖)〉에서 내삼문(內三門)이 외문루인 정수루와 같은 동향(東向)으로 묘사되어 있고, 정수루부터 동헌까지의 전체 진입 경로가 지나치게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필자 추정처럼 c가 맞다면 내삼문을 통해 동헌에 들어서는 위치(내삼문 문턱 바로 안쪽)에서 2번 사진을 촬영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동헌 추정 위치는 대체로 나주시에서 2018년에 간행한 《나주목 관아와 향교 종합정비계획》의 도면과 비슷하나, 당시에는 위의 동헌 추정 사진이 발견되기 이전이고 문헌 기록에도 동헌이 몇 칸이었다는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세부 위치 및 규모가 필자 추정과 다릅니다. 또 종합정비계획 도면에서는 진입로를 a 및 b로 추정하여 5칸 규모의 내아 문간처럼 동헌 정면인 남쪽 행랑채에 문이 있었고 별도로 동북쪽에 내삼문이 존재하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외문루를 통과하여 직진해서 내삼문에 들어간 후, 왼쪽으로 꺾어 동헌 건물에 닿는 b 경로를 중심 진입로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렇게 되면 내삼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헌이 북향 건물이 되어야 하므로 불가능합니다. 만일 이런 통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헌과 내아를 오가는 보조적인 출입문이었을 것입니다.
D의 각 화살표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빨간색 화살표 : 2번 사진 동헌 건물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동헌 부속 건물
2) 보라색 화살표 : 2018년 《 나주목 관아와 향교 종합 정비계획 》에 수록된 '아사(衙舍) 복원 배치도' (옅은 회색 평면도)
3) 분홍색 화살표 : 1917년 지형도의 주요 관아 건물
4) 초록색 화살표 : 본문에 수록하지 않은 나주시장 사진엽서에 등장하는 건물 (일본 제18은행 출장소 사용 시기)
5) 파란색 화살표 : 1919년 경찰서 도면 (아래 4번 도면을 비율에 맞춰 축소 삽입)
6) 하늘색 화살표 : 1919년 경찰서 도면의 부속 건물 (작청 건물의 나주경찰서 사용 시기 죄인 구금 장소)
이쯤에서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시기 관아 건물 고증과 관련하여 중요한 일제강점기 기록을 살펴봅니다. 작년 7월 글에서 소개했던 1922년판 및 1932년판 『조선총독부 관유재산목록(官有財産目錄)』입니다. 그 책자에 수록된 나주목 관아 주요 부지 및 조선시대[朝鮮式] 건물 내역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토지[土地及附屬物]
- 나주군(羅州郡) 나주면(羅州面) 금정(錦町)
구군청사(旧郡廳舍) 부지 2,920.78평, 정호(井戶, 우물) 2, 수목(樹木, 나무) 10, 정호옥형공(井戶屋形共, 지붕설치 우물) 1 [나주목 동헌 및 내아 터]
통인청(通引廳) 부지 593.02평
서기청(書記廳) 부지 643.88평 [나주목 작청(作廳, 吏廳) 터]
33-3번지, 광주지방법원 나주출장소(羅州出張所) 부지 333.87평, 정호 1, 수목 1 (1932년판에서는 23-2번지 333.15평?)
(1932년판 기록) 33번지, 군수관사(郡守官舍) 부지 873.87평, 수목 2 [나주목 내아 필지] (1932년판 33번지 舊군청사는 2,038.50평, 수목 8)
- 과원정(果院町)
군청 및 군창청(郡倉廳) 부지 3,424.44평, 수목 2, 정호옥형공 1, 석조도랑(石造溝渠, 도랑? 연못 시설?) 79.40평? [나주목 객사 터]
관노청(官奴廳) 부지 179.61평 [과원정 120번지 : 현재 과원동 120번지]
향장청(鄕將廳) 부지 494.99평, 정호 1, 수목 1 [나주목 향청(鄕廳) 터]
정부창고(政府倉庫) 부지 1,044평 [광원정 88번지 : 현재 과원동 88번지] [나주목 읍창(邑倉) 터]
나주경찰서 관사(官舍) 부지 291.78평, 정호 1
- 서문정(西門町)
둑사(纛舍) 부지 144.42평 [서문정 103번지 : 현재 서내동 103번지]
호장청(戶長廳) 부지 256.91평, 정호 1, 수목 2 [서문정 48번지 : 현재 서내동 48번지] (1932년판 260.00평)
- 본정(本町)
보역청(補役廳) 부지 213평 [본정 47번지 : 현재 중앙동 48-17 인근]
기패관청(旗牌官廳) 부지 181.12평
102번지 밭[田] 141.30평
(중략)
- 북문정(北門町)
인덕정(仁德亭) 부지 2,984.87평
- 대정정(大正町)
학교부속농원(學校附屬農園) 1,069평
공지(空地) 167.19평
우영사정(右營射亭) 부지 2,695.44평 (1932년판 96.20평) [대정정 240번지]
- 나신면(羅新面) 경현리(景賢里)
사직단(社稷壇) 부지 500.25평, 수목 1 [경현리 200, 201번지]
건물[營造物及附屬物]
- 나주군 나주면 금정
구군(旧郡) 청사, 조와(朝瓦 = 朝鮮式 瓦葺, 조선 기와집) 54.22평(24.22평?) [나주목 동헌 제금헌 건물]
부속가(附屬家), 朝瓦 43.46평, (2) 3.10평 [나주목 내아 금학헌 건물] (1932년판 군수관사)
문간(門間), 朝瓦 6.23평 (1932년판 군수관사 영역)
문간, 朝瓦 4.42평 (1932년판 군수관사 영역)
(중략)
폐문루(閉門樓), 朝瓦 15.08평, (2) 15.08평 [동헌 외문루 정수루]
비각(碑閣), 朝瓦 1.10평
비각, 朝瓦 1.32평
장청(將廳), 朝瓦 23.75평 (1932년판 16.55평)
문간, 朝瓦 1.75평
물치(物置, 헛간), 朝瓦 1.62평
청직실(廳直室, 청지기 건물), 조초(朝草, 조선 초가집), 8.81평
토장(土墻, 흙담장) 226.20 (1932년판 94.70 + 1932년판 군수관사 영역 131.50)
목조문(木造門) 3 (1932년판 군수관사 영역 2)
통인청, 朝瓦 18.62평 (이하 통인청 부지 소재)
사령청(使令廳), 朝瓦 17.55평
대동청(大同廳), 朝瓦 16.36평 [금정 23-2번지 소재 : 현재 금계동 23-4번지 인근]
토장 97.00평?
목조문 3
서기청, 朝瓦 69.80평 (이하 서기청 부지 소재) [나주목 작청 건물]
형리청(刑吏廳), 朝瓦 11.85평 [나주목 추청(秋廳) 건물] (작청의 헌병파견소, 경찰서 사용 시기 감옥?)
관청(官廳), 朝瓦 18.96평
토장 81.40
목조문 1
- 과원리
군 청사, 朝瓦 135.43평 [나주객사 금성관 건물]
문간, 朝瓦 15.12평
도회청(都會廳), 朝瓦 17.52평
물치, 朝瓦 18.00평
토장 193.50
목조문 2
(관노청 부지 건물 누락 : 부지 내 건조물 철거 상태로 추정)
향장청(鄕長廳), 朝瓦 45.84평 (이하 향장청 부지 소재) [나주목 향청 건물]
문간, 朝瓦 22.15평
문간, 朝瓦 7.84평
토장 56.00
목조문 1
- 서문정
둑사(纛司), 朝瓦 3.23평
목조문 1
호장청, 朝瓦 13.86평
문간, 朝瓦 3.36평
문간, 朝瓦 1.86평
토장 19.50
목조문 1
- 북문정
인덕정, 朝瓦 13.94평
고직실(庫直室, 창고지기 건물), 朝草 8.29평
- 대정정
우영(右營, 전라도 우영장) 사정(射亭), 朝瓦 15.43평
- 나신면 경현리
고자간(庫子間), 朝瓦 6.35평
사직사(社稷祠), 朝瓦 1.15평
일부 내용에 오류 또는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재 내용이 매우 방대하고 상세하므로 소개 글에서도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관아(官衙) 건물 고증에 있어 놓칠 수 없는 자료가 바로 이 『조선총독부 관유재산목록』입니다.
붉은색 글자는 나주목 소재 주요 관아 건물의 명칭을 참고 차원에서 덧붙인 것이고, 푸른색 글자는 주로 1932년판에서 기재된 지번입니다. 이처럼 『관유재산목록』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는 건물은 비교적 정확하게 그 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이미 알려진 동헌, 내아, 객사, 호장청, 옥사 등 건물의 위치 자료 및 나주 지역 고지도(古地圖), 『금성읍지(錦城邑誌)』, 『속수나주지(續修羅州誌)』 등 문헌에 기록된 여타 관청의 상대적인 위치 기록, 예를 들면 '군관청(軍官廳), 아사 남쪽 담 밖에 있음[在衙舍南墻外]' 등과 같은 내용을 추가해 분석하면 더욱 실체에 근접하는 각 관아 시설물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8번 지도 이미지에 각 건물의 추정 위치 표기)
정리한 목록을 보면 향장청(鄕長廳)이 향장청(鄕將廳)으로, 군사 관련 의례를 지내던 둑사(纛祠)가 둑사(纛舍) 및 둑사(纛司)로 기재되는 등 일부 오기(誤記)된 내용이 보입니다. 향장청은 지방관 사무를 보좌하기 위해 좌수(座首), 별감(別監) 등 지역 양반층을 중심으로 구성 및 운영된 향청(鄕廳)이 1896년 이후 개편된 것이기에 나주목 향청을 의미합니다.
구군청(舊郡廳) 청사 부지가 약 2,920평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1913년 지적원도의 33번지 면적 약 2,820평과 근접합니다. 현대 지도 사이트에서의 면적 측정 오차를 참작해야 하고 1913년 지적원도 측량 시기와 1922년 재산목록 작성 시기 사이의 필지 변화, 측정 오차도 고려해야 합니다.
구군청 부지에 소재한 구군청사 건물이 54.22평으로 기재되어 있는데(연필로 적혀 있어서 언뜻 보면 24.22평으로 보임), 2번 제금헌 추정 사진을 보면 54평 규모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동헌과 그 부속 건물을 통로로 연결하거나 확장한 상태에서 측정된 면적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현대에 측정된 정면 7칸의 ㄷ 자 내아 건물이 약 48.14평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정면 6~7칸, 측면 3칸 건물이라고 하면 전체 규모가 18칸에서 21칸에 달하므로 여기에 조선시대 건물의 1칸 평균 면적(1.74평)만 곱해도 31~37평이 나오고 관청[公廨] 건물이 일반 민가(民家)보다 규모가 다소 컸던 점과 앞뒤로 있었을 툇칸(退間) 면적을 추가하면 얼추 40평대 넓이가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동헌이 내아보다 넓은 54평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의 건물은 그렇게 보이지 않고, 건물 서쪽의 추녀마루 모양도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보면 사진 건물이 제금헌이 아닐 확률도 극히 일부 있으나 기둥에 제대로 된 주련(柱聯)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 확률은 매우 낮아 보입니다. 일부 의문이 남는 부분에 관해서는 심도 있는 연구가 후속되어야 하겠네요.
동헌 외문루(폐문루)인 정수루가 15.08평으로 되어 있는데 2015년 발간된 『나주목 관아와 향교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에 기록된 현대 실측 면적은 48.80제곱미터(14.78평)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와 현재 평(坪) 기준이 다르고 측정 기준을 기둥 중심으로 잡느냐 바깥으로 하느냐 바닥(마루)를 중심으로 하느냐 등에 따라서도 이러한 3~7% 정도의 오차는 항상 발생합니다. 참고로 1923년 나주군청 정문 관련 폐문루 도면에도 정면 5.20m(1.7+1.85+1.65) x 측면 2.9m(1.45+1.45)의 15.08평으로 되어 있네요.
앞에서 1896년에 지방관리(地方官吏) 직제를 개편하면서 향청이 향장청으로 변경되었다고 적었는데, 그때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등의 향리(鄕吏)가 서리(書記)로 개편됩니다. 따라서 향리들이 근무하던 공간인 작청(作廳) 역시 서기청(書記廳)으로 개칭되었죠. 위 목록을 보면 서기청 부지가 643.88평, 서기청이 69.8평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청이 서기청, 헌병파견소, 경찰서 등으로 사용될 시기에 일부 확장되었지만, 기록된 건물 면적만 따지면 동헌, 내아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넓었습니다. 아무래도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고을 아전들이 함께 모여서 일하던 곳이었기 때문이겠죠. 참고로 작청은 '질청'이라 발음하였으며, 기록에 따라 이청(吏廳), 인리청(人吏廳), 연청(椽廳) 등으로 표기되었습니다.
1913년 지적원도에서 서기청 추정 부지인 13번지는 약 600평입니다. 통인청 부지 593평과 더 가깝지만, 육방(六房) 아래에서 잔심부름을 담당하던 통인(通引) 청사가 그토록 클 리 없죠. 따라서 통인청은 작청(서기청) 맞은편인 외문루(정수루) 남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에 수록한 『관유재산목록』 정리 내용에 설명을 붙여 계속 이야기를 풀어보면 본문이 한없이 길어지므로 이만 끊습니다.

위 3번 사진은 나주목 외문루와 그 옆에 있던 작청 부지 일부를 촬영한 사진엽서입니다. 제목은 '조선나주군청 및 헌병대(朝鮮羅州郡廳及憲兵隊)이며, 2번 군청 사진처럼 '澤井商店發行(택정상점발행)'에서 판매했고 1913년 7월 23일('2.7.23') 소인이 찍혀 있습니다. 현재까지 온라인에서 확인 가능한 가장 이른 시점의 정수루 사진으로 보입니다. 문루 1층 좌우 칸[間]에 벽을 세워 내부를 창고 용도 같은 것으로 사용하던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주목 외문루인 정수루 2층에는 본래 '금성절제아문(錦城節制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금성(錦城)은 나주 지역의 별칭이며, 흔히 별칭으로 이름 붙이던 관례에 따라 나주 객사에도 '금성관(錦城館)' 편액이 붙었죠. 또 1891년에 나주읍(羅州邑)이 시로 승격되면서 잠시 금성시(錦城市)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사진 촬영 당시에는 1층 오른쪽 기둥에 '전라남도나주군청'이라는 현판을 걸었네요. 그 오른쪽에는 길가로 낸 일본 헌병대(헌병파견소, 헌병분견대) 문이 있고 각종 사항을 알리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빨간 화살표 부분을 보면 문루 안쪽이 나무 또는 화단으로 막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문루를 지나 직진하지 않고 왼쪽으로 꺾어서 동헌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외문루 오른쪽(북쪽)에 작청 부지로 연결되는 문이 있고 그 뒤쪽에 팔작지붕 건물 하나가 보입니다.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곳인데, 작청 부지(정수루 북쪽에 연접한 문에서 작청 본청으로 연결된 통로)와 담장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초록색 화살표 지점을 보면 흰색 회반죽으로 양성바름된 지붕 용마루 부분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숫기와 상단 일부를 회칠이 덮고 있는 형태인 것 같은데 현재 정수루는 양성바름 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 외문루 북쪽 1층 기둥 앞(노란색 화살표들)을 보면 담장 일부가 짧게나마 남아 있고 지면 위에도 관련 흔적이 있습니다. 즉, 작청 부지가 정수루에 접해서 동쪽으로 돌출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1번 지도의 1913년 지적원도 필지 구획 참조). 사진 해상도가 낮아 2층 기둥에 걸린 주련에 적힌 글자가 식별 안 되는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위 4번 도면은 1919년 나주경찰서 도면입니다. 경찰서 청사 정면에 현관, 북쪽에 화장실(변소)를 설치하고 내외부 구조를 바꾸는 등의 수선(修繕, 개수) 및 증축 작업을 위해 작성된 도면이며,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오른쪽 '재래청사 평면도[羅州警察署在來平面啚]'가 바로 예전 나주목 작청 본청 건물에 가까운 평면입니다.
10년 가량 헌병대와 그 후속 기관인 경찰서 등이 사용했기에 이미 상당 부분 개조된 상태일 수 있지만 조선시대 나주목 작청(연청) 건물의 내부 구조를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ㄷ 형태 건물이며, 외쪽 건물 외형을 그린 정면도(正面圖)를 보면 원형에 상당히 근접하게 복원 가능합니다. 단, 지금 작청 부지에 나주목문화관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 건물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허물기 전에는 사업 추진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나주목(羅州牧)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건물이 나주목 관아 건물 복원을 원천 차단하고 있는 형세라고 할까요. 실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3번 외문루 사진의 하늘색 화살표 건물이 위 4번 도면의 화살표 평면 건물로 판단됩니다. 1919년에는 경찰서 옥실(獄室), 즉 수인(囚人, 죄인)을 가두는 유치장(留置場)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관유재산목록』에 기재된 건물 면적을 검토하면 작청 부속 건물인 형방청(刑房廳), 즉 11.85평 규모의 추청(秋廳)이 유력해 보입니다. 작청에서 일하는 향리에는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여섯 아전이 있는데, 나주목 형방(刑房)은 따로 건물(추청)을 가지고 있었죠. 건물 일부 단면도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건물 또한 꽤 충실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나주목문화관을 철거할 수 있을지는...

위 5번 사진은 나주읍 서북쪽 산자락에서 나주 전경을 찍은 것으로 2번 군청 사진 및 3번 폐문루 사진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10년 전후에 촬영 및 제작된 사진엽서입니다. 발행 상점 역시 동일합니다.
대한제국 또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나주 지역 전경을 찍은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는데, 나주 지역 관아 건물 복원히 중요한 사료임이 틀림없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나주목 동헌 외문루인 정수루, 파란색 화살표는 훗날 향장청으로 개칭된 향청입니다. 정수루가 있는 빨간 화살표 오른쪽 부분이 동헌 권역이고, 향청 2시 방향이 객사 금성관 건물군입니다.

위 6번 그림은 5번 사진 일부를 확대한 것입니다. 빨간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동헌 일대를 확대한 것이 상단, 파란색 화살표의 향청 건물을 확대한 것이 왼쪽 아래입니다. 하단 중앙은 1911년 당시 향청(당시 나주재무서 청사) 건물의 도면이고, 그 오른쪽은 1960년대에 촬영된 향청(당시 나주농지개량조합) 사진입니다.
원본 사진엽서 자체의 해상도와 화질이 그리 좋지 못하고 나무가 울창한 시점에 촬영되었기 때문에 확대 사진에서 개별 건물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위쪽 사진을 설명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보라색 화살표 : 외문루 정수루
2) 갈색 화살표 : 작청
3) 분홍색 화살표 : 나주목 내아 금학헌
4) 초록색 화살표 : 내아 앞 행랑채 (내아 문)
5) 파란색 화살표 : 나주목 동헌 제금헌 추정 (2번 군청 건물?)
나주목 동헌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건물이 사진에서 동북쪽 위치, 즉 내아 남쪽 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청 건물 북쪽 후면 외형이 4번 재래청사 도면과 일치하는 것도 눈에 띕니다.
향청 확대 사진에서 눈여겨 보이는 부분은, 1911년에 생산된 「전라남도(도청) 이전에 관한 품신」 문서에 수록된 도면(하단 중앙)처럼 건물 동쪽(사진에서는 서쪽)이 확장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지붕 연결이 매끄럽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근대 시기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협소한 관청 건물을 확장하기 위해 내부 구조를 개조한 경우가 제법 있는데, 향청 건물은 본래부터 이런 형태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1960년대 촬영 사진에도 빨간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연장 지붕이 일부 보입니다.
2023년 5월에 나주목 향청 건물이 복원되는데, 전형적인 팔작지붕 모습으로 낙성되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한 것이었겠지만 혹시 미빔점이 없었는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서두에 언급했던 논문 저자께서 「1911년 전라남도 이전에 관한 품신(稟申)을 통한 나주 향청의 복원 고찰」이라는 논문을 2022년 춘계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논문 본문을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본 글에서 다룬 내용(도면, 사진 자료 비교)을 토대로 비슷한 결론을 이미 내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주시에서 추진했던 향청 복원 과정에서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요.
참, 복원 향청에 '향사당(鄕社堂)' 편액을 걸었는데, 『학봉전집(鶴峯全集)』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나주목 향청은 향사당(鄕射堂)이었다고 합니다. 1872년 〈나주지도〉에는 향청(鄕廳)으로 기재되어 있고요.

위 7번 그림은 5번 나주 지역 전경 사진 이외의 나주읍 전경 사진 자료를 6번과 비슷하게 조망한 것입니다. 왼쪽 아래의 '1920년대 나주향교와 나주 시가지' 사진에서 빨간색 화살표 부분을 확대한 것이 상단 이미지이며,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전남 나주의 전경' 사진엽서에서 동헌 일대를 확대한 것이 오른쪽 하단 이미지입니다.
위 2개 이미지 모두 6번 이미지와 같은 건물 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빨간 화살표 부분이 나주목 내아, 초록색 화살표 부분이 내아 문이 있는 행랑채, 그리고 파란색 화살표가 동헌 건물입니다. 위쪽 1920년대 사진은 동헌 지역이 원경(遠景)이라 이미지 선명도가 아쉽고 아래 나주 전경 사진은 5번 사진과 비교할 때 나뭇잎이 덜한 계절에 촬영되어 몇몇 건물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인터넷상에 공개된 이미지 해상도가 낮아서 식별 한계가 존재합니다. 박물관을 직접 방문해서 고해상도 촬영을 하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8번 지도는 1913년 지적원도에 본문에서 수집하고 추론한 각종 내용을 종합해 나주목 소재 관아 건물의 위치를 나름 추정해 표기한 것입니다. 빨간색 표시 글자는 정확한 위치, 파란색 글자는 추정 위치이며, 보라색 지명은 지적원도에 기재된 당시 행정구역 명칭입니다.
일본인들이 많이 진출한 지역(군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시가 중심부)에는 1910년대부터 일본식 지명이 붙었는데 북문정(北門町)은 현재 성북동(城北洞), 과원정(果院町)은 과원동, 서문정(西門町)은 서내동(西內洞), 금정(錦町)은 금계동(錦溪洞), 금성정(錦城町)은 금성동, 본정(本町)은 중앙동(中央洞)이며, 박정리(朴丁里)는 현재 산정동(山亭洞) 지역입니다. 대부분 법정동으로서 행정동인 금남동(錦南洞, 금계, 금성, 산정, 서내 등)과 성북동(과원, 성북, 중앙 등)에 속해 있습니다.
2025년 10월 현재 나주목 관아 동헌 정비 및 복원을 위한 막바지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각적인 자료 조사와 고증 및 분석을 통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관계자와 나주 시민 그 누구도 후회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복원 사업이 진행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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