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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몇 자 적어봅니다.
이달 12월 3일에 있었던 비상계엄, 즉 내란 사태와 관련하여 속속 밝혀지고 있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현재 군(軍) 상층부가 '개판 5분 전'이 아닌, 그야말로 '개판'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상시 군령권(軍令權, 전투부대 작전지휘권)은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합참의장에게, 육군 조직에 대한 군정권(軍政權, 육군부대 행정권 및 비전투부대 지휘권)은 육군참모에게 주어져 있고, 계엄 선포시 계엄 지역 내에서의 행정, 사법 등에 관한 사무 및 통제 권한이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게 있는데 이러한 정상적인 지휘 계선 및 통제 체계(지휘시스템)가 완벽하게 무시된 상태에서 각급 부대가 동원된 것이 이번 사태에 있어 군사상의 문제점 내지 의문점입니다.
야전의 군단장급 지휘관인 중장 계급의 수도방위사령관, 특수전사령관 등이 국방부 장관의 비화기 전화를 통한 구두 지시에 따라 몸소 국회의사당 현장으로 출동해 고작 1개 보병대대 규모 미만의 병력을 직접 지휘(수방사령관)하거나 본인 휘하 부대를 다수 출동시킨 것(특전사령관)이 대표적인 문제 사례입니다.
군사 분야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국방부 장관은 통상 국직부대(國直部隊), 즉 국방부 직할부대만 직접적인 지휘 권한이 있습니다. 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등은 국직부대라서 장관 지휘가 가능하지만, 수방사와 특전사는 엄연히 장관 직할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합참의장 또는 육참총장을 통해 지휘 및 감독권을 행사해야 하죠. 하지만 이러한 규정과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때에도 국회는 정상 기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전쟁사를 공부했으면 당연히 인식했을 것들인데 아는 군인이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굳이 헌법이나 법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극한의 계엄 상황일 때조차 '국회 활동을 제한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내용을 수록한 합참 편찬 『계엄실무편람』 등 책자의 수록 내용을 숙지하고 있던 지휘관, 참모가 전혀 없었던 것과 같은 모습을 보였는지 하는 것도 납득 불가능했습니다. 관련 교육과 훈련이 여러 차례 시행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또 하나 문제점은, 여러 지휘관이 계엄에 관한 사전 모의를 통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특정 지점에 투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이를 즉각 직속상관이나 상급사령부에 보고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계획하고 계엄령 발령을 전후로 즉시 실천했다는 부분입니다. 그 때문에 제복 군인 최고 서열인 합참의장이 허수아비로 전락했으며, 비정상적인 군대 내부 동향 및 군부대 이동을 감지해야 하는 각급 부대 파견 방첩사 요원들은 (사령관이 이미 비상계엄 주요임무종사에 가담했던 때문인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정보사령관 같은 인물은 이미 퇴역한 민간인인 육군사관학교 출신 전직 사령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도 했을 정도죠. 이쯤 되면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가 울고 갈 지경입니다.
군 최고 지휘부가 이러한 행태를 보였음에도 중간 간부 및 최일선 장교, 부사관, 병사들 가운데 상황의 심각함을 이해 또는 체감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현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머뭇거리고 주춤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사례가 제법 있었기에 제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았습니다. 그런 부분은 그나마 우리 군에 남은 일말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긴박하게 움직인 국회의원과 국회 직원들, 그리고 시민들의 열성을 다한 노력이 사태 수습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입니다.
육사 출신을 중심으로 한 국군 장교단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아니, 예전부터 계속 그랬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던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고 참담한 현실이네요. 사안이 마무리된 후에 이 부문에 관해서는 제도 또는 교육과 관련하여 분명한 보완이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나중에 차분히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만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국군이 등장하는 영화, 드라마를 보면 각 시대마다 등장하는 군인들 복장(군복)에 달린 계급장 형태가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2·12를 다룬 〈서울의 봄〉 영화에서 장군 계급장에는 아래에 무궁화잎 문양이 있는데, 연대장인 대령이나 대대장인 중령, 중대장인 대위 계급장에는 현행과 달리 무궁화잎 무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군 이래 한 가지 고정된 디자인의 계급장을 계속 사용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장교 계급장의 시대별 변천 내역을 간략하게 한 장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위 이미지입니다. 주요 변경 내용을 적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미군정(美軍政)이 1946년 1월 15일에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한 직후에는 당시 경찰 정모의 양쪽 끝에 있는 턱끈 고정용 귀단추를 임시 계급장으로 사용했습니다. 무궁화 모양으로 된 단추 1개를 참위(參尉, 소위), 2개를 부위(副尉, 중위), 3개를 정위(正尉, 대위)로 하여 장교 모자 정면에 달았죠. 이치업(李致業, 일본군 특별지원병 및 갑종간부후보생 소위 출신, 1922-2009)이라는 인물의 경우에는 경찰복장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서 본인이 쓰고 갔던 경찰모 귀단추를 떼어 모자에 달고 참위로 임관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정식 계급장이 마련되지 않아 임시 적용한 것이며, 정위 일부를 참령(參領, 소령)으로 진급시킬 때에도 귀단추 1개를 추가하여 4개로 대신했다고 합니다(아래 채병덕 사례?).
2.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가 대대(大隊) 규모 편성을 마치고 발대식을 한 날짜가 1946년 2월 8일인데, 이때 A중대장 겸 제1대대장이었던 채병덕(蔡秉德, 일본육사 졸업 중좌 출신, 1916-1950) 정위를 참령으로 최초 진급시켰고 이즈음 군사영어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군정청 장교 비숍(Bishop) 대위의 제안에 따라 군정청에서 미군 준위 계급장의 직사각형 놋쇠판 위에 은빛사각형(위관급) 또는 태극형(영관급) 표지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장교 계급장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신형 계급장의 정식 제정일은 4월 5일이지만, 참령 진급 시기를 참작할 때 급조된 계급장을 2월부터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1946년 12월 1일에 계급 체계를 정비하면서 기존 참위, 부위, 정위, 참령, 부령(副領), 정령(正領) 계급을 소위(少尉), 중위(中尉), 대위(大尉), 소령(少領), 중령(中領), 대령(大領)으로 개칭하고 준장(準將), 소장(少將), 중장(中將), 대장(大將) 등의 장관(將官) 계급을 신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별 1개, 2개, 3개, 4개로 이루어진 미군 장성 계급장을 그대로 도입하였습니다.
4. 위관급과 영관급 계급장이 현재와 같은 디자인으로 변경된 것은 1954년 5월입니다. 1953년 5월 신문기사를 보면 육군, 해군, 공군 3군(三軍)의 장교 계급장을 통일하기 위한 공모전을 실시한 결과, 응모된 작품 중 서울시 충무로에 거주하는 이용훈(李龍勳)이라는 시민의 작품을 선정하고 조만간 계급장이 마련되는 대로 적용할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상공모를 통해 장교 계급장 개정을 시도한 것이 매우 특이하게 여겨지네요. 공모전 응모자가 제시한 각 계급장의 의미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으며, 1954년 1월 13일에 대통령 재가를 거쳐 동년 5월 15일 오전 10시를 기해 착용하였습니다.
ㄱ) 위관급 계급장은 금강석인 능형(菱形, 마름모) 다이아몬드 : 초급 간부로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견고한 의지와 기백, 금강석과 같은 고귀한 존재
ㄴ) 영관급 계급장은 원형으로 배치된 9개 대잎사귀[竹葉] 속에 다이아몬드 1개 배치 : 불멸의 송죽절개(松竹節介), 민족적 무사(武士) 상징인 대잎사귀, 군의 중견 간부로서의 상징
5. 장군 계급장 아래에 무궁화 1개와 무궁화잎 6개로 구성된 '무궁화꽃잎받침'이 추가된 것은 1975년 9월 30일입니다. 대통령령 제7837호 「군인복제령」 개정을 통해서였죠. 증언에 따르면 제13대 합참의장인 한신(韓信, 일본군 학병 출신, 1922-1996) 대장이 전역 후에 유럽 각국을 순방 출장하면서 한국군 대장 계급이 미군과 동일하다는 지적이 있자, 국적(國籍, 국가 특색) 있는 복제를 도입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무궁화 표식을 부착했다고 합니다.
6. 1980년 7월 1일부터 위관급과 영관급의 계급장 아래에 장성급과 같은 무궁화 꽃잎 문양이 추가되었습니다. 현재 계급장과 같은 형태로 변경된 것이죠. 개정 내용을 담은 대통령령 9713호 「군인복제령」 시행일은 1980년 1월 1일이지만 계급장 제조, 보급 등에 다소 시일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해 7월부터 본격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7. 국방색 배경에 은색 금속제 또는 백색 기계자수로 제작되었던 계급장 컬러가 저시인성 흑색으로 변경된 것은 1996년 10월 1일입니다. 1996년 9월 18일의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발생 이전인 1996년 5월 17일자 대통령령 제15000호 「군인복제령」 개정을 통해서였죠. 다만, 모든 법령 시행이 다 그렇지만 시행일 즉시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실제 계급장 교체는 무장공비 침투를 계기로 1996년 연말에 급히 진행되었습니다. 또 개정 당시에는 계급 배경색이 상당히 어두운 진청록색이었으나 일정 거리 이상에서 계급 식별이 어렵다는 (대체로 경례를 받은 고급 간부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되자 1998년부터 밝은 연청록색으로 변경됩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화강암 무늬 디지털 5도색 전투복이 널리 보급된 2011년 5월 이후에는 다시 조금 짙은 수풀색(Forest Green)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계급장 실물 컬러와 관련한 참고 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ㄱ) 1996년 10월 이전 포제 모장(帽章, 모자 부착 표지) 계급장 : 백색 중령 계급장 참고
ㄴ) 1996년 10월 이전 포제 약장 계급장 : 백색 대위 '포제 약장' 계급장 참고 (전투복 옷깃 부착)
ㄷ) 진청록 바탕 저시인성 포제 계급장 : 흑색 중령 계급장 참고
ㄹ) 연청록 바탕 저시인성 포제 계급장 : 흑색 중위 계급장 참고
ㅁ) 수풀색 바탕 저시인성 포제 계급장 : 흑색 소장 계급장 참고 (2024년 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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