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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구한말-대한제국 시기 한성부 관청 편액(현판) 이야기

대한제국 시기 촬영 한성부(漢城府) 청사 (Palais de justice et du gouverneur de la ville de Séoul)


이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에 촬영된 한성부(漢城府) 관청의 청사 사진이다. (사진 제일 오른쪽에 등장한) 외국인이 한성부 청사를 방문한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자료나 논문, 문헌에서 이 사진을 광화문 세종대로(육조거리)에 있던 한성부 청사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는 돈화문(敦化門, 서대문) 밖, 지금의 서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3, 4번 출구 인근에 있던 경기감영(京畿監營)의 본청인 선화당(宣化堂) 건물이다. 즉, 한성부 청사가 (사진을 촬영하던 1902년부터 1908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예전 경기감영이 있던 자리로 옮겨 있었던 것이다. 경기감영은 1896년(고종33)에 이미 수원(水原)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 위 한성부 청사 사진에 찍힌 외국인은 프랑스 사람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로 추정(!!)된다. 1888년(고종25)에 초대 주한프랑스공사로 부임하여 1890년 8월까지 근무하였으며, 1896년에 다시 부임하여 1906년 1월까지 서울에 있었다. 플랑시의 한자 이름은 갈임덕(葛林德)이다.

※ 이제까지 1건의 문헌에서만 위 사진의 건물이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대부분은 그냥 한성부 청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한성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세종로 시절의 청사가 아닌 경기감영 위치에 들어섰던 한성부 사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제6폭


이 그림은 19세기에 그려진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의 일부(제6폭 부분)이다. 대형 병풍으로 제작되어 각 건물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주의한다.

1) 편액 : 편액(현판)의 위치가 사진과 그림에서 일치한다. 정면 8칸(間)의 규모가 비교적 큰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중앙부(왼쪽에서부터 4칸 또는 5칸)가 아닌, 왼쪽에서 세 번째에 현판이 걸려 있다.

2) 기단(월대)과 답도 : 건물 기단의 형태가 일치한다. 한성부나 경기감영은 등급이 높은 관청(정2품 아문, 종2품 아문)이었으므로 상징이 되는 본청 건물을 아무렇게나 짓지 않고 이렇게 돌을 쌓아 올린 월대(月臺, 기단) 위에 만들었다.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월대의 유무가 아니라, 편액의 위치와 일치하는 답도(踏道, 계단)의 위치가 되겠다.

3) 가석과 폐석 : 한성부, 경기감영 등의 관청은 사법(형사)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인을 다룰 때 필요한 시설물인 가석(嘉石)과 폐석(肺石)을 두었다. 〈경기감영도〉에서는 삼도의 왼쪽에 폐석, 오른쪽(화살표로 가리키는 부분)에 가석이 마련되어 있다. 가석은 죄가 가벼운 자가 돌의 아름다운 무늬를 보고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것이고, 폐석은 억울한 죄인이 돌 옆에 서서 관리에게 하소연하는 용도라고 한다.

위 설명에 추가하면, 내삼문으로 이어지는 세 줄의 바닥돌(디딤석) 위치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를 삼도(三道)라고 하는데, 중앙은 수당상(首堂上 한성판윤 또는 경기도 관찰사)이 다니고 좌우 디딤돌로는 차당상(次堂上, 한성부의 경우 좌윤, 우윤)이 통행한다.

이를 통해, 위 한성부 청사 사진이 실제는 예전 경기감영의 건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기에 따라 육조거리, 정동, 군기시 등으로 옮겨 다니던 한성부 청사의 건물이 아주 우연하게도 〈경기감영도〉의 건물과 거의 같은 형태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확률은 거의 없다.


위 한성부 청사 사진이 경기감영 선화당 사진임이 확실하지만, 단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 사진 속의 등장인물과 같은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프랑스 파리의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에서 1900년 4월부터 11월까지 열린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의 한국관 홍보를 위해 출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책자(=대한제국 안내 도록) 『서울의 추억(Souvenir de Séoul, Corée : 1900)』에도 이 사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성부가 경기감영 터를 사용한 시기는 1902년 4월부터이다.

사진 촬영 시기상으로 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성부 청사 사진이 경기감영 선화당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의 비교 이미지를 보자.


위 사진은 앞에 실었던 한성부 청사 사진이고, 아래 사진은 1941년에 일제가 간행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3권에 수록된 구(舊) 고양군청 사진이다. 고양군청은 1914년 3월 1일부터 경기감영 자리에 소재하다 1928년 4월 7일에 을지로 6가 위치로 이전하였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진홍색 화살표로 표시된 용마루 양성바름의 얼룩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또 하늘색 화살표의 기와 부분도 일치하고, 확인 가능한 지붕 전체의 기왓골(숫기와, 암기와)의 숫자도 같다. 차이 나는 것은 녹색 화살표의 기단(답도) 부분인데, 전통건물로 지어진 선화당 건물 내부를 바깥 기둥까지 확장하여 벽을 올리고 유리 창호를 내는 과정에서, 편액(현판)이 걸려 있던 건물의 중심부를 오른쪽으로 한 칸 옮기면서 답도(계단)의 위치와 형태에 일부 변화가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관청 대문의 위치 변경에 따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한성부 청사 사진이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인 것이 이토록 확실하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하나다. 한성부 청사가 경기감영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무리 빨라도 1902년 4월인데, 1900년에 간행된 『서울의 추억』에 같은 사진이 실린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

문제점을 하나씩 헤아려 본다.

1) 한성부 청사 사진이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이 확실한가? : 앞에서 살펴본 정황 증거를 감안할 때 99.98% 이상의 확률로 확실하다.

2) 한성부 청사 사진 촬영은 언제 이뤄졌는가? : 한성부 청사가 경기감영 위치에 소재한 시기는 1902년 4월부터 1908년 9월 5일까지이다. 또 사진 속의 등장인물(외국인)은 1906년 1월까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사진 촬영 시기는 1902년 4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기간 중 어느 한때라고 추정할 수 있다. 마당에 눈이 쌓여 있으므로 아마도 1902년 가을 이전은 아닐 것이다.

3) 『서울의 추억』은 1900년에 간행된 책인가? : 지금까지 검색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책자 본문이나 외부에 인쇄일이나 출간일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서지 정보에 1900년으로 기재된 것이 많다. 또 책의 본문 내용이 1900년 4월 14일부터 동년 11월 22일까지 열린 파리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의 전시물에 대한 (박물관 개관시 현재 시점의) 상세한 설명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으며, 책에 수록된 50장의 다른 사진들에서도 1900년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1900년 당시 출간된 것으로 본다. 참고로, 한성부 청사 사진은 '서울시 시장(과 사법관료)의 청사(Palais de justice et du gouverneur de la ville de Séoul)'라는 설명과 함께 책의 15번 째 사진으로 실려 있다.

4) 한성부 청사가 아닌, 한성부재판소(한성재판소)의 사진이 아닌가? : 일단 편액의 글자 때문에 그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군기시 자리에 있던 한성부 본청에는 다른 편액을 만들어 걸고, 예전 한성부의 편액을 별도의 사법 관청인 한성부재판소에 걸어 두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결정적으로 한성부재판소가 경기감영 터에 (파리 만국박람회가 끝나가는) 1900년 11월 이전에 위치했던 기록이 없다. 한성부재판소는 육조거리 아래쪽 혜정교(惠政橋) 남측의 예전 우포도청(右捕盜廳) 자리에 있다가 1898년 9월부터 군기시 자리의 한성부 청사에 더부살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연출된 사진은 아닐까? : 1896년에 경기감영(경기관찰부)이 수원으로 이전된 후, 사실상 빈 건물로 남아 있던 경기감영 터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을 (파리 만국박람회 도록 책자에 수록하기 위한 대한제국의 멋진 행정관청 사진을 확보하려고) 한성부 청사 사진으로 꾸며 연출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경기감영이 1902년 4월 이후에 한성부 청사로 활용되었고 1900년에 『서울의 추억』 책자가 출간되었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힘들게 한성부 편액(현판)을 옮겨 달고 관원, 관리, 군인 등 복장의 사람 14명까지 배치하면서 사진을 찍었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 한성부 청사가 있던 군기시(軍器寺, 현재 서울시청 바로 위쪽) 자리 또는 세종로(육조거리)의 다른 번듯한 관청에 가서 촬영하면 그만이기 때문. 사진 건물의 창호가 온전하고 마당에 등불까지 있기 때문에 선화당이 실제 한성부 청사로서 기능하고 있었을 1902년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 연출된 사진을 찍은 지 약 2년 후에 한성부 청사가 실제 경기감영 터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6) 시간 여행자의 장난은 아닐까? : 타임머신을 타고 온 미래의 시간 여행자가 1899년 또는 1900년으로 가서 1902년 이후에 촬영된 한성부 청사 사진을 파리 만국박람회 도록(圖錄) 간행에 참여한 사람(아마도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처럼 소소한 사진 끼워 넣기 같은 행동을 벌였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도록 집필자의 기억력까지 조작했어야 할 텐데, 이것도 알약 하나로 손쉽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웜홀(wormhole)을 이용해 시간여행을 하였다면 웜홀을 만든 시점보다 더 과거로는 갈 수 없으니, 아마 다른 은하계의 외계인이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두었던 웜홀을 이용했을... (그, 그만하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서울의 추억』 책자의 발행연도가 1900년경이 아닐 가능성이 그나마 가장 높을 것 같다. 구한말 주요 관청 청사의 정면 사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을 생각해 보면, 연출 사진이었을 가능성도 조금(1%)은 있을 것 같다. 한성부 청사 사진의 촬영 시점에 대한 면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말로 이만 생각을 마친다.


자, 이제 이 글의 본론이다.

한성부(漢城府) 청사 대청 편액 경조좌당(京兆坐堂)


사진에서 한성부 편액(扁額, 현판)에 어떤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인지 확인해 봤다. 전서체(篆書體)로 되어 있어서 한자를 잘 모르는 필자가 몇 시간 동안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가며 점검한 결과, '경조좌당(京兆坐堂)'이라고 되어 있음을 알아냈다.

경(京)과 조(兆)는 '경조(京兆)'가 한성부의 별칭이기에 쉽게 읽을 수 있었고, 당(堂) 역시 관청의 주요 건물에 흔히 붙는 명칭이므로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전서체 중에서도 소전체(小篆體)로 되어 있어서 堂과 室이 아주 비슷하다. 좌당(坐堂)은 '앉아 있는 당'이라는 뜻이 된다. 즉, 경조좌당을 풀어 설명하면 '경조부(京兆府, 한성부)의 판윤(과 좌윤, 우윤)이 앉아서 공무를 보는 당(건물)' 정도가 되겠다.

편액 왼쪽에 쓰인 작은 글자들은 사진상에서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마 다른 편액의 경우처럼, 글자를 쓰거나 현판을 새긴 날짜와 글쓴이의 직함, 이름 등이 기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해상도 이미지(유리원판 원본)을 확보할 수 있으면 확인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 한성부 편액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일까. 아니면 경기감영 건물로 한성부가 옮겨 오면서 새롭게 새겨 걸게 된 것일까. 편액 왼쪽의 글자가 확인되면 간단하게 결론이 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1) 건물 규모를 생각할 때 편액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경기감영도〉 그림에서는 선화당 편액이 건물 한 칸 너비에 달한다. 만약 새로 편액을 만들어 달았으면 건물 규모에 걸맞은 크기로 제작했을 것이다. (〈경기감영도〉 그림이 과장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2) 한성부는 구한말-대한제국 시기의 짧은 기간 동안 여섯 차례나 청사 위치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편액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관청이 이사할 때마다 현판을 새로 만들어 걸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면 자연스럽다.

단, 옛 경기감영 정문(포정사, 포정문, 기보포정사)에 걸었던 '한성부(漢城府)'라는 편액은 어느 시점에 새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종 연간(1871년 탈고, 1884년 출간?)에 간행된 『林下筆記(임하필기)』에 따르면 한성부 편액이 유혁연(柳赫然)이 쓴 '경조부(京兆府)'라고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임하필기』의 경조부 편액이 (한성부 대문에 걸었던 것이 아니라) 본청 건물에 걸었던 위 '경조좌당' 편액을 지칭한 것일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사실 이쪽이 사실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2018.07.14 - 처음 등록
2018.07.22 - 내용 추가 (콜랭 드 플랑시, 모리스 쿠랑 부분)
2018.07.28 - 내용 추가 (서울의 추억, 고양군청 사진 관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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