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 '경상좌수영, 동래도호부... 이야기'에서 부산(釜山) 지역에 설치했던 관청인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에 대해 잠시 알아봤습니다. 그 감리서에서 서기관(書記官), 방판(幇辦)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인 민건호(閔建鎬, 1843-1920)가 작성한 『해은일록(海隱日錄)』의 1885년(고종22)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1885년 12월) 15일 기묘일, 맑고 동북풍이 잠시 불다. ○ 돛을 걸자 곧 남해(南海) 노량포(露梁浦)를 지났다. 포구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사당[祠宇]이 있는데, 임진년(壬辰年)에 이 포구에서 일본군[日本兵]을 물리쳤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
조선시대 '거북선[龜船]'의 정확한 형태가 어떤지에 관해서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철갑을 두르고 있었느냐, 쇠못이라도 꼽고 있었느냐, 거북이 머리에서 연기를 뿜었는지 총통 설치했는지, 2층과 3층의 내부 구조는 어떻고, 크기와 승조원 규모 등은 또 어떠했는지. 이런 논란에 오늘날까지 가중되는 원인은, 실제 거북선의 형태를 확정해 줄 수 있는 사료가 현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북선을 촬영한 사진, 하다못해 실물을 보고 그린 정교한 그림이라도 한 장 전해지고 있다면 논쟁의 대부분이 종식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아쉬움이 크다. 일제강점기, 아니 해방 직후에라도 거북선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조선시대 수영(水營) 인근들 돌아다니며 관련 증언을 채록했더라면 오늘날처럼 의문이 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