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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0월에 올린 '경상좌수영, 동래도호부… 다대포진 객사 이야기' 글에서 1890년 무렵의 동래(東萊) 다대포진(多大浦鎭)[각주:1] 사진 이미지를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논문, 연구, 언론보도 등에서는 조선시대 고지도, 문헌, 일제강점기 초기에 제작된 지적도, 현재 답사, 발굴자료 등을 통해서만 다대포진의 외형과 건물 배치에 관해 논할 수 있었으나, 이 사진의 발견으로 인해 해당 논의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다대포 남쪽의 몰운대(沒雲臺)에 있는 현존 다대포진 건물[각주:2]이 '다대포진 객사(客舍)인가, 아니면 동헌(東軒)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외에 다대포진의 원형을 살려 진성의 전체 또는 일부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2021년 첫 글은 다대포진의 실체에 관한 한 발 더 들어가 보는 내용이다. (비슷한 내용을 보다 자세하기 다루고 있기에 일부 중복되는 내용이 있다.)

경상도 동래도호부 다대포진(多大浦鎭) 전경1번 이미지 - 경상도 동래 다대포진(多大浦鎭) 전경


위 1번 이미지는 이전 글에서 살펴봤던 사진이다. 1880년대 또는 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며, 주요 건물의 위치를 화살표와 글자로 표기해 보았다. (2020년 10월 글의 11번 이미지에 표기한 건물 추정에서 서평선소 등의 위치를 보정하였다.)

사진 중앙에 객사 건물이 있고, 그 뒤쪽(평면상에서는 북북서 방향)으로 내아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보인다. 또 객사 왼쪽(서쪽)에 비교적 큰 기와 건물이 두 채 보이는데, 이들 중 하나는 동헌(東軒)[각주:3]으로 보인다. 우측 하단에 서평선소(西平船所)가 있는데, 이는 서평진(西平鎭)[각주:4]의 선소(船所)[각주:5]를 뜻한다. 당시 기와집이 모두 관아 건물이었기 때문에[각주:6] 사진에 보이는 곳(필지)이 선소일 가능성이 높다. 그 앞에 서평진의 선창(船艙)[각주:7]이 있다. 붉은색 화살표는 객사의 외사문(外舍門, 바깥채에 있던 문)으로 보인다.[각주:8]

사진에 표기된 각 숫자는 아래에서 살펴볼 지적원도상의 지번(地番, 지적도상의 토지에 부여한 필지 번호)이다. 이 지번들이 이 사진을 다대포진이라고 추정한 근거가 된다. 현재 지적도의 지번과도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도 사이트나 앱에서 '다대동 200번지' 등으로 검색하면 해당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83?'로 표기한 부분은 다대교회(多大敎會) 주소지[각주:9]로 추정된다.[각주:10] (위 사진만 보고 각 지번을 추정한 것이기에 일부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참고로, 다대진에 임명되었던 첨절제사의 공식 직함은 '다대포수군첨절제사 겸 동래감목관(多大浦水軍僉節制使兼東萊監牧官)'이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동급(이지만 지휘 체계상으로는 하급자)인 정3품 당상관 무관(武官, 무과 급제자)이 임명된다. 다대첨사 관직은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의 고위 무관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처야 하는 직책인 '변지이력(邊地履歷)'으로 운용되었다.

경상도 동래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 전경2번 이미지 - 경상도 동래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 원경


위 2번 이미지 역시 이전 글에 올렸던 것을 다시 편집한 것이다. 두 장의 이미지, 즉 왼쪽의 일러스트와 오른쪽의 사진을 합성한 다대포진 전경 이미지인데, 이번에는 ㉠ - ㉡ - ㉢ - ㉣의 4개 지점을 따라 노란색 선을 겹쳐 보았다. 이 선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던 다대포진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도로[각주:11] 축선이다. 각 번호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 해안선을 따라 있는 도로와 다대포진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만나는 작은 삼거리
㉡ 다대포성 남문(南門)인 장관루(壯觀樓)[각주:12]
㉢ 대대포성 원문(轅門)[각주:13]인 진남루(鎭南樓)
㉣ 객사 위치 추정을 위해 표시한 지점 : ㉡ - ㉢ 사이의 간격만큼[각주:14] ㉢에서 북쪽으로 연장한 지점


사진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을 대다포진의 객사(客舍, 客館)인 회원관(懷遠館)[각주:15]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문헌상의 객사 규모(15칸)와 사진의 건물 규모(정면 5칸, 측면 3칸)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2) 지방 관아(官衙, 관청), 군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 (일반적으로) 객사였다.
3) 19세기에 제작된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다대포진의 객사가 진영(鎭營) 중앙부에 그려져 있었다. 사진의 건물 위치와 대략 같다.

핵심 근거는 1)번이다. 이외에도 이 건물이 1904년(광무8?)에 다대진 자리에 개교한 사립실용학교(다대초등학교의 전신)로 활용되었다고 추정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조선왕조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지방 관청의 객사 건물이 교육기관 시설로 대거 활용되었는데,[각주:16] 다대진 내에서 가장 넓은 객사 건물이 실제 교사(敎舍, 교실)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외에 사립실용학교를 찍은 사진의 촬영 위치에 대한 추정 문제도 있다(이 부분은 7번 이미지에서 설명 예정).


다다포진성 전경 아래쪽으로 서평진의 선소와 선창이 보인다. 1번 이미지에서 추정한 위치이다. 서평진은 다대포진 북동쪽에 있던 작은 군영으로, 조선 후기에는 종4품 만호(萬戶)[각주:17]가 다스리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바닷가인 다대포에 선소와 선창을 두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선창에 전선(戰船)[각주:18] 1척, 병선(兵船)[각주:19] 1척, 사후선(伺候船)[각주:20] 2척 등이 매여 있어야 했지만, 이 사진이 촬영되던 시점에는 서평진이 폐지된 상태(유력)이거나 진이 존재하더라도 전선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각주:21]

작은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은, 멀리 보이는 다대진성의 북문(北門)인 숙위루(肅威樓)이다. 사진에 표기한 각 숫자는 1번 이미지의 경우와 같이 성밖 남쪽 몇몇 건물의 지번을 추정한 것이다.

임진전란도(任辰戰亂圖) 다대진성(多大鎭城) 전투3번 이미지 - 1834년작, 임진전란도(任辰戰亂圖) 다대진성(多大鎭城) 부분


위 3번 이미지는 1834년에 그려진 〈임진전란도(任辰戰亂圖)〉[각주:22]의 다대포진 부분이다. 다대진성(多大鎭城) 전투는 당시 다대포첨절제사였던 윤흥신(尹興信, 1540-1592)의 지휘 아래에 이루어진 전투로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발발 당일[각주:23]인 1592년 4월 14일에 왜군이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후, 일부 부대를 부산진 서남쪽의 다대포진에 보냈는데 다대진성 군병들이 이러한 왜군의 1차 공격(또는 정찰대 접근)을 격퇴하여 비록 소규모이지만 임진왜란 최초의 조선군 승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튿날인 15일에 진행된 본격 전투에서 치열한 항전 끝에 함락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주:24]

이 그림이 임진왜란이 끝난 지 230여 년 후에 제작된 것이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다대포진성 모습을 완벽하게 묘사한 것은 아니다. 다수 논문에서 추정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릴 당시(19세기 초)의 진성(鎭城) 형태를 기본으로 임란 시기의 객사 위치를 추정하여 그려 넣었을 것이다. '다대객사(多大客舍)'로 표시된 객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전쟁 후에 원래 위치에서 아래쪽 지점에 다시 건축되었다.[각주:25]

객사 이외에 한글로 표기한 부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진아(鎭衙) : 다대포진의 관아, 즉 진헌(鎭軒, 동헌)이다.
2) 동문(東門) 패인루(沛仁樓)
3) 서문(西門) 영상루(迎爽樓)
4) 남문(南門) 장관루(壯觀樓)
5) 북문(北門) 숙위루(肅威樓)
6) 원문(轅門) 진남루(鎭南樓)
7) 연못 : 다대첨사 윤흥신 순절(殉節) 터


이 〈임진전란도〉 좌측 상단에는 다대진 성내에 있었던 윤공단(尹公壇)의 당시 모습도 그려져 있다. 위 이미지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그림이다. 북쪽이 윤흥신 장군에게 제례를 지내는 정단(正壇)[각주:26]이고, 서쪽에 당시 전투에서 생을 마감한 백성들에게 제례를 지내는 서단(西壇)[각주:27]이며,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싸 있고 남쪽에 작은 문(門)이 있었다. 이 윤공단은 1765년(영조41)에 마련되었고, 이후 1841년(헌종7)에 '첨사윤공흥신순절비(僉使尹公興信殉節碑)'가 세워졌다.

윤공단이 자리한 곳은 소실 전 객사 동쪽의 연못 위치이다. 다대첨사 윤흥신이 결전 끝에 서제(庶弟) 윤흥제(尹興悌, ?-1592)와 함께 연못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기 때문에 연못이 있던 자리에 제단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1872년 지방도 다대진지도(多大鎭地圖)4번 - 1872년, 다대진지도(多大鎭地圖)


위 4번 이미지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72년(고종9) 제작 지방도 가운데 〈다대진지도(多大鎭地圖)〉의 일부분이다. 한글로 표시한 부분을 각각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앞의 3번 그림 설명과 다수 중첩된다.)

1) 동문 패인루(沛仁樓)[각주:28]
2) 서문 영상루(迎爽樓)
3) 남문 장관루(壯觀樓)
4) 북문 숙위루(肅威樓)
5) 객사 회원관(懷遠館)
6) 아사(衙舍) : 다대포진 동헌(東軒) 또는 내아(內衙)
7) 윤공단(尹公壇) : 다대첨사 윤흥신 제향 제단
8) 선소(船所) : 다대진 선박의 운영, 수리를 위한 건축물
9) 선창(船艙) : 다대진 전선의 정박, 수리를 위한 시설물
10) 서평선소(西平船所) : 다대진 동북쪽에 있던 서평진의 선소
11) 서평진(西平鎭) 선창(船艙) : 서평진의 선창
12) 장대(將臺) : 남림(南林)에 있던 건물[각주:29]
13) 서평진(西平鎭) : 다대포진 동북쪽에 있던 부산포진관(釜山浦鎭管) 서평포수군만호영(西平浦水軍萬戶營)
14) 야망대(夜望臺) : 다대포 동남쪽에 있던 대(臺), 밤에 멸치 떼를 살피던 곳(망대)이라고 함[각주:30]
15) 몰운대(沒雲臺) : 다대포 서남쪽 몰운산(沒雲山)에 있던 대
16) 주산(主山) : 다대포진 북쪽의 아미산(峨嵋山)에서 이어진 산
17) 당산(堂山) : 다대포진 우측(지도에서 볼 때는 왼쪽)이 있던 낮은 산
18) 남림(南林) : 다대포 남쪽에 쌓은 제방에 조성한 숲[각주:31]
19) 죽도(竹島) : 다대포 동쪽에 있던 작은 섬


아사(衙舍)라는 글자가 표기된 곳은 붉은색 점으로 표시한 건물의 지붕 위쪽이다. 그러나 지도상에 보이는 건물 가운데 객사 다음으로 제대로 된 형태를 보이는 것은 녹색 점으로 표시한 건물이다. 아사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동헌(東軒, 첨절제사가 공무를 보는 청사)을 뜻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동헌과 내아(內衙, 첨절제사 거주 공간)를 포함하여 지칭하거나 동헌과 구분되어 내아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글자만 취하면 붉은 점이 동헌이고, 건물 모습을 고려하면 녹색 점을 동헌, 붉은 점을 내아로 추정할 수 있다.

북문 바로 아래의 '子坐午向(자좌오향)'은 전통 풍수지리 방향으로 정남향을 뜻한다. 객사와 남문 사이에 원문(轅門)이 보인다.

1913년 동래 다대포진(多大浦鎭) 지적원도5번 이미지 - 1913년 동래 다대포진(多大浦鎭) 일대 지적원도


위 5번 이미지는 다대포진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1913년 측량 지적원도(地籍原圖)[각주:32]이다. 1번과 2번 이미지의 사진 및 일러스트는 녹색 화살표 지점과 방향(시점)에서 촬영되고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다대진 선소, 선창과 서평진 선소, 선창, 그리고 야망대(夜望臺) 위치와 몰운대(沒雲臺)로 가는 방향을 표기하였다.

다대진성에서 가장 넓은 필지는 다대포진성 글자 위의 1240번지이다. 다대포진 관아 건물의 상당수가 위치했던 곳이다. 다대진성 오른쪽 위에 있는 밭[田] 지목(地目)의 159번 필지는 바로 다음 이미지에서 설명한다.

부산 다대포항 항공촬영 사진 (일부)6번 이미지 - 부산 다대포항(多大浦港) 일부 사진 (1950년대)


위 6번 이미지는 다대포진의 동북쪽 일대를 촬영한 사진이다. 1950년대에 촬영된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 항공 사진의 일부로 보인다. 왼쪽 위의 작은 사진은 다대포사립실용학교(多大浦私立實用學校) 교실 용도로 사용되던 시절(인 1904년 또는 일제강점기 초기)[각주:33]에, 현재 몰운대에 이전해 있는 건물을 찍은 사진이다. 객사인지, 동헌인지 하는 논란이 있는 건물의 옛 모습이다.

사진에 표기한 각 숫자는 지번이다. 필자 추정이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다. 5번 지적도에서 159번지가 있는 곳을 일치시키면 이 사진이 촬영된 곳이 어떤 지역인지 대략 알 수 있다. 174번지와 164번지, 170번지와 166번지 사이를 보면 다디진성의 동쪽 성벽(으로 보이는 축조물)이 사진 촬영 당시까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대진성 성곽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1234번지 임야[林]에 현재 윤공단[각주:34]이 소재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윤공단 정상 위치로 향하는 꽤 넓은 길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지점(지도 바깥에 위치)에 윤공단이 있었다. 다대실용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1934년 추계 운동회[각주:35]를 찍은 사진을 보면 윤공단의 순절비와 담장이 보인다.


왼쪽 위 사진의 각 화살표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 보라색 화살표 : 초가집 지붕이 보인다. 사진 촬영 위치(카메라 설치 높이)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2) 녹색 화살표 : 건물 뒤쪽으로 축대가 보인다.
3) 검은색 화살표 : 기와지붕 뒤쪽에 나무가 보인다.
4) 형광색 화살표 : 사진을 촬영한 위치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화살표. (7번 이미지 참고)

7번 이미지 - 1913년 동래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 지역 지적원도


위 7번 이미지는 2번 이미지에 표기한 ㉠ - ㉡ - ㉢ - ㉣ 축선을 5번의 지적원도에 나타낸 것이다. 사진과 지적도를 비교하면 1번 사진에서 보이는 객사 건물은 ㉣의 바로 왼쪽 위에 있었다. 객사 건물 크기(면적)는 현재 몰운대에 있는 실제 건물의 크기에 최대한 가깝게 그렸다.


학계 논문에서는 원문(轅門, 진남루) 위치를 붉은색 화살표 부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녹색 점선의 사각형 지역(또는 사각형 아래에 걸친 한자 國 지점)에 객사(客舍)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객사 위치 추정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객사일 경우에는 얼추 맞지만, 1번과 2번 사진에서 보이는 객사 위치, 즉 보라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 지점의 객사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객사 동쪽에 활터[射基]가 있었다고 하므로,[각주:36] 노란색 축선을 중심으로 객사 동쪽(① 바로 아래쪽)은 비교적 한가하였을 것이다. 이 활터 위치는 윤공단 근처일 수 있지만.

객사 뒤쪽에 있던 축대(6번 이미지의 녹색 화살표)는 관련 논문에서 ② 위치로 추정하나, 큰샘 형태와 2번 사진을 고려하면 ① 지점이 실제에 가까웠을 것이다.


지도상에 보라색의 '國(국)'으로 표기한 필지는 지적도 제작 당시에 국유지(國有地), 즉 예전의 다대진 관아 부지였다. 1913년 당시에 국유지가 아닌 필지도 예전에는 관유지(官有地, 관아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기와 건물이 다수 보이는 190번지(1번 사진에서 '190?'으로 표시된 곳) 등이 대표적이다.[각주:37]


원문과 객사 이외에, 위 지적도 이미지에 표기한 각 지명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 윤공단(尹公壇) : 녹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지점이 바로 제단과 순절비가 있던 곳이다. 부산광역시 유아교육진흥원 내에 있는 유아체험장 건물 입구 왼쪽에 2004년에 다대초등학교 총동창회가 다대초등학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순절비 터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위치는 옅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지점이다.) 대체로 이 위치를 예전 윤공단 터라고 보면 된다.

2) 동헌(東軒) : 옅은 노란색으로 채색된 지역이 1번과 2번 사진에 담긴 여러 관청 건물들이 산재한 곳이다. 4번 이미지 〈다대진지도〉에서 붉은색과 녹색으로 표시한 점에 해당하는 건물을 1번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과 비교하여 지적도에 표기해 보았다. 동헌 건물은 이 두 점 가운데 하나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또는 1139번지에 소재).

3) 내아(內衙) : 첨절제사가 숙식을 해결하는 거주 공간인 내아 건물은 아마도 이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번 사진에서 '내아?'로 표시한 건물군이다. 또는 붉은색 점 지점일 수 있다.

4) 큰샘 : 다대진 군사들이 이용하던 샘물이라고 한다. 수량이 풍부해 인근 주민과 어부들도 함께 이용했다고 한다. 이 큰샘 왼쪽 아래, 녹색 십자 표시한 지점에 선정비(善政碑)[각주:38] 1기가 있었다. 현재는 윤공단으로 옮겨져 있다. 아마도 이 지점, 큰샘 왼쪽의 비교적 넓은 도로변에 각종 불망비(不忘碑), 선정비가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작은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지점이 빨래터로 이용되었다고 하는 작은 샘(아래샘)이다.

5) 선소(船所) : 다대포진 선소는 857번 국유지에 있었다. 선소에는 대변소(待變所)[각주:39] 건물인 진남정(鎭南亭)이 있었다. 이 필지 바로 왼쪽 성벽에 1칸 규모의 서남간문(西南間門)이 있다. 진성 안에서 선소와 손쉽게 교통하기 위해 만든 문이다.

6) 서평선소(西平船所) : 녹색 채색 필지(211번지)이다.


원문(轅門)이 있는 ㉢ 위치에 형광색으로 표시한 화살표 지점을 6번 이미지 왼쪽 위의 다대포사립실용학교를 촬영한 곳으로 추정한다. 다대포 진지(鎭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실용학교 건물 왼쪽의 초가지붕이 나오려면 카메라를 놓은 위치가 특정한 고도(높이)를 확보해야 한다. 그 때문에 원문의 2층 문루(진남루)가 적당해 보인다.

다대진성의 관아 건물은 모두 기와집이었으므로, 사진에 초가집이 찍힌 것은 1136번지에 있었던 민가(民家)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녹색 원으로 표시한 곳에 있었을 동헌 건물이 실용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면, 그 아래 필지(1137번지)는 국유지이므로 초가집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대진이 폐지된 후에 관아 건물지가 민간에 넘어가고 일부 건물이 초가로 바뀐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러한 실용학교 건물 촬영 위치에 관한 추정도 현존 건물이 다대포진 객사였을 가능성을 증진한다.


1번 사진, 2번 사진에 숫자로 표시한 지번을 위 지적원도의 지번과 비교하면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이를 근거로 이 사진과 일러스트를 다대진성이라고 확신하였다. 동북쪽에 옅게 채색된 지역은 6번 사진에 찍힌 부분이다. 역시 지적원도상의 지번과 사진의 건물을 각각 비교할 수 있다.

부산 다대포항(多大浦港) 1960년대8번 이미지 - 부산 다대포항(多大浦港) 사진 (1960년대)


위 8번 이미지는 학계 논문[각주:40]에 실린 1960년대 촬영 다대포항(多大浦港) 사진이다. '동헌'이라고 표시된 건물이 현재 몰운대로 이전되어 있는 건물이다.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곳이 다대진성의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이므로, 이를 7번 이미지(지적원도)에서 추정했던 1번 사진 등장 건물(객사)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한 자리에 이 '동헌' 건물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규모가 다소 왜소해 보이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큰 학교 건물이 뒤편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동헌 아래쪽에 보이는 일반 건물과 비교하면 여전히 꽤 큰 비중으로 화면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다대포항 전면이 일부 매립되어 1890년대와 1960년대 해안선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보라색 점선으로 표기한 지점이 7번 이미지에서 추정한 객사 위치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위치 추정시에는 각 사진의 촬영 각도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현재 몰운대로 이전되어 있는 건물(다대진 동헌)이 조선후기 다대포진의 객사 건물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남아 있는 의문점은 아래와 같다.

1) 1번 이미지에는 건물 용마루에 양성바름이 되어 있으나, 현재 확인되는 다대사립실용학교 사진(6번 사진의 왼쪽 위)을 보면 양성바름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양성마름은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문루 사례[각주:41]를 보아도 (양성바름이 있었다가 십여 년 후에 없어진 상태가 확인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2) 객사 건물은 사진과 문헌에 모두 전체 15칸(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다대사립실용학교 사진은 전체 10칸(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이는 현재 몰운대에 있는 건물도 같다. 객사를 교실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교실 내부에 가능하면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내부 구조를 고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굳이 외부 기둥까지 구조적으로 제거하고 개조하였을까 하는 점이 걸린다.

3) 건물 크기. 특히 높이가 약간 낮아 보인다는 점도 확인된다. 기단 부분의 확대 모습은 상당히 일치하나, 같이 찍힌 원문, 남문의 폭과 비교해도 현존 건물의 외형이 다소 작아 보인다. 단순히 사진 촬영 또는 인화의 문제일 수 있지만, 건물 규모(크기, 면적)와 관련하여 면밀한 고증이 요구되는 부분으로 보인다. 현재 몰운대 건물의 오른쪽 1칸의 너비가 다른 칸보다 넓은데, 이는 6번 이미지의 실용학교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1번 다대진 객사 사진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식별되지 않는 문제점도 있다. (1번 사진에서 객사 이외에는 현존 몰운대 소재 건물이라고 추정할만한 마땅한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객사 서쪽에 몇 채의 기와 건물이 있지만 그 위치와 규모가 실용학교 사진의 건물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

4) 건물 왼쪽(건물 대청에 앉아서 볼 때는 우측)의 건물이 사립실용학고 촬영 사진과 다른 점도 유의해야 한다. 4칸 규모의 행랑(行廊) 1채가 부속 건물로 있었는데, 다대진성 사진에 보이는 객사 왼쪽 건물은 3칸이다. 다대진성을 촬영한 사진(1번, 2번 사진)이 다대진 관아 건물군의 최종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진 촬영 이후에 건물 배치나 형태와 관련하여 일부 변경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조선시대 동래(東萊) 다대포진(多大浦鎭)9번 이미지 - 경상도 동래(東萊) 다대포진(多大浦鎭) 모습


위 9번 사진은 1번과 2번 사진 및 일러스트의 상세 이미지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노란색 점선)의 객사 사진을 자세히 확대하면 편액(扁額, 건물 현판)의 존재가 어렴풋이 보인다. 또 객사의 건물 외형(벽체 형태, 내부 구조)을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다. 6번 사진의 왼쪽 위에 있는 다대포사립실용학교 사진의 화살표처럼 파란색은 객사 뒤쪽의 축대이고, 객사 뒤쪽으로 검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나무가 보인다. 빨간색 화살표는 1번 사진에서 표시한 객사 대문[外舍門] 부분이다. 대문과 객사 사이의 공간(너비)을 참작하면 정확한 객사 위치 추정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다대진성(多大鎭城) 남문(南門)인 장관루(壯觀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門樓)였다. 문헌에 따르면 동문(東門)인 패인루(沛仁樓)도 6칸이었으므로, 아마도 이 남문과 같은 형태였을 것이다.

다대진성 북문(北門)인 숙위루(肅威樓)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였다. 문헌에 따르면 서문(西門) 영상루(迎爽樓)도 3칸이었으므로, 남문과 동문의 사례처럼 북문과 서문이 비슷한 형태였을 것이다.

다대진(多大鎭) 원문(轅門)인 진남루(鎭南樓)는 남문, 동문처럼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였다. 하단부가 상당한 높이의 목재 기둥으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관아 건축의 외삼문(外三門) 문루(門樓)와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문처럼 용마루에 양성바름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다대진성의 성곽, 도로, 건물 위치 등을 현대 지도에 표기한 이미지를 올려 본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진성 위치10번 이미지 - 다대포진(多大浦鎭) 수군영(水軍營)의 현재 위치


다대포(多大浦) 수군첨절제사진영(水軍僉節制使大鎭營) 성곽 안팎의 주요 건축물 위치를 현재 위치(주소)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1) 다대진성 동문(東門) : 다대교회 교육관이 있는 주차장 바로 위쪽 지점의 도로 (다대동 169-2)
2) 다대진성 서문(西門)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다대포항역(多大浦港驛)의 4번 출구 위치
3) 다대진성 남문(南門) : 다대동 193-2번지 건물 앞의 도로(다대동로53번길) 우측 지점
4) 다대진성 북문(北門) : 다대동 1142번지 비전교회와 1149번지 건물 사이 횡단보도 중간 지점
5) 다대진성 간문(間門) : 다대동 1112번지와 857-2번지 건물 사이의 골목길 지점
6) 다대진영 원문(轅門) : 다대동 192번지 건물 바로 앞 지점
7) 다대진영 객사(客舍) : 부산광역시 유아교육진흥원 남쪽 중앙 (같은 필지에 동헌, 윤공단 등 소재)
8) 다대진 선소(船所) : 다대동 857-1 건물(금천베스트원) 및 857-2번지 건물(우성로얄캐슬)
9) 서평진 선소 : 다대동 221-1번지 및 221-2번지 건물이 있는 곳 (이 서평선소는 추정 위치임)


본 글에서 1번과 2번 이미지를 다대포진성을 촬영하고 그린 사진 및 일러스트라고 추정한 근거를 살펴봤고, 다대포진 원문(轅門)인 진남루(鎭南樓), 객사(客舍) 회원관(懷遠館) 등의 위치를 추정하였으며, 현재 몰운대(沒雲臺에 있는 건물이 '다대포진 객사인가?, 동헌(東軒)인가?' 하는 의문에 관한 필자 나름의 추론과 의견을 기술해 보았다.

이것으로 2021년을 맞이하는 첫 글을 마친다.



[후기] 이상으로 조선시대 남동쪽 최전방의 진성(鎭城)인 다대포첨사영(多大浦僉使營)의 모습 및 현존 몰운대 소재 조선시대 건물의 객사, 동헌 논란에 관해 한층 깊이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현존 건물이 다대포진 객사가 아니라고 해도, 다대진 객사의 실제 모습과 다대진성의 전체적인 형태와 건물 배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점이 본 글의 작은 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언젠가 한 번 다대동 성터를 찾아보고 싶네요.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1동에 소재한다. 부산광역시 유아교육진흥원(예전 다대초등학교 자리)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본문으로]
  2.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대다진(多大鎭) 동헌(東軒). 2020년 7월에 객사(客舍)에서 동헌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본문으로]
  3. 다대포진 동헌 명칭은 수호각(睡虎閣)이다. 다대포진은 일반 지방 행정관청이 아닌 군영(軍營)이므로 동헌(東軒)보다는 진헌(鎭軒), 영헌(營軒)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 다만 조선시대에도 진영의 중심 청사(진사)를 통상적으로 동헌이라고 부르고 기록하였다. [본문으로]
  4. 서평진(西平鎭)은 1881년(고종18) 2월 26일자로 폐쇄되었다., 『고종실록』 권18. 고종18년 2월 26일 무오조 [본문으로]
  5. 선소(船所)는 수군(水軍) 전선(戰船, 군함)의 운영, 수리를 위한 항만시설이다. [본문으로]
  6. 다대포 지역의 일반 민호는 모두 초가집이었다. 『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 서울대학교 규장각 奎17947, 1904년(光武8). [본문으로]
  7. 선창(船艙)은 수군(水軍) 전선(戰船)의 정박, 수리를 위한 토목 시설이다. [본문으로]
  8. 1899년(광무3) 무렵 외사문은 4칸[間] 규모였다. 1893년(고종30)에는 헐소청(歇所廳, 객사 대기실) 3칸으로 되어 있다. 외사문 기록 출전은 『경상남도동래부다대진목공해간수집물공숭추주수급장내동리호수성책(慶尙南道東萊府多大鎭牧公廨間數什物公崧楸株數及場內洞里戶數成冊)』, 서울대학교 규장각 奎20929, 1899년(광무3). [본문으로]
  9. 다대1동 183번지. 도로명 주소로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로529번길 38-2. [본문으로]
  10. 다대교회(多大敎會)를 1987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제3성전, 예배당)할 때 오래된 기와집을 허물었다고 한다(출처 확인 예정). 이 시점(1980년대)의 기와집이라면 일제강점기 시절에 건축되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이 사진에 보이는 기와 건물일 수도 있다고 본다. 기와집을 철거할 때 상량문 같은 것이 나왔으면 어떤 시대에 건축된 것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11.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로53번길. [본문으로]
  12. 다대진첨사를 지낸 인물인 민건호(閔建鎬, 1843-1920)가 쓴 『해은일록(海隱日錄)』의 1893년(고종30) 4월 16일 무진일 일기에는 장관루(壯觀樓)를 장관루(壯關樓)라고 기록하고 있다. 착오일 것이다. [본문으로]
  13. 원문(轅門)은 군영(軍營)의 영문(營門) 또는 관문(關門)이다. 관문(官門)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4. 그림상으로 ㉠ - ㉡ 사이보다 ㉡ - ㉢ 사이가 멀고, ㉡ - ㉢ 사이보다 ㉢ - ㉣ 사이가 더 멀다. 만약 이들 간격이 모두 동일하다고 해서도 원근법이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 간격은 위쪽(㉣)로 갈수록 더 멀다. [본문으로]
  15. 회원관(懷遠館)은 다대포진 객사의 명칭이다. '변방[遠]을 생각한다[懷]'는 의미에서 회원관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같은 이름의 건물이 중국 요동(遼東)에 있어 중국을 오고 가던 조선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 숙소 중문(中門)에 '회덕원래(懷德遠來, 덕을 그리워하여 멀리서 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본문으로]
  16. 객사(客舍) 기능이 중지되자 각 지방마다 있던 객사가 공터로 남아 있었고, 학생을 다수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건물과 공터를 가진 객사가 교육기관으로 활용되기에 최적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다수 학교가 객사 자리에 위치하였다. 특히 1907년(광무11) 3월에는 객사 공간을 교사(校舍)로 만들라는 명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고종실록』 권48. 고종44년 3월 29일 기사. [본문으로]
  17. 만호(萬戶)는 대대장급의 육군 또는 수군 지휘관이다. 서평진에는 본래 중대장급인 종9품 권관(權管)이 임명되어 있었으나 1677년(숙종3)에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다. [본문으로]
  18. 조선 전기에는 대맹선(大猛船), 후기에는 판옥선(板屋船)을 전선(戰船)이라 하였다. 판옥선에는 약 120명에서 160명이 승선한다. [본문으로]
  19. 병선(兵船)은 소형 군선(軍船)이다. 약 20명에서 40명 사이의 인원이 승선하며, 전투선, 정찰선, 수송선 등의 다양한 전선 보조 용도로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20. 사후선(伺候船)은 가장 작은 크기의 소형 군선(軍船)이다. 정찰선, 연락선 등의 비무장 임무에 사용되었다. 승선 인원은 5명 내외. [본문으로]
  21. 일례로, 다대포진도 1887년(고종25) 시점에 이미 전선, 병선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수군 편제는 그대로 있어 서류상으로 각 인원이 전선, 병선에 할당되어 있었고, 이를 토대로 관련 행정(수군 훈련, 백성 동원, 송사 처리, 세금 징수 등)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22.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임진전란도(任辰戰亂圖)〉. 화사(畵師) 이시눌(李時訥) 제작. 1834년(순조34). [본문으로]
  23. 일본군 상륙일자는 4월 13일이다. [본문으로]
  24. 『다대진사례(多大鎭事例)』에 의하면 매년 4월 15일(음력)에 군관(軍官)을 보내 윤공단(尹公壇)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다대진첨사 민건호의 『해은일록』에 따르면 실제로 윤공단에 향사하는 날짜는 매년 4월 14일이었다. 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첨절제사 본인이 아닌, 다대진의 장교(將校)로 하여금 기신제(忌辰祭)를 지내게 하였던 것으로 적고 있다. 1892년(고종29) 4월 14일 임인일 기록과 1893년(고종30) 4월 14일 병인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25. 4번 이미지의 다대포진 지도를 보면 객사 위치가 윤공단(3번 그림의 연못 위치)과 같은 선상이 아니라 그 아래쪽이다. 기록에 따르면, 예전 다대초등학교(현재 유아교육진흥원) 정문과 마주보는 목조 건물의 용마루 망와(望瓦, 용마루 끝의 기와 장식)에서 '康熙 五十二年 癸已 五月日, 多大 客舍..'라는 내용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강희52년(1713년, 숙종39)에 다대 객사를 위해 만든 기와 일부를 뜻하므로, 최소한 이 시기에 다대포진 객사가 다시 건축되었다. 기록 출전은 《부산시사》 제4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년. [본문으로]
  26. 현재 윤공단(尹公壇)은 다대진성 성밖 다대동 1234번지로 옮겨져 있고, 단(壇)에 '첨사윤공흥신순절비(僉使尹公興信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본문으로]
  27. 현재 윤공단에는 순절비와 같은 단에 '순난사민비(殉亂士民碑)'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위치는 순절비 서쪽이다. [본문으로]
  28. 앞 8번 주석의 『호수성책(戶數成冊)』에는 동문(東門) 기록이 있을 부분에 춘인문(春仁門)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성문 아래쪽의 문을 춘인문, 2층 문루 부분을 패인루(沛仁樓)라고 호칭했을 수 있다. [본문으로]
  29. 이 건물이 부방루(浮舫樓)라는 기록이 『해은일록』에 여럿 보인다. 『다대진지(多大鎭誌)』 기록에 의하면 1753년(영조29)에 장대(將臺)를 지어 이름을 부방루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0. 다대포진 병사들이 야간에 왜적(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1. 다대포진 군사들이 활쏘기 훈련인 시사(試射), 포술 훈련인 방포(放砲)를 하는 교련장(훈련장)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32. 가장 처음 제작된 지적도라서 지적원도(地籍原圖)라고 한다. [본문으로]
  33. 다대포사립실용학교(多大浦私立實用學校) 정면에 걸린 깃발이 보기에 따라 일장기(日章旗)가 아닌 태극기(太極旗)로 보인다. [본문으로]
  34. 부산광역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9호. [본문으로]
  35. 제1회 다대실용학교 추계운동회가 1923년 11월 5일이 있었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23년 11월 12일 기사. [본문으로]
  36. 1893년(고종30) 4월 16일 무진일 기록 '회원관 동쪽 활터에서 활쏘기 연습 3순(巡)을 하였다[習射三巡於懷遠館東射基].',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37. 190번지의 중심 건물(1번 이미지에서 '190?'이 표시된 건물)의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8칸인데, 문헌에 일치하는 건물은 1893년(고종39)에 작성된 『다대진각방중기책(多大鎭各房重記冊)』의 별포청(別砲廳) 정도가 있다. 건물 뒤쪽으로 본체가 연장되어 L자 건물로 되어 있었다면 10칸 규모의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이청(吏淸, 리청)으로 후보가 넓어진다. 190번지는 꽤 넓기 때문에 그 건물 동쪽과 남쪽의 여러 채를 모두 포함하는데(전체 5채?), 모두 기와집 건물이므로 다대포진을 이루는 관아 건물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38. 겸감목관(兼監牧官) 구공정환(具公鼎煥)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1691년(숙종17)에 부임한 다대첨사 구정환(具鼎煥)의 선정을 칭송하는 이 비석은 현재 윤공단의 비석군으로 옮겨져 있다. 구정환은 이후 병마절도사 벼슬까지 올랐으며, 효행(孝行)으로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본문으로]
  39. 평상시에 포구(浦口) 앞 바다를 감시하고 긴급 상황 발생시에는 군함의 신속한 출동을 위해 군인들이 대기하던 건물이다. 대변정(待變亭), 어변정(禦邊亭), 어변소(禦邊所)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0. 현재 몰운대(沒雲臺)에 있는 다대진 건물이 기존 객사에서 동헌으로 명칭이 변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논문이다. 서치상, 「다대포진 객사와 동헌에 관한 연구」, 2020년 4월, 『건축역사연구』 제29권 2호 (통권129호), 한국건축역사학회. [본문으로]
  41. 본 블로그 '경상좌수영, 동래도호부, 동래감리서, 부산진 및 다대포진 객사 이야기'의 4번 이미지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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