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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鬱陵島)에 설치된 울릉군(鬱陵郡)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군(郡)이다. 면적도 가장 작지만, 인구수가 2022년 4월 기준 9천여 명(9,003명)에 불과할 정도의 소규모 지방자치단체이다. 읍(邑)이나 동(洞)의 승격 또는 분할 기준이 2만 명인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의 독립된 군 인구가 여느 도시의 읍이나 동 규모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울릉군이 처음 군(郡) 단위로 승격되고 군청이 설치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10월이었다. 당시 내려진 칙령(勅令, 황제의 명령) 일부는 아래와 같다.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鬱島, 鬱嶋)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여 관제(官制) 가운데 편입하고 군의 등급[郡等]은 5등(五等)으로 한다.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 죽도(竹島), 석도(石島, 독도)를 관할하게 한다.
     (하략)

처음 군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명칭은 울릉군이 아니라 울도군(鬱島郡)이었다. 글자 '도(島)'는 '도(嶋)'와 통하므로 울도군(鬱嶋郡)이라고도 하였다.


간단하게 울릉도의 행정 변천을 살펴보면, 울릉도가 군(郡)으로 승격되기 전에는 강원도 삼척영장(三陟營將)과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교대로 울릉도 지역을 관리하였다. 이를 수토(搜討) 제도라고 한다. 삼척영장은 삼척(三陟) 지역에 있던 군부대의 장수인 정3품 삼척영장(三陟營將) 겸 삼척진 우영장으로 토포사와 삼척포 수군첨절제사를 겸하고 있었고(전체 직함 三陟營將兼三陟鎭右營將討捕使三陟浦鎭水軍僉節制使), 월송만호는 당시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있던 수군(水軍) 부대의 장수인 종4품 월송포 수군만호였다(전체 직함 三陟浦鎭管越松浦水軍萬戶). 영장은 오늘날 연대급 부대의 부대장(연대장), 만호는 오늘날 대대급의 부대장(대대장)에 상당하였다. 평해군은 현재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에 속한다. 평해와 삼척에서 울릉도를 수토하였으나 기록에 따라서는 당시 울릉도 소속을 강원도 울진현(울진군)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두 진영(鎭營)에서 울릉도를 관할하다가 1882년(고종19)에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후, 1884년(고종21)에 울릉도 첨사(僉使)를 신설하고 이를 본직(本職)으로 삼척영장을 겸직하게 하였다가 곧 평해군수에게 울릉첨사를 겸직시켰다. 첨사는 앞 삼척영장 직함에서 등장했던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준말이며, 만호보다 높은 오늘날의 여단장 혹은 연대장급 지휘관이었다. 이후 도장(島長)을 재설치하는 등의 변동을 거친 끝에 1895년(고종32)에 별도로 울릉도의 행정 사무를 책임질 도감(島監, 嶋監) 직책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인 출범한 지 3년 후인 1900년(고종37, 광무4)에 도감 직책이 감무(監務)로 개칭되고 그 지위도 기존 판임관(判任官, 7~9품급)에서 주임관(奏任官, 4~6품급)으로 승격된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882년(고종19) 8월 20일, 전임(專任) 도장(島長) 체제 도입, 이듬해 4월경 전석규(全錫奎) 파송
1884년(고종21) 04월 12일, 종3품 울릉도 첨절제사 신설 (3월 15일, 통리군국사무아문 재가 획득)
           직함 : 울릉도진 수군첨절제사 겸 삼척진 우영장 토포사
1884년(고종21) 07월 4일, 울릉첨사 겸직 개편 (6월 30일, 통리군국사무아문 재가 획득)
           직함 : 평해군수 겸 강릉진관 평해병마동첨절제사 울릉도진 수군첨절제사
1888년(고종25) 02월 06일, 첨사를 폐지하고 다시 겸임 도장(島長)으로 개편
           직함 : 삼척포진관 월송포 수군만호 겸 울릉도 도장
1895년(고종32) 01월 29일, 전임 도장 체제 재도입 (월송만호의 울릉도장 겸직 폐지)
1895년(고종32) 08월 16일, 도감(島監) 설치, 같은해 9월 20일에 도민 배계주(裵季周)를 임명
1898년(고종35) 05월 26일, 칙령 제12호 〈지방 제도 중 울릉도 도감 설치 건〉 반포 (판임관)
1898년(고종35) 06월, 1896년에 반포한 칙령 제36호에 제7조를 신설 (도감 설치 내용)
1900년(고종37) 03월, 도감을 임기 5년의 주임관(奏任官)인 감무(監務)로 개편
1900년(고종37) 10월 25일, 울도군(鬱島郡) 설치 및 군수 임명 (5등군)

초대 도감 배계주 임명 전에 오성일(吳性鎰)이라는 인물이 도감 직책을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1890년 9월 발행 교지(敎旨)도 전해지고 있는데, 발급 날짜가 도감 직책 설치(1895년) 이전이고 4품 이상 사령장인 교지라는 점에서 일부 의문이 있다. 초대 도감이 아닌, 배계주 도감 부재시 잠시 도감직을 대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890년 교지에는 '吳性鎰', 1900년 당시 대한제국 정부 기록에는 '前島監吳聖一(전도감오성일)', 일본측 기록에는 '前監吳相鎰(전감오상일)'로 되어 있다.

울릉도에 진(鎭, 군부대)을 실제로 설치하지는 못했으나 울릉도진 수군첨절제사 직책을 본직(本職)으로 신설했다는 점이 꽤 흥미롭다. 절영도진(絶影島鎭)의 사례처럼 진아(鎭衙, 진 청사)를 울릉도에 마련했으면 좋았겠지만, 울릉도 개척을 위해 임시로 개설한 관직이었고 얼마 안 있어 평해군수가 첨절제사를 겸직(兼職)하는 형태로 개편되었기에 제반 여건상 불가능했다. 만약 가능했다면 이때 설진(設鎭)된 울릉도진(鬱陵島鎭) 청사가 나중에 울도군으로 승격되는 바탕(군청)이 되었을 것이다.


울릉도 지도 및 울도군 군청 청사 소재지
1번 이미지 - 울릉도 지도 및 울도군 군청 소재지


위 1번 이미지는 울릉도 전도(全島)를 그린 것이다. 1900년 울도군 설치 당시 군청은 울릉도 서북쪽의 태하동 지역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다. 군청 설치를 즈음한 시기부터 북면과 남면(南面)으로 되어 있던 울릉도의 행정구역이 남북서(南北西)의 3면 체제로 개편된 것은 1906년이었다.

울도군 승격 이후 울릉도의 행정구역에 관한 대략적인 연혁은 아래와 같다.

1900년(고종37) 10월 25일, 강원도 울도군을 신설하고 태하동에 군 청사를 둠 (남/북면 2면 체제)
1906년(고종43, 광무10), 서면 신설 (북면의 태하리 지역과 남면의 남서리, 남양리 지역을 통합)
1906년(고종43, 광무10) 9월 24일, 울도군을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소속 변경
1914년 03월 01일, 울도군 소속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변경 (3면 9동 체제)
1915년 05월 01일, 울도군을 도제(島制) 적용을 받는 울릉도(鬱陵島)로 개편, 도사(島司) 임명
1949년 08월 15일, 경상북도 울릉군(鬱陵郡)으로 개칭 및 개편 (군수 임명)

1906년에 울도군이 강원도 소속에서 경상남도 관할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육지에서 울릉도로 향하던 교통편인 선편(船便, 배편)의 출항지가 주로 경상남도 지역(부산항)이었던 것에 기인하였다. 1914년에 경상북도로 관할이 변경된 시점에는 정기선(定期船)이 부산에서 포항(경상북도)을 거쳐 울릉도를 왕래하고 있었다.

위 울릉도 지도에서 [가] 지역에 있던 울도군 군청은 1903년경에 [나] 지역으로 이전된다. [가] 지역은 태하동이고, [나] 지역은 현재 군청 소재지인 도동(道洞)이다.

2022년 5월 현재 울릉군 행정구역은 아래와 같다.

1) 울릉읍(예전 남면) : 도동리, 저동리, 사동리, 독도리
2) 북면 : 천부리, 나리, 현포리
3) 서면 : 남서리, 남양리, 태하리


울릉도 태하동 울도군 군청사 소재지 (추정)
2번 이미지 - 울릉도 태하동의 울도군 군청 초기 소재지


위 2번 이미지의 상단은 1913년 제작된 태하동 부근 지적원도(地積原圖)이다. 하단은 동일한 부분을 촬영한 현재 항공사진.

태하동에 있었던 울도군 초기 군청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02년에 작성된 〈울도군절목(鬱島郡節目)〉에 청사 규모가 7칸[間]이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1910년대에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에서 구군아(舊郡衙, 구 군청 관아) 인근을 촬영한 것이 전해질 뿐이다. 이 유리건판 사진도 청사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로서는 추측에 의존하여 태하동 시기의 초기 울도군 군청사 위치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1) 파란색 화살표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에 나타난 건물지(址)
2) 초록색 화살표 : 태하리 주민의 증언에 의해 특정된 위치 (예전에 오렌지색 컨테이너가 있던 곳)
3) 노란색 화살표 : 광서명각석문(光緖銘刻石文) 위치 (각석문을 보호하는 작은 누각이 유리건판 촬영시에도 존재)

역사학계에서 어느 지점을 태하동 군 청사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파란색 화살표 지점(울릉군 서면 태하리 511번지)과 그 옆 510번지를 중심으로 넓게는 513번지 일대, 그리고 513번지와 각석문이 있던 465번지 사이의 어느 지점(462번지?)에 초창기 울도군 청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파란색 화살표 지역에 있던 건물과 초록색 화살표 자리에 있던 컨테이너는 2011년을 전후한 시점에 철거되었다.

태하동 청사가 1903년경에 도동 지역으로 이전했을 때 기존 건물을 뜯어서 옮긴 것이 아니기에 원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목(地目)도 '대(垈, 대지)'로 계속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행정구역이 새로 마련되고 관원이 임명된 지 오래되지 않았던 당시 울릉도의 현실과 특성을 헤아리면 그 이후에 논이나 밭으로 용도(지목)가 변환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청사 위치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파란색 화살표 지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되지만, 1913년 지적도에서 그곳 대지(가옥)의 소유주와 인근 여러 전답(논, 밭) 필지의 소유주가 동일하기 때문에 울릉도 개척 초기부터 살았던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옥과 토지 소유 상태는 461번지, 462번지, 465번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태하동 울도군 청사의 위치 추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만일 파란색 화살표 지점이 맞는다면, 511번지 건물은 군 청사, 510번지 건물은 군수 관사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이전부터 울릉도에 진출했던 일본인의 숫자가 적지 않았던 탓에 539번지에 (지적도 제작 당시 군청이 있던 도동 지역의 신사와 별개의) 일본신사(日本神社)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 눈에 띈다. 신사 인근 536번지의 성하신당(聖霞神堂)은 현존하고 있다.


울릉도 도동 군청사 소재지 및 군청 평면도
3번 이미지 - 울릉도 도동 울도군 군청 소재지 변천


위 3번 이미지는 1903년(건물 준공은 1904년?)에 기존 태하동에서 도동으로 신축 이전한 군 청사가 있던 현재 도동(道洞, 도동리) 지역의 1913년 제작 지적원도이다. 이곳 도동 소재 군청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다가 1918년에 남동쪽으로 약 170m 떨어진 지역(도동리 206번지)으로 다시 신축 이전된다.

1) 빨간색 화살표 : 큰 화살표는 군청사 본관, 작은 화살표는 부속 건물 (도동리 251번지)
2) 노란색 화살표 : 울도군 군청 부속 건물 추정 (객사?)
3) 파란색 화살표 : 1918년경 신축 이전된 청사 (현재 울릉군청 소재지)
4) 밤색 화살표 : 신축 군청사 옆에 있던 경찰서 (현재 경북울릉경찰서 소재지)
5) 초록색 화살표 : 대구지방법원 울릉도출장소 위치 (현재 울릉군민회관 소재지)

지적도에서 옅은 녹색으로 채색된 필지는 지적도를 측량하던 1913년 당시 국유지(國有地)였다. 울릉군 재산으로 등재된 지역이기에 군청을 비롯한 관청 건물이 소재한 필지였다고 보면 된다.


위 이미지의 오른쪽 상단 평면도는 1918년에 청사 신축 이전할 때 제작된 도사(島司) 관사(官舍) 신축부지 도면이다. 빗금이 그어진 부분이 신축 관사 부분이며, 나머지 평면은 기존 군청 건물의 배치를 잘 보여준다. 1917년에 작성된 울릉도 도청(島廳) 건물 목록 문서와 대조하면 각 건물의 용도를 추정할 수 있다.

1) 군 청사 본관, 18.99평(坪) - 동헌(東軒) 기능
2) 본관 동쪽 부속 건물, 11.84평 : 군수 관사로 추정 - 내아(內衙, 군수 살림집) 기능
3) 본관 서쪽 부속 건물, 7.42평 : 문서 보관 등의 창고 용도로 추정
4) 문행랑(門行廊), 9.75평 : 대문 및 대문에 이어진 행랑채
5) 창고, 4.44평 : 본관과 행랑 사이 서편에 있던 창고
6) 기타 변소, 우물 등

보라색으로 표시되지 않은 기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시기인 1913년에서 1915년 사이에 건축된 숙직실(5.52평), 부속 건물(5평), 창고(6평), 변소 등이다.

도청 청사가 남동쪽으로 이전되자 빈 곳으로 남게 된 기존 청사 지역(2번 부속 건물지)에 관사(官舍)가 신축되었고, 이 관사는 해방 이후에도 울릉군수의 관사로 사용되었다(현존하고 있음). 관사가 들어서고 남은 부지의 한쪽(1번 본관 건물지)에는 남면 면사무소가 들어섰고 현재는 울릉읍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의 울도군, 일제강점기 시기의 울릉도, 해방 이후 울릉군의 청사 소재지 변경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태하동 청사 : 군청 설치 초기 (1900년~)
2) 도동 청사 : 1903년 이전 위치 (위 이미지의 ㉠ 지역, 현재 울릉읍사무소 소재지)
3) 현재 청사 : 1918년 신축 위치 (위 이미지의 ㉡ 지역, 현재 울릉군청 소재지, 1982년 재건축)
4) 미래 청사 : 2020년 폐교된 구 울릉중학교 터로 이전 예정 (위 이미지의 ㉢ 지역)


1906년 3월 28일 울도군(울릉군) 청사
4번 사진 - 1906년 3월 울도군 군청 전경


위 4번 사진은 울릉도나 울릉군의 역사, 연혁, 독도 관련 단어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뜨는 이미지이다. 1906년 3월에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했다는 것(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기 위해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인이 촬영했던 사진으로, 원본은 1908년 간행된 『독도 및 울릉도[竹島及鬱陵島]』라는 책자에 실려 있다. 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1905년 2월 22일의 시마네현[島根県] 고시 이후인 1905년 8월 19일의 제1차 독도 시찰에 이어 파견된 제2차 시찰인단이다. 3월 27일에 독도의 서도(西島)와 동도(東島)를 차례대로 조사한 후, 다음날 28일에 날씨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울릉도에 상륙해 군청을 방문했다.


3번 이미지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기했던 울도군 청사 본관과 부속 건물이 사진에 그대로 보이고, 삼문(三門) 형태를 갖추고 있던 문행랑의 형태도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진에 표기된 화살표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 빨간색 화살표 : 큰 화살표는 군청 본관, 작은 화살표는 부속 건물
2) 초록색 화살표 : 군청 정문 앞에서 태극기를 펼쳐 든 모습
3) 파란색 화살표 : 부속 건물에 게양된 태극기 (군수 관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함)
4) 노란색 화살표 : 홍살문이 설치된 건물 (객사?)

군청 본관과 부속 건물의 지붕이 소나무 껍질 조각을 얹은 너와 투막집이고, 대문 지붕도 나무 널빤지로 되어 있다. 우측 상단 사진은 군청 본관 앞에서 모여 찍은 것인데, 그나마 지붕이 가지런하다. 관청 건물임에도 기와를 구워서 짓지 못한 당시의 울릉도 현실을 짐작하게 한다.


멀리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곳에는 홍살문을 갖춘 건물에 주의한다. 군청사처럼 솟을삼문(三門)을 갖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참작하면 객사(客舍)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는 관청(관아), 객사(객관), 향교(문묘)가 필수적으로 설치되고 특히 홍살문은 객사와 향교 앞에 마련되는데, 관청(군청)은 사진에 보이고 향교는 1909년(또는 1910년?)에 비로소 마련되며(향교 건축 도면 존재), 지방관 입장에서는 향교보다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봉안하던 객사 건립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홍살문이 있는 이 건물의 위치는 3번 이미지의 노란색 화살표 지점(도동리 250번지)로 추정되는데, 사진 구도를 헤아리면 현재 울릉초등학교(옛날에는 울도공립보통학교)가 있는 248번지 일부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 건물군의 정확한 위치와 용도에 관해서 학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대한제국 제4대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과 초대군수 배계주가 있다(녹색 화살표 오른쪽에 서 있는 관원이 심흥택이고 배계주는 제일 앞줄에 있음). 일본인 시찰단의 통보 내용을 정부에 알리면서 '본군 소속 독도(本郡所屬獨島)'라는 문장이 포함된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울도군 설군(設郡) 이후 역대 울도군수 명단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초대 주임관6등 배계주(裵季周), 9품(九品) : 1900.11.29일 (음력 10.05) ~ 1901.10.11
제2대 주임관6등 강영우(姜泳禹), 전의관(前議官) : 1901.10.09 (음력 08.27) ~ 1902.02.19
제3대 주임관6등 배계주, 전군수(前郡守) : 1902.03.07 ~ 1903.01.26
제4대 주임관6등 심흥택(沈興澤), 전군수(前郡守) : 1903.01.26 (음력 '02.12.28) ~ 1907.03.15
제5대 주임관4등 구연수(具然壽), 전기사(前技師) : 1907.06.26 ~ 1907.07.21
제6대 주임관4등 심능익(沈能益), 9품(九品) : 1907.08.14 ~ 1909.07.31
제7대 주임관4등 전태흥(全泰興), 경부(警部) : 1909.07.31 ~ 1910.08.29 (경술국치일)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군수 전태흥 계속 근무함 (1911.11.01 거제군수로 전보됨)
제8대 고등관8등 홍종욱(洪鍾旭), 군수(郡守) : 1912.03.09 ~1913(1914?)
         울릉군수 면직 시기 불분명 (1914년부터 북청군수로 근무함)
1914년경부터 1915년 5월 1일 도사(島司) 체제 개편 시점까지 울도군수 미확인 (부재중?)


위 사진에 [가]라고 표시한 곳은 3번 이미지에서 [가]로 표시된 지점(군청사 앞 도로)이고, [나]로 표시한 곳 역시 3번 이미지에서 [나]로 표시된 지점(건청사 앞 개울 건너편)이다.


일제강점기 울릉도 도청 및 울릉경찰서
5번 사진 - 1918년 신축 울릉도 도청 및 경찰서 청사


위 5번 사진은 1918년경 신축 이전된 도청(島廳) 청사와 경찰서이다. 경찰서는 도청 신축에 몇 년 앞서서 건축되었다(1914년?). 전술한 것처럼 이 청사는 해방 후에도 울릉군 군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같은 자리에 재건축한 건물이 2022년 현재의 울릉군청이며, 일제강점기 때 경찰서 자리(멀리 보이는 건물)에 현재 경상북도 울릉경찰서가 있다.


대한제국 시기 울릉군 청사 본관 (울도군 군청)
6번 사진 - 대한제국 시기 울도군(울릉군) 청사 본청 건물


위 6번 사진은 앞의 5번 사진과 같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가운데 하나이다. 사진 자료 제목이 '경북울릉 울릉도 가옥'이라고 되어 있지만, 3번 이미지에서 살펴본 도면과 4번 사진 설명에서 언급한 내용과 비교하면 1903년경에 건축된 울도군 청사가 분명하다. 사진 왼쪽에 1914년에 세운 일본식 창고도 일부(멀리 부속건물 2채 포함)가 보인다.

4번 사진의 본관 모습과 가장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지붕이다. 기존 나무 널판이 기와로 대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무실 용도에 맞게 전면에 벽을 세우고 왼쪽에 문을 두는 등의 변화도 있다.

건물 처마 중앙에 걸린 편액도 확인되는데, 어떤 글자인지는 식별되지 않는다. 한자, 한문, 한학 전문가의 의견을 기다린다. (4번 사진 우측 상단의 군청 앞 촬영 사진에도 이 편액이 보임)


1906년에 촬영된 2장의 사진(4번 사진), 1910년대에 촬영된 고해상도 유리건판 사진(6번 사진), 그리고 울도군 군청 건물의 위치가 표시된 1918년 평면도를 비롯한 각종 문헌 자료가 존재하고 있다. 옛날 울도군 군청이 있던 곳에 현재 울릉읍사무소가 있으므로 부지(땅) 문제도 없다. 울릉군청이 예전 울릉중학교 부지로 이전되면 울릉읍사무소도 마땅한 장소를 찾아 이전할 수 있을 것이고, 관계 당국의 의지만 있다면 대한제국 시기 울도군 군청 건물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지역의 무분별한 관아 복원과 달리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한 상징성 내지 가치도 충분하다. 이 경우,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울릉군수 관사 건물은 그대로 두는 것이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과연 이러한 사업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인지...?


대한제국 시기 울릉군 청사 본관 (울도군 군청)
6번 그림 - 대한제국 시기 울도군(울릉군) 청사 본청 건물


마지막으로 게시하는 위 이미지는 울도군 청사 그림을 끄적여본 것이다.

군청 본관 측면을 3칸(전체 12칸 규모)으로 그렸는데, 실제는 2칸(8칸 규모)일 수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기둥 위치나 건물 면적을 생각하면 아마도 12칸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대청을 반 칸으로 해서 전체 10칸(8間+前退2間)일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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