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월 29일, 4년마다 돌아오는 2월 마지막 날입니다. 본래 몇 달 전부터 예고하던 경상좌수영 수군진 글을 올려야 하나 시간이 여의찮고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게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매달 한 편씩 짧은 글이나마 올리지 않을 수 없기에 간략한 다른 내용으로 대신합니다. 약 120년 전에 이 땅에 존재하던 대한제국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식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편성표 숫자를 기준으로 그 규모가 약 30개 대대(大隊) 2만 8천 명을 넘을 정도였죠. 물론, 외형적인 숫자만 그러했을 뿐입니다. 훈련과 무기 및 탄약 자체 조달에 있어 내실이 크게 부족하고 군대 양성과 유지 목적 자체가 외세 침략에 대한 대응보다는 내부 민란이나 반란을 막기 위한 용도가 강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907년 ..
사진 한 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글 제5편입니다. 1월도 어느덧 월말이네요. 바쁘게 지나간 한 달이 이처럼 열두 번 반복되면 2024년 한 해도 훌쩍 지나가지 않을까 합니다. 세월이 유수(流水, 흐르는 물)와 같다더니, 정말 빠릅니다. 위 사진은 조선시대 평안도 북쪽 국경의 의주부(義州府) 읍성 남문(南門)을 안쪽에서 촬영한 사진엽서입니다. 의주는 본래 정3품 목사(牧使)가 있던 의주목(義州牧)이었는데 1603년(선조26)에 종2품 부윤(府尹)이 부임하는 곳으로 승격되었죠. 읍성 남문을 바깥에서 찍은 사진은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성 내부에서 바라보고 찍은 사진은 이게 거의 유일한 것 같습니다. 의주읍성 남문은 2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일명 '내남문(內南門)'으로 의주성 남쪽에 있었던..
영화 〈서울의 봄〉을 개봉 직후 관람했는데,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였습니다. 일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극적 효과를 위한 각본이었다고 넉넉히 이해될 정도였죠.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고 각종 무대와 소품도 고증에 꽤 충실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내용을 긴박하게 풀어가는 것이 참 좋았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 역사에 대해 관심과 반성을 가지게 하는 좋은 영화였네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과정을 정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많이 늦었지만, 2023년을 마무리하는 날에 올려봅니다. (예고했던 경상좌수영 수군진 글은 다음에...) 12·12 쿠데타(Coup d'État)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약 한 달 보름 전에 일어난 박정희(朴正..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1597년(선조30)에 두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당해 최전선으로 향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그해 9월에 명랑대첩(鳴梁大捷)을 거둔 곳 인근인 전라우수영 지역까지 이동한 경로를 표시한 남행도(南行圖)입니다. 예전에 올렸던 것인데, 일부 미비점이 있어 내용 보완 후 다시 등록(공개 전환)하는 것입니다. 지도는 1861년(철종12)에 간행된 〈동여도(東輿圖)〉 기준이며, 날짜별 행적 경로는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역(譯)의 현암사 개정판 『난중일기(亂中日記)』 기술 내용에 기초하였습니다. 수록 기간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한 1597년(정유년) 4월 초1일에 옥문[圓門, 감옥 문] 밖을 나온 이후부터 동년 8월 초3일 진..
성환도(成歡道)는 조선시대 역로(驛路) 가운데 현재 충청남도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표적 도로입니다. 한성부, 즉 서울에서 전라도 전역 및 진주(晉州), 사천(泗川), 통영(統營, 삼도수군통제영) 등 경상도 남부 지역을 가려면 거의 필수적으로 이용하게 되는 중심 도로이며, 그 도로 중간에 설치된 수많은 역참(驛站)과 역로에 운용되는 역마(驛馬)를 관리하던 관아(官衙)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각 역도(驛道)에는 역도 명칭을 대표하는 찰방역(察訪驛)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속역(屬驛, 소속 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성환도는 종6품 찰방(察訪)이 근무하는 성환역과 11개의 속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위 1번 지도는 성환도(成歡道)를 따라 배치된 성환도 각 속역의 위치 지도입니다. 행정구역 표시가 1910..
지난 6월 24일에 블로그 방문자 20만을 달성했습니다. 10만 달성 때처럼 기념하는 글을 올릴까 하였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수많은 검색 로봇이 들락날락하는 현실 아래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특별한 일일까 싶어 날짜만 기록해 두고 그냥 넘어갑니다. 매월 한 편씩 주요 컨텐츠를 담은 글을 올리려 하고 있는데, 이번 글은 월말이 되어서야 겨우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남쪽 바닷가 끝, 조선시대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지역의 관아 건축물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목은 부산진(釜山鎭)과 왜관(倭館) 사이에 있던 초량객사(草梁客舍) 및 성신당(誠信堂) 건물의 위치 비정에 관한 탐구입니다. 초량객사 터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에서 이미 두 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
사진 한 장을 (조금) 자세히 탐구해 보는 글 제4편입니다. 이번에는 경복궁(景福宮) 궐내각사(闕內各司), 즉 궁궐에 있던 관청 건물 가운데 하나인 홍문관 건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위 사진엽서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남산 북쪽 기슭, 당시 주소로 경성(京城) 남산정2정목(南山町二丁目) 50, 현재 도로명 주소로 중구(中區) 퇴계로18길 103, 지번 주소로 남산동2가 50번지에 있던 화월별장(花月別莊) 건물입니다. 현재 중국대사관 영사부(領事部)가 소재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경복궁 안에 있던 홍문관 관청의 본관 대청(大廳)이었는데, 1914년경에 공매를 통해 일본인에게 낙찰 매각되어 어느 요정(料亭)으로 해체 이전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요정, 다른 말로 '기생집'의 한 건물이 바로 위 사진의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