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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년에는 또 어느 곳에 가 있을지 알지 못한다
: 不知明年又在何處(부지명년우재하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고전 문구는 아니지만, 한곳에 오래 정착해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현대 사람들의 처지를 이보다 잘 나타내는 문장이 있을까 싶다. 마음 먹은대로, 계획한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사건들로 인해 몇 년 후에 내가 있을 곳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평생직장 개념이 흐려진 시기에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삶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 많아진 지금에는 더욱더 그렇다.

옛날 동양 전통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이 관직이었고, 그 관직에 진출해 생활하다 보면 지방관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다. 한 지역에 부임하여 열성을 다하다가도 임기를 마치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필연인데, 다음에 갈 곳은 본인의 결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앙 인사권자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기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임기를 마치기 전에라도 정치적 격변으로 현직에서 갈리어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가게 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수백 년에 걸쳐 그러한 처지를 겪은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마침내 한 선비의 붓끝에서 이와 같은 문구 '명년에는 또 어느 곳에 가 있을지 알지 못한다'가 나오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개화기 시절을 살았던 민건호(閔建鎬, 1843-1920)라는 인물이 자신의 관직 생활을 중심으로 장편의 기록을 남겼는데, 그 문서가 바로 《해은일록(海隱日錄)》이다. 해은(海隱)은 민건호의 호(號)이고, 일록(日錄)은 하루하루 기록인 일기를 뜻한다. 그 일기 가운데,

'세상일은 실로 예견할 수 없으니, 명년에는 또 어느 곳에 가 있을지 알지 못한다[世事實未可預度 不知明年又在何處]'

고 적어 관직살이의 고달픈 처지를 후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이 문장은 민건호의 창작이 아니라 옛사람의 글에서 빌린 것이다. 중국 송나라의 시인 왕우칭(王禹稱)의 시 〈황강죽류기(黃岡竹樓記)〉에 이런 글이 있었다.

내년이면 또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니
[未知明年又在何處]
어찌 죽루의 지붕이 쉬이 썩는 것을 두려워하랴.
[豈懼竹樓之易朽乎]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그의 저작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 건물(관청)이 누구의 집인가. 목민관은 나그네라, 명년에는 또 어느 곳에 가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어찌 목민관의 집이겠는가.
[此屋 誰之屋也. 牧是旅人, 不知明年 又在何處. 斯豈牧之屋耶]

라고 하였다.


혼란했던 시절에 고향 해남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부산)에 부임하여 일하기를 10여 년, 얼마나 자신의 처지와 부합한다고 느꼈으면 일기에 그러한 글귀를 남기게 되었을까.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나 역시 그러한 문장을 SNS에 프로필 문구로 가끔 올리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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