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년 3월 23일에 새 정자[亭]를 낙성하였으니, 이름하여 '아정(雅亭)'이다. 본래 암파소(岩破所, empas)에 운암(李雲) 이공[李公德武]의 생전 거처가 있었는데, 이 역시 '아정'이라 불렀다. 그러나 세 칸[三間] 초가(草家)의 모습을 띄고 있었으므로, 오늘날 정자를 지어 낙성한 것을 두고 '이건(移建)'이라 하지 않는다. 갑신년 9월 초6일에 운암 이공이 졸(卒)하자 공의 백씨(伯氏)인 경재(景齋) 이공[李公德文]이 초가를 맡아 머물렀고, 을유년 7월 28일에 나 하은(河銀)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초가 주위가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세가 험하고 터가 협소하기 때문에 장구한 계책을 펼 곳이 되지 못하기에 새로운 곳에 터를 잡아 정자를 짓게 되었다. 그리하여 길지(吉地)를 구한 끝에 면남방담(..
블로그 방문자 10만 명을 기념하는 글[十萬紀念序] 아정(雅亭)이 이곳 면남방담(綿南方談, tistory)에 터를 잡고 단장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문을 연 지 어느덧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개설 3년만에 폐(閉)하였다가 8년을 기다린 후에 다시 빗장을 열었으니, 실제로 사람들이 드나든 기간은 5년 남짓이다. 지난 6월 초10일에 그 방문자 수가 10만을 헤아리게 되었으므로 대략 연간 2만가량이 찾은 것인데, 무술년(戊戌年, 2018) 이후가 월 1천 내외이니 상당수 적산(積算)이 개설 초기 3년 동안에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금 이곳을 찾는 손님의 수가 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대략 게시하는 글의 주제가 '관아(官衙)'에 크게 치우치고 그동안 올렸던 여러 글을 비공개로 전환해..
발(跋) 무릇 '발(跋)'이라는 것은 서책(書冊)의 뒤에 부기(附記)하는 글이다. 수필전산기(手筆電算機, Notebook)도 엄연히 책(冊, Book)이라 별칭하므로, 발문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내가 무자년 10월 22일에 서부(西部) 반송방외(盤松坊外) 목동역(木洞驛)에서 세 번째 수필전산기를 직거래로 취하였는데, 국제상업기계회사(IBM)의 악수이십유일(岳水二十有一, X21)이라는 중고 제품이다. 일명 악수입일(岳水卄一)이라고도 하며, 형번(形番)이 '2662-SBK'인 것을 보건대 흔히 말하는 서울은행판으로 추정된다. 사양은 오형육백(五形六百, Pentium 600) 중앙처리장치(CPU)에, 주기억장치(主記憶裝置) 용량은 256조(兆, 256M), 보조기억장치(HDD) 용량은 2만조(萬兆,..
무자년(2008) 2월 11일 술시(戌時, 19-21시)에 숭례문(崇禮門)에 화재가 일어나 이튿날 축시(丑時, 01-03시)에 문루(門樓)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상당 부분이라 함은 전소(全燒)를 말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중층(重層)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축(石築) 부분과 홍예문(虹霓門)이 무사하고 1층 이하는 목부재(木部材)가 제법 남았기 때문이다. 편액(扁額, 현판) 역시 부분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건재하다. 전각(殿閣)의 백미(白眉)와 점정(點睛)이 바로 액자(額字)이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 숭례문 편액의 서자(書字)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설(說)이 적지 아니하다. 문헌에 따라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지금은 한성부에 속하는, 옛 양주목 노원면(蘆原面)의 한천(漢川) 오른편으로 태릉(泰陵)과 덕릉(德陵) 사이에 중종 연간에 세워진 한글영비(靈碑)가 서 있는 작은 길목이 있는데, 그 어귀에 즈음하여 충숙(忠肅) 이공(李公)의 묘(墓)가 있다. 충숙 이공의 신도비(神道碑)를 비롯한 여러 기(基)의 묘와 재사(齋舍) 동천재(東川齋)가 있고 그 주변에 몇 채의 가옥이 위치하니, 곧 성주(星州)에서 나온 벽진(碧珍) 이씨의 충숙공파 선조 묘역이다. 충숙 이공, 즉 충숙공(忠肅公)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강도(江都:강화도)에서 자결한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이다.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이며, 명종 병진(1556)년에 태어나 선조 을유(1585)년에 문과(文科) 갑과(甲科) 제2인으로 급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