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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탁지부)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 - 1편

※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안팎으로 조금은 바쁜 나날들이었습니다.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세요~!!

※ 작년 6월에 블로그 운영을 재개하고 지금까지 주로 올린 글의 주제가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시기의 관청(官廳, 관아) 청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에 다룰 '호조(戶曹)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는 그러한 여러 편의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호조 청사에 관한 글을 정리해 올려보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불로그 재개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짐과 기대가 컸던 것에 비해 내용이 많이 부실할 수 있지만, 하여간 2018년 여름에는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 본 글은 지난 2월에 올린 '광화문 앞 육조거리 6조 관청 청사 실측 평면도' 문서에서 추정한 조선왕조(朝鮮王朝) 호조(戶曹) 및 대한제국(大韓帝國) 탁지부(度支部) 청사의 실체에 관해 조심스럽게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읽기 편하시도록 글을 쓰다 보니, 초안에서 주(注, 주석, 각주, 후주)를 상당수 삭제하고 문단 단위로 글을 짧게 끊어 전체적인 내용을 구성하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더 세밀하게 기술했을 내용이 간략하게 처리되고, 일부 출처나 단어 풀이가 생략된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호조(탁지부) 청사 평면도1번 이미지 - 호조(탁지부) 청사 평면도 : 1908년(左) 1919년(右)


위 1번 이미지는 본래 조선시대 호조(戶曹) 관청이 있었던 지역의 1908년과 1919년 무렵 건물 배치도이다.

왼쪽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 오른쪽은 〈경성광화문통관유지일람도(京城光化門通官有地一覽圖)〉이다. 지도에 표기된 것처럼 1908년 당시에는 호조 청사 위치에 호조의 후신인 탁지부(度支部)가 자리해 있었다. 호조 관청이 1894년(고종31) 6월에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일환으로 탁지아문(度支衙問)이 되고, 이듬해 1895년 3월에 탁지부로 다시 개칭되었다.


호조 북쪽에는 원래 한성부(漢城府)가 있었으나, 1868년(고종4) 4월[각주:1] 삼군부(三軍府)에 청사를 내어주고 이전해 온 예조(禮曹)가 위치하다가 학무아문(學務衙門)을 거쳐 학부(學部)로 개편되어 존속하고 있었다.

호조 남쪽은 일반 민가(民家) 자리였는데 1870년(고종7) 5월에 (잠시 경희궁 앞의 훈련도감 신영 자리로 옮겨가 있었던) 한성부 청사가 육조거리 지역으로 돌아올 때 관아 부지로 편입(?)되어 한성부 청사가 신설되었다. 이후 1895년 5월에 한성부가 군기시(軍器寺) 자리로 이전하고, 이 자리에는 경무청(警務廳)이 들어섰다. 그리고 1900년 10월(윤8월)에 경무청이 경부(警部)로 승격되면서 농상공부(農商工部)와 처소를 맞교환하였고, 1907년 12월에 농상공부가 동현(銅峴,, 구리개)으로 이전해 가면서 빈터가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1908년 2월에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가 들어섰다.

호조 청사와 호조 북쪽, 남쪽 지역의 변천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호조 북쪽 : 한성부 - 1868년(1866년?) 예조 - 1894년 학무아문 - 1895년 학부
2) 호조 자리 : 호조 - 1894년 탁지아문 - 1895년 탁지부 - 1908년 법부(法部)
3) 호조 남쪽 : 민가 - 1870년 한성부 - 1895년 경무청 - 1900년 농상공부 - 1908년 법관양성소


오른쪽 지도는 호조(탁지부)의 터가 나중에 2개 필지로 분할되었음을 보여준다. 양쪽에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작은 골목길의 좌우 입구인데, 이처럼 도로를 내면서 그 위를 82번지로 하고, 아래를 기존 법관양성소 부지와 합쳐 84번지로 하여 지번을 나눴다.

예조(학부)가 있던 곳은 82번지이며, 82번지 오른쪽 아래에 작은 (민가) 필지로 83번지가 있었다. 이러한 호조 터 중앙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도로 개설과 필지(지번) 통폐합은 분할은 1912년에 제작된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에서 이미 나타난다.[각주:2]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호조 청사의 실체 추적에 들어간다. :)

탁지지(度支志) 본아전도(本衙全圖)2번 이미지 - 탁지지(度支志) 본아전도(本衙全圖), 1788년


위 2번 이미지는 호조 청사의 평면도를 추정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1788년(정조12) 간행 『탁지지(度支志)』 수록의 〈본아전도(本衙全圖)〉이다. 탁지(度支)는 호조 관청의 별칭이며, 본아전도의 본아(本衙)는 본 관청(관아)을 뜻한다.

호조의 장관(長官)인 정2품 호조판서(戶曹判書), 차관(次官)인 종2품 호조참판(戶曹參判), 그리고 오늘날의 차관보급에 상당하는 정3품 호조참의(戶曹參議)로 구성된 세 명의 당상관(堂上官)이 근무하는 당상대청(堂上大廳)[각주:3]이 보이고, 그 아래 4시 방향에 정5품(正郞), 정6품 좌랑(佐郞) 각 세 명으로 이루어진 여섯 낭청이 근무하는 낭청대청(郞廳大廳)[각주:4]이 있다.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가느다란 담장 부분을 기억해 두자.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호조(戶曹)3번 이미지 -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호조(戶曹), 1839년


위 3번 이미지는 1839년(헌종5)[각주:5] 무렵에 그려진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의 호조 청사 채색 그림이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각주:6]라는 조선 후기 인물이 관직 생활을 하며 거쳐 갔던 여러 관청의 도면을 본인이 소장 차원에서 그려둔 화첩이다.

앞에서 살펴본 2번 이미지의 〈본아전도〉와 거의 같은 그림으로, 본아전도를 기반으로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림에 주요 건물과 문의 명칭이 표기된 것이 본아전도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당상삼문(堂上三門), 중대문(中大門), 연못[池] 등 백색 테두리의 글자는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을 토대로 필자가 임의 기재한 것이다.

『탁지지』 관사 항목의 기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관사(館舍)

본아(本衙, 호조)는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경복궁 광화문의 왼쪽이며, 북쪽에 한성부[京兆], 남쪽에 고예조동(古禮曹洞), 동쪽에 태복천(太僕川, 중학천)이 있고, 서쪽의 대로(大路, 육조대로) 문밖에 우물이 있다[門外有井].

당상청사(堂上廳事) 12칸[間]. 4면에 퇴가 있고[四面退]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좌우에 아방(兒房) 각 4칸이 있다. ...(중략)...

낭관청사(郎官廳事) 4칸. 앞에 퇴가 있고[前退]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입직방(入直房) 4칸. 앞에 퇴가 있다[前退]. 우방(右房) 2칸, 다주(茶廚, 부엌) 1칸, 마구간[馬廐] 1칸. ...(중략)...

고사(庫舍) 127칸. 판적사고(版籍司庫) 52간, 판별고(版別庫) 44간, 세폐고(歲幣庫) 9간, 잡물고(雜物庫) 11간, 은색고(銀色庫) 4간, 별례방고(別例房庫) 7간.

연정(蓮亭) 3칸. ...(중략)...

연지(蓮池). 동서(東西) 10보, 남북(南北) 13보. 당상청사 동쪽에 있다[在堂上廳事東].

주학청사(籌學廳事, 산학청사) 6칸. 입직방(入直房) 1칸반, 청(廳, 마루) 3칸, 행각(行閣) 20칸, 고사(庫舍) 8칸, 중문(中門) 1칸.

서리장방(書吏長房). 도장방청(都長房廳) 6칸, 방(房) 2간, 판적사청(版籍司廳) 3간, 방 4간, 문서고(文書庫) 3간, 판별방청(版別房廳) 3칸, 방 4칸, 문서고 5칸, 전례방청(前例房廳) 4간, 방 2칸, 문서고 2칸, 별례방청(別例房廳) 3칸, 방 2칸, 문서고 5칸, 은색방(銀色房) 1간, 청(廳) 1간, 요록색방(料祿色房) 1간, 청 1칸, 잡물색방(雜物色房) 1칸, 청 1칸, 세폐색방(歲幣色房) 2칸, 청 2칸, 응판색방(應辦色房) 2칸, 청 1칸, 별영방(別營房) 1칸, 청 1칸, 별고방(別庫房) 1칸.

서사방(書寫房) 1칸, 청(廳) 1칸.

고직상직방(庫直上直房) 2칸, 청(廳) 2칸.

사령방(使令房) 4칸.

당상삼문(堂上三門, 내삼문), 중문(中門) 1칸, 남협문(南挾門) 1칸, 북협문(北挾門) 1칸. 중대문(中大門) 1칸, 협문(挾門) 1칸.

대문(大門) 1칸. 편액은 지부아문이다[扁以地部衙門]. 후문(後門) 1칸. 편액은 탁지남문이다[扁以度支南門].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및 『탁지지』의 〈본아전도〉에 수록된 호조 청사 그림의 묘사와 관사(館舍) 항목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건물 배치도)4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추정


위 4번 이미지는 1번의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탁지부(호조) 부분을 기초로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호조 청사의 건물 배치도를 만들어 본 것이다.

『탁지지』에 실린 관청 그림과 기록을 참고하였는데,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건물이 〈본아전도〉의 그림과 (두드러지게) 맞지 않는다. 후문(탁지남문)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건물 대신에 기역(ㄱ)자 형태의 대형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1908년(융희2) 1월경 실측된 평면도에서 본래의 호조 청사와 크게 다른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대적인 건물 철거, 신축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탁지부(度支部) 청사 실측도면5번 이미지 - 탁지부(度支部, 호조) 청사 실측도면, 1905년 8월


위 5번 이미지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의 측량기술자(測量技術者) 양성 과정에 있던 토지측량강습생(土地測量講習生)이 1905년(광무9) 8월경에 측량한 탁지부 청사의 실측도면이다.[각주:7]

왼쪽 도면은 전양지아문양무위원(前量地衙門量務委員) 김한표(金漢杓), 탁지부기수(度支部技手) 이원기(李源綺), 전탁지부양지국기수(前度支部量地局技手) 조명호(趙明鎬) 등 3인, 오른쪽 도면은 탁지부기수 강대성(姜大成), 前탁지부기수 6품 김윤하(金潤夏) 2인이 실측하였다. 이들 5인은 모두 탁지부 사세국(司稅局) 양지과(量地課)의 토지측량강습생 양성 과정에 있었던 삼각측량법(三角測量法) 및 쇄부측량법(碎部測量法) 양성강습 수료자 신분이었다.

이 두 장의 실측도면 중, 왼쪽 도면에서 4번 이미지의 파란색 화살표 부분과 다른 형태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띈다.

탁지부(度支部) 청사 평면도 추정본6번 이미지 - 탁지부(度支部) 청사 평면도 추정, 1905년 8월


위 6번 이미지는 5번에서 살펴본 두 장의 도면을 합친 것이다. 5번의 왼쪽 도면은 연못 우측 부분(서무과, 문서과)이 생략되어 있고, 오른쪽 도면은 좌측(대문)과 하부(교환소, 후문 등)가 생략되어 있었다.

중앙의 대청(大廳)을 중심으로 왼쪽에 고문실(顧問室), 오른쪽에 연못[池)이 있고, 연못 건너로 서무과(庶務課), 문서과(文書課), 대청 아래에 금고(金庫), 출납국(出納局), 출납국 아래에 교환소(交換所), 교환소 왼쪽에 작은 연못[池]이 있다.[각주:8]


분석해 보면, 1905년 8월 도면에서는 파란색 화살표의 건물이 현존하고 있었는데, 1908년 1월 도면(4번 이미지)에서는 기역(ㄱ)자 건물로 변경되었다. ㄱ자 형태의 건물 재건축 부분은 다음 편에서 고찰하기로 하고, 일단 호조 청사의 본래 배치가 어떠했는지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노란색 테두리로 표시된 고문실(顧問室)에 눈에 띈다. 4번 이미지에서는 정체불명의 건물이었는데, 건물 용도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된 두 개의 긴 담장도 특이하다. 탁지부(호조) 청사의 일부가 다른 용도로 활용되면서 탁지부 경내가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 설치했던 담장으로 보인다.

탁지부 재정고문 그림엽서7번 이미지 - 탁지부 재정고문 그림엽서, 1907년


위 7번 이미지는 탁지부의 재정고문(財政顧問)이었던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목하전종태랑, 메가타 슈타로)의 그림엽서[繪葉書]이다.

러일전쟁(露日戰爭)의 여파로 1904년(광무8) 8월 22일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각주:9]이 체결되면서 일제(日帝)의 고문정치(顧問政治)가 시작되었으며, 1904년 10월에 일본 대장성(大藏省)의 주세국장(主稅局長) 메가타 다네타로가 대한제국 탁지부의 재정고문으로 취임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07년 10월에 발행한 엽서이다.

엽서 오른쪽에 재정고문실(財政顧問室)[각주:10] 사진이 있는데, 고문실 우측에 탁지부 대청(당상청사)의 일부가 보인다. 이 탁지부 대청은 '병조 청사 당상대청 촬영 사진' 편에서 한 차례 살펴본 적이 있다.

엽서를 보면 일본이 파견한 재정고문이 탁지부 대신(大臣)이 근무하는 대청 바로 앞에 (사진상으로 볼 때) 조적조(벽돌집)로 추정되는 재정고문실 건물을 마련하고 업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잘 보면 고문실과 대청을 직접 연결하는 난간을 갖춘 통로도 설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내부(內部) 및 군부(軍部) 청사 평면도8번 이미지 - 대한제국 내부(內部) 및 군부(軍部) 청사 평면도, 1908년


위 8번 이미지는 내부(內部), 군부(軍部) 청사의 도면이다. 탁지부 고문실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 평면이 보인다.

내부는 원래 의정부(議政府) 청사였다가 1895년(고종32)경부터 내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군부는 기존의 병조(兵曹) 청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내부고문실(內部顧問室)이 1907년(융희1) 8월에 폐지되어 내부경무고문실(內部警務顧問室)로 개편되었다가 곧 헌병사령부(憲兵司令部) 청사{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 터}로 옮겨갔기 때문에 실측평면도가 그려진 1908년 1~2월 시점에는 (실제 고문실 건물이었다면) 다른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군부고문실(軍部顧問室)로 추정되는 건물은 기단부가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내부, 군부 등의 고문실에 대한 사항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각주:11]


- 본 1편의 요약
1) 호조 청사 평면도 추정 : 탁지지 관사 항목 기준 [4번 이미지]
2) 호조 남쪽 건물의 원형 추적 : 후문 왼쪽의 건물 평면, 작은 연못 위치 등 [6번 이미지]
2) 호조 대청 앞 건물의 용도 확인 : 탁지부 재정고문실 사진 [7번 이미지]


※ 다음에 올릴 2편으로 이어집니다.



  1. 또는 1866년(고종3) 5월. [본문으로]
  2. 1910년 10월경의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광화문분실(光化門分室) 설치 시기를 전후로 필지 분할을 추정한다. [본문으로]
  3.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에는 당상청사(堂上廳事)로 기록되어 있다. 당상청(堂上廳), 당상청사(堂上廳舍)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에는 낭청청사(郞廳廳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낭관청(郞廳廳), 낭청청사(郞廳廳舍), 낭관청사(郞官廳舍)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책의 주인공인 한필교가 호조좌랑으로 부임한 연도가 1839년 6월 30일이기 때문이다. 그림 오른쪽 위에 부임 관직과 일자가 적혀 있는데, 좌랑과 참의 부임 두 차례의 필적이 서로 다르다. 좌랑으로 부임한 직후 호조 청사의 그림을 그렸고, 1876년 3월에 다시 호조참의가 되어 부임했을 때 추기한 때문으로 보인다. '평성을 거쳐 온 여러 관아의 그림'이라는 뜻의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자체는 한필교의 관직 경력이 끝나는 1878년을 편찬 연도로 볼 수 있다. 한필교는 화첩의 서문을 1840년에 썼다. [본문으로]
  6. 본관 청주(淸州), 자 보경(輔卿), 호 하석(霞石). [본문으로]
  7. 『한국근대사료집성(韓國近代史資料集成)』 제7권 한일경제관계(韓日經濟關係) 2편 수록 자료. [본문으로]
  8.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도면을 확인했는데 책에 수록된 이미지의 해상도가 높지 않아서 서무과, 문서과 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본문으로]
  9. 협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關한 協定書)〉 [본문으로]
  10. 정부재정고문본부(政府財政顧問本部) 건물 [본문으로]
  11. 외부고문실 건축 도면인 외부고문실(外部顧問室) 건축도형(建築圖形)이 현존한다. [본문으로]
고문실, 관아, 관청, 대한제국, 탁지부,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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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거리 의정부(議政府) 청사의 건물 배치 이야기


2016년에 광화문 육조거리(세종대로) 동쪽 상단에 있었던 의정부(議政府) 청사의 배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아래 사진은 그해 3월 초에 확인한 것으로, 의정부 본청의 건물인 정본당(政本堂) 사진이다. 출전은 콘스탄스 제인 도로시 테일러(Constance Jane Dorothy Tayler)[각주:1]의 1904년 간행 저작물 『Koreans at home; the impressions of a Scotswoman』.

의정부 본청 건물 정본당(政本堂)의정부 정본당(政本堂) - War Office, Koreans at Home (1904)


2016년 8월경 의정부 발굴 착수에 관한 기사가 쏟아질 때 기사에 등장했던 자료이기에 의정부 청사에 관심을 가진 사림이라면 이미 익숙한 사진이다. 『Koreans at home』의 16면에 'WAR OFFICE, SEOUL'이라고 실려 있지만, 군권을 담당하던 군부(軍部), 병조(兵曹), 원수부(元帥府), 예전 삼군부(三軍府) 등의 건물이 아닌, 의정부의 중심 건물인 정본당이다.

정본당의 또 다른 정면 촬영 사진인 '경기관찰부(京畿觀察府) 선화당(宣化堂)'[각주:2] 이미지와 비교하면 지붕의 서까래 숫자와 기왓골 수가 정확히 일치하며, 뜰(마당)에 심어진 묘목이 약 20~30년간 자란 모습도 서로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바깥 기둥에 벽을 올리고 유리창호를 덧붙인 상태에서 찍은 후대의 사진이 아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추후 정본당 복원시 결정적이면서도 거의 유일한 핵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의정부 청사 배치 평면도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1908.01) - 조선시대 의정부 터 부분


위 이미지는 1908년 1월경 제작된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의 의정부 청사 부분이다. 도면 제작 당시에는 문관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吏曹) 관청의 후신인 내부(內部) 청사였다.

의정부 발굴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 의정부 청사 배치에 관한 내용도 기사 본문에 실렸는데, 위 이미지의 '추정A'와 같은 형태의 건물 배치를 주장(?)하였다. 반면, 같은 시기에 의정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필자는 '추정B' 형태로 결론을 내렸었다.


의정부 청사의 주요 건물은 정본당, 협선당, 석화당이며, 각각의 용도는 다음과 같다.

정본당(政本堂) :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공간
협선당(協宣堂) : 좌찬성(左贊成), 우찬성(右贊成), 좌참찬(左參贊), 우참찬(右參贊) 공간
석화당(石畫堂) : 여러 재신[諸宰]의 공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정1품 관직이며, 영의정은 조선시대에 가장 높은 관직으로 흔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표현된다. 오늘날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좌찬성, 우찬성은 종1품(부총리급), 좌참찬, 우참찬은 정2품(장관급)으로, 이들 7개 직책은 의정부에 정식으로 설치된 관직이다. '제재(諸宰)', 즉 여러 재신(宰臣)에서 '재(宰)'는 통상 종2품 참판급(차관급) 이상의 신하를 의미한다. 1865년(고종2)에 비변사(備邊司)를 흡수 통합한 의정부에서 겸직으로 근무하던 고위 관료(종2품 또는 최소 정3품 당상관급 이상)[각주:3]를 위한 건물이 석화당이라고 보면 된다.


정본당은 중심 건물이었으므로 제일 위 사진에서처럼 가운데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협선당, 석화당의 배치가 된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협선당, 석화당의 위치를 고증할 수 하나의 근거가 바로 석화당을 건축할 때 남겨진 기록인 「석화당기(石畫堂記)」의 본문 중, '命重修議政府左建一堂名曰石畫諸宰之所'이라는 내용이다. 대략 풀어서 설명하면, '(주상전하께서) 명하여 의정부를 중수하고 좌측에 하나의 당(堂)을 세워 이름을 석화(石畫)라 하여 여러 재신의 처소로 삼았다' 정도가 된다. '의정부좌건(議政府左建)', '좌건일당(左建一堂)'이 바로 석화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어떤 건물의 '왼쪽[左]'이라고 하면 건물 앞(대문)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왼쪽을 생각하기 쉽지만[위 이미지 '추정B'의 파란색 화살표와 글자 참고],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건물에 앉아서 건물 앞쪽(마당)을 바라볼 때의 왼쪽이 바로 좌(左)가 된다[위 이미지 '추정B'의 빨간색 화살표와 글자 참고].

정본당을 중심으로 하는 세 건물이 정확하게 서향이 아니라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이 각각 (약간이지만) 정본당의 서쪽과 동쪽에 위치하는 것도 좌건(左建)을 풀이하는데 약간 참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학계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북쪽에서부터 석화당-정본당-협선당이라는 '추정A' 형태를 의정부 건물 배치라고 결론하고 있는데, 협선당-정본당-석화당의 '추정B' 체계가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2016년 당시 필자 생각이었다. 위 『석화당기』 기록 이외에 다른 문헌이나 발굴조사 결과 등과 같은 어떤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서 세 건물의 배치를 '추정A'라고 결론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좌건(左建) 해석에 따라 좌우되는 위 내용과 더불어, 의정부 정본당, 협선당, 석화당 세 건물 배치에 관해 추가로 고려해야 할 점은 아래와 같다.

1) 육조거리(세종로) 동편의 다른 관청, 즉 이조,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의 경우에는 중심 건물(당상대청) 남쪽에 보조 건물(낭청대청)이 있었으므로, 의정부도 중심 건물(정본당) 남쪽에 제1보조 건물(협선당)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제2보조 건물(석화당)은 북쪽이다. 육조거리 서편의 삼군부(三軍府),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역시 중심 건물 남쪽에 보조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2) 각종 도면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본당의 남쪽 건물 면적이 북쪽 건물보다 약간 넓었다. 협선당이 석화당보다 지체 높은 건물이었으므로, 남측에 있던 건물이 협선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협선당은 의정부 고위 관원 4명의 공간이고, 석화당은 이보다 많은 숫자의 여러 신하(20명 내외)가 필요에 따라 근무하는 곳이었으므로 요구 면적 자체는 석화당이 더 넓었을 수 있다. 즉, 건물 등급과 면적을 일치시킨다면 남쪽이 협선당이고, 건물 용도를 생각한다면 남쪽이 석화당이다.

3) 위 사진 '추정A'에서 빨간색 선으로 표시된 부분을 온전히 장대석 다층기단의 1층(하층 1단) 기단으로 간주한다면, 정본당 남쪽 건물 전면의 기단부 면적이 북쪽 건물의 앞의 기단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넓다. 남쪽 건물 앞의 월랑(月廊, 건물 앞 내삼문 부분의 L자 행랑)이 백관(百官)의 서계(誓戒)가 진행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비슷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공간상의 필요에 따라 기단부를 넓게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관원이 상주하는 건물(의정부 본직 관원의 협선당)이 그러한 행사 진행과 맞지 않다면 남쪽 건물이 석화당(겸직 관원들인 제재의 공간)이고, 건물 지체에 비례하여 각각의 기단부를 조성하였다면 남쪽 건물이 협선당일 것이다.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1580년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 - 일본 경도(京都) 양명문고(陽明文庫)


위 그림은 1580년(선조13)는 과거 시험의 급제자를 축하는 연회 모습을 그린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 科擧恩榮宴圖)〉이다. 알성시(謁聖試)는 국왕이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에 제례를 지낸 후에 시행하는 특별 과거시험이며, 이 시험에 합격한 급제자 50명의 축하 잔치를 당시 의정부 청사에서 열어 주었다.

건물 정면의 기단 위 동쪽에 문과(文科) 급제자 12명, 서쪽에 무과(武科) 급제자 38명이 각각의 급제 등위대로 앉아 있다. 중앙에 문과 갑과(甲科) 제1인, 무과 갑과 제1인 각 1명, 그리고 동쪽에 문과 을과(乙科) 3인, 병과(丙科) 8인, 서쪽에 무과 을과 6인, 병과 31인이 배치된 것이다. 본래 기단은 빨간색 화살표와 선으로 표시한 부분(2번 이미지의 추정A에도 표시)인데, 무과 급제자 숫자가 많아서 공간 제약상 모두 앉을 수 없었으므로 서쪽에만 받침대(노란색 화살표 부분)를 설치해서 기단부를 대문 방향으로 임시 확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문과 급제자는 문관(文官)이 되고, 무과 급제자는 무관(武官)이 된다. 문관은 문반(文班), 무관은 무반(武班)이라고 하며, 이 둘을 아울러 양반(兩班)이라고 한다. 또 문관은 조회(朝會) 자리에서 동쪽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동반(東班), 무관을 반대로 서반(西班)이라고도 하였다. 이 알성시의 은영연에서도 문과 급제자가 동쪽에, 무과 급제자가 서쪽에 앉아 있었는데, 의정부 건물 대청에서 앉아 정문을 바라볼 때의 좌우(동서) 위치에 들어맞는다.


중앙의 의정부 대청(大廳) 왼쪽에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눈에 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행각(行閣), 행랑(行廊)처럼 좁게 묘사하였지만, 건물 앞에 계단(녹색 화살표)이 보이므로 번듯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생략된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청 오른쪽에는 건물 묘사가 없다.

1592년(선조25) 4월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대부분의 궁궐, 관청이 손실되었는데, 의정부 청사도 이때 피해를 당하여 그림 중앙의 의정(議政)이 일하던 대청이 불타 사라지고 찬성(贊成)이 근무하던 건물만 남았다. 그래서 그 청사를 의정부 대신(大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처소로 삼았다. 위 그림처럼 의정부의 중심 건물이 본래 두 채였다면, 즉 남쪽에 생략된 건물이 없었다면 전란 후에 남은 하나는 파란색 화살표 건물일 것이다.


1865년(고종2)에 의정부 청사를 중건할 때 각 건물의 건축과 관련한 기록이 『관각류집(館閣類集)』에 남아 있다. 앞서 살펴본 「석화당기」도 『관각류집』에 실린 기문이다. 의정부 건물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정본당중건기(政本堂重建記)」, 「정본당기(政本堂記)」, 「정본당상량문(政本堂上樑文)」
2) 「협선당중수기(協宣堂重修記)」
3) 「좌성당기(佐成堂記)」, 「좌성당상량문(佐成堂上樑文)」
4) 「숙야당기(夙夜堂記)」
5) 「석화당기(石畫堂記)」

정본당은 중건(重建), 협선당은 중수(重修)로 구분된다. 중건은 예전 건물의 자리에 다시 짓는 것 또는 원래 건물을 해체 후 재건하는 것이고, 중수는 이미 있는 건물을 주요 구조부는 그대로 두고 일부분만 고쳐 짓는 것(=대규모 수리)이다.

관련 기록[각주:4]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에 남아 있던 건물은 서벽당(西壁堂)이다. 동벽(東壁), 서벽(西壁)은 관직 서열에 따라 관원들이 앉아 있는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좌석의 동쪽에 앉는 관직을 동벽, 서쪽에 앉는 관직을 서벽이라 하였다. 의정부의 동벽은 종1품 좌찬성, 우찬성이고, 셔벽은 정2품 좌참찬, 우참찬이다. 가운데 앉는 주벽(主壁)은 정1품 의정(議政).

협선당은 서벽당(西壁堂)을 중수한 것인데, 서벽이 비록 같은 방(房) 안에서 서열대로 앉는 위치를 말하는 것이지만, 건물 자체도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 있던 본청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벽당이라 이름을 붙였을 약간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협선당(서벽당)이 정본당 북쪽(우측)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남쪽 건물이 있었는데 그림에서 생략된 것이라면 그 이름은 동벽당일까?)

의정부 대청(大廳) 외형 추정의정부 대청(大廳) - 협선당, 석화당의 형태 추정


의정부 청사의 배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확인하던 중,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던 것이 정본당 좌우 건물 2채의 형태였다.

위 이미지에서 1)번은 전통적인 형태의 한옥 건물이다. 용마루를 갖춘 팔작지붕(합각지붕)으로 가장 권위(지체, 위계)가 높은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육조거리 청사의 주요 건물(당상대청, 낭청대청)은 모두 팔작지붕 형태였다.

2)번은 1890년대에 의정부 일대를 촬영한 사진[각주:5]에서 정본당 좌우 건물에서만 보이는 형태이다. 당시 의정부를 원거리에서 촬영한 것밖에 없기에 해상도가 매우 낮아서 정확한 외형을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1)번의 팔작지붕과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보인다. 1915년 촬영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사진에도 이러한 지붕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는데, 본 문서 첫번 째 사진과 대조하여 건물 원형에 대한 면밀한 추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협선당과 석화당의 정면을 7칸[間] 규모로 추정하고 있지만, 사진 안에 표기한 빨간색 세로줄 숫자 살펴보면 6칸 규모로 보인다. 측면은 3~4칸일 것이다(3칸 유력).

3)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중 '조선군사령부 부속청사 경기도 순사교습소' 사진 중 하나인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 대청(大廳) 이미지를 참고하여 그려본 것이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그것으로, 일종의 가적지붕, 가첨지붕과 같은 형태로 양쪽 지붕에 처마 같은 것을 덧댄 모습이다. 중앙의 정본당과 이어지는 복도각(複道閣)을 위한 추가 구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여러 사진들로 인해 2)번과 비교하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의정부 정본당은 1)번 형태가 확실하고, 협선당과 석화당은 2)번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2)번 형태가 일반적인 관아 건축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고,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 시기에 주요 관청의 건물 외형이 유리창호 방식으로 변형되기 이전인 1890년대에 촬영된 사진이기에 정본당 복원은 충분히 가능할지 몰라도 협선당과 석화당 복원은 (건물 순서는 차치하고서라도) 현재로서는 그 외형, 규모, 구조와 같은 실체를 확정하기 어려운 이상 극도로 신중하게 추진 여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미군정 시기에 훼철된 정본당과 그 남측 건물(석화당?)에 대한 철거 기록(철거된 건물의 이전, 자재 활용, 관련 도면 등)이 미군 당국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서 의정부 터 발굴조사에 대한 공식 결과 보고서가 나왔으면!



※ 가볍게 쓰기 위해 비교적 간단한 주제를 골랐지만, 역시나 글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주석도 몇 개 첨가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연습이 필요하네요. 다음에는 더욱 간결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참고 자료 링크 : 사이버 조선왕조 의정부(議政府) 홈페이지 - 의정부 안내 화면


2019.08.25 - 처음 등록
2019.09.03 - 2번 이미지 하단의 추가 고려 내용 추가 (추가로 고려해야 할 점 세 가지)



  1. 콘스탄스 J. D. 쿨슨(Constance J. D. Coulson)의 결혼 전 이름 [본문으로]
  2. 193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 발행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 72면 수록 사진 [본문으로]
  3.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판서와 3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대장, 총융사, 4도유수, 대제학, 호위대장, 좌우포장 등 시기에 따라 20명 내외 (정원은 없음) [본문으로]
  4. 「협선당중수기(協宣堂重修記)」, 「임총부기회(臨總府記懷)」, 「어제중서당술성사(御製中書堂述盛事)」,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경도(京都) 항목 등 [본문으로]
  5.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Isabella Bird Bishop (1987) 및 『서울의 추억(Souvenir de Séoul, Corée : 1900)』, Maurice Courant (1900) [본문으로]
석화당, 육조거리, 의정부, 정본당, 협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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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처럼 | 2019.09.28 10:14 | 수정/삭제 | 쪽글 달기
귀한 글 감사합니다. 찾는 자료가 있어 검색하다 들어와 읽게 되었어요. 의정부만큼은 정궁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육조등과 함께 외부에 있었군요! 16년에 의정부 청사 터가 발굴되었다니요!! 우와~~역시 서울은 특히 광화문 일대는 역사의 땅이네요!! 보존 발굴과 복원이 순조롭게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잘 진행되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귀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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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장성, 예비역 장군이라는 표현

대한민국 육군 소장(少將) 녹색 지휘관 견장대한민국 육군 소장(少將) 계급장 - 녹색(지휘관) 견장


신문, 방송 등을 보면 '예비역(豫備役) 장성(將星)'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예비역 장성 모임 OO회, 예비역 장성 초청 토론회, 예비역 장군 인터뷰 등등. 그리고 재향군인회 이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계급까지 붙여 사용한다. 예비역 소장, 예비역 대장과 같이.

그런데 국군(國軍) 군인사법(軍人事法)과 병역법(兵役法)에서 규정하고 있는 예비역과 퇴역의 차이점은 아래와 같다.

--------------------------------------------------

군인사법
[시행 2019. 07. 16.] [법률 제16224호, 2019. 01. 15., 일부개정]

제41조(퇴역)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장교, 준사관 및 부사관은 퇴역(退役)된다. 다만, 제4호에 해당하는 여군이 퇴역을 원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예비역에 지원할 수 있다.
1. 20년 이상 현역에 복무하고 퇴역을 원하는 사람
2. 연령정년에 도달한 사람
3. 전상ㆍ공상으로 인하여 군에 복무할 수 없는 사람
4. 여군으로서 현역을 마친 사람
[전문개정 2011. 05. 24.]

제42조(예비역 편입) 현역에서 전역되는 사람으로서 퇴역되지 아니하는 사람은 예비역에 편입한다.
[전문개정 2011. 05. 24.]

--------------------------------------------------

병역법
[시행 2017. 8. 9.] [법률 제14555호, 2017. 2. 8., 일부개정]

제72조(병역의무의 종료)
① 현역·예비역·보충역의 병과 전시근로역의 병역의무는 40세까지로 하고, 예비역·보충역의 장교·준사관 및 부사관의 병역의무는 「군인사법」에 따른 그 계급의 연령정년이 되는 해까지로 한다. <개정 2016. 5. 29.>
② 제1항에 따른 병역의무기간을 마치면 장교·준사관 및 부사관의 경우는 퇴역이 되고, 병의 경우는 면역(免役)이 된다.
[전문개정 2009. 6. 9.]

--------------------------------------------------


즉, 군인 신분이 종료될 때의 선택지는 '예비역 편입' 또는 '퇴역(면역)'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예비역(豫備役)은 현역(現役)을 마친 군인에게 일정한 기간 부여되는 병역(兵役)이다. 예비역에 편입되면 전쟁이 발발하거나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또는 특별한 훈련 기간에 군부대에 다시 소집될 수 있다. 정기적으로 소집 훈련을 받기도 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비군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퇴역(退役)은 문자 그대로 군역(軍, 군 복무)에서 완전히 물러나는[退] 것이다. 병사의 퇴역은 면역(免役)이고 하며, 퇴역 군인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다시 군대에 소집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고,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이 되면 관련 절차에 따라 다시 무기를 들게 될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 병사는 퇴역이 없다. 전역(轉役), 즉 현역을 마치면 역종(種)이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전환(煥)되는 것만 있을 뿐이다.

역종은 병역의 종류를 뜻하며, 크게 현역(現役), 예비역(豫備役), 보충역(補充役), 병역준비역(兵役準備役), 전시근로역(戰時勤勞役) 등이 있다.[각주:1] 예전에는 국민역(國民役), 후비역(後備役), 호국병역(護國兵役) 같은 것도 있었다.

1) 현역 : 현역 복무자 (장교, 준사관, 부사관, 징집 또는 자원 입영 병)
2) 예비역 : 현역을 마친 자 (군인사법과 병역법에 따른 예비역 편입자)
3) 보충역 : 현역 자원 중에서 병력 수급 사정에 따라 현역병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은 사람
4) 병역준비역 : 징병검사 대기자, 현역 대상 중 입대 대기자 (종전의 제1국민역)
6) 전시근로역 : 현역, 보충역을 수행하기 어려우나 전시 근로소집(전쟁 상황에서의 군사지원 업무)은 가능한 사람 (종전의 제2국민역)

후비역은 예비역을 마친 사람에게 다시 주어지는 2차 예비역(제2예비역)과 같은 것이었고, 호국병역은 출퇴근하는 병사인 호국병을 말한다. 즉, 방위병(防衛兵)으로 널리 알려진 보충역(제1예비역)의 전신이 호국병역이다. 참고로, 예비군 읍면동대에서 근무하는 상근예비역은 현역이 아닌, 예비역 병사이다.[각주:2]


각설하고, 위 군인사법 제41조(퇴역)의 2호에서 '연령정년에 도달한 사람'은 퇴역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전역(현역 복무를 마침) → 퇴역 또는 예비역 편입 → 예비역 편입 후 퇴역 (연령정년 도달시)


직업군인의 정년은 연령정년, 근속정년, 계급정년의 3가지로 되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먼저 도달하면 정년이 다한 것으로 보고 (군인사법 제41조 2항에 따라) 퇴역시킨다.

군인사법 제8조의 정년 규정은 아래와 같다.

--------------------------------------------------

제8조(현역정년) ① 현역에서 복무할 정년(停年)은 다음 각 호와 같다. 다만, 전시ㆍ사변 등의 국가비상시에는 예외로 한다.

1. 연령정년
원수: 종신(終身)
대장: 63세
중장: 61세
소장: 59세
준장: 58세
대령: 56세
중령: 53세
소령: 45세
대위, 중위, 소위: 43세
준위: 55세
원사: 55세
상사: 53세
중사: 45세
하사: 40세

2. 근속정년
대령: 35년
중령: 32년
소령: 24년
대위, 중위, 소위: 15년
준위: 32년

3. 계급정년
중장: 4년
소장: 6년
준장: 6년

... (중략) ...

[전문개정 2011. 05. 24.]

--------------------------------------------------


연령정년은 흔히 말하는 직장에서의 정년이다. 즉, 나이로 끊는 것이다. 피라미드 구조를 유지해야 하는 군대의 특성상 계급에 따라 연령 정년이 철저하게 차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속정년은 대령 이하의 장교와 준사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령 35년은 대령 계급으로 있는 사람은 임관 이후부터 계산해서 35년이 지났으면 (아직 연령정년인 만56세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퇴역 또는 전역(예비역 편입)시킨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장교가 근속정년이 되기 전에 연령정년에 먼저 도달하기 때문에 거의 적용할 일이 없는 조항이다.

계급정년은 중장, 소장, 준장에게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중장 계급으로 있으면서 4년 이내에 상위 계급인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면 (역시 연령정년인 만61세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퇴역 또는 전역(예비역 편입)시킨다는 뜻이다. 본인보다 늦게 임관한 후배가 먼저 진급하거나 자신보다 직책으로 부임하면 알아서 전역신청서를 내는 것이 일종의 관례이기 때문에 계급정년이 적용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직업군인은 연령정년과 근속정년(대령 이하 장교), 계급정년(준장 이상 장교)을 동시에 적용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령정년, 계급정년 적용에는 몇 가지 예외 규정이 있으며, 군인 외에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등의 조직도 일부 계급에서 계급정년 제도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예비역 장성, 예비역 장군이라는 표현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상당수 직업군인들이 연령정년에 도달할 때까지 복무하다 비로소 전역하는 것이 현실이고, 본인의 뜻과 달리 근속정년, 계급정년 에 먼저 걸리거나 부득불 중간에 전역신청서를 내더라도 그 시점은 연령정년을 불과 몇 년 앞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비역에 편입되어 예비역 대장, 예비역 중장, 예비역 소장, 예비역 준장과 같은 '예비역 장성'이 되더라도 현실적으로 1~3년 정도만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연령정년에 도달하여 퇴역된다. 따라서 더는 예비역 장성이라 자칭 혹은 타칭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예비역 장성', '예비역 장성단'이란, 한때 잠시 예비역 장성이었던 사람 또는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부분의 경우는 '퇴역 장성'이 맞는 말이니까. 출생년도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진짜 예비역 장성도 몇 명 있겠지만.


이번에도 간단한 내용을 참 길게 썼다.



  1. 병역법 제5조(2016년 5월 29일 개정)에 따른 병역의 종류 기준 [본문으로]
  2. 신병훈련소에서의 기초군사교육 기간(5주)에는 현역 신분으로 복무 [본문으로]
군인사법, 병역법, 예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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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 추천합니다. 전체적으로..
andrew - 10.02
귀한 글 감사합니다. 찾는 자..
혜성처럼 - 09.28
보다 알찬 글로 보답하겠습니..
도필리 - 2018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스니쯜 - 2018
근래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gildong7 - 2009
려 명예교수가 두음법칙 폐지..
도필리 - 2008
여씨가 아니라 려씨인가요.
천어 - 2008
오늘하루종일 육조판서 생각..
벽계수 - 2008
방문과 리플, 2중으로 감사드..
도필리 - 2008
그래도 궁굼한 것은 어쩔 수..
도필리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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