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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동화문 앞 비변사 터 표지석창덕궁 돈화문 앞, 창덕궁 교차로의 비변사 터 표지석 (종량제 봉투 찬조출연)


조선왕조의 대표적 궁궐 가운데 하나인 창덕궁(昌德宮), 그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 창덕궁 삼거리 교차로가 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비변사(備邊司)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5 또는 5-6번지이며, 기념표석에 새겨진 글귀는 아래와 같다.

비변사 터
備邊司 址
조선시대 외적의 방비와 국가 최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 때 창설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음.

비변사의 정확한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1510년(중종5)에 발생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기점으로 1510년 또는 1517년(중종12) 6월경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1592년(선조25)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기점으로 점차 기능과 권한을 확대하여 명실상부한 국정 최고의 합의제 의결기관이 되어 조선 후기 약 250년 동안 조정(朝廷, 정부, 국가)의 주요 사무를 총괄하였다. 약칭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 한다.

비변사 청사는 본래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앞 육조거리(세종로) 오른편의 기로소(耆老所) 남쪽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창덕궁 돈화문 앞길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돈화문 앞 비변사 터 표지석의 위치를 위성 지도에서 확인하면 아래 이미지와 같다.

창덕궁 돈화문 주변 위성지도창덕궁 돈화문 주변 위성지도 (비변사 터 표지석)


형광색으로 비변사 터 표지석의 위치를 표기하였다. 2018년 11월 현재, 창덕궁 돈화문 왼쪽에 있던 매표소 공간에서는 '창덕궁 매표소 종합정비' 계획에 따른 공사가 2017년 6월부터 한창 진행되고 있다.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올해 12월에 공사가 마무리되어 '통합관람종합지원센터(종합관람지원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율곡로 건너편으로는 가칭 '돈화문민요박물관' 건설 현장이 있다.

위성 지도가 아닌, 일반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창덕궁 돈화문 주변 지도창덕궁 돈화문 주변 지도 (비변사 터 표지석)


공사 이전의 창덕궁 매표소 공간에는 기념품 매점, 화장실, 창덕궁 주차장 및 서울시 주차장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 공사 현장의 남쪽 절반 공간에 비변사 관청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1912년에 제작된 지적도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를 토대로 비변사 청사의 위치를 그린 것이다.

비변사 터 (1912년 경성부지적원도)비변사 터 위치 (1912년 지적도 기준)_


구분을 위해 도로를 회색으로 칠했다. 숫자는 번지를 의미하며, 적색은 1912년 당시 지명인 와룡동(臥龍洞), 왼쪽 아래의 보라색은 운니동(雲泥洞), 왼쪽 위의 녹색은 원동(苑洞)이다.

붉은색 외곽선으로 표시된 비변사 터(와룡동 5번지)와 그 위쪽 지번(4번지) 사이에 동서 방향으로 작은 도로가 개설되고(㉠ 부분), 그 도로와 돈화문 서쪽의 창덕궁 궁궐 담장 바깥을 타고 역시 작은 길이 (기존보다)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분).

같은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에 제작된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壹筆每地形明細圖)〉의 돈화문 앞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비변사 터 (1929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비변사 터 위치 (1929년 지적도 기준)


1930년대에 개설 예정이었던 신작로(新作路)를 위해 구획과 지번을 대폭 정리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엷은 청색으로 채색한 부분이 오늘날 율곡로(신작로)가 지나가는 구역이다.

앞의 1912년 지적도에 있던 궁궐 담장길 대신에 와룡동 4번지를 좌우로 나누는 골목길이 개설되면서 해당 필지가 여러 개로 나뉘었고(㉠ 부분), 125번지와 126, 127, 130번지가 통합되어 5-8, 5-9번지가 되었다(㉡ 부분). 이렇게 기존의 비변사 청사 터는 필지가 조각조각 분할된다.

현대 지도에 비변사 터 위치를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비변사 터 (현대 지도)비변사 터 위치 (현대 지도 기준)


창덕궁 매표소 종합정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당 부분(㉠), 그리고 율곡로(㉡)와 돈화문민요박물관 공사 현장의 일부(㉢)를 포괄하는 곳이 바로 비변사 터였다.

위 지도처럼 비변사 위치를 추정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아래는 1908년(순종2) 5월 6일에 정리국(整理局) 기수(技手) 이계홍(李啓弘)이 작성한 〈실측도(實測圖)〉이다.

비변사 청사 평면도 (1908년 실측도)비변사(의정부 조방) 실측 평면도 - 니동의정부조방지원도


대한제국 궁내부(宮內部)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 측량과(測量課)에서 황실 재산(궁내부 소유지)과 국가 재산(국유지)의 분리 작업을 위해 근대적 측량 기술을 이용하여 여러 도면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의정부(議政府) 조방(朝房)을 현지 측량한 위 도면이다. 참고로, 궁내부 제실재산정리국은 1908년 7월에 탁지부(度支部) 임시재산정리국(臨時財産整理局)에 업무를 인계한 후 폐지되었다.

1865년(고종2) 3월 28일에 비변사를 의정부로 흡수 통합시키고, 기존의 비변사 청사를 의정부의 조방(朝房)으로 개편하였다.[각주:1]

"이제 의정부가 이미 새로 건축된 이상 정부(의정부)와 비국(비변사)을 일체 종친부와 종친부를 합부(合附, 합쳐서 붙인)한 사례에 따라 합쳐서 한 부(府)로 하되, 비국은 그대로 정부의 조방(朝房)으로 삼아서 대문의 문미(門楣)에 현판[각주:2]을 새겨서 달고, 묘당(廟堂)[각주:3] 편액은 (조방의) 대청에 옮겨 달도록 하라.[각주:4]" - 『고종실록』 권2, 1896년(고종2) 3월 28일 계해조

從玆爲始, 政府、備局, 一依宗簿寺、宗親府合附之例, 亦合爲一府。 備局則仍爲政府朝房, 而刻揭于大門之楣, 廟堂扁額則移揭大廳。


비변사와 의정부의 통합은 형식상으로는 당시 어린 고종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大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 1809-1890)의 하교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치였으나, 실제는 당연하게도 권력 실세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뜻이 작용한 처분이었다.

조방(朝房)은 본청과 대비하여 일종의 별관(別館) 청사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창덕궁, 경희궁 등의 대궐 앞에 위치하여 아침 일찍 궁궐 문이 열기기를 기대라는 입궐 대기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또는 왕이 있는 궁궐과 신속하게 왕래하며 업무를 보기 위한 공간, 특별한 사업의 추진 영역, 문서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직방(直房)과 혼용되어 쓰이나, 직방은 조방에 비해 '숙직(宿直)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 2편 열람하기 (링크)



  1. 흥미로운 점은 3월 28일의 3일 전인 동월 25일자 『승정원일기』의 병조(兵曹) 보고 문서에 이미 '의정부조방(議政府朝房)'이라는 단어가 보인다는 점이다. 대왕대비전의 전교가 있기 전에 조정 차원에서 비변사를 의정부의 조방으로 개편하는 부분에 대한 사전 조치 내지 합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 고종2년 을축(1895) 3월 25일(경신) 기사 참고. [본문으로]
  2. 현존하지 않는 이 '의정부조방(議政府朝房)' 또는 '정부조방(政府朝房)' 편액은 당시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이 쓰게 된다. 『승정원일기』, 고종2년 을축(1895) 3월 28일(계해) 기사 참고. [본문으로]
  3. 묘당(廟堂) 편액은 1894년(고종1) 9월에 기존의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쓴 비변사 편액을 좌의정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것으로 고쳐서 단 것이다. 비변사 체계 개편의 1단계 조치 중 하나였다. 참고로, 현존하는 묘당 편액은 1865년(고종2) 5월에 고종 임금이 어필로 쓴 것이다. 『고종실록』, 고종1년(1894) 9월 24일(임술)조 기사 참고. [본문으로]
  4. 문맥에 따라 묘당 편액을 조방 대문에서 조방 안의 대청으로 옮긴 것이 아닌, 창덕궁 돈화문 앞 조방에서 경복궁 광화문 앞 의정부 청사의 대청으로 옮겨 달도록 명한 것일 수 있다. 비변사가 의정부로 흡수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의정부 청사의 중건(重建) 공사가 막 시작되려는 때였고, 중건 이후 의정부 본청인 정본당(政本堂)에는 고종 임금이 1895년(고종2) 5월에 쓴 어필(御筆) 편액이 걸리게 되므로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정본당 편액을 만들 때 묘당 편액도 어필로 다시 제작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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