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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작년 7월에 올린 '세종로 광화문 앞길 육조거리 의정부 및 육조 관청 배치도' 문서를 보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리게 될(?) 육조거리 소재 주요 관청에 대한 개별 분석을 예정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이번 2월에는 이렇게 간략한 글을 올려봅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 6조 청사 평면도국가기록원 소장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1908년경)


위 이미지는 1908년(융희2) 무렵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던 여러 관청의 건물 배치도를 담고 있는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이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제작 시기를 넓게 추정하기도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됨)

현재의 광화문 앞 세종대로(세종로)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六曹街]라고 불렸을 정도로 조선왕조의 주요 관청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의 육조(六曹) 관청과 조정(朝廷)의 최상위 행정 관청인 의정부(議政府), 정치 논쟁과 관원 감찰을 담당한 사헌부(司憲府), 고위 관원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중추부(中樞府)를 중심으로, 도읍지 행정을 책임지던 한성부(漢城府), 퇴임한 고위 문관을 예우하는 기로소(耆老所), 노비 계층을 관리하던 장례원(掌隷院), 외국어 번역과 통역을 맡은 사역원(司譯院) 등의 관청이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있었던 것이다.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는 2003년 8월에 정부기록보존소(현재의 국가기록원) 부산지소의 지하문서고에서 발견되었는데[각주:1], 그 평면도의 발견으로 인해 그 이전에 부정확한 자료로 추정하였던 육조거리 각 관청의 건물 배치를 고증하는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평면도가 발견되기 전에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탁지지(度支志)』, 『추관지(秋官志)』, 『경조부지(京兆府誌)』 등의 몇몇 문헌과 그림 자료인 〈본아전도(本衙全圖)〉,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경성부지적원도〉, 〈경성광화문통관유지일람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경기도순사교습소배치도〉 등의 도면, 그리고 구한말-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으로 육조거리 원형을 간접 추론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러 학자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가 매우 명확했다. (그래서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발견 이전과 이후에 제작된 육조거리 모형에 많은 차이가 있다.)


순종(純宗) 즉위 2년차인 1908년(융희2) 당시에는 육조거리(세종로)에 아래 관청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 광화문(光化門) 동편
1) 내부(內部) : 예전 의정부(議政府) 자리
2) 통감부(統監府) 법무원(法務院) : 예전 이조(吏曹), 외부(外部) 자리
3) 학부(學部) : 예전 한성부(漢城府) 자리
4) 탁지부(度支部) : 예전 호조(戶曹) 자리
5)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 예전 한성부(漢城府) 및 농상공부(農商工部) 자리
6) 기로소(耆老所)

- 광화문 서편
1) 근위보병대(近衛步兵隊) : 예전 예조(禮曹), 삼군부(三軍府) 자리
2) 경시청 부속청사 : 예전 중추부(中樞府) 자리
3) 경시청(警視廳) : 예전 사헌부(司憲府), 경부(警部) 자리
4) 군부(軍部) : 예전 병조(兵曹) 자리
5) 법부(法部) : 예전 형조(刑曹) 자리
6) 통감부 통신관리국(通信管理局) : 예전 공조(工曹), 통신원(通信院) 자리

1905년(광무9) 11월 체결된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된 시점이기 때문에 외교를 담당하던 외부(外部)가 폐지되어, 그 자리에 통감부(統監府) 및 통감부 법무원(法務院)이 연이어 들어섰다. 공조와 통신원이 있던 자리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通信管理局)이 소재하면서 대한제국의 통신업무를 장악하였다. 군대도 사실상 해산되어 황실 경호를 위한 근위보병대(近衛步兵隊) 1개 대대급만 예전 예조, 삼군부, 시위대(侍衛隊) 자리에 주둔하는 방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위 평면도에서 퍼센트(%)로 기재된 숫자는 필자 추정의 조선시대 청사 원형 보존비율이다.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이 완료된 1868년(고종5)에 의정부, 중추부, 사헌부, 육조 각 관청의 건물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는데, 그 시기의 건물 규모와 평면도가 제작된 1908년 시기의 도면상 건물 규모를 비교하여, 얼마나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추론한 비율이라고 보면 된다. (어디까지나 필자 추정이기에 반론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필자가 추정한 원형 보존비의 근거를 광화문 동편부터 나열해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의정부(議政府) 터 90% : 예전 의정부 청사의 원형을 1908년 시점에도 거의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조(吏曹) 터 75% : 대문(大門)에서 대청(大廳, 당상대청) 사이에 적잖은 변화가 있는 것을 보인다. 성격이 많이 다른 관청인 외부(外部)와 일제 통감부가 거쳐 간 때문일 것이다.

3) 한성부(漢城府) 터 80% : 『경조부지(京兆府誌)』의 기록으로 정확하게 각 건물의 위치를 고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4) 호조(戶曹) 터 65% : 중문(中門) 부분과 탁지부 청사 남서쪽의 양지아문(量地衙門), 지계아문(地契衙門) 일대에 제법 많은 변형이 가해진 상태이다.

5) 농상공부(農商工部) 터 : 1870년경에 관아 건물로 신축되어 한성부(漢城府), 경무청(警務廳) 등이 소재한 공간이다. 그 이전에는 민가(民家) 지역이었을 것이다.

6) 예조(禮曹) 터 70% : 예조 청사에 군사 분야를 관장하는 삼군부(三軍府)가 들어서면서 대청부터 대문 사이 공간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시위대, 보병대 등의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군사가 숙영하는 병영을 신설하고 연병장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재차 변동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대청 서쪽은 비교적 변화가 덜하다.

7) 중추부(中樞府) 터 85% : 내삼문(內三門)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

8) 사헌부(司憲府) 터 90% : 문헌 기록, 자료와 비교할 때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9) 병조(兵曹) 터 95% : 사헌부처럼 한두 건물의 변동을 제외하면 별다른 변동이 없었던 것을 보인다.

10) 형조(刑曹) 터 80% : 평면도에서 생략된 건물이 몇 있다. (사헌부, 병조 등과 비교할 때 관련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오히려 원형 보존비가 낮아진 것일 수 있음)

11) 공조(工曹) 터 0% : 평면도에 부지 흔적만 남아 있다. (통신관리국 건물 신축 시기)


※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를 현대 지도에 대입한 그림은 '세종로 광화문 앞길 육조거리 의정부 및 육조 관청 배치도'를 참고하세요.


  1. 100년전 육조거리 실측평면도 발견, 〈동아일보〉, 2003년 8월 31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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