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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필리(刀筆吏)는 이 블로그의 필명(筆名)이다.

도필리는 칼 도(刀), 붓 필(筆), 아전 리(吏)의 조합이다. 종이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 동양에서는 흔히 죽간(竹簡)에 붓으로 글을 썼다. 죽간은 대나무 조각을 말하는 것으로, 형태와 재질에 따라 죽책(竹冊) 또는 목간(木簡)이라고도 한다.

죽간은 대략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죽간(竹簡) 두루마리죽간(竹簡) 목간(木簡) 두루마리


멀고 먼 옛날 시대를 그린 영화나 사극을 본 사람이라면, 혹은 삼국지(三國志)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위 이미지와 비슷한 소품이나 아이템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간에 글을 쓰다가 오탈자가 났을 경우에, 그 글자 부분을 칼로 긁어내 삭제하는 일을 맡은 아전(衙前, 하급 관리)을 도필리라고 하였다. 도필리의 첫 글자 도(刀)가 바로 대나무 조각에 쓴 글자 부분을 긁는 도구를 뜻한다.

예를 들어, 글을 직접 쓰는 관원(상급 관리)이 "여기 잘못 썼네" 하면 도필리가 칼로 글자를 깎아내는 식이다. 또는 상급 관원의 명령을 불러주는 대로 죽간에 글자를 쓰다가 필요하면 고치고 다시 썼기에, 즉 칼과 붓을 모두 한 손에 다루었기에 도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록에 따르면 주로 형정(刑政) 업무를 맡은 하급 관리를 지칭한다고도 한다.


글자를 긁어낸 모습을 그려 보면 아래와 같다. 도필리의 칼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깎아냈는지는 고증하지 않았다. 그저 상상으로 그린 것.

도필리(刀筆吏)도필리(刀筆吏)


내가 '도필리'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각고의 노력 끝에 집필한 『사기(史記)』에서였다.

한(漢)의 전장군(前將軍) 이광(李廣)의 전기인 열전(列傳) 제4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같은 한의 구경(九卿)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의 합전(合傳)인 열전 제60.〈급정열전(汲鄭列傳)〉 등에 나온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60여 세로, 새삼 지금에 와서 (나를 심문하는 자로) 도필리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각주:1] - 자결하기 직전 이광의 말, 〈이장군열전〉

"세상에서 흔히 말하기를, '도필리를 공경(公卿) 벼슬에 앉혀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과연 옳은 말이다."[각주:2] - 급암이 혹리(酷吏)[각주:3] 장탕(張湯)을 지목하여 한 말, 〈급정열전〉



이렇듯 도필리는 그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원래부터 하던 일만 반복하는 하급 관리일 뿐, 스스로 어떤 이론을 세우거나 주장 또는 의견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내가 이러한 필명을 쓴 것은 스스로 겸손해서가 아니라, 실제 그러하기 때문이다. 검색만 하면 여기저기에서 모을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가끔 몇 자 끄적일 뿐이기에.

더하여, 공직에 있었던 적이 없으면서 필명에 리(吏)를 넣게 되었으니 이것은 참칭(僭稱)이다.



  1. 且廣年六十餘矣 終不能復對刀筆之吏 [본문으로]
  2. 天下謂刀筆吏不可以爲公卿 果然 [본문으로]
  3. 가혹하고 무자비한 형벌을 위주로 백성을 다스린 관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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