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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에 올렸던 1편 글(링크)에서 이어지는 비변사 터 이야기입니다.


앞의 글 마지막에 살펴보았던 〈실측도(實測圖)〉에 한글로 주기(注記)를 달아 보면 아래와 같다.

비변사 관청 평면도 (1908년 실측도)비변사(의정부 조방) 실측 평면도 - 정선방 니동의정부조방지원도


한성부(漢城府)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의 '니동(泥洞) 의정부조방지원도(議政府朝房之原圖)'가 도면의 제목이다. 축척은 200분의 1. (1:200)

조선시대 한성부의 주소 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통(統)-호(戶) 순서로 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구(區)에 해당하는 부는 중부(中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의 5개로 되어 있었는데, 1894년(고종31)[각주:1]에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부를 서(署)로 개칭하여 중서(中署), 동서(東署), 서서(西署), 남서(南署), 북서(北署)가 되었다.

니동(泥洞, 이동)은 측량 당시인 1908년에 중서 정선방 돈녕계(敦寧契)에 속해 있었으며, (니동을) 비가 오면 땅이 무척 질었기 때문에 진골(즌골) 혹은 진골목이라고 했다. 습동(濕洞)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곳을 돈녕계로 개편하기 전에는 구병조계(舊兵曹契) 또는 고병조계(古兵曹契)였다. 돈화문전로(敦化門前路), 즉 돈화문 앞길 지역을 니동이라 기록하기 전에는 흔히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고 하였다.

의정부 조방, 즉 비변사(備邊司) 청사 주위로 조선시대 통호(統戶) 번호에 따른 일반 가옥의 주소가 한문으로 기재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경연청(經筵廳) 조방이 있었고, 남쪽 방향에는 前국민교육회가 인접해 있었다.

도면 오른쪽의 '대로(大路)'는 지금의 돈화문로(敦化門路)이고, 왼쪽 '도로(道路)'는 비변사와 금위영(禁衛營) 사이의 좁은 길이다. 이 왼쪽에 난 길 북쪽으로 약간만 걸어가면 창덕궁 서문인 금호문(金虎門)이 나오고, 금위영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약 1km를 걸어가면 경복궁(景福宮)과 육조대로(六曹大路, 세종로)가 나온다.


도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9칸(間) 규모의 대청(大廳) 건물이 중앙 상단에 있고, (아래쪽 장방 공간이 제외되었음에도) 전체적으로 70여 칸이 넘는 상당히 큰 규모인 것을 알 수 있다(72~78칸). 다른 문헌을 참고하면 의정부 조방의 규모는 전체 81칸에 달하였다고 한다.

육조(六曹) 청사나 종친부(宗親府) 조방 건물의 사례를 참작할 때, 비변사 청사가 의정부 조방으로 용도 변경된 1865년과 실측도가 그려진 1908년 사이에 (약 40년간 세월 차이가 존재하지만) 부지 내 건물의 구조 변경이나 신축, 중건, 해체는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비변사 청사의 규모가 도면에서처럼 80칸에 다다랐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도면 아래쪽에 '전국민교육회(前國民敎育會)'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1905년(고종42) 7월에 국민교육회가 의정부 장방(長房)으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이 구역까지를 비변사 권역으로 볼 수 있다. 의정부 장방을 곧 비변사 서리들의 업무 공간이던 비변사 장방(長房)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에 그런 것인데, 1912년 〈경성부지적원도〉에서 의정부조방(비변사) 공간과 전국민교육회 공간이 동일한 와룡동 5번지로 묶여 있던 것은 애초에 같은 공간(지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편 글의 지도 참고)


잠시 여담이지만, 비변사 청사에 관한 자료를 구축하던 2016년 3월경에 위 의정부조방 〈실측도〉를 확인하고 비변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며 혼자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10여 년 전에 관련 분야에 정통하신 어느 학자께서 논문을 통해 〈실측도〉와 의정부조방(비변사) 사이의 관계를 이미 고증한 바가 있었음을 그해 8월에 알게 되어 실망 아닌 실망을 했었다(-_-'). 해당 논문은 이규철 선생의 2005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대한제국기 한성부 제실유가사에 관한 연구 - 제실재산정리국 도서를 중심으로」. 각설하고.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의 위치는 1909년경에 제작된 〈황궁경찰서관사부지평면도(皇宮警察署官舍敷地平面圖)〉[각주:2]를 참고한 것이다.

비변사에 동서(東西) 양문(兩門)이 있었던 것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특히 고종 시대에 임금이 비변사 또는 의정부 조방의 동문과 서문, 그리고 금위영의 대문(大門) 거쳐 운현궁(雲峴宮)을 왕래하는 통로로 자주 사용하였다. 아무래도 비변사 청사를 남쪽으로 도는 작은 골목길을 통하는 것보다는, 돈화문을 나와 비변사의 동문으로 진입해서 서문으로 빠져나가 금위영 대문(또는 동문)을 경유하여, 곧바로 금위영과 운현궁 사이에 설치된 고종 임금의 전용문인 경근문(敬覲門)을 통해 운현궁으로 진입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 임금도 문희묘(文禧廟)를 찾을 때 비변사 동문을 거쳐 서문으로 나간 기록이 있다.

필자 추정이지만, 동문과 서문 외에 남문(南門)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청사는 대부분 정문(正門, 外三門), 중문(中門, 內三門)의 이중으로 되어 있었는데, 현재의 도면상으로는 동문과 서문 외에 따로 문(또는 문을 설치할 내부 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위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비변사 청사였다가 1965년에 의정부의 조방으로 격하되면서 일부 공간에 변형이 있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장방(長房) 방향에 솟을삼문(솟을대문) 형태의 남문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청사의 중심 건물인 대청(㉠)부터 장방이 있던 국민교육회(㉢) 사이의 행랑(㉡)에 중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문(정문) - 중대문(中大門, ㉢) - 중문(㉡)의 삼중 체계가 된다. 또는 남문이 없이 돈화문 방향에 있던 동문을 외대문으로 썼고, 중간(㉣ 위치)에 작은 담당을 경계로 중문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각종 문헌에 비변사 동서문(東西門)과 동문(東門), 대문(大門)이라는 단어가 섞여 있기에 드는 의문이다. (비변사 관청의 격을 생각해 보면, 번듯한 솟을삼문의 남문에 한 표를 주고 싶다.)

비변사 청사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전해지고 있다.

1630년 비변사문무낭관계회도(備邊司文武郎官契會圖)1630년 〈비변사문무낭관계회도〉


1630년(인조8)에 제작된 〈비변사문무낭관계회도(備邊司文武郎官契會圖)〉이다. 비변사 관청의 중간급 관료들이 모여 계회(契會, 계모임)를 연 장면을 그린 것이다. 관청 계회는 관원이 중심이 된 일종의 친목 모임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회화가 면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기에 그림 그대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문-중문-대청으로 이어지는 건물의 전체적인 외형에는 큰 왜곡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창덕궁 돈화문 앞에 있던 비변사가 아니라, 경희궁(慶熙宮) 앞에 하나 더 있었던 비변사 청사일 가능성이 높지 않나 생각한다. 1630년 무렵에 인조 임금이 정무를 보던 궁궐은 창덕궁이 아닌 경희궁이었고, 주변 묘사가 대문 앞 거리의 모습이 아무래도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앞 도로(현재의 새문안로, 신문로)처럼 동서 방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 구조가 〈실측도〉의 비변사 건물군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구분되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의정부 조방 평면도를 지적도에 대입하면 아래와 같다.

비변사(의정부 조방) 관청 평면도비변사 청사 평면도 (1912년 지적도 기준)


관청 건물은 보라색으로 표기하였고, 중부(중서) 정선방 니동(泥洞)의 민가(民家) 통호(統戶)는 녹색, 정선방 수문동(水門洞)의 통호는 청색으로 기록하였다. 이들 통호는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 가능한 것만 기재한 것이다.

창덕궁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은 그 크기가 장대하다. 그런데 비변사(의정부조방)의 대청(大廳) 크기가 거의 돈화문의 절반 면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신하가 모여서 회의를 하고 업무를 보던, 국정을 총괄하던 비변사 청사의 위상이 그 옛날에 어떠했을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임금의 행차가 돈화문을 나와 금위영 또는 금위영과 형조 조방의 사잇길로 향할 때, 비변사(의정부 조방)의 동문과 서문을 거쳐 가게 되면 한성부 직방 모퉁이를 거쳐 남쪽으로 돌았을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경호에 수월하고 신속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 지적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현대 지도에 삽입하면 아래와 같다.

비변사 관청 평면도비변사 청사 평면도 (현대 지도 기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율곡로에 편입되어 있지만, 그래도 비변사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은 여전히 창덕궁 돈화문 앞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청사의 중심이 되는 대청(大廳) 건물은 돈화문 바로 왼쪽에 있어, 비록 정확한 모습으로 복원할 수는 없지만, 의지가 있다면 그 지역을 보존하거나 (다른 전통건축물의 형태를 참작하여) 원형에 가깝게 중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 돈화문민요박물관이 건립되고 있는 공간에 있던 비변사 장방, 선전관청 직방, 한성부 직방 터의 보존이나 복원도 아쉬운 부분이다.

미자막으로 위성 지도에 비변사의 위치를 다시 한번 겹쳐 본다.

비변사 청사 위치 지도비변사 청사 평면도 (위성지도 기준)


앞의 〈실측도〉가 나름대로 정밀한 측량을 거쳐 제작된 것이기에 각 건물의 위치 오차가 최대 1-2m를 넘지 않는 선에서 실제 비변사 청사의 소재지를 특정할 수 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창덕궁 매표소 주변의 종합정비 공사가 끝나게 된다. 기존의 매표소 공간에 대한 불과 5일 동안의 발굴 결과 비변사 건물과 관련된 담장 석렬(石列), 적심석(積心石) 등이 나왔다고 하는데, 대청 같은 주요 건물의 기단부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발굴 결과가 상세하게 공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약 100년 동안 이루어진 비변사 터 파괴와 매립의 기록을 헤아려 볼 때, 제대로 된 유물, 유구 발굴은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비변사 터도 이러한데 선전관청과 한성부 직방, 경연청과 형조 조방 등의 터는 오죽할까 싶다.

아무튼 이렇게, 대충 옛날 건축물을 허물고 다시 세련된 건물을 짓는 것으로 비변사 터의 복원 내지 원형회복 가능성은 일단 물 건너 가버리고 말았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절반에 걸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신권(臣權)의 상징과도 같은 역사적 장소, 비변사의 대청 자리에 창덕궁 통합관람종합지원센터(종합관람지원센터)라는 것을 신축하다니...


복원이나 중건은 고사하고 땅에 비변서 건물이 있었음을 선으로 표시하거나 비변사 터 표지석을 대청이나 대문(동문) 위치로 이전하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 부록(附錄) 문서 열람하기 (링크) / 비변사 청사 터 추가 문서 열람하기 (링크)

※ 참고 자료 링크 : 사이버 조선왕조 비변사(備邊司) 홈페이지 - 비변사 안내 화면



  1. 또는 1895년(고종32) 윤5월. [본문으로]
  2. 일본인 국적의 황궁경찰서장이 관사에 입주한 시기가 1910년 1월이다. 이 신축 관사는 비변사 장방 지역(5-1번지)에 있었다. 때문에 비변사(의정부 조방) 터의 남쪽 필지가 1909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정리(철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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