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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제목의 글 상편(링크)에서 이어지는 사재감(司宰監) 청사 이야기입니다. (상편과 달리 이번에는 문체를 원래대로 써 보겠습니다.)
지난 상편에서 재정을 담당한 호조(戶曹) 관청의 속아문(屬衙門, 소속 관청)인 사재감의 위치를 살펴봤다. 이번 하편은 사재감 청사 터의 변천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다.
8번 지도 - 서촌 일부 지역 (경성지형도, 1915년)
위 8번 지도는 1915년에 측량된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의 일부분이다. 상편의 6번 지도와 동일하게 일본 참모본부(參謀本部)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제작한 1만 분의 1 축적 지형도이다.
사재감 터를 하늘색으로 표시했는데, 상편의 7번 실측 도면에서 살펴본 건물 3채가 표시되어 있다.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것이 그것으로,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신당(神堂, 부군당), 대청(大廳), 주접실(住接室)이다. 상편 6번의 1921년 지형도에서는 건물이 모두 사라졌지만, 1915년 당시에는 주요 건물이 모두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좌측으로 활엽수가 세 그루가량 식재되어 있다. 지형도 '범례(凡例)'에 독립수(獨立樹)가 침엽수(鍼葉樹), 활엽수(濶葉樹) 1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재감의 나무는 활엽수이고 지형도 아래쪽에 빨간 점으로 표시한 백송(白松)은 (소나무니까 당연히) 침엽수이다. 이 사재감 나무들과 백송은 상편 6편의 1921년 지형도에 더욱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2
지도에 표시된 지명은 대부분 앞에서 살펴본 지도와 같다(상편 글의 5번 지도 참고).
9번 지도 - 서촌 일부 지역 (경성부지적원도, 1912년)
위 9번 이미지는 1912년에 제작된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이다.
빨간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의 구역이 대문 우측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편의 7번 실측 도면 외곽 형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란 화살표는 사재감 남쪽에 있었던 대문(大門)으로 향하는 골목 입구이다. 대동(帶洞)과 서문후동(西門后洞) 글자가 표시된 부분의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사재감 입구가 있는 이 길이 바로 1번 지도에서 나왔던 사재감전로(司宰監前路)이다. 참고로, 서문후동의 서문(西門)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社宅) 자리에 있던 창의궁(彰義宮)의 서문을 말한다.
녹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구역은 상편 1번의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 표기된 사재감 청사의 위치이다. 고지도에 따라서는 사재감이 보라색 사각형 지점에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실제로 18세기까지 사재감이 '사재감전동(司宰監前洞)'으로 표시한 지역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사재감 청사로 가는 입구가 서향(파란 화살표)이었기 때문에 1번 지도에서 그렇게 사재감 위치를 기재한 것인지는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상편 2번 지도의 설명 부분에서 잠시 언급했던 추정 내용을 요약하자면,
1) 사재감 청사가 녹색 사각형(㉠ 위치) 또는 보라색 사각형 지역에 있다가 빨간 화살표(㉡ 위치) 지역으로 이전했다.
2) 사재감 청사 이동은 없었다. 줄곧 ㉡ 위치에 있었으며, 다만 ㉡ 지역의 행정구역이 의통방(義通坊, 통의방)에서 순화방(順化坊)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3) 사재감 청사 위치가 실제 이동했고 더불어 행정구역 조정도 이루어졌다.
의 3개로 정리할 수 있다. 1) 번 주장을 유력하게 하는 증거는 각종 지도 표기와 문헌상의 기록이고, 2) 번 혹은 3) 번 입장을 검토할 수 있는 이유는 곧이어 살펴볼 내용 때문이다.
10번 지도 - 대한제국 시기 통의동 일대 (경성부지적원도, 1912년)
위 10번 지도는 지적원도에 1906년(광무10) 작성된 이른바 〈광무호적(光武戶籍)〉의 기록과 1912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査事局)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기록을 비교하고 추적한 후, 그 결과를 정리하여 필자가 임의 기재한 것이다.
보라색 글자는 1912년 당시 예전 순화방(順化坊) 지역의 국유지(國有地)이다. 녹색은 예전 통의방(의통방) 지역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소유지.
ㄱ) 창성동 117번지, 국유 2,268평 : 경관연습소(警官練習所) 부지
ㄴ) 통의동 7번지, 국유 1,658평 : 매동보통학교(梅洞普通學校) 및 관사(官舍) 부지
ㄷ) 통의동 28번지, 국유 196평 : 조선총독부 관사 부지로 활용
ㄹ) 통의동 29번지, 국유 202평 : 조선총독부 관사 부지로 활용
ㅁ) 통의동 91번지, 국유 790평 : 예전 사재감 청사 터
ㅂ) 통의동 35번지, 동양척식주식회사 6,381평 : 동척(東拓) 사택 부지 (예전 창의궁 터)
작은 숫자들은 통호(統戶) 번호이다. 예를 들어 3-8은 3통(統) 8호(戶), 71-1은 71통 1호가 된다. 지명 역시 1906년 호적표(戶籍表)에 기재된 내용이다. 역시 짧게 줄여 적은 것으로, 예를 들어 '사재감계 대동'은 실제 호적표에 '북서(北署)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 대동(帶洞)'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지적원도 위쪽에서부터 기재된 호적표상의 지명을 간추려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장동(壯洞) : 사재계(司宰契) 장동
대동(帶洞) : 사감계(司監契) 대동
사재감계(司宰監契) 대동(帶洞)
사재감계(司宰監契) 왕정동(旺井洞, 王井洞)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장동(壯洞)
상패계(上牌契) 사재감후동(司宰監后洞, 司宰監後洞)
후동(後洞) : 사재감계 후동
사재감내동(司宰監內洞) : 사재감내계(司宰監內契) 사재감내동
마병영내동(馬兵營內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마병영내동
북장동(北壯洞) :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북장동
상패계(上牌契) 반정동(半井洞)
전동(前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전동
사재감계(司宰監契) 하패동(下牌洞)
사재감계(司宰監契) 매동(梅洞)
매동(梅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매동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누각동(樓閣洞)
누각동(樓閣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누각동
사재감계(司宰監契) 체부동(體府洞)
사재감전동(司宰監前洞)
사재감계(司宰監契) 장동(壯洞)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에 호적을 작성할 때, 관청에서 나온 관리가 일정한 양식에 맞게 일괄 기록하지 않고, 호적을 신고하는 각 가옥의 호주(戶主)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상세 주소를 호구조사 관리에게 불러줬거나 스스로 문서에 적어 관청 혹은 관리에게 제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웃한 집 사이에도, 같은 통호 안에서도 위 지도와 간추린 지명에서 보는 것처럼 세부 지명(계, 동)이 제각각이다.
1906년 광무 호적을 기준으로 할 때, 노란색 글자는 순화방(順化坊)이고 하단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백송 왼쪽의 녹색 글자 지역만 통의방(通義坊)이다. 즉, 통의방 4통 2호, 통의방 4통 1호로 표시된 부분과 동척 부지 구역을 제외한 지적원도의 전 지역이 순화방이며, 이는 상편 1번의 〈도성대지도〉와 분명한 차이점이다.
〈도성대지도〉에 따르면 사재감이 있던 구역 위쪽(후동계)과 오른쪽 상단 지역(왕정동), 그리고 아래쪽의 창의궁 지역(연추문계)이 모두 의통방 관할이었으며, 이처럼 북쪽, 서쪽, 남쪽이 모두 의통방으로 둘러싸인 사재감 소재지 역시 의통방에 속하였을 확률이 높다. 〈도성대지도〉와 〈광무호적〉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의통방 왕정동계(王井洞契) 지역 →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 왕정동(王井洞) 일대로 편입
의통방 후동계(後洞契) 지역 → 순화방 사재감계 대동(帶洞), 매동(梅洞) 일대로 편입
의통방 연추문계(延秋門契) 지역 → 의통방(통의방) 창의궁계(彰義宮契) 또는 사재감계
의통방의 관할 면적이 현저하게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 사재감 청사의 이동이 없었을지 모른다. 즉, 지도에서 사재감 청사가 서향(西向)으로 표기된 것은 사재감 대문으로 향하는 골목 방향을 중점으로 그린 때문이고, 각종 문헌에 사재감 위치 변동이 기재된 것은 동일한 지점(사재감 청사 위치)의 행정구역이 의통방에서 순화방으로 조정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1808년(순조8)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의 훈련도감(訓鍊都監) 수성자내(守城字內) 항목에 각 군영별 한성부 방어[守城] 구역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 문서에 등장하는 순화방, 의통방의 계 명칭은 아래와 같다.
순화방(順化坊) : 사재감계(司宰監契)
의통방(義通坊) : 왕정리계(王井里契), 후동계(後洞契), 연추문계(延秋門契)
1870년경 간행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의 수록 내용도 연추문계가 영추문계(迎秋門契)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동일하다. 정조 시기에는 순화방이 사재감일계(司宰監一契), 사재감이계(司宰監二契) 또는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로 되어 있기도 하다. 같은 시기 의통방 후동계(後洞契)는 왕정후동계(王井後洞契)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행정체계가 1895년(고종32) 윤5월에 한성부 행정구역 개편 후 아래처럼 변화된다.
순화방(順化坊) :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통의방(通義坊) : 창의궁계(彰義宮契)
왕정리계, 후동계 지역이 순화방계 아래로 흡수되고, 의통방(통의방)의 3계 중에 연추문계의 후신인 창의궁계만 남은 것이다.
정조 연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1781년(정조13) 당시 팔도 전 지역의 호구가 매우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과 1906년 광무호적의 호적표 기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상평방(常平彷), 연희방(延禧坊), 연은방(延恩坊) 등 3개 방을 제외한, 북부(北部) 한양도성 성내(城內) 9개 방을 담았다.
방명(坊名) | 1789년(정조13) | 1906년(광무10) | 증감(%) | 비고 |
순화방(順化坊) | 1,167호 (2계) | 1,391호 (2계) | +224호 (+19%) | |
안국방(安國坊) | 229호 (1계) | 177호 (1계) | -52호 (-22%) | 안동별궁 소재 |
가회방(嘉會坊) | 252호 (1계) | 354호 (1계) | +102호 (+40%) | |
의통방(義通坊) | 158호 (3계) | 36호 (1계) | -122호 (-77%) | |
관광방(觀光坊) | 652호 (3계) | 612호 (4계) | -40호 (-6%) | 종친부 소재 |
진장방(鎭長坊) | 346호 (1계) | 401호 (1계) | +55호 (+16%) | |
양덕방(陽德坊) | 124호 (1계) | 165호 (1계) | +41호 (+33%) | |
준수방(俊秀坊) | 204호 (1계) | 326호 (1계) | +122호 (+60%) | |
광화방(廣化坊) | 202호 (1계) | 254호 (1계) | +52호 (+25%) | |
합계 | 3,334호 (14계) | 3,716호 (13계) | +382호 (+11%) | 성내(城內) |
순화방 지역이 1789년 1,162호에서 1906년 1,391호로 100여 년 사이에 224호가 증가한 반면, 통방 지역은 122호가 감소하여 증감비가 -77%에 달하였다. 다른 대부분 지역이 한성부의 인구 증가에 맞물려 호구(戶口)가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양도성 내 중심부의 거주 가능한 필지는 건물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행정구역 변동 없이) 필지 합병 또는 분할만으로는 순화방과 의통방 지역에서 이러한 호수 증감이 일어나기 어렵다. 위 표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동서남북의 4개 부(部)에 막혀있던 중부(中部)는 1789년 4,082호에서 1906년 3,972호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한양도성 안쪽 지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벽 가까이 외곽으로 확장될 여유가 있었던 북부의 여러 방(坊)과 대비된다. 3
참고로, 1795년(정조19) 6월 당시 순화방 2계의 원호(元戶)는 1,127호(戶), 의통방 3계의 원호는 안국방(安國坊)의 안국동계(安國洞契)를 포함하여 583호 규모였다. 의통방의 3계(왕정리계, 후동계, 연추문)와 안국방 1계(안국동계)의 호수 합계 583호에서 안국동계 소속 약 230호를 제외하면 의통방 3계의 호수는 약 350호였던 것이 된다. 이 350호에는 1788년(정조12) 10월에 신설되었던 상평방(常平坊)의 원호가 일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서 상평방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실린『일성록(日省錄)』의 해당 기사에 숫자 오류가 여럿 있으므로 기록 자체의 신뢰성에 일부 의문이 있다.) 4
의통방의 창의궁계(연추문계) 자체도 영조, 정조, 순조 시기의 창의궁 기능 확장에 따라 주변 여러 민가(民家)가 점차 창의궁 부지로 편입 5되었기 때문에 일반 가옥은 1906년경에 불과 36호만 남았을 정도로 그 권역이 축소되었다. 6 순화방이 130통 1,391호였던 것과 비교하면, 4통 36호로 된 통의방은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1909년 12월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청원을 탁지부(度支部)에서 받아들여 통의방에 있던 창의궁(彰義宮) 부지 5,999평과 창의궁 북동쪽의 2개 필지(92평)를 매각 후 동척 사택 부지로 제공하였기 때문에 통의방 지역은 다시 줄어들었다. 7 8
위에 기술한 것처럼 의통방(통의동) 관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지만, 의통방이 통의방(1894)으로 개칭된 후, 일제강점기 시기의 통의동(1914), 통의정(通義町, 1936)을 거쳐 현재는 행정동 사직동(社稷洞) 아래에 법정동인 통의동(1946)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순화방은 동명으로 남지 못했다.)
11번 이미지 - 사재감계회도(司宰監契會圖), 1605년
위 그림은 1605년에 제작된 〈사재감계회도(司宰監契會圖)〉이다. 1592년(선조25)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1597년 종결된 지 7년 정도가 지난 시점의 모습으로, 사재감 청사가 의통방에서 순화방으로 이전했다고 하면 9번 이미지의 ㉠ 위치일 것이므로 대문(大門)과 대청(大廳)이 서향이고, 만일 사재감 청사의 이전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 위치이므로 남향(南向)이다.
계회도의 모습과 상편 7번의 사재감 청사 실측 도면을 비교하면 중문(中門) 역할을 하는 내담(內墻)이 눈에 띈다. 그리고 대청의 평면도 다르고 기타 부속 건물들의 배치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대문 앞에도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으므로, 이 계회도는 의통방 시절의 관청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쪽에 작은 문이 있고 그 위로 다시 담이 있는 것을 보면 160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볼 때 사재감 청사는 ㉡ 위치에 계속 있었을지 모른다는 놓지 않게 한다. 북문(北門)을 사재감 북쪽의 도로(현재의 자하문로 10길)로 통하는 문, 그 위의 담을 길 건너편 민가 일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문을 비롯한 주면 풍경은 계회도가 회화라는 점을 참작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내부 건물의 형태와 배치는 3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여러 차례 변화되었을 것이니까.
12번 이미지 - 통의동 사재감 (동아일보, 1924년 7월 19일)
위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동아일보(東亞日報) 1924년 7월 19일자 기사의 일부분이다. 연재물 제목은 '내동리 명물(名物)', 당시 경성부(서울)의 여러 동내 명물을 소개하는 짧은 코너였으며, 1929년에 『경성백승(京城百勝)』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기사 오른쪽에 사재감 건물의 사진이 실려 있다. 기사가 작성된 1924년 당시에는 사재감에 있던 건물 대부분이 헐려 공터가 되었기 때문에(상편 6번의 1921년 경성지형도 참고), 그 이전에 촬영된 사진이었을 것이다. 대청 혹은 신당(부군당)으로 추정되나, 사재감의 어떤 건물인지는 기사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9
기사 본문을 현대어로 윤색하여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通義洞 司宰監 (통의동 사재감)
◇ 사람이 사는 데 없어서 못쓸 요긴한 물건이 많습니다만 어렴시수(魚鹽柴水, 물고기와 소금, 장작, 물)가 제일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살 땅을 고르자면 첫째 이 네 가지가 좋으냐 언짢으냐 묻습니다. 물은 흔한 것이니까 고만두고, 여렴시같이 요긴한 물건은 또다시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이 요긴할 물건을 궐내에 공궤하던 관청이 사재감입니다. 제일 존귀한 곳에 제일 요긴한 물건을 공궤하는 관청이니 관청중 제일가는 관청이 이 사재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의동 명물입니다.
◇ 사재감이 사재감 노릇을 못 하게 된 뒤에 잠깐 마대(馬隊, 마병 부대)가 들어섰고 또 오랫동안 공청으로 있었답니다. 지금은 되지 못한 채 하나만 남아있고 모두 빈 터전이 되었는데, 이 터전의 주인이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 하는 일인이랍니다. 애호박 덩굴지고 아주까리, 옥수숫대 우뚝우뚝 선 밭 모퉁이를 돌아서 늙은 회화나무 밑에를 가면 전에 부군당이 있던 터전이 있습니다. 이 부군당의 부군은 고려 공민왕이더랍니다. 이 부군이 영험이 있어서 부군당 물건을 훔쳐 가는 도적놈은 담에도 꼭 붙여놓더랍니다. 그 영검도 지금은 물을 곳이 없게 되고 회화나무 그늘이 동네 늙은이의 졸음터가 될 뿐입니다.
8번 〈경성지형도〉에서 살펴본 사재감 청사 내의 활엽수는 회화나무였다. 신당(부군당)에서 모시던 대상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었고, 예전 사재감 청사 부지가 1924년 당시에는 고리대금업을 하던 일본인의 소유로 되어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마대(馬隊)는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하는 부대, 즉 기병대(騎兵隊를 가리킨다. 단, 사재감 터에 있었던 마대는 기병 전투부대가 아니고 말이 끄는 수레 중심의 보급부대인 치중마병대(輜重馬兵隊)였다.
사재감 관청 폐지 이후의 사재감 청사 터 변동 내역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882년(고종19) 12월 29일 - 사재감 폐지
1896년(건양01) 06월 08일 - 친위대(親衛隊) 치중마병대 창설 (100명 규모)
1900년(광무04) 12월 29일 - 치중마병대 해체 (치중병 1개 중대 설치)
1904년(광무08) 02월 23일 - 일본군 치중병마(輜重兵馬) 부대가 북장동 마병대영으로 이전
1908년(융희02) 11월 00일 - 사재감 청사 터의 관리 관청 변경 (군부에서 탁지부로)
사재감 기능이 폐지되면서 그 터는 공터가 되었는데, 1896년에 치중마병대가 창설되어 위 신문기사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잠시 마대영(馬隊營)으로 사용되었다. 10번 지도의 설명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마병영내동(馬兵營內洞)' 명칭이 1906년 호적표에 남아 있었다.
상편의 7번 실측 도면에 등장하는 대청 동쪽의 마구간 5칸 반과 주접실 남쪽의 마구간 4칸은 사재감이 마대영으로 전용되었던 실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재감이 본래 궐내에 물고기, 소금, 장작 등을 공급하는 관청이었으나, 그러한 업무를 행정적으로 담당한 관청일 뿐이므로 대청 바로 옆에 마구간을 둬야 할 정도로 본청 차원에서 많은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1904년에 일본군 치중병마 부대가 북장동(北壯洞) 마병대영으로 옮겨갔다. 상편 3번의 〈한국경성전도〉에서는 상편 5번의 〈경성부관내지도〉에서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지점에 '北壯洞(북장동)'이라는 표기가 있다. 그러나 1904년의 북장동 마병대영은 사재감 터에 있던 대한제국 친위대의 마병대영을 가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10번 지적원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재감 일대도 흔히 북장동이라 하였고, 치중대(보급부대)이기는 하지만 실제 마병대가 사재감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13번 지도 - 사재감(司宰監) 인근 지적도 필지(筆地) 변천
위 지도는 시기별 지적도이다. A 지도는 1912년 〈경성부지적원도〉에 1908년 사재감 실측 도면을 겹친 것이고, B 지도는 1912년 시점의 필지별 지번(地番), C 지도는 1929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壹筆每地形明細圖)〉의 사재감 터 부분, D 지도는 현대 지도상의 지번 번호이다.
사재감 터는 통의동 91번지였는데, A 지도와 B 지도를 살펴보면 사재감 대문 오른쪽으로 작은 부분도 통의동 91번지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자감 부지(대형 91번지)와 대문 우측의 작은 필지(소형 91번지)를 합쳐서 790평 규모였다. 10번의 지적원도 이미지와 비교하면, 통의동 83번지는 조선시대(대한제국) 통호 번호로 순화방 사재감계 71통 1호, 93번지는 70통 7호, 95번지는 70통 5호, 103번지는 69통 9호, 106번지는 63통 10호, 129번지는 66통 2호, 130번지는 66통 7호였다.
이 사재감 부지(통의동 91번지)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중후반에 C 지도처럼 여러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도시한옥(개량한옥, 연립한옥)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다시 필지가 합병되고 분할되어 D 지도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D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기재한 숫자가 예전의 사재감 터 지번이다. (예 : 33은 종로구 통의동 91-33번지를 뜻함)
13번 지도 - 사재감(司宰監) 필지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년)
위 지도는 앞의 12번 지도 C번 지적도를 확대한 것이다. 국유지에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소유로 넘어간 통의동 91번지 사재감 청사 부지가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2개 골목으로 나뉜, 91-1번지부터 91-16번지까지의 16개 필지로 분할된 상황이다. 사재감 대청은 91-9, 신당은 91-12, 주접실 건물은 91-15, 대문은 91-6번지에 속하였다. 모든 건물이 헐려 공터가 된 지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지만.
15번 지도 - 사재감(司宰監) 청사 평면도 : 현대 지도
위 지도는 현대 지도에 사재감 청사 도면을 중첩한 것이다. 사재감 대청(大廳)은 ㉠ 건물과 ㉡ 건물 사이에, 신당인 부군당(府君堂)은 ㉢ 건물 바로 앞의 자하문로 10길 위에, 외대문(外大門)은 ㉣ 건물 바로 왼쪽에 있었다. 북문, 내담은 사재감 청사 위치가 이전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사재감계회도〉를 토대로 위치를 추정한 것이다.
사재감 터 표지석이나 안내판을 설치한다면, 자하문로 10길 도로에 면한 ㉠ 또는 ㉢ 건물의 북쪽 인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안내판에 사재감 평면도도 같이 넣으면 좋을 것 같다.
※ 사재감 청사의 정확한 위치 고증은 상편에 수록한 7번 사재감 청사 실측 도면이 학계에 공개되었을 때부터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도면이 공개된 때가 빠르면 2005년이지만, 그동안 사재감 청사를 통의동 91번지로 특정하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사재감 청사가 지명도 낮은 3급 관청이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사재감 청사의 위치 이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그리고 사재감 터의 변천과 여러 시기별 지도에 등장하는 주변 지역에 대한 내용을 짧게나마 풀어본 것에서 본 글의 작성 의미를 찾아봅니다.
※ 사재감 청사 위치는 필자가 처음 밝혀낸 것이 아닙니다. 녹색창에서 '사재감 통의동 91번지'로 검색해 보면 어느 카페의 게시물 제목으로 '궐외각사의 하나인 사재감 자리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91번지'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단 본문 내용이 제목과 전혀 상관없고, 게시물이 올려진 카페도 뜬금없는 곳이기에, 그리고 계정의 아이디도 자동생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마도 광고용 계정이 어떤 프로그래밍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등록한 게시물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필시 어떤 책이나 문서, 게시물에서 제목 내용을 가져와 올릴 것일 테니, 게시물이 등록된 2014년 3월 이전에 이미 사재감 청사 위치가 누군가에 의해 고증되었던 것 같습니다. (논문, 발굴조사보고서, 학계 문헌 등에서는 현재까지 사재감 위치를 통의동 91번지로 지목한 부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시는 분 계시면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 상편과 본 하편의 문체가 많이 다릅니다. 어떤 것이 편하신지 모르겠네요. 5천 만이 넘는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조선시대 관아 건축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 100명이나 될까 싶은데, 그래서 그런지 글에 피드백이 거의 없어서 어떤 식으로 글을 올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혼자만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누구나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또 최근 글에서 주석을 기재하다 보니 글이 점차 논문 분위기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가능하면 가벼운 형식으로, 간결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 오늘날 단어로는 침엽수(針葉樹) [본문으로]
- 오늘날 단어로는 활엽수(闊葉樹) [본문으로]
- 고종 연간에 본격 건립된 안동별궁(安洞別宮)이 있었던 안국방, 역시 고종 연간에 기능과 규모가 확장된 종친부(宗親府), 의정부(議政府)가 있었던 관광방 정도만 일반 가옥의 수가 감소하였다. 별궁, 관청과 일부 세도(勢道) 가문이 부지를 확장하면서 인근 민가의 가대(家垈, 집터)를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일성록(日省錄)』, 정조19년 을묘(1795) 6월 17일(병신) 기사 [본문으로]
- 창의궁 경내에 1729년(영조5)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당인 효장묘(孝章廟) 건립, 1752년(영조28) 효장묘 동쪽에 의소세손(懿昭世孫) 사당인 의소묘(懿昭廟) 건립, 영조 연간의 장보각(藏寶閣) 건립, 1776년(정조즉위년) 의소묘의 효장묘 자리 이전. 1830년(순조30) 예전 의소묘 자리에 효명세자(孝明世子) 문호묘(文祜廟) 건립 등이 있었다. [본문으로]
- 영조 임금의 잠저였던 창의궁의 주소는 (상편의 각주에서 살펴본 것처럼) 의통방 연추문계 7통(統) 5호(戶)였다. 각 통은 10호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창의궁 권역에 1통부터 7통까지만 있었다고 해도 영조 초기에는 이곳에만 60~70호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06년경에는 통의방(의통방)에 1통부터 4통까지만 존재했고, 특히 창의궁동(彰義宮洞) 지역의 2통은 1호부터 7호까지가 결락되어 겨우 3호만 남아 있었다. [본문으로]
- 통의방 전체 36호 중에 창의궁계(彰義宮契), 창궁계(彰宮契), 창의계(彰義契), 창의동(彰義洞), 창의궁동(彰義宮洞) 기재는 9호에 불과하다. 나머지 26호는 사재감계(司宰監契),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사재감하계(司宰監下契), 하패계(下牌契)이며, 1호는 호적표에 매동계(梅洞契)로 적었다. [본문으로]
-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부지는 1912년에 6,381평(5,999+92+290)으로 확장된다. (위 10번 이미지 참고) [본문으로]
- 189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사재감 일대를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으나 원거리에서 경복궁 서촌 일대 조망하여 앞뒤로 찍은 것이기에 사재감 청사의 구조나 건물 형태를 식별하는데에는 한계가 뚜렸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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