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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팔도 감영(監營) 및 한성부의 편액(현판) 이야기

※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지역에서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가 근무하던 관청인 감영(監營) 시설을 복원하거나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여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의 전라감영이 얼마 전에 복원되었고, 공주(公州)와 원주(原州)에서 충청감영과 강원감영 구역에 대한 정비를 본격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에 경상감영이 있던 상주(尙州)는 감영 건물을 복원해 공원을 조정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가장 격이 높았던 관아 건물(랜드마크)을 내세워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거나 자치단체장이 스스로 치적을 쌓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물론 가장 큰 목표는 관광객 유치겠죠. 이번 글은 이러한 감영 건물에 걸려 있었던 편액(현판) 글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작합니다.



현재의 광역자치단체장인 도지사(道知事)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관원인 종2품 관찰사(觀察使)가 근무하던 청사를 감영(監營)이라 하였다. 관찰사의 별칭이 감사(監使)였고, '영(營)'은 '영문(營門)' 또는 '영아(營衙)', 즉 군영(軍營)을 의미하는데, 관찰사가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예겸(例兼)[각주:1]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마절도사 군영은 병마영(兵馬營), 병영(兵營), 수군절도사 군영은 수군영(水軍營), 수영(水營)이라 한다.[각주:2]

조선시대에는 전국이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의 8개 도(道)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팔도(朝鮮八導)'라는 명칭이 익숙하다. 이들 8개 도에 위치하였던 8개 감영은 다음 2개의 건물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ㄱ) 대문(大門)에 해당하는 문루(門樓)[각주:3]

ㄴ) 관찰사가 근무하던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각주:4]

이외에 징청각(澄淸閣), 관풍각(觀風閣), 내아(內衙) 등의 건물도 여러 감영 경내에 공통으로 등장하지만, 본 글에서는 일단 가장 중요도가 높은 2개 건물의 편액(扁額)[각주:5]에 대해서만 살펴보려 한다.

경기감영 기보포정사 및 선화당 편액(현판)1번 이미지 - 경기감영 대문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 및 선화당(宣化堂) 편액


1. 경기감영(京畿監營) :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소재

ㄱ) 문루 편액 : 한성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신문) 밖에 위치하던 경기감영 정문에는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1882년(고종)에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일본인이 발행한 사진첩인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에 수록된 사진을 참고하여 편액 글자를 그려본 것이다. 이 편액은 현존하지 않는다.

ㄴ) 선화당 편액 : 193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 발행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에 수록된 사진을 참고하였다. 사진에 찍힌 이 건물은 본래 의정부(議政府) 중심 대청인 정본당(政本堂)이었는데 사진을 촬영할 당시[각주:6]에는 경기도청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선화당 편액이 달려 있었다. 옛날 경기감영에 달려 있던 바로 그 편액인지, 수원(水原)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관찰사 소재지를 옮겨갔다가 다시 서울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 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편액이 아래쪽 절반만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에 추정하여 그린 것이다. 역시 편액은 현존하지 않는다.


대구 경상감영 영남포정사 선화당 편액(현판)2번 이미지 - 경상감영 대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및 선화당(宣化堂) 편액


2. 경상감영(京尙監營) :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소재

ㄱ) 문루 편액 : 경상감영 문루에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건판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사진 해상도가 높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글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루는 현재 대구 달성공원 관풍루(觀風樓)[각주:7]로 현존하는데, 문루 안쪽에 이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글자 형태가 거의 유사하지만, 예전 사진의 편액과 면적에서 일부 차이가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동일한 편액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색상도 흑백이 반대로 도색되어 있다.

ㄴ) 선화당 편액 : 문루와 같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자료를 참고하였다. 이 사진 이외에도 교차 검토 가능한 사진이 여럿 전해지고 있다. 경상감영 선화당은 원래 위치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걸려 있는 현판은 정체불명의 것이다. 아마도 1966년에 경북도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 후, 원래의 도청 부지에 중앙공원[각주:8]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글씨로 새겨서 걸었던 것 같다.

전주 전라감영 및 평양 평안감영 선화당 편액(현판)3번 이미지 - 전라감영 및 평안감영 선화당(宣化堂) 편액


3. 전라감영(全羅監營) : 전주부(全州府)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전라감영 외삼문(外三門)이 촬영된 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 수를 참작할 때 확신하기 어렵다.

ㄴ) 선화당 편액 : 일제강점기에 촬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몇 점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토대로 비슷하게나마 글자를 추정하면 위와 같다. 선화당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전소되었고, 최근 전라감영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원래 위치에 선화당과 관풍각을 재건축하였다. 이 선화당 복원 건물에는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디지털 복원한 글씨의 편액을 걸었다. 위 이미지의 전라감영 편액과 거의 비슷한 형태이다.


4. 평안감영(平安監營) : 평양부(平壤府) 소재

7-1.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대한제국 시기에 문루 정면을 촬영한 사진이 전해지나, 이 사진에는 '평안남도관찰부(平安南道觀察府)'라는 간략한 형태의 낡은 현판이 걸려 있다. 감영 시절의 편액에는 아마도 '관서포정사(關西布政司)'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7-2. 선화당 편액 :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 선화당을 촬영한 사진과 1890년대 추정 사진 하나, 그리고 위 문루를 촬영한 사진 등이 전해진다. 이들 사진을 토대로 선화당 글씨를 추정해 보면 위 사진과 같다.


함흥 함경감영 관북포정아문 및 선화당 편액4번 이미지 - 함경감영 대문 관북포정아문(關北布政衙門) 및 선화당(宣化堂) 편액


5. 함경감영(咸鏡監營) : 함흥부(咸興府) 소재

ㄱ) 문루 편액 : 함경감영 포정문(布政門)[각주:9]에는 '관북포정아문(關北布政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함흥 지역에서 활동하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던칸 맥래(Duncan M. Macrae, 1868-1949)가 촬영한 사진이 전해지고 있는데, 보통의 감영 문루와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기반으로 편액의 글자를 그려 보면 위와 같다. 글씨에 힘이 넘치고 각 글자가 조화롭다.

ㄴ) 선화당 편액 : 대한제국 시기 또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발행된 사진그림엽서[각주:10]에 선화당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을 토대로 편액을 그려본 것이다. 문루와 선화당의 편액이 모두 흑색 바탕의 백색 글씨로 되어 있어 함경도 지역의 고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현재 함흥 선화당[각주:11]에 걸려 있는 편액의 글자 형태가 확연히 다른 것을 볼 때, 북한에서 해방 이후에 새로 제작해 걸어둔 것으로 보인다.


다음 3개 감영(충청, 강원, 황해)은 문루 또는 선화당 편액의 형태에 관한 사진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필자가 확인하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공주 충청감영 및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 편액(현판)5번 이미지 - 충청감영 및 강원감영 선화당(宣化堂) 편액


6. 충청감영(忠淸監營) : 공주목(公州牧)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문루 사진은 여러 장 확인되지만, 모두 '충청남도포정사(忠淸南道布政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리된 1896년(고종33) 8월 이후에 새로 걸었던 편액이므로, 이전 편액은 어떤 글자로 이루어진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호서포정사(湖西布政司)' 또는 '충청포정사(忠淸布政司)'일 가능성이 높다.

ㄴ) 선화당 편액 : 위 이미지의 편액은 공주시문화재관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편액 왼쪽에 새겨진 낙관(落款)에 '우당(羽堂)'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우당은 1833년 무렵에 공충감사(公忠監司,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조병현(趙秉鉉, 1791-1849)의 호(號)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편액이 현존하는 조선시대 제작 유일의 선화당 편액이라고 할 수 있다. 편액은 조선시대의 것이지만, 선화당 건물 자체는 충청남도 도청으로 계속 활용되다가 1932년에 도청이 대전(大田)으로 이전하면서 청사 기능을 상실한 후, 1938년경 앵산공원(櫻山公園, 櫻丘) 위치로 이전되어 백제박물관(百濟博物館)이 되었다가[각주:12] 1992년에 다시 현재 위치인 웅진동의 국립공주박물관(國立公州博物館) 옆으로 옮겨졌다. 공주박물관 시기에도 계속 걸려 있던 선화당 편액은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몇 곳에 균열이 생겼기에 1992년 이전시에 정밀한 복제품을 만들어 다시 걸었다. 지금 선화당 건물의 편액이 그것이다.


7. 강원감영(江原監營) : 원주목(原州牧)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문루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지만 1895년(고종32) 6월에 23부제가 실시되면서 강원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忠州府)의 원주군(原州郡)이 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광역행정기관인 관찰부(觀察府)가 춘천(春川)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포정사 편액이 걸린 사진 자료가 남기 힘들었다. 편액 명칭은 '관동포정아문(關東布政衙門)'으로 추정되고 있다.[각주:13]

ㄴ) 선화당 편액 : 역시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문루 편액과 같은 사유다. 명필로 알려진 석봉(石峯) 한호(韓灝, 1543-1605)의 글씨로 만들어진 선화당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강원감영 선화당에 걸린 편액은 대한민국 제0대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1919-2006)이 쓴 글씨로 1980년 3월 제작된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출생지가 강원도 원주였던 인연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위 이미지를 보면 선화당 세 글자가 (전통 방식과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선화당 건물 자체는 감영 문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건물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8. 황해감영(黃海監營) : 해주목(海州牧)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 때 감영이 있던 해주(海州) 전경을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으나 문루라고 특정할 수 있는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건물(해주성 남문)에 가려진 것일 수 있고, 일본인 관리의 관사(官舍) 건축을 위해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루를 해체한 때문일 수 있다. 문루 2층을 망월루(望月樓)라고 했는데, 어떤 명칭의 편액이 붙어 있었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황해포정사(黃海布政司)' 또는 '해서포정사(海西布政司)'일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

ㄴ) 선화당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조선 후기 8개 감영 가운데 유일하게 사진 한 장 전해지지 않는다. 원거리에서 선화당 건물 일부만 찍힌 사진그림엽서가 있긴 하다. 황해도 해주(海州) 지역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일본인)에게 그리 흥미를 끌 만한 지역이 아니었기에 관련 자료가 매우 희박한 것 같다. 지금 북한 지역이기에 더 열악한 형편이겠지만.


이상으로 팔도(八道) 감영의 문루와 선화당 편액에 관해 살펴보았다.


선화당(宣化堂) 편액 탁본6번 이미지 - 매원(梅園) 서기순(徐箕淳)의 선화당(宣化堂) 편액 탁본


위 이미지는 매원(梅園)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선화당(宣化堂) 팬액의 탁본(拓本)이다. 탁본을 뜬 선화당 편액이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는 미상이다. 본 문서에서 살펴본 어느 편액의 글자와도 모양이 일치하지 않는다.

전주성(全州城) 남문인 풍남문(豊南門) 안쪽에 걸려 있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편액을 1842년(헌종8)에 전라감사로 부임했던 서기순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전라감영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나, 서기순 본인이 1849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므로 확신할 수 없다.

감영 선화당을 복원할 때, 전라감영 선화당의 사례처럼 옛날 편액의 정확한 형태를 고증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자료 부족으로 그럴 수 없다면 이 선화당 탁본을 기초로 편액을 제작해 거는 것은 어떨까 싶다. (경기감영, 황해감영이 그렇고, 경상감영과 강원감영 편액도 고쳐서 다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강원감영 선화당은 한석봉의 천자문 글자를 집자해도 좋을 듯.)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을 책임지던 한성부(漢城府) 관청의 편액을 살펴보자.

한성부 대문 및 본청 편액 (경기감영 건물 시기)6번 이미지 - 한성부 대문 및 본청 대청 편액 (경기감영 건물 사용 시기)


위 사진은 돈의문 밖 경기감영 청사를 사용하던 시절의 한성부(漢城府) 대문 편액이다. 1번 이미지의 기보포정사 사진과 같지만, 촬영 시기가 약 20년 정도 늦다. 사진을 확대하여 글자를 그려본 것이기에 형태가 정확하지는 않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따르면 유혁연(柳赫然, 1616-1680)이 '경조부(京兆府)' 편액을 썼다고 한다. 경조(京兆)는 한양(서울)의 별칭이다. 한성부가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을 때는 경조부 편액을 걸고 있었으나, 한성부 청사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어느 순간에 (특히 경기감영 문루 2층에 걸기 위해) 새로 '한성부'라는 글자로 편액을 만들어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각주:14]

아래 사진 역시 경기감영 청사를 사용하던 시절의 한성부 본청 건물 편액이다. 사진에서 글자 윗부분과 낙관 부분이 보이지 않으나, 대략적인 글자 형태는 추정 가능하다. 글자는 '경조좌당(京兆坐堂)'으로, 이에 관해서는 2018년 7월에 올린 '한성부 관청 편액(현판) 이야기' 글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 편액이 유역현의 글씨일 수도 있다.


본문 요약.
1) 경기감영(돈의문 밖), 경상감영(대구), 함경감영(함흥)의 대문 편액 글자 확인 가능
2) 경상감영(대구), 전라감영(전주), 평안감영(평양), 함경감영(함흥)의 선화당 글자 확인 가능
3) 경기감영(돈의문 밖) 선화당 편액과 한성부 청사의 정문 편액은 대략적인 형태만 확인 가능
4) 충청감영 선화당의 편액은 현존 유일의 조선시대 제작 편액으로 추정됨 (더 찾아보자!!)



  1. 예겸(例兼)은 으레 겸하는 관직이다. 즉 어떤 관직에 임명될 때 자동으로 겸하는 관직. [본문으로]
  2. 병마절도사를 겸직하는 관찰사 옆(감영 영내 또는 인근)에는 전임 무관인 중군(中軍)이 임명되어 관찰사의 군사 업무를 보좌하였는데, 중군이 있던 곳을 중영(中營) 또는 중군영(中軍營)이라 한다. [본문으로]
  3. 감영 정문을 포정사(布政司), 포정문(布政門)이라고 한다. 그 형태가 대개 2층 누각 형태로 되어 있었기에 문루(門樓)라고 기재하였다. [본문으로]
  4. 선화당(宣化堂)의 '선화(宣化)'는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글에서 딴 것이다. 임금의 덕화를 널리 편다는 뜻의 선화승류(宣化承流)와도 의미가 통한다. [본문으로]
  5. 현대에는 편액(扁額)이 현판(懸板)이라는 용어와 혼용되고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건물 처마나 문 위에 다는 것은 편액이라고 해야 옳다. 현판은 더욱 포괄적인 범위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6. 경기도청 선화당이라는 표현은 1917년 11월 무렵까지 신문지면에 등장한다. [본문으로]
  7. 1917년에서 1920년 사이에 경상감영 포정사 문루가 기존 위치에서 달성공원(達城公園)의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본문으로]
  8. 1970년에 개원한 중앙공원(中央公園)은 1997년에 경상감영공원(京尙監營公園)으로 개칭되었다. [본문으로]
  9. 포정문(布政門) 안쪽에 순찰문(巡察門)이 있었다. 포정문과 순찰문 사이는 군영 위주 공간이었고 순찰문과 선화당 사이에 다시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는 관풍문(觀風門)이 있었으므로, 실제 포정문(외대문) 기능을 하던 것은 순찰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본문으로]
  10. 사진그림엽서를 한자로는 회엽서(繪葉書)라고 한다. 일본 한자는 絵葉書. [본문으로]
  11. 북한 국보유적 제109호. [본문으로]
  12. 이때 선화당 건물을 이전하면서 건물 규모가 약간 축소되었다고 하나, 사진상으로는 용마루의 회반죽 양성바름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러한 모습이 특별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면에서 볼 때 건물 좌측 후면의 3칸(間)이 축소된 것은 확실하다. [본문으로]
  13. 「강원도정선군일록 (江原道旌善郡日錄)」 1887년(고종24) 윤4월 15일자 기록, 『정선총쇄록(旌善叢鎻錄)』, 오횡묵(吳宖默, 1834-1906?) [본문으로]
  14. 경조부(京兆府) 편액이 정문 문루가 아니라 본청(당상대청) 건물에 달았던 것일 수 있다. 또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실제 편액의 글자가 '한성부(漢城府)'였는데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단순히 한성부를 경조부라고 표현(기재)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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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섬시(內贍寺) 및 내수사(內需司) 청사 터 이야기

※ 작년 6월에 올린 글에서 경복궁(景福宮) 서편에 있던 '사재감(司宰監) 관청의 청사 위치에 관한 내용'을 다룬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와 비슷한 역할과 규모의 조선시대 관청인 내섬시(內贍寺) 관아 터 자리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내섬시(內贍寺)는 각 궁과 전[各宮各殿]에 올리던 공상(供上) 물품과 기름[油], 식초[醋], 소찬(素饌) 등의 공급을 담당하던 관청이다.[각주:1] 담당 업무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 대체로 사소한 물자를 취급하던 관청이었기에 조선왕조 관직 체계에서 전형적인 한직(閑職)이었다.

관청 수장의 관직도 초기에는 정3품 정(正)이었으나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불필요한 관원[冗官, 용관]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종6품 주부(主簿)로 낮아졌다. 현대 공무원 직급으로 따지면 2급에 상당하는 중앙 행정기관 국장급의 정3품 당하 아문(衙門)에서 5급 사무관 정도의 종6품 아문으로 격하된 것이다.

서부 인달방 내섬동 내섬시 측량 평면도1번 이미지 - 서서 인달방 내섬동 내섬사(內贍司) 측량도


위 1번 이미지는 내섬시 청사의 평면도이다. 1908년(융희2) 5월에 정리국(整理局) 기수(技手) 이계홍(李啓弘)이 작성한 〈실측도(實測圖)〉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 서서(西署) 인달방(仁達坊) 내섬동(內贍洞)에 있었다. 서서는 서부(西部)를 1894년(고종31)에 개칭한 것이고, 내섬사(內贍司)는 내섬시를 뜻한다.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로 각 관청의 명칭에 사(司)가 붙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문에 생겨난 착오로 보인다.[각주:2]

내섬시 평면이 위 실측도에서 간단히 확인되었으므로, 이제 이 필지의 외곽 형태와 축적이 일치하는 곳이 실제 지도에서 어디에 있었는지만 살펴보면 내섬시 청사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된다.[각주:3]

조선시대 육조거리 서편 일대 지도2번 이미지 - 육조대로 서편 일대 (1912년 지적도 기준)


위 2번 이미지는 1912년에 작성된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를 토대로 육조거리(육조대로) 서편 일대의 여러 관청 위치를 표기한 것이다.[각주:4] 육조거리는 오늘날의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앞 세종대로이며, 이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의 6조 관아와 의정부(議政府), 중추부(中樞府), 사헌부(司憲府) 등의 주요 관청이 늘어서 있었다.

위 지도에 수록된 관청 가운데 육조거리 서편에 있던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사역원(司譯院)과 경희궁(慶熙宮)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앞에 있던 훈련도감(訓鍊都監), 비변사(備邊司)[각주:5] 정도가 주요 관청이고, 내자시(內資寺), 장흥고(長興庫), 내수사(內需司), 의영고(義盈庫), 봉상시(奉常寺), 내섬시(內贍寺) 등은 2급 또는 3급 수준의 소규모 관청이었다.


장흥고 아래에는 사재감의 공상 대상인 각궁각전(各宮各殿)에 포함되는 청평위궁(淸平尉宮)이 보인다. 효종(孝宗) 임금의 3녀가 살던 숙명공주방(淑明公主房)을 그 남편의 관직인 청평위(淸平尉) 심익현(沈益顯, 1641-1683)의 직함을 따서 청평위궁(淸平尉宮)이라고 불렀다. 청평위궁 자리를 어의궁(於義宮)이라고 기재한 도면과 지도가 있는 것을 보면,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효종 임금의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 잠저였던 어의궁이 동부(東部) 숭교방에서 이곳 청평위 궁가(宮家) 자리로 이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자시, 장흥고, 청평위궁에 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알아볼 예정이다.)

지도 중앙을 상하로 가로지르며 백운동천(白雲洞川)이 흐르고, 중앙에 송첨교(松籤橋)가 있다. 송첨교는 종침교(琮沈橋) 또는 종교(宗橋)라고도 불렀는데, 자료에 따라서는 장흥고 대문 앞에 있던 다리에 종침교 명칭이 붙어 있기도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청평위궁 아래에 있던 다리는 승전색교(承傳色橋)이다.[각주:6] 송첨교에서 승전색교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지도 바깥쪽 바로 앞에 사직(社稷)이 있다.

지도 오른쪽의 사역원 왼쪽 붉은색 ⓐ 지역은 1905년(광무9) 4월에 사립(私立) 양정의숙(養正義塾)이 들어선 곳이다. 양정의숙은 순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의 재종질인 7촌 조카 엄주익(嚴柱益, 1872-1931)이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학이다.


1번 이미지의 내섬시 청사 〈실측도〉를 위 2번 이미지의 〈경성부지적원도〉와 비교하면 내섬시 청사의 위치가 곧바로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었던 봉상시 바로 앞에 있었다.[각주:7]

내섬시 청사는 본래 북부 준수방(俊秀坊) 지역에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서부 인달방 위치로 옮겨졌다.[각주:8] 아마도 임진왜란(壬辰倭亂) 전후 또는 내섬시가 내자시, 의영고 등에 일시 통합되었다가 다시 분리 재설치되던 과정에서 청사 소재지에 변동이 있었을 것이다.


내섬시 청사에 대해 더 알아보기 전에 잠시 내수사 청사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면, 〈칠궁명례궁간략도(七宮明禮宮間略圖)〉 도면,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등의 고지도에서는 ㉠ 위치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1848년(헌종14)에 만들어진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에서는 ㉡ 위치에 내수사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현재 내수사 터 표지석 역시 ㉡ 위치에 있는데, 일제강점기 시기의 〈동아일보(東亞日報)〉 지면에서는 내수사 위치를 ㉢의 '수창동 184번지'로 적고 있다.

동아일보 수창동 내수사(內需司) 기사동아일보 1924년 7월 30일 기사 - 내동리명물, 수창동 내수사(內需司)


위 이미지가 1924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 지면이다. '내동리명물(내 동네 명물)' 코너에 '수창동(需昌洞) 내수사(內需司)'라는 소제목으로 내수사 관청에 대한 짧은 글이 실려 있다.

내수사 대문 사진과 함께 '옛대문이 남아 있고 옛현판이 달려 있을 뿐입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184번지의 면적이 104평으로 협소하지만 내수사 부지가 민간에게 매각될 때 여러 필지로 분할된 때문일 수 있기에 내수사 청사의 마지막 위치를) ㉢ 필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내자시 건물 별도로 왕비의 산실에 깔았던 거적을 보관하던 권초각(捲草閣) 건물이 있었는데, 만약 내자시 본청과 권초각이 서로 다른 필지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내자시 본청이 ㉢이고 권초각이 ㉠ 또는 ㉡일 수 있다.[각주:9] 1911년에 발행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에는 ㉣ 위치[각주:10]에 내수사 지명 '內需寺'로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 위치의 동향(東向) 청사가 실제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내섬시(內贍寺) 청사 배치 평면도3번 이미지 - 종로구 당주동 내섬시(內贍寺) 청사 지도


위 3번 이미지는 1912년 〈경성부지적원도〉에서 내섬시 청사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내섬시 청사 위치는 현재 주소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唐珠洞) 95번지[각주:11]이며, 보라색 숫자는 지번, 녹색 글자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의 주소 체계인 통호(統戶) 번호이다. 파란색 번호는 〈실측도〉에 기재된 녹색 숫자의 이웃 통호와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봉상시 터는 당주동 128번지[각주:12], 훈련도감 터는 신문로1가 58번지임을 알 수 있다.

1882년(고종19) 12월 30일자로 내섬시 관청이 폐지된 이후 내섬시 청사 자리는 동제학교(同濟學校)[각주:13], 찬문야학교(贊文夜學校)[각주:14], 동제측량학교(同濟測量學校)[각주:15] 등의 교사(校舍)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종래의 건물 배치 및 구조에 일부 변형이 가해졌을 수 있다. 그 때문에 1908년 5월 실측한 도면을 조선시대의 내섬시 청사 평면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367평 면적에 10칸[間] 규모의 대청, 퇴(退) 2칸을 포함한 7칸 규모의 건물, 부군당(府君堂, 신당) 또는 측간(廁間. 화장실)으로 볼 수 있는 2칸 건물 두 채, 대문과 행랑 등이 확인된다. 진입 도로 위치와 필지 형태를 감안할 때, 행랑 북단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칸에 대문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내섬시 청사 위치 지도4번 이미지 - 내섬시 청사 위치 (2020년 현대 지도 비교)


위 4번 이미지의 지도는 내섬시 청사 부분을 현재 지도와 겹친 것이다. 내섬시 터에 현재 어떤 건물이 들어서 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아직 내섬시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 1980년대에 세종빌딩 및 세종아파트가 들어선 이 부지[각주:16] 모퉁이에 조선시대 내섬시 청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시판 하나를 설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요도가 낮은 관청이었기에 굳이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참고로, 내수사 터 기념표석은 2번 이미지에서 [내]로 표시된 지점인 종로구 내수동 72번지[각주:17]에 있으며, 봉상시 터 기념표석은 4번 이미지에서 [봉]으로 표시된 지점인 당주동 128-27번지[각주:18]에 설치되어 있다.


  1. 궁중에 공물을 공급하는 대표적인 관청 6개를 공상6사(供上六司)라고 한다.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 사도시(司䆃寺), 사재감(司宰監), 사포서(司圃署), 의영고(義盈庫)로 구성된다. 봉상시(奉常寺), 내자시, 내섬시를 따로 삼사(三司)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당시 신문지면의 주소 표기에 '內贍司' 명칭이 관측된다. 내섬시(內贍寺)의 한자 '寺'를 '시'가 아닌 '사'로 읽고 그것이 말에서 말로 전달되어 내섬사로 기재되었을 수 있다. 보통 절 이름에 붙는 한자 寺가 관청 이름으로 사용될 때에는 '사'가 아닌 '시'로 발음한다. [본문으로]
  3. 내섬시 터 위치는 이미 학계 논문에서 (본 블로그에서 살펴본 위치에) 비정된 바 있다. [본문으로]
  4. 1912년 지적원도 자체가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지적도이므로 조선 후기의 도로 구성, 필지 위치와는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본문으로]
  5. 비변사는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앞에도 있었는데, 돈화문 앞 비변사가 제1청사, 흥화문 앞 비변사가 제2청사 비중으로 시기에 따라 활용되었다. 지도에 표기한 비변사 위치는 대략적인 것이다. [본문으로]
  6. 별칭 승전교(承傳橋), 승전빗다리. [본문으로]
  7. 봉상시(奉常寺) 정문 사진이 193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 발행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비고편(備考篇).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1. 〈경도(京都)〉의 내섬시(內贍寺) 항목. "처음에는 준수방에 있었는데 후에 인달방으로 옮겼다[初在俊秀坊 後移仁達坊]." [본문으로]
  9. 반대로 권초각이 ㉢이고, 내자시 본청은 ㉠ 또는 ㉡에 있었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0. 수창동 110번지. 1912년 당시 3,559평 국유지. [본문으로]
  11. 당주동은 법정동이다. 행정동은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본문으로]
  12. 1,882평 면적으로 내섬시의 5배 이상 규모였다. 1912년 당시 소유는 구한국 재산 관리 기관인 이왕직(李王職). [본문으로]
  13. 은사교사(恩賜校舍),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09월 19일. [본문으로]
  14. 〈황성신문(皇城新聞)〉, 1906년 11월 06일. [본문으로]
  15.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6월 16일. [본문으로]
  16. 지번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100번지이다. 지번 통폐합 과정에서 원래 필지의 지번인 당주동 95번지는 현재 소멸되었다. 도로명주소로는 종로구 세종대로23길 54. [본문으로]
  17. 도로명주소 종로구 사직로8길 34 [본문으로]
  18. 도로명주소 종로구 새문안로3길 15 [본문으로]
내섬시, 내수사, 백운동천, 봉상시, 인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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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성부(서울) 지도 : 현대 지명 표기

조선 후기 한성부(서울) 지도조선시대 18세기 무렵 한성부(서울) 그림 지도


예전에 한국어 위키백과를 위해 제작하였던 조선시대 18세기 무렵의 한성부(漢城府, 서울) 지도를 오랜만에 일부 보완하여 올려봅니다.

각 지명, 관청, 궁실의 위치와 형태를 대략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완벽한 고증을 거친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P.S. 2010년 10월에 본 블로그에 등록한 '조선시대 한성부 실측지도 (클릭)' 역시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서울, 조선시대, 조선왕조, 지도, 한성부, 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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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9 19:22 | 수정/삭제 | 쪽글 달기
비밀댓글입니다
BlogIcon 도필리 | 2020.08.31 23:06 신고 | 수정/삭제
조선시대 후기에서 대한제국 시기의 통호(統戶) 번호로 현대 주소(지번)를 정확하게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호적, 지적도, 토지조사부, 지도 등을 하나하나씩 대조하면서 확인해야 하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호적(광무호적 등) 자료 가운데 '인달방(仁達坊) 호적' 전체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호적 자료가 있으면 보다 수월하겠지만, 일단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사이트의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에서 일치하는 이름의 지번을 찾는 방법이 있습니다(경기도 경성부 서부 당주동 토지조사부). 이 경우, 일치하는 이름이 있다고 해도 당시에는 10년 사이에 필지 소유자(호주) 절반 정도의 이름이 변경되었던 상황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는 찾으려는 분 또는 그 자식 세대의 제적등본을 떼어 보시면, 상당 기간 그 지역에 사셨을 경우에 현대 주소로 그 위치를 추적 내지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현재 주소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5길 13 부근, 지번으로는 종로구 당주동 160번지 인근 지역이 말씀하신 통호 근처가 아닐까 합니다. 본 블로그 '내섬시 및 내수사 청사 터 이야기' 글의 4번 이미지 '내섬시 청사 위치 (2020년 현대 지도 비교)'에서 녹색 글자 당주동의 동(洞) 글자에서 5시 방향의 KB국민은행 표시 지점입니다.

| 2020.09.16 20:17 | 수정/삭제 | 쪽글 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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