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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모처의 카페 달몬트(dalmonte)

여행은 안전한 철도로 - 철도청여행은 안전한 철도로 - 철도청 한국철도공사 코레일 KTX


'여행은 안전한 철도로'

옛날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지난주 주말에 목포를 방문했다. 사진은 서울역에서 KTX 역방향 좌석에 앉아서 출발하기 직전에 찰칵한 것.


2010년 이후 9년 만에 찾은 목포이지만, 목포역 주변의 구(舊)시가지는 여전했다.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즐비한 그 인근의 어느 식당에서 중식(中式, 중국식)으로 중식(中食, 점심)을 먹고 유달산(儒達山)을 거쳐 도착한 곳이 어느 해안도로 옆에 있던 로스터리 카페였다.

본래 가려던 곳은 그 맞은편의 다른 카페('카페치노')였는데, 남은 자리가 없다고 하기에 대신 들어간 곳이다. 2층 규모라서 공간이 넓은 것이 제법 쾌적했다. 카페 내에 사람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수도권에 미세먼지가 심했던 날이었지만, 여기는 남쪽이고 바다가 보이는 장소에 토요일이었으니까.

일행이 주문한 것을 몇 장 찍었는데 그나마 잘 나온 것이 아래 두 장이다. 사진에는 없지만 긴 유리잔은 지난달에 올린 카페에서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딥초콜릿라떼딥초콜릿라떼 (카페 달몬트)

플레인요거트 (with Blueberry)플레인요거트 with Blueberry (카페 달몬트)


카페 이름이 달몬트(dalmonte)였는데, 무슨 뜻일지 궁금했다. 오렌지 주스로 유명한 델몬트(Del monte)가 아니다.

달몬트 냅킨냅킨 (DALMONTE Roastery Cafe)


카페 냅킨을 보면 달(Moon)과 산(Mountain)이 보인다. 오른쪽의 ㄱ 모양은 무엇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달(DAL)과 산(MON?)처럼 자연물일 것 같은데, 테라스(terrace)일까? 일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간단하겠지만, 상상의 여지를 위해 물음표 하나로 남겨두어도 괜찮을 듯하다. 산도 애매하므로 어쩌면 물음표가 두 개일 수 있겠다. (설마 달, 산의 모양이 알파벳 D, M, T의 형태만을 딴 것은 아니겠지...)

아래는 2층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이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하늘이 청명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풍광 자체는 꽤 마음에 들었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는 사람이 많은 것이겠지 싶다. 앞에 보이는 섬은 고하도(高下島).

목포 바다목포항 길목 (목포시 서산동)


요 며칠간 목포(木浦) 이야기로 이런저런 말이 많다. 바로 직전에 목포를 방문하면서 문제의 그 장소(목포 시내)도 구경할 수 있었다. 목포진 역사공원에 올라 구시가지가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때 받았던 인상과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주말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없구나."

인구 25만 남짓한 지방 중소도시의 쇠락한 도심.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비슷하게 남아 있는 군산(群山)은 상대적으로 수도권과 가깝기에 찾는 사람이 어느정도 있지만, 국토 서남쪽 끝 부분에 위치한 목포는 너무 멀다. 서울과 용산에서 가득 차서 내려오던 KTX의 승객 대부분은 광주송정역에서 내렸고, 목포로 향할 때는 한 칸에 서너 명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랬다는 짧은 이야기.

목포진(木浦鎭) 객사(客舍)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목포진(木浦鎭) 객사(客舍) - 목포시 만호동


위 사진은 전라우수영 목포진(木浦鎭)의 객사(客舍)이다. 목포역과 목포항 사이, 구시가지 가운데에 솟아 있는 높은 언덕의 목포진 역사공원 내에 최근(2015년 1월) 복원한 건물이다. 나름대로 고증을 거쳤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완벽한 복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관련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유물 발굴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지도가 복원의 유일한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포진은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근무하던 진(鎭)이다. 만호는 현대 계급으로 중령(中領) 정도가 된다. 군사 편제상으로 해남현(海南縣)의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 함평현(咸平縣) 임치도(臨緇島)의 임치도진관(臨緇島鎭管) 관할하의 무안현(務安縣) 소재 목포진이다. 우수영에는 정3품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임치도진에는 종3품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었으며, 임치도진은 함평현에 있었는데 임치도라는 섬 자체는 영광군(靈光郡)에 있었다(섬에서 마주 보는 곳에 진이 있음).

조선시대 진(鎭)은 군부대, 군사시설이지만 진영(鎭營) 인근에 한해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목포만호가 다스린 목포진은 목포 항구와 포구 마을, 그리고 영산강(榮山江) 하구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옛날의 포구 마을이 오늘날 목포시의 구시가지 지역이다.


역사공원에 오르면 지금도 목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사진 찍기도 좋다. 목포는 그만큼 한적하고 한가하다. 목포 구도심(舊都心)보다는 원도심(原都心)이라고 해야 더 이상의 퇴락을 막을 수 있을까? 용어가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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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구한말 시기 서울시청 인근 지역 지도

서설. 지난해(2018년) 6월에 본 블로그(아정)의 글을 일부나마 공개 문서로 전환하고 다시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후 새로 올린 글들은 주로 조선시대 중앙 관청(관아)의 형태, 변천, 자료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때 계획하기를 한 달에 최소 하나의 새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꿔 2019년, 새해 1월을 맞이하여 '이미지 위주의 글'을 급조해 올려봅니다.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고, '역사-관아' 카테고리가 아닌 '역사-일반' 카테고리의 글이 되었습니다.)

이하 본문.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경북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어가 서울특별시청과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驛)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대표 도로가 바로 세종대로(世宗大路, 세종로)이다. 이는 현재의 도로명 주소 체계에서 2010년에 바뀐 이름이고, 예전에는 현재 세종대로 전체 2.2km 구간 가운데 종로(鐘路)와 만나는 곳까지는 세종로(世宗路), 그 아래는 태평로(太平路)였으며, 남단은 남대문로(南大門路)의 일부였다.

현대 지도에서 세종대로 중 서울시청 인근을 살펴보면 다음(Daum)과 같다.

서울시청 인근 세종대로 일대 (현대 지도)1번 지도 - 서울시청 인근 세종대로 일대 (현대 지도)


세종대로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고 있다. 북쪽에 '세종대로'로 표기된 부분은 현재 광화문 광장의 남쪽 끝부분이다.

서쪽으로 향한 '새문안로'는 경희궁(慶熙宮)과 서울역사박물관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지번 주소와 법정동 명칭, 한자 지명으로는 신문로(新門路)이다. 한양성곽을 이루는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대문(西大門)인 돈의문(敦義門)을 1422년(세종4) 2월에 새로 만들자, 사람들이 이를 '새문', '신문(新門)'이라 하고 새문 안쪽의 동네를 새문안[新門內]이라고 한 것에서 도로명이 유래하였다. 새문안로 반대쪽은 익히 알려진 종로(鐘路)이다.

빨간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부분은 근대, 즉 대한제국 시기 이후에 새로 설치했던 도로를 이후 꾸준히 확장한 결과에 따른 세종대로 구간이다. 행정구역으로는 태평로1가(太平路一街)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도로가 조선시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참고로 태평로라는 명칭 자체는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공간인 객관(客館) 태평관(太平館)에서 딴 것이다. (태평관 위치는 위 지도 밖의 태평로2가 지역에 있다.)

아래는 위 지도와 동일한 지역을 조망한 조선시대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이다.

한성부 군기시 일대 지도 (1750년 도성대지도)2번 지도 - 한성부 군기시 일대 지도 (1750년 도성대지도)


〈도성대지도〉는 앞에 올렸던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18세기 중반(1753~1759년 사이)에 제작된 채색필사본 지도이며, 그 수록 내용이 매우 상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번 지도에서 보았던 세종대로의 광화문 광장 부분이 '육조거리[六曹街]'로 써넣은 지역이다. 이 부분을 바로 남쪽, 즉 지도에 '[서]일영대계'라고 표시된 지점을 황토현(黃土峴)이라고 하였다. 현(峴)은 작은 언덕을 뜻한다.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 나지막한 황토현 언덕 앞에서 가로막혀 좌우의 새문안로, 운종가(雲從街, 종로)와 만나는 삼거리로 굳어진 것이다.

육조거리, 새문안로, 운종가, 무교로(武橋路) 등의 도로 명칭은 〈도성대지도〉에 없는, 조선시대에 통용된 명칭을 토대로 필자가 임의 기재한 것이다.

운종가는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시전(市廛) 밀집 지역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다니는 거리'라는 뜻이며, 현재의 종로에 해당한다. 무교로 명칭은 군기시(軍器寺) 관청 앞에 있던 다리인 군기교(軍器橋, 군기시교)에서 나왔다. 군기시의 별칭이 무고(武庫)였기에 군기교를 무교(武橋)라고 부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사형 죄인을 처단하던 장수로 자주 활용되었던 곳이 바로 군기시전로(軍器寺前路), 즉 군기시 앞길이었다. 역사 소설이나 사극 드라마에 종종 나온다.

"백관(百官)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 차례로 서 있는 앞에서 역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 ?~1728)를 참수하고 노적(孥籍, 연좌 처벌 및 가산 몰수)을 법대로 하였다."
- 1728년 3월 27일 - 영조실록 권16. 영조4년 3월 27일 정축조.



위 2번 지도에 등장하는 주요 관청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장례원(掌隷院) : 노비 문서, 소송 판결 등을 담당한 관청
2) 기로소(耆老所) : 연로한 고위 퇴직 관료를 위한 관청
3) 우순청(右巡廳) : 한성부 서쪽의 야간 순찰을 담당한 관청
4) 우포청(右捕廳) : 한성부 서쪽 지역의 치안을 담당한 관청. 우포도청(右捕盜廳).
5) 귀후서(歸厚署) : 시신을 담는 관곽(棺槨) 제작, 장례(葬禮) 등을 담당한 관청.
6) 서부(西部) : 한성부의 서쪽 지역 행정을 담당한 관청. 오늘날의 구청(區廳).
7) 선공감(繕工監) : 토목 공사를 담당한 관청.
8) 서학(西學) : 한성부 서쪽 지역의 초중등 교육을 담당한 관청. 서학당(西學堂).
9) 권지청(權知廳) : 수습 관원인 권지(權知)가 업무를 보던 관청.
10) 군기시(軍器寺) : 무기 및 화약 제조 관청. 별칭 무고(武庫).
11) 분호조(分戶曹) : 외국 사진 접대에 관한 행정을 담당한 관아. 호조(戶曹) 소속.
12) 남별궁(南別宮) : 조선왕조 왕실의 별궁(別宮). 경정공주(慶貞公主) 소공주댁(小公主宅).
13) 경운궁(慶運宮) 터 : 임진왜란 직후 궁궐 기능을 수행했던 터. 인조 임금이 즉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서궁(西宮).


지도에 등장하는 주요 다리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송기교(松杞橋) : 육조거리와 새문안로가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 아래로 백운동천(白雲洞川)이 흐른다. 송교(松橋).
2) 혜정교(惠政橋) : 육조거리와 운종가(종로)가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 아래로 삼청동천(三淸洞川)이 흐른다. 혜교(惠橋).
3) 모전교(毛廛橋) : 운종가에서 군기교로 이어진 도로에 있던 다리. 아래로 청계천(淸溪川)이 흐른다. 모전은 과일 판매 상점이다. 운종가남교(雲從街南橋),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4) 군기교(軍器橋) : 군기시 앞에 있던 다리. 아래로 창동천(倉洞川) 지류가 흐른다.
5) 복차교(卜車橋) : 취현동(聚賢洞) 창동천 지류 위에 있던 다리. (한성부 동부에 같은 이름의 다리가 하나 더 있었다.)
6) 전교(錢橋) : 돈을 제조하는 전도감(錢都監) 앞에 있던 다리. 아래로 창동천(倉洞川)이 흐른다. 전도감교(錢都監橋).


지도에 등장하는 주요 행정구역 명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
2) 중부 서린방(瑞麟坊)
3) 서부(西部) 적선방(積善坊)
4) 서부 여경방(餘慶坊)
5) 서부 황화방(皇華坊)
6) 남부(南部) 광통방(廣通坊)
7) 남부 호현방(好賢坊)

방(坊)은 오늘날의 동(洞)에 해당한다. 시청은 한성부(漢城府)이고, 구청은 중부(中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라고 보면 된다. 방 아래에는 현재 통반(統班) 제도의 통(統)에 해당하는 계(契)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도에서 '[적]당피동계'라고 표시된 것을 '서부 적선방 당피동계(唐皮洞契)'라는 뜻이다. 현대식으로 표시하면 '서구 적선동 당피통' 정도가 되겠다.

구분 조선시대 현대 비고
1단계 한성부(漢城府) 서울특별시(市) 한성부 인구 : 15~20만
서울시 인구 : 1천 만 내외
2단계 부(部) 구(區) 1부 인구 : 2~5만 (5부)
1구 인구 : 20~50만 (25구)
3단계 방(坊) 동(洞) 1방 인구 : 1~3천 (43~52방)
1동 인구 : 1~3만 (424개 행정동)
4단계 계(契) 통(統) 계 숫자 : 320~340개
통 숫자 : 12,622개 (2017년)
(4.5단계) 동(洞) -
반(班) -
5단계 통(統) 반 숫자 : 94,651개 (2017년)
6단계 호(戶) 호(戶) 가(家)


아래는 2번 지도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848년경의 동일 지역 지도이다.

19세기 중엽 한성부 군기시 일대 지도 (도성전도)3번 지도 - 한성부 군기시 일대 (1848년 청구요람 도성전도)


이 지도는 <청구요람(靑丘要覽,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포함된 도성전도(都城全圖)이다. 19세기 중반의 서울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개 관청의 위치에 변동이 있을 뿐, 도로 체계상의 가로(街路)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도로가 눈에 띄고, 녹색 화살표로 표시된 분호조의 위치가 2번 지도와 다르다는 점이 특징이다. 2번 지도에서는 작은 골목길[小路] 왼쪽에 분호조가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길 오른편의 남별궁 바로 옆에 '分戶曹(분호조)' 세 글자가 세로쓰기로 표기되어 있다.

관청 변동에 확연히 보이는 점은 여경방(餘慶坊)에 있던 서부(西部) 청사가 남쪽의 양생방(養生坊) 지역으로 이전하여 지도에서 사라진 것, 그리고 조정 연회를 담당하는 예빈시(禮賓寺) 청사가 1776(영조52) 11월에 서부 양생방(養生坊)에서 남부 회현방(會賢坊, 호현방)의 남별궁 안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간행 고지도(古地圖) 자료와 1912년에 제작된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를 기반한 조선 후기 한성부의 군기시 인근 지도를 그려 보면 아래와 같다. (어디까지나 필자 추정 지도이다.)

조선시대 후기 군기시 인근 (1800년대 추정 지도)4번 지도 - 조선시대 후기 군기시 인근 (1800년대 추정 지도)


1800년대 추정 지도이기 때문에 구한말-대한제국 시기에 많은 변형이 있었던 지역에는 상당 부분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특히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두 부분이 그렇다. 또 현재 덕수궁(德壽宮)이 들어서 있는 곳 역시 번듯한 궁궐인 '경운궁'이 아닌, '경운궁 터'로 기재하였다. 경운궁(덕수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왕실 건물 몇 채와 민가(民家), 밭[田], 개천(開川)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동네 소정동(小貞洞) 지역이었다.

1번의 현대 지도에서 살펴봤던 세종대로 태평로1가 구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번 지도, 3번 지도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그러한 도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중등 교육을 담당했던 서학(西學)의 위치를 ㉠로 추정하는 것이 최근의 고증 결과이나[각주:1], 2번의 〈도성대지도〉와 3번의 〈청구요람〉 도성전도에서는 ㉡ 위치에 서학이 표시되어 있다. 1825년(순조25)경 제작된 김정호(金正浩, 1804?-1866?)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 위치에 서학이 표기되어 있는데, 지명 기재와 관련하여 채색본 지도와 목판본 지도가 가지는 공간적인 특성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근대 시기에 서학이 표시된 부분의 도로망 및 필지의 변동이 적지 않았기에, 문헌과 지번 추적을 통한 고증에도 불구하고 과연 ㉠ 위치에 서학당이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불확실성이 추가된다.)

분호조(分戶曹) 청사의 위치가 2번 〈도성대지도〉에서는 ② 위치, 3번 〈청구요람〉 도성전도에서는 ①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① 위치에 분호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각주:2] 뒤에서 알아보겠지만, 필자는 녹색으로 칠해진 ② 지역으로 분호조 청사의 소재지를 판단한다.


아래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인 1903년 무렵의 서울시청 인근 지도이다. 앞의 지도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지역을 담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 군기시 인근 (1903년 전후 지도)5번 지도 - 대한제국 시기 군기시 인근 (1903년 전후 지도)


가장 큰 변화는 태평로(太平路)의 원형이 되는 도로가 개설된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도로(태평로)의 형태는 1908년에 제작된 『한성부 지적도(漢城府地籍圖)』 중 〈여경방도(餘慶坊圖)〉에 기초하였다.[각주:3]

고종 황제가 경운궁(慶運宮)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기존의 도로망 체계를 개편하여 경운궁에서 광화문 육조거리로 이어지는 새 도로를 건설하였다. 도로가 개설된 시기는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이 도로가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지도가 1901년경 제작된 것이고(필자 확인에 한함), 도로 중간에 있는 신교(新橋)가 1901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만들어진 대부분 도로가 그러하듯, 처음 만들었을 때는 '신작로(新作路)'로 호칭하였다.

육조거리의 기로소 바로 아래에 있는 기념비전은 1902년(광무6)에 건립된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高宗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이다. 문화재청 사적 제1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교보생명빌딩(교보문고 건물) 앞에 현존한다.

군기시 청사가 있던 곳에 숙위소(宿衛所)가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숙위소는 경운궁의 경비, 경호를 위한 숙위대(宿衛隊)의 병영(兵營)이다. 숙위대영(宿衛隊營)이라고도 하였다. 구한말에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처지의 한성부(漢城府) 관아가 1895년(고종32) 5월부터 군기시 청사에 입주해 있었으나, 1901년(광무5, 고종38) 5월에 징상(徵上) 평양2대대(平壤二大隊)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징상은 서울로 불러서 올린 것을 뜻하고 평양2대대는 대한제국 각 지방에 편성되어 있던 진위대(鎭衛隊) 중에 평양진위대(진위 제4연대) 제2대대를 말한다.

숙위소 오른쪽에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주의하자. 이 작은 도로는 3번 지도에서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길이다. 군기시 오른쪽으로 작은 길이 존재하고 있었다.

숙위소 아래의 영선사(營繕司)는 토목, 건축을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 제용원(濟用院) 소속 관청으로 1895년에 신설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영선사와 숙위소 사이에 서편 도로를 따라 주전원(主殿院), 대령청(待令廳)이 차례대로 있었으며, 주전원 맞은편에 경운궁 포덕문(布德門) 보였다.

분호조 터와 환구단(圜丘壇, 원구단)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도로의 이름이 '분호조후도(分戶曹后道)'로 되어 있다. 이는 1903년 당시 일본이 간행한 서울 지도[각주:4]에 표기된 것을 그대로 기재한 것이다. '후도(后道)'는 '후도(後道)'의 간체 표기이므로, 풀어서 쓰면 '분후조 뒷길'이 된다. 따라서 분호조는 4번 지도의 ① 위치가 아닌, ② 위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뒷길이 되려면 분호조가 길 앞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호조 터가 국유지(관유지)였고, 이후 일본군 수비대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던 점도 ② 위치를 유력하게 한다.

분호조 터 아래의 대관정(大觀亭)은 대한제국 황실의 영빈관(迎賓館)이다. 미국선교회가 건립한 서양식 건물을 1898년(광무2)에 황실에서 사들여 외국(유럽)의 고위 인사를 맞이하기 위한 용도로 운영하였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던 비교적 큰 규모의 2층 건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서 서울 시내를 조망하여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다. (분호조 청사의 건물 배치를 유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 사진이다.)

경운궁의 대한문(大漢門)은 위치 비교를 위해 기재한 것이다. 본래 대안문(大安門)이었던 것을 1906년에 수리하면서 대한문으로 개칭하였다.


아래는 1910년 8월 일제(日帝) 강제병합 이후, 1912년 무렵의 같은 지역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시기 경성부청 인근 (1912년 전후 지도)6번 지도 - 일제강점기 시기 경성부청 인근 (1912년 전후 지도)


〈경성부지적원도〉가 1912년경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원도에 도로명, 교량명, 건물명 정도를 추가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상당수 지명이 일본식으로 교체되거나 새로 할당되었다. '1912년 전후'라고 하였지만, 일부는 1914년에 붙은 지명이다.

1) 육조거리(세종로) : 광화문통(光化門通)
2) 새문안로(신문로) : 서대문정1정목(西大門町一丁目)
3) 운종가(종로1가) : 종로1정목(鐘路一丁目)
4) 황토현 신작로(태평로1가) : 태평통1정목(太平通一丁目), 신교통2정목(新橋通二丁目)
5) 현재 을지로1가 : 황금정1정목(黃金町一丁目)
6) 분호조후도(소공로) : 장곡천정(長谷川町)
7) 서소문내(서소문로) : 서소문정(西小門町), 소의문통(昭義門通)

광화문통, 서대문정1정목, 종로1정목, 태평통2정목이 교차되는 사거리 부분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1912년경에 태평통이 확장되면서 덕수궁(경운궁)의 상당 부분이 도로에 편입되어 덕수궁 앞에도 삼각형 모양의 넓은 공간이 확보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삼각형 동쪽으로 현재의 을지로(乙支路)에 해당하는 도로가 상하로 확대되는 방식으로 군기시 터 주변의 도로망 체계가 정비되었다.

과거의 군기시 청사, 숙위소 병영은 일본군 병기지장창고(兵器支廠倉庫)가 되었고, 남별궁에는 조선호텔이, 분호조 청사 터에는 일본군 수비대가 들어섰다. 병기지장창고는 군수품, 보급품을 보관하는 창고이고, 조선호텔은 1914년 10월에 개관한 철도호텔이다. (조선호텔 건물은 1967년에 철거 후, 1970년에 현재의 20층 빌딩으로 신축되었다.)

분호조의 일본군 수비대(守備隊)는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또는 보병 제51연대의 예하 대대가 주둔하였다. 수비대 병영 아래 대관정에는 1904년(광무8) 4월 3일 자로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들어섰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그해 2월에 강제 체결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여파였다. 1905년 11월 체결된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을사조약, 을사늑약) 기념사진이 촬영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태평통1정목 왼쪽의 경선궁(慶善宮)은 고종 황제의 비(妃)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가 거처하던 공간이다. 엄귀비는 순종 황제가 황태자로 책봉한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생모이기도 하다. 1911년에 엄귀비가 사망하자 경선궁은 엄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되어 덕안궁(德安宮)으로 개칭되었다.

경선궁 왼쪽의 수학원(修學院)은 황실과 고위 관료의 자제를 교육하던 궁내부 산하 기관이다. 1906년(광무10) 10월에 개설되고 1910년 8월에 폐지되었다.


이상으로 세종대로의 과거 태평로 구간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서울시청, 옛날의 군기시 청사 인근의 도로망 모습을 조선후기-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초기로 삼분하여 시기별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현재 지도와 1800년대 추정 지도를 비교한 지도를 올려본다.

서울시청 일대 지도 (조선시대 군기시 인근)7번 지도 - 서울시청 일대 지도 (조선시대 군기시 인근)


1968년에 태평로를 다시 한번 확장하면서 덕수궁 권역이 도로와 인도 부지로 추가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大漢門)이 덕수궁과 떨어져 마치 섬처럼 도로 한편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1970년 8월을 기해 후퇴 이전시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1971년 1월 2일 이전 준공). 군기시와 분호조 터 역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자취를 찾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갔을 옛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오늘날의 서울시청 인근 도로를 걸어본다. 이만 총총.


  1. 이순우, 2015, 「근대시기 사부학당 터의 위치 확인과 공간 변화과정에 대한 고찰」, 『항토서울』 제89호, 서울역사편찬원. [본문으로]
  2. 서울시 중구 홈페이지 - 역사문화자원 JGH_000341 분호조 터,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 (소공동 87-1) 일대 [본문으로]
  3. 「경기도한성부서서여강방도(京畿道漢城府西署餘慶坊圖)」, 『한성부 지적도』, 탁지부 측량과, 1908년. [본문으로]
  4.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 일본 경부철도주식회사, 1903년 5월. [본문으로]
경운궁, 구한말, 군기시, 대한제국, 덕수궁, 분호조, 서울광장, 서울시청, 세종대로, 조선시대, 태평로,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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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모처의 카페 언와인드(unwind)

카페 언와인드 복숭아 아이스티 & 롤케이스복숭아 아이스티 & 수제 롤케이스 (카페 언와인드)


일전 11시에 아점을 먹고 2시쯤 길을 나서 서해선을 타고 시흥(始興)에 도착했을 때, 저녁 무렵의 약속 시각까지 약간 시간이 남았기에 출출함을 채울 겸 해서 이면도로 골목길의 어느 카페에 들어가 복숭아 아이스티와 케이스 한 조각을 냠냠하였다.

케이스는 세 종류를 전시(?)하고 있었으나 다른 두 종은 성황리에 모두 소진되고 하나가 겨우 남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사진의 롤케이크(Swiss roll)다. 미세먼지가 심해 외출하기 어려운 날임에도 마감을 한참이나 남겨둔 시간에 케이크가 거의 다 판매되었으니, 이 카페의 디저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케이크 종류가 매일 바뀌는지는 모르겠다.) 빈 테이블이 겨우 한두 개일 정도로 카페 내에 사람들이 많았다.

본래 고르려던 케이크(치즈 케이크? 레몬 케이크?)를 맛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운 일이지만, 다시 시흥에 발걸음할 일이 있을지...

카페 언와인드 흑미 쌀가루 롤케이크딸기 + 흑미 쌀가루 롤케이크 (카페 언와인드)


시흥(始興)이라는 지명은 느낌이 참 좋다. 비로소 시, 시작할 시의 시(始)와 일으킬 흥, 흥성할 흥의 흥(興) 글자가 합쳐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본래 이 지역의 지명은 금천(衿川)이었는데, 1795년(정조19) 윤2월 1일에 고을의 등급을 종6품 현감(縣監)에서 종5품 현령(縣令)으로 올리면서 시흥으로 개칭하였다. 금천의 별칭(옛날 이름)이 시흥이었던 것을 반영한 조치였다. 시흥이 중요해진 것도 정조 임금 시기였으니, 본인의 생부(生父)인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찾을 때 오가던 능행(陵幸)의 중심이 바로 시흥로(始興路, 시흥대로)이고, 능행 중간에 잠시 쉬어 머물던 곳이 시흥행궁(始興行宮, 금천구 시흥5동)이었다. 장용영(壯勇營) 동원 체제의 일부를 시흥이 담당하기도 했다. 한양을 벗어난 후 능행길의 시작[] 지점에 있던 고을 이름을 시흥으로 바꾼 정조 임금의 마음에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현재 도로명 주소에서 '시흥대로'가 2개다. 서울에 하나, 시흥-안산에 하나. 그 가운데 정조의 능행길은 서울의 시흥대로이며, 내가 들렸던 카페는 시흥-안산 시흥대로의 시흥방향 초입 근처(시흥시 대야동)에 있었다.

unwind, 대야동, 롤케이크, 시흥시, 아이스티, 언와인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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