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전옥서(典獄署)는 조선시대 서울인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서린방(瑞麟坊)에 있던 감옥 및 감옥 관리 관청입니다. 사극, 소설 등에 곧잘 등장하고 천주교 순교지로도 널려 알려져 있기 때문인지 조선왕조 관청 가운데 품계가 낮은 관원이 근무하던 관청치고는 꽤 유명한 편입니다.

전옥서를 감옥이라고 하였지만 '감옥'은 근대에 도입된 단어이고 조선시대에는 그냥 '옥(獄)'이라고 하였습니다. 간략히 정리하면 조선시대 옥(獄, 典獄) - 구한말 및 대한제국 시기 감옥(1894년) - 일제강점기 형무소(1923년) - 현대 교도소(1961년 이후) 순서로 감옥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전옥서는 현대적 의미의 감옥(교도소)이 아니라 판결이 확정되기 전의 죄수(미결수)를 수감해 두는 일종의 구치소(拘置所, 형사 피의자 및 피고인 수용 시설)에 가까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둬두는 교도소 개념의 형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일단 전옥서에 수감된 후, 형조를 비롯한 재판권 행사 관청인 직수아문(直囚衙門)을 드나들며 수사 및 재판을 받았고, 그 판결 결과에 따라 정형(正刑, 사형), 유형(流刑, 유배), 도형(徒刑, 노역 유배), 장형(杖刑, 곤장), 태형(笞刑, 작은 곤장), 방면(석방) 등을 받았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죄인이면 사형을 집행하기 전까지 가둬두는 용도로 전옥서 옥이 사용되기는 했습니다. 전옥서 내에 사형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수아문은 각 관청이 맡은 사무와 관련하여 직접 수사하고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관청(아문)을 의미합니다. 지금처럼 모든 수사 및 재판을 경찰, 검찰, 법원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 집행을 담당하는 형조(刑曹) 관청 이외에 한성부, 병조, 사헌부, 승정원, 종부시 등의 관청들도 각각 주어진 권한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건을 수사하고 논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관청은 필요에 따라 (형조에 보고하지 않고) 죄인을 전옥서에 수감했습니다. 예를 들면, 종부시(宗簿寺) 관청은 왕실 족보를 편찬하고 종실(宗室, 왕실 친척)의 잘못을 규탄하는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해당하는 일로 죄인을 잡아다 곧바로 전옥서에 가두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전옥서 내부에는 죄인을 가둬두는 옥이 있고 그 옥사(獄舍)에 수감된 죄인을 관리(管理)하는 관리(官吏)가 근무하는 청사가 있었습니다. 청사에는 전옥서 실무 책임자인 종6품 주부(主簿), 종9품 참봉(參奉) 등 정식 관원(官員)이 업무를 보는 본청(本廳, 大廳), 그리고 전옥서 아전(衙前)에 해당하는 서리(書吏), 사령(使令, 羅將, 鎖匠)이 일하는 서리청(書吏廳), 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었죠. 종6품 주부 위에 정3품 제조, 부제조 등이 있었으나 실무 관원은 아니었고 전옥서 관원에 대한 인사 평가, 일반적인 행정 책임 등을 담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 편액 청사 사진 자료
1번 사진 - 전옥서 및 감옥서 청사 편액, 대문, 청사 사진


위 사진은 1924년 8월에 조선치형협회(朝鮮治刑協會)에서 발행한 『조선형무소사진첩(朝鮮刑務所寫眞帖)』에 실린 전옥서 및 감옥서의 편액, 대문, 사무소 사진 자료입니다.

전옥서 편액을 보면 '갑진서(甲辰書)'라고 되어 있어 갑진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정확히 어떤 시기의 갑진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감옥서는 1894년(고종31)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경무청(警務廳) 아래에 설치된 관청으로, 처음에는 좌포도청(左捕盜廳), 우포도청(右捕盜廳)에 있던 기존 감옥 시설을 각각 좌(左)감옥서, 우(右)감옥서를 하였다가 1896년에 서소문 안의 선혜청 별창(別倉) 자리로 통합 이전하였고 1902년 4월 25일에 예전 전옥서 자리로 재차 이전하였습니다. 이때 부지를 확장하고 새로 서양식 감옥과 감시 시설을 건축하였습니다.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전옥서 청사 터가 대한제국 육군감옥서(陸軍監獄署)로 잠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감옥서는 1908년 1월에 경성감옥서(京城監獄署, 경성감옥), 1908년 10월에 경성감옥 종로구치감(鍾路拘置監, 鍾路監獄), 1912년 9월에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종로구치감으로 개편 및 개칭되었으며, 1921년 5월 5일에 폐쇄됩니다. 그래서 1924년 책자 발행 당시에는 '원(元) 종로구치감' 표문(表門, 대문) 및 사무소(事務所)라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前)'을 '元(원)'이라고 합니다.

사무소 건물이 한옥 기와집인 것을 볼 때 전옥서 시기의 사령청(使令廳) 건물을 그대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문은 외형 자체는 전옥서 대문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1781년(정조5) 『추관지(秋官志)』 등의 문헌에 전옥서 대문이 2칸[間]으로 기재되어 있고 담장 형태가 근대식 벽돌 형태로 개축된 것을 볼 때 1902년 감옥서 이전 과정에서 새로 건축했거나 일부나마 변형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때 건축에 사용한 벽돌은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전옥서와 감옥서 편액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사진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요.

감옥서 전옥서 청사 평면도
2번 그림 - 감옥서 및 전옥서 청사 평면도


위 그림은 1948년 발행된 『조선형정사(朝鮮刑政史)』 수록 내용의 일부입니다. 조선시대 전옥서와 대한제국 시기 감옥서 평면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왼쪽 감옥서 평면도에는 '종로감옥(鐘路監獄) 원전옥서(元典獄署)', 오른쪽 전옥서 평면도에는 '구전옥서약도(舊典獄署略圖)'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도면 자체는 1936년 『朝鮮舊時の刑政(조선 옛 시대의 형정)』 책자에 수록되었던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감옥서 도면에서 형장(刑場)은 사형집행장, 계호소(戒護所)는 간수(看守, 교도관) 공간, 취장(炊場)은 취사 시설, 신단(神壇)은 신당(神堂)입니다. 조선시대 관청에는 으레 부군당(府君堂)이라고 하는 신당이 있었는데, 전옥서에도 동명왕(東明王)을 모신 신당이 있었습니다. 그 신당 공간이 감옥서 시기에도 계속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형무소사진첩』에 신단 사진이 존재합니다. 빨간색 화살표 부분(2칸 건물)은 용도 미상이며, 그 오른쪽에 감옥서 사무소와 내정(內庭, 안뜰) 감방을 잇는 문이 있습니다.

전옥서 도면에서 주부청사[主簿官房]는 전옥서 관원인 종6품 주부의 청사, 압뢰숙직소(押牢宿直所)는 압뢰(押牢, 간수) 공간, 지찬소(支饌所)는 죄수 식사 조리 시설이며, 지찬소 아래에는 음식지찬인(飮食支饌人) 처소가 있습니다. 지찬소와 지찬인 처소는 옥바라지 시설로 이해됩니다. 옥사는 남자 감옥인 남옥(男獄)만 표시되어 있으며, 널빤지가 깔린 하절기 판방(板房)과 동절기 온돌방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은 1870년대 중반에 전옥서 서리(書吏)로 일했던 김태석(金泰錫, 1848-1934)의 증언을 토대로 『朝鮮舊時の刑政』 집필자인 중교정길(中橋政吉, 나카하시 마사요시)이 작성한 것입니다.

전옥서 청사 소재지 (1912년 지적원도)
3번 그림 - 조선시대 전옥서 청사 소재지


위 3번 그림은 1912년 측량된 종로 일대 〈지적원도(地籍原圖)〉 위에 전옥서 청사 위치를 표기한 것입니다. 앞 2번 그림에서 살펴본 감옥서 평면도와 일치하는 필지(筆地)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번 주소로 종로구 서린동(瑞麟洞) 42번지입니다. 전옥서 오른쪽(동쪽)에 남대문로가 있고 운종가(雲從街, 종로)와 만나는 곳에 종각(鐘閣, 보신각)이 있습니다. 전옥서 북쪽으로 맞은편에는 왕명으로 죄인을 다루는 의금부(義禁府)가 있었고요.

1902년 4월에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 안쪽 선혜별창에 있던 감옥서가 예전 전옥서 자리인 이곳 서린동 42번지로 옮겨오기 전에 대대적인 부지 확충과 시설 개수가 있었습니다. 1901년 3월부터 약 1년간 진행된 이 공사에서 전옥서 인근 민가 66칸(기와집 35칸, 초가집 31칸)을 철거해 감옥서 부지로 편입하고 서양식 건물로 50칸 규모의 옥사[洋製獄五十間], 3층 망대(望臺) 등을 건축했던 것이죠.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기록에 따르면 감옥서 필지인 서린동 42번지 면적은 826평(2,730제곱미터)입니다. 42번지 필지에서 감옥서 평면도 면적을 제외한 ㉠과 ㉡ 필자가 1901년경 민가를 철거 후 편입한 부지로 보이지만, 2번 그림에서 전옥서 평면도가 사각형으로 묘사된 것과 주변 필지 형태를 참작하면 ㉢ 지역도 본래 민가 지역이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철거 민가 66칸이라는 규모 자체는 ㉠, ㉡ 필지로도 충분히 나옵니다. 어쩌면 ㉠, ㉡ 필지가 애초에 1901년에 편입한 지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1912년 기준 지적도라서, 툭 튀어나온 필지가 감옥서 정비 후 구치감 시절에 합병된 대지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조선시대 전옥서 청사 추정 평면도
4번 그림 - 전옥서 청사 평면도 추정


위 4번 그림은 전옥서 청사 평면도를 추정한 것입니다. 감옥서 평면도 면적 전체가 예전 전옥서 자리였다고 간주하고 2번 그림의 전옥서 평면을 조선시대 건물 칸 규모(면적)에 맞춰 적용한 것입니다.

대문 위치를 감옥서 대문 자리에 그대로 표시하였으나 빨간색 화살표 지점(42번지 안쪽인 회색 실선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취사 옥바라지 시설'이라고 표기된 부분은 주방이 있던 지찬소(支饌所) 공간입니다.

주부 청사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두 개의 초록색 화살표를 따라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옅은 녹색으로 표시한 형태로 전옥서 주부청(主簿廳), 서리장방(書吏長房, 서리청), 옥사로 향하는 중문(中門) 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옥사도 조금씩 남쪽으로 옮겨야 하겠죠. 혹은 위쪽 초록색 화살표 지점을 따라서 주부청 남쪽 담장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서리청과 사령청 사이 공간이 너무 협소하게 되겠죠. 이 두 가지 가정을 절충한 것이 위 보라색 추정 평면도입니다.

본 추정도에서는 전옥서 건물 배치에 대한 학계 다수설에 따라 원옥(圓獄, 원형 감옥)을 남옥(男獄), 여옥(女獄) 2개로 그렸으나, 2번 그림의 전옥서 평면에서 관계자 증언에 따라 원옥을 남옥 1개만 표시하였으므로 실제 전옥서의 원형 담장 감옥은 1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형 담장을 갖춘 옥 1개 안에 남옥이 동쪽, 남쪽, 북쪽에 각 3칸, 여옥이 남쪽 2칸, 서쪽 3칸씩 배치되어 있었을 수 있는 것이죠.

위 평면도가 학계에서 추정한 전옥서 건물 배치도와 다른 점은, 전옥서 대문을 북쪽으로 정확히 고증함에 따라 주부청, 서리청, 사령청, 남옥, 여옥 등의 배치가 조금은 실제에 가깝다는 부분입니다.

㉠과 ㉡ 필지는 3번 그림 설명에서 기술한 것처럼 감옥서 부지 확장시 편입된 민가 지역 추정 공간입니다. ㉡ 필지에 대한 건물 도면은 1908년에 정리된 〈가사불허차(家舍不許借)에 관한 문서〉 3호에 전하고 있는데, 위 3번 그림 설명에서 ㉡ 필지가 감옥서 이전(移轉) 이후에 편입된 것일 가능성을 언급하게 한 자료입니다. 1908년 당시에 이미 관유지(官有地, 국유)라서 부동산 차용이 신청되고 불허되었던 것이므로, 오히려 가능성을 낮추는 자료일 수 있지만요. 이 부분은 연구가 필요하겠네요.

전옥서 동쪽에 '共(공)'으로 표시된 필지는 공용(共用)으로 활용된 지역(시장?)으로 보입니다. 종로 육의전(六矣廛) 공간의 후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전옥서 청사 터 위치
5번 그림 - 전옥서 터 위치 (현대 지도 종각 지역)


위 5번 그림은 현대 지도에 전옥서 건물 평면도를 배치한 것입니다. 4번 그림과 달리 원옥을 1개만 그린 형태이며, 신당 위치도 옥사 영역의 적당한 곳에 이동 배치하였습니다.

현재 전옥서 터 표지석(표석)은 현재 지하철 종각역 6번 출구 근처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잘 보이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실제 전옥서 소재지와 꽤 차이가 있죠. 전옥서 대문 지점까지 약 40미터 거리입니다.

영풍문고 종로본점이 있는 영풍빌딩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전옥서 청사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술한 것처럼 옛날 서린동 42번지 면적이 826평이고, 감옥서 개편시 편입된 지역(앞의 ㉠, ㉡ 필지)을 제외하면 대략 600평(2,000제곱미터) 초반으로 판단됩니다. 옥사 시설을 갖추고 있던 좌포도청 439평, 우포도청 376평보다 넓었습니다.

이상, 간략하게 조선시대 전옥서 청사의 위치, 건물 배치에 관한 내용을 알아봤습니다.


※ 참고 자료 링크 : 사이버 조선왕조 - 전옥서 청사 안내 화면


음료 한 잔 후원 블로그 주인장(글 작성자)에게 음료 한 잔 후원하기 : 토스로 익명 선물 (클릭)    토스로 익명 선물하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