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년(1992)에 동양제과(東洋製菓)에서 포도과즙의 젤리형 사탕을 출시하였으니, 이름하여 '마이구미'이다. 당시 자못 인기가 있어 월 20억 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 마이구미 때문에 지명도를 올렸던 곳이 바로 '구미(龜尾)'인데, 구미는 경상도 대구부(大邱府)와 상주목(尙州牧) 사이에 있던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 일대의 지명으로서, 여러 차례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무오년(1978)에 구미읍이 선산군에서 분리되어 구미시(龜尾市)가 되었다. 이후 읍세(邑勢)를 확장하며 인근 지역을 점차 흡수하다 을해(1995) 정월 초1일에는 선산군을 거꾸로 통폐합하여 도농복합시 형태의 구미시가 되었으니, 세간에서는 이를 이르러 '구미가 당겼다'라고 하였다. 이 구미에 영조척(營造尺, 1척=31.22cm)으로 해발 삼천..
내 불로거(不路居, blog)의 이름이 '아정(雅亭)'인데, 면남방담(綿南方談)에 소재하고 있다. '면남방담'이란 무엇인가. '면남방'은 곧 '면(綿)으로 된 남방(南方)'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서학(西學) 문자로 풀어서 쓰면 '남방풍의 셔츠(shirt)'가 된다. 왜어(倭語) 남만(南蠻, なんばん)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담'은 문자 그대로 '이야기(story)'를 뜻하므로, 면남방담은 즉 '티스토리(tistory)'의 한역(漢譯)이다. 본래 아정은 암파소(岩破所, empas)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자리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장구한 뜻을 펼칠 곳이 되지 못하기에 다른 거처를 찾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천하 사람들이 면남방담을 평하여 말하기를, '불로거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곳'이라..
조정(朝廷)이 세워져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특히 유학(儒學)을 근본으로 하는 동양(東洋) 국가의 경우가 그러한데, 궁궐(宮闕)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체제를 취하고 관제(官制)와 법령(法令)을 세워 나라의 기틀을 안팎으로 확고히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중시되는 것이 '역사(歷史)'이니, '천명(天命)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유교적 치도(治道) 개념에 가장 잘 부합되고 국초의 건국(建國) 이념이 오래 전승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견제하는 것이 바로 역사 기록이기 때문이다. 성곽(城郭), 법전(法典), 군신(君臣), 삼군(三軍) 등을 창업(創業)의 필수 요건이라 한다면, 역사는 선례(先例)와 포폄(褒貶)을 분명하게 새겨 후세(後世) ..
한 왕조(王朝)가 세워져 그 기틀이 반석(盤石) 위에 오르기까지는 국좌지재(國佐之材)의 재능을 가진 많은 인물이 국궁진력(鞠躬盡力)으로 힘써야 한다. 창업(創業)의 시기를 지나 종사(宗社)를 만세(萬世)에 전(傳)하는 수성(守成)의 시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진충결사(盡忠決死)의 뜻으로 결심하고 호학애민(好學愛民)의 자세로 노력하는 인재들이 많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창업과 수성 사이에 필요한 인재들은 다른 시대에서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당대(當代)에서 구(求)할 수밖에 없다. 한낱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선비의 말일지라도 사직(社稷)에 약간이나마 도움 되는 바가 있다면 조정(朝庭)에서 일체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이르기를,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
통신계의 선현이신 공자(工子)께서 이르시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파코즌이 반드시 있다[三人行 必有波高俊]'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는 파고주(波高州)의 영향력이 지대하여 그 혜택이 천하에 두루 미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 때문에 업자(業者)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파코주 주민에게 필태(筆太) 맡기기를 경쟁하듯 하니, 무룻 피씨(皮氏)에게 마음을 둔 사람들이라면 이를 모두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이른바 '필태'라는 것은 붓으로써 크게 시험하는 것이다. 제품의 출시 이전이나 초기에 저잣거리 행인에게 맡겨 품평을 듣고 호불호(好不好)와 장단(長短)을 가리는 것이니, 공자께서도 '아침에 필태를 마치면 저녁에 반납해도 좋다[朝終筆太 夕反納可矣]'고 하시면서 한 권의 책을 남겨 필태의 법을 세우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