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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기념서(十萬紀念序)

블로그 방문자 10만 명을 기념하는 글[十萬紀念序]

아정(雅亭)이 이곳 면남방담(綿南方談, tistory)에 터를 잡고 단장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문을 연 지 어느덧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개설 3년만에 폐(閉)하였다가 8년을 기다린 후에 다시 빗장을 열었으니, 실제로 사람들이 드나든 기간은 5년 남짓이다. 지난 6월 초10일[각주:1]에 그 방문자 수가 10만을 헤아리게 되었으므로[각주:2] 대략 연간 2만가량이 찾은 것인데, 무술년(戊戌年, 2018) 이후가 월 1천 내외이니 상당수 적산(積算)이 개설 초기 3년 동안에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금 이곳을 찾는 손님의 수가 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대략 게시하는 글의 주제가 '관아(官衙)'에 크게 치우치고 그동안 올렸던 여러 글을 비공개로 전환해 둔 때문이겠지만, 10년 사이에 세태(世態)가 크게 변하여 불로거(不路居, blog)의 입지가 예전만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 벌써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이다. 실로 면앙지간(俛仰之間)[각주:3]이라 하겠다.

옛사람들은 어떤 일을 기념하기 위해 시(詩)를 지었는데, 나는 문장이 없으므로 이렇듯 짧은 글을 지어 남길뿐이다.

경자(庚子, 2020년) 6월, 선성(宣城) 김하은(金河銀)


  1. 6·10 민주항쟁기념일이다. 음력으로는 윤4월 19일. [본문으로]
  2. 방문자 수가 아닌 방문수라고 해야 정확하다. 그 가운데 검색로봇 카운트, 1인 다중클릭, 다중방문 등이 있으므로 실제 누적 방문자는 그 이하이다. [본문으로]
  3. 왕희지(王羲之), 〈삼월삼일난정시서(三月三日蘭亭詩序, 蘭亭集序)〉, '고개를 숙였다 드는 사이에 벌써 과거의 일이 되고 만다[俛仰之間 已爲陳迹]' [본문으로]
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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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탁지부)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 - 3편

※ 지난해 11월에 올렸던 동일한 제목의 1편, 그리고 지난 2월에 올린 2편에 이어지는 호조 관아 건물 배치에 관한 마지막 글입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시기가 요원한 때입니다. 여기에 이런저런 일이 더해져서 본편의 편집이 더 늦어졌습니다. 기다려 주신 분이 계신다면,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 같은 제목의 글 2편(링크)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육조거리 호조(戶曹) 청사 건물 배치도17번 이미지 - 호조(戶曹) 및 탁지부(度支部) 청사 건물 배치도 (추정)


위 17번 이미지의 A 평면도는 1편과 2편 글에서 다뤘던 내용에 기반하여 추정한 조선시대 후기의 호조(戶曹) 청사 건물 배치도이다.

호조와 같이 육조거리(세종대로) 동쪽 편에 있었던 이조(吏曹), 한성부(漢城府),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대청(大廳) 건물이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육조거리 방향, 즉 서쪽 9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호조 청사의 당상청사(堂上廳事)는 이보다 약간 위쪽인 9시 30분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탁지지(度支志)』 관사(館舍) 항목에서는 이 건물의 정면 방향을 '을좌신향(乙坐辛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각주:1].

을좌신향은 '을방(乙方)을 등지고 신방(辛方)을 향한 좌향(左向)'을 말하며, 동양의 전통 방위법에서 풍수지리적으로 '대부(大富, 큰 부)가 날 형국'의 길지(吉地) 뜻하는 화국고묘향(火局庫墓向)[각주:2]이다. 즉, '국고(國庫)가 풍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당상대청을 비롯한 호조 청사의 중심 건물이 북쪽으로 15도 방향의 서향(좌향)을 택한 을좌신향으로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각주:3]


오른쪽의 B 평면도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광무10) 무렵의 호조 청사 배치도이다. 이때는 호조 청사의 후신인 탁지부(度支部) 청사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호조 북쪽의 예전 한성부 및 예조 청사는 학부(學部)로, 그 위쪽의 이조는 통감부(統監府)의 법무원(法務院)으로, 호조 남쪽의 경무청(警務廳) 및 농상공부는 학부 또는 법부에 소속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각주:4]

녹색 ①번은 왼쪽 A평면도에서 별표로 표기한 곳의 창고를 허물고 들어선 탁지부의 2층 목재 양옥 건물이다.[각주:5] 신축 과정에서 창고 안쪽에 있던 작은 연못이 매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녹색 ②번은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 또는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건물로 추정[각주:6]되는데, 그 이유는 ③번에 개설된 작은 문 때문이다. 탁지부 내에 설치되었던 양지아문(量地衙門), 지계아문(地契衙門) 건물을 이어받았던 한성재판소는 탁지부 소속 기관이 아니었고, 고유한 재판소 업무를 위해서도 탁지부와 대문을 공유하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했을 것이기에 (양옥 건물을 신축한 이후에 특히) 독립된 문이 필요했을 것이다.


학부(學部) 청사 영역의 노란색 ① 지역은 학부 문서과(文書課), 회계과(會計課) 일원으로, 1908년 12월경에 신축 청사가 들어설 공간이다.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본청(1908년) 및 부속 건물(1907년 12월)의 건축 시기는 참고 차원에서 기재하였다.

육조거리 호조(戶曹) 터 잔존 건물 배치도18번 이미지 - 1911년 및 1918년 무렵 호조 터 건물 배치도


위 18번 이미지 왼쪽의 C 평면도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인 1911년 무렵의 동일한 지역이다. 노란색 ① 지역에 2층 양옥의 목조 건물로 지어진 학부 합설청사[각주:7]가 건축된 이후이며, 기타 보라색으로 표시된 몇 개 건물 1908년과 1911년 사이에 새로 들어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기존의 이조, 한성부, 호조 청사 일대가 모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각주:8] 광화문 분실(分室)로 활용되었고, 호조 남쪽의 법관양성소는 1909년에 법학교(法學校)로 개편되어 존속하고 있었다.

오른쪽의 D 평면도는 1918년 초의 같은 지역을 그린 것이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기한 것처럼 기존에 없던 소로(小路)가 임시토지조사국 및 경관연습소와 법학교의 후신인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사이에 개설되어 82번지(토지조사국)와 84번지(전수학교)로 필지를 분할하고 있었다. 1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소로 개설과 병행된 필지 개편은 1911년을 전후로 이미 이루어졌다. 호조와 경무청(농상공부) 사이에 있었던 종래의 골목길은 필지 변화에 따라 전수학교 부지로 편입되었다.

호조 남측이 경성전수학교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탁지부 신축 건물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敎舍)로, 호조 낭청청사(낭청대청)가 구희실(球戱室)[각주:9]로 사용되었고, 남동쪽 고사(庫舍)는 그대로 창고로, 경무청의 대청 건물은 도서실 용도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시토지조사국 지역에 보라색으로 표시된 여러 건물(사무실)이 신축된 것이 보이고, 왼쪽 C 평면도의 ② 지역에 있던 3동의 건물은 모두 철거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광화문외관유지도면(光化門外官有地圖面)19번 이미지 - 광화문외관유지도면 (1911년)


위 19번 이미지는 1911년에 작성된 〈광화문외관유지도면(光化門外官有地圖面)〉을 채색 편집한 것이다.[각주:10] 도면 작성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철도국(鐵道局) 기수(技手) 전중리삼랑(田中理三郞)이다.[각주:11]

앞에서 살펴본 18번 이미지의 C 평면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전통 한옥의 온돌(溫突), 목조(木造), 연와조(煉瓦造)[각주:12] 등으로 구분된 각 건물의 건축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도면을 보면 호조, 한성부의 외행랑(外行廊), 고사(창고)까지 모두 온돌로 표기되어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각종 창고가 사무실로 용도 변경되면서 온돌로 개조되었을 수 있지만, 실제 온돌 난방이 아니더라도 전통 한옥 형태이면 모두 온돌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각주:13]

ㄱ) 빨간색 화살표 : 1편에서 살폈던 탁지부 재정고문(財政顧問) 건물이다. 도면에 등장하는 신축 건물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지어졌기 때문인지 온돌로 건축되었다.

ㄴ) 파란색 화살표 : 한성부 당상대청 남쪽에 지어진 목조 건물이다. 이 자리에는 본래 한성부 낭청대청이 있었을 것이다.

ㄷ) 노란색 화살표 : 1908년 화재 이후 2층으로 신축된 목조 건물이다. 2편에 관련 내용이 있다.

ㄹ) 보라색 화살표 : 탁지부 금고(金庫) 건물이다. 〈본아전도(本衙全圖)〉를 비롯한 그림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본래 온돌 건물[각주:14]이 있었는데, 1904년 10월 한일신협약에 의해 임명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대한제국 재정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시행하면서 벽돌로 쌓은 금고를 설치하였다.[각주:15]

ㅁ) 녹색 화살표 : 기타 목조와 연와조 신축 건물이다. 외부(外部) 고문실(顧問室), 학부 합설 청사, 창고 등의 용도로 대한제국 시기에 신축된 것들이다. 제일 위쪽의 이조(당시 외부) 경내 신축 건물 2동 가운데 하나는 통감부의 초대 통감(統監)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갑(甲), 을(乙)로 표시한 건물은 아래에서 다룰 예정이다.

호조(탁지부) 부지 잔존 건물 배치도 (1918년)20번 이미지 - 호조 터 일부 건물 배치도 (1918년)


위 20번 이미지는 1918년 5월에 제작된 경관연습소(警官練習所) 조선인[鮮人] 기숙사[宿舍] 건축 관련 도면이다.

경관연습소는 본래 경복궁 서쪽 창성동(昌城洞)에 있었는데, 1917년 11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임시토지조사국과 같은 지역을 공유하고 있었다. 호조 북동쪽의 고사(창고)를 숙소로 개조하는 이 도면에서 1908년 5월 시점에 이미 호조 당상대청이 훼철된 상태임이 확인된다. 대략 3월에서 5월 사이에 해체 이전되었을 것이다.

재정고문실(財政顧問室), 연정(蓮亭) 등은 이때까지 남아 있었다. 연못은 없어진 것으로 그려졌지만.


[링크1] 경복궁 서쪽 창성동의 경관연습소 관련 내용은 '사재감(司宰監) 터 - 상편' 글 참고.
[링크2] 호조 당상대청의 훼철 및 이전 관련 내용은 '병조(兵曹) 당상대청(堂上大廳)' 글 참고.

호조(戶曹) 터 일제강점기 시기 건물 배치도21번 이미지 - 1919년 및 1929년 무렵 호조(탁지부) 부지 건물 배치도


위 21번 이미지의 왼쪽 E 평면도는 1919년 무렵, 오른쪽 F 평면도는 1929년 무렵의 같은 지역을 그린 건물 배치도이다. 각 변천을 간략하게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①번 : 호조 당상대청(당상청사)가 1908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철거되었다.

②번 : 경성전수학교 청사가 북쪽 경내로 이전되었다. 시기는 대략 1927년(또는 1926년).

③번 : 경성전수학교의 부속 건물이 남쪽으로 이전되었다.

④번 : 임시토지조사국 건물로 시작하였던 3동 가운데 가장 동쪽의 한 동이 예전 한성부 대청이었던 열품실(列品室, 진열실) 동쪽으로 이축(移築)되어 경찰관강습소(警察官講習所)의 연무장(演武場)으로 활용되었다.[각주:16] 건물 이전 시기는 1918년 5월경이며, 나머지 건물은 모두 철거되고 기숙사가 새로 들어선다.

⑤번, ⑥번 : 경관연습소 경내의 두 건물이 지질조사소(地質調査所) 본관 아래쪽으로 이전된다. 용도는 기존 그대로 ⑤은 창고(倉庫) 및 ⑥은 탕비소(湯沸所).

이외에 경성전수학교가 1922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로 개편되면서 강당, 연무장 등이 신축되었다. 도서관으로 사용되던 경무청 대청은 전수학교 청사 이전을 전후(1927년경)로 철거된 상태.

호조 낭청대청(郞廳大廳) 추정 건물 평면도22번 이미지 - 호조 낭청대청 평면 (경성법학전문학교 학생 대기실)


위 22번 이미지는 1922년경 제작된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생도타실(生徒扣室)[각주:17], 즉 '학생 대기실' 도면이다. 『탁지지』 관사 항목에 낭관청사(郎官廳事)가 전면 4칸에 앞에 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각주:18]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정면 4칸(하늘색 채색 부분), 전퇴(붉은색 채색 부분)를 포함한 측면 2칸 규모가 된다. 즉, 경성전수학교 시기의 구희실을 대기실로 개편하면서 건물을 일부 증축 또는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각주:19]

호조 산학청(算學廳) 추정 건물 평면도23번 이미지 - 호조 산학청 평면 (대한제국 탁지부 양지과 사무실)


위 23번 이미지는 앞의 19번 이미지 설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갑(甲), 을(乙) 건물로 추정되는 도면이다. 탁지부 양지과(量地課) 사무실 2동의 평면도를 기존의 도면과 비교한 결과이다.

ㄱ) 갑(甲) 평면 : 정면 6칸 규모의 산학청사(算學廳事, 籌學廳事) 건물과 들어맞는다. 앞뒤로 퇴칸(退間, 툇간)가 있는 형태이다.

ㄴ) 을(乙) 평면 : 호조 중대문(中大門)을 이루던 행각(行閣)의 일부분으로 추정한다. 또는 기존 중대문을 허물로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일 수 있다.

1910년대 경성전수학교 및 1920년대 경성법학전문학교24번 이미지 - 경성전수학교 및 경성법학전문학교 시기 사진


위 24번 이미지는 1910년대 경성전수학교 시기, 1920년대 후반의 경성법학전문학교 시기의 자료 사진이다. 탁지부 남쪽에 2층으로 건축한 목조 건물이 교사(교실)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 북쪽으로 이전하기 전과 후의 청사(본청), 경무청 대청과 외대문(정문)의 형태 등을 볼 수 있다.

1929년 촬영 육조거리 항공사진 (호조 터 중심)25번 이미지 - 1929년경 육조거리 항공사진 일부 (호조 터 일대)


위 25번 이미지는 1929년경 촬영한 항공사진의 호조(탁지부) 일대 모습이다. 이 시점까지 이조 대청, 한성부 대청, 호조 낭청대청 등의 육조(六曹) 주요 건물이 건재하고 있었다.


이상으로 호조 및 탁지부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짧은 고찰을 마친다.


- 본 3편의 요약
1) 호조 부지를 중심으로 한 공간의 시기별 건물 배치를 추정 [17, 18, 21번 이미지]
2) 호조 당상대청(당상청사) 건물 방향 이야기 (풍수지리적 이유?)
3) 호조 낭청대청(낭청청사) 및 산학청(주학청) 건물 평면 추정 [22번, 23번 이미지]



  1. 제1편 3번 이미지 부분 참고 [본문으로]
  2. 화국고묘향(火局庫墓向)에는 을좌신향(乙坐辛向)과 진좌술향(辰坐戌向)이 있다. 을좌신향은 서쪽에서 북쪽으로 15도 방향, 진좌술향은 서쪽에서 북쪽으로 30도 방향이다. [본문으로]
  3. 낭청대청(郞廳大廳)이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택한 이유에 대한 고찰도 필요할 듯하다. 다른 육조 관청의 낭청 건물 방향이 서향 또는 동향이었던 것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대문(外大門), 중대문(中大門), 당상삼문(堂上三門)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외대문을 지난 후 90도로 두 번 꺽어서 대청 건물에 진입하도록 건물과 문을 배치한 것도 풍수지리학적 이유 때문일 수 있다. [본문으로]
  4. 제1편의 1번 이미지 부분 참고 [본문으로]
  5. 제2편의 10번 이미지 부분 참고 [본문으로]
  6. 건물 연혁이 호조에서 이어지지 않고 1900년대 이후에 신축 또는 개조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신축된 ①번 건물 내부 구조를 감안하면 ①번 건물의 일부가 잠시나마 한성재판소의 재판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본문으로]
  7. 양과신축(兩課新築) 기사 중 '대신관방이하각국과단취설치(大臣官房以下各局課團聚設置)',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5일. [본문으로]
  8. 1910년 1월 또는 2월(양력 3월 14일)월에 탁지부 산하에 토지조사국 설치, 동년 9월 30일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으로 개칭, 1918년 11월 폐지 [본문으로]
  9. 공을 가지고 놀던 공간. 이 시기의 구희는 대개 당구(撞球)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두박물관 문서 자료. [본문으로]
  11. 전중리삼랑(田中理三郞)이 철도국 기수로 임명된 날짜가 1910년 12월 2일이다. 1912년 지적도에서 필지가 분할되었으므로, 그 기간 사이(1911년)에 이 도면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12. 건축 용어 연와(煉瓦)는 벽돌로 순화한다. 즉, 벽돌로 지은 건물. [본문으로]
  13. 그런 점에서 제1편 7번 이미지에서 살펴 본 탁지부 재정고문실이 특이하다. [본문으로]
  14. 낭청청사 입직방(入直房)일 가능성이 있다. [본문으로]
  15. 제1편 6번 이미지를 보면 금고 아래에 교환소(交換所)가 있다. 교환소는 화폐교환소(貨幣交換所)의 약칭으로 경성교환소(京城交換所) 구백동화교환소(舊白銅貨交換所) 등으로도 호칭되었다. 금고와 더불어 일제의 대한제국 재정 장악을 위한 제도였다. [본문으로]
  16. 이축되기 전에도 연무장, 즉 격검장(擊劍場) 및 유도장(柔道場)이었다. 이축 이후 1930년대에 무도장(武道場)으로 신축된다. [본문으로]
  17. 대기실(공실)을 의미하는 타실(扣室)은 타실(控室)로 표기하기도 함. [본문으로]
  18. 郎官廳事四間前退 [본문으로]
  19. 1929년 무렵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볼 때 기와집 형태를 띄고 있는 것으로 봐서 기존의 낭관청사를 허물로 구희실 또는 생도타실을 신축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본문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 낭청대청, 당상대청, 법학교, 육조거리, 탁지부,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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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징상 평양대 시기 경기감영 선화당(宣化堂) 건물

조선시대 각 도(道)의 행정, 사법을 책임지던 관청이 감영(監營)이다. 감영은 오늘날의 도청(道廳)이라 할 수 있고, 감영의 수장(首長, 長官)[각주:1]이 바로 관찰사(觀察使)였다. 관찰사의 품계는 종2품으로 현재의 차관급에 해당하며[각주:2],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 권한까지 관찰사가 가지고 있었다.

감영의 정청(政廳)을 선화당(宣化堂)이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팔도(八道)의 모든 감영이 동일했다. 경기도의 행정을 맡고 있던 경기감영(京畿監營)의 선화당 건물에 관해서는 2018년 7월에 올린 '조선왕조-구한말-대한제국 시기 한성부 관청 편액(현판) 이야기' 문서에서 짧게나마 한 번 다룬 바 있다. 이번 글은 그 선화당 건물의 1902년경 모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이다.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 (징상 평양대 시기)1번 사진 - 경기감영 선화당 (징상 평양대 사진)


위 사진은 대한제국 주재 이탈리아 영사를 지낸 카를로 로세티(Carlo Rossetti, 魯士德, 1876-1948)가 1904년(1부)과 1905년(2부)에 간행한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한국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 실린 것이다. 사진에는 '한국 장군과 장교'라고 설명되어 있다.[각주:3]

사진의 배경 건물은 경기감영 선화당이며, 사진에 등장하는 군인은 징상평양대(徵上平壤隊) 간부들이다. 징상평양대의 '징상(徵上)'은 '서울로 불러서 올린 것'을 의미하고, '평양대(平壤隊)'는 평양 지역에 주둔하던 지방군인 진위대(鎭衛隊)이다. 당시 고종 황제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평양 진위대 병력을 교대로 상경케 해서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기록에 따라 징상대(徵上隊), 평양대(平壤隊), 징상진위대(徵上鎭衛隊)라고도 했다.


건물 기단(월대)에 마련된 돌계단 3개를 보면 건물 왼쪽에서 4번째 칸[間]이 건물의 중심 대청(大廳)임을 알 수 있다. 각 화살표 설명은 아래와 같다.

1) 진홍색 화살표 : '한성부 관청 편액 이야기 (클릭)' 문서에서 확인했던 용마루의 얼룩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 2번 사진과 비교)

2) 파란색 화살표 : 경기감영이 징상평양대 주둔을 위한 군영(軍營, 營門)으로 개조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감영 외행랑(外行廊), 내부 부속 건물 등이 2층의 군인 숙소로 개조되었다.

3) 보라색 화살표 : 제일 왼쪽에 있던 돌계단이 화살표 위치로 이축되면서 건물의 중심이 한 칸 오른쪽으로 이동되었다. (아래 2번 사진과 비교)

4) 주황색 화살표 : 화살표 끝부분에 글자 비슷한 것이 보인다. 그중 한 글자는 '隊(대)'처럼 보인다.

경기감영 선화당 (한성부 청사 시기)2번 사진 - 경기감영 선화당 (한성부 청사 사진)


위 사진은 이전 글에서 살펴봤던 것이다. 1번 사진과 비교를 위해 다시 올려본다.

기단부 돌계단 3개가 원래 자리에 있고, 편액(현판) 위치를 봐도 왼쪽부터 3번째 칸이 건물 중심임을 알 수 있다. 각 화살표 설명은 아래와 같다.

1) 진홍색 화살표 : 용마루 얼룩이 보인다. 1번 사진이 이 사진보다 뒤에 촬영된 것일 텐데, 1번 사진에서 얼룩이 안 보인 것은 조명, 노출 등의 촬영 조건에 따른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녹색 화살표 : 건물 기단에서 내삼문(內三門)으로 이어지는 길에 바닥돌이 있고, 그 바닥돌 삼도(三道) 바로 옆에 가석(嘉石)[각주:4]이 세워져 있다. 1번 사진에서 바닥돌이 제거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돌계단 위치가 바뀌면서 바닥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고(=가석과 겹쳐짐), 행정 관청이 아닌 군영으로 건물 용도가 개편되면서 바닥돌이 있을 필요성도 감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노란색 화살표 : 건물 오른쪽의 1칸만 온돌방 형태의 외형을 보인다. 반면 1번 사진에서는 7번부터 이러한 형태를 보인다. 대청에 설치된 분합문(分閤門)[각주:5]을 모두 개방 시켜 열어 놓은 상태에 따른 차이일 수 있다. 그러나 위 사진에 고창(高窓)[각주:6] 또는 교창(交窓)[각주:7]으로 보이는 부분(화살표 끝 지점)이 있고, 바닥 부분의 높이도 약간 다르기 때문에 어떻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창은 아래쪽의 문이나 창문과 목재로 분리되어 있기에 분합문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는 다른 칸처럼 보일 수 없다. 위 사진에서는 8번의 1칸만, 1번 사진에서는 7번과 8번의 2칸이 대청(마루) 아닌 방 구조일 가능성이 높다.[각주:8]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선화당(宣化堂)3번 이미지 -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선화당(宣化堂) 건물의 변화


위 이미지는 1번 사진, 2번 사진을 기반으로 19세기에 제작된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의 선화당 부분을 편집한 것이다.

왼쪽이 2번 사진(한성부 입주), 오른쪽이 1번 사진(진상평양대 주둔) 상태를 보여준다. 변경된 점은 아래와 같다.

1) 빨간색 화살표 및 초록색 화살표 : 돌계단이 이동되면서 건물의 중심이 3번 칸에서 4번 칸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4년에 고양군청(高陽郡廳)이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에 들어섰을 때도 (그 사이에 돌계단이 2개로 축소되고 건물 외형에 변형이 있었으나) 4번 칸이 중심이었다.

2) 건물 전면 마당의 바닥돌(디딤석)이 철거되었다.


하나 남는 의문점은 사진 촬영 시기에 관한 것이다. 2번 사진의 촬영 시기가 1번 사진보다 빠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경기감영도〉에서 보이는 돌계단의 위치 이동, 바닥돌의 철거 때문이다. 옮기고 철거했다가 다시 옮기고 깔았다고 추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2번 사진에서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은 촬영 추정 시점을 역행한다. 〈경기감영도〉 선화당 그림에는 1번 사진처럼 7번과 8번 칸이 방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 2번 사진 촬영 후 1번 사진 촬영 : 돌계단 위치 변경, 바닥돌 철거가 자연스러움 (7번 칸 용도 문제 발생)

2) 1번 사진 촬영 후 2번 사진 촬영 : 7번 칸이 대청으로 개조되었다고 이해 가능함 (돌계단 원위치 및 바닥돌 재설치 문제 발생)

2번 사진의 촬영 시점에 대한 의문은 '한성부 관청 편액 이야기 (클릭)' 문서에서 이마 제기한 바 있다. 1902년 5월경 진행되었던 당시 한성부(漢城府) 청사의 대대적인 정비와도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경기감영 자리에 들어섰던 한성부 청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 공간을 같이 점유했던 징상 평양진위대.[각주:9] 그 시기를 전후로 한 한성부 청사의 잦은 이전 시도와 감영 및 선화당 구역의 외형 변화. 그 관계를 보여주는 두 장의 사진. 전문가에 의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1. 조선시대에는 주로 행수관(行首官), 행수장무관(行首掌務官) 등으로 호칭. [본문으로]
  2. 중앙 관청의 장관인 판서(判書)는 정2품, 그 아래 차관급인 참판(參判)이 종2품이다. 선거로 뽑은 현재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도지사)도 차관급 예우를 받고 있다. 한성부 판윤이 정2품으로 장관급, 현재의 서울특별시장도 도지사보다는 한 등급 높은 장관급 예우이다. 즉, 조선시대와 현재의 주요 관직 등급이 비슷하다. [본문으로]
  3. 서울학연구소 번역, 숲과 나무, 1996년 초판 1쇄 271면. (이탈리아어 원서 미확인) [본문으로]
  4. 가석(嘉石)은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도록 하는 돌이다. 형조, 한성부, 감영 등의 관아에 두었다. [본문으로]
  5. 분합문(分閤門)은 접거나 펼 수 있는 문이다. 보통 상태에서는 창호지문 형태의 얇은 벽이 되고, 모두 접어서 위로 고정하면 공간이 개방된다. [본문으로]
  6. 창문 위에 낸 작은 창 [본문으로]
  7. 분합문 위에 낸 채광창 [본문으로]
  8. 분합문은 통상 대청 또는 대청과 방 사이에 설치한다. 전면에 분합문으로 보이는 창 4개가 있으므로 단순한 방이 아닌, 대청일 수 있지만, 역시 고창(高窓) 부분이 걸린다. [본문으로]
  9.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에 '서울 군부대'라고 설명된 사진이 실려 있는데, 경기감영 정문을 찍은 것이고 '漢城府(한성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각종 기록에도 이 시기에 한성부, 한성재판소, 진상 평양대가 경기감영(빈관) 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경기감영, 고양군청, 대한제국, 선화당, 진위대, 평양대,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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