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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네요. 벌써 12월 중순입니다. 이제 보름 남짓 남은 시간이 지나면 2026년이죠. 한 세기 100년의 사반세기(四半世紀) 25년이 이렇게 흘러갑니다. 이걸 네 번 거듭하면 2100년이겠죠. 의과학 발전 속도를 볼 때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수가 그때까지 살아 있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집니다. 아마 지금 태어나는 아기들은 대부분 맞이할 그날이겠죠. 미리 축하합니다!
군사 분야에 관한 글을 올릴 때가 되었지만 잠시 미뤄두고, 관아(금위영) 건물에 관한 내용을 약간 포함하는 조선시대 한양 사대문 안 건축물 관련 내용으로 글을 갖춰 올려봅니다.
본문에서 다룰 운현궁(雲峴宮) 아재당(我在堂) 건물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금위영(禁衛營) 건물 배치에 관한 자료를 탐구했을 때 '파주에 복원된 아재당' 내용을 처음 접하고 겸사겸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금위영과 인접해 있던 운현궁에 소재한 건물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곧 검색과 사진, 도면 등의 내용 확인을 거쳐 '이름만 아재당인 건물'로 나름 결론을 내린 후, 블로그에 게시할 때 활용할 몇 건의 파일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새창 열기) 자료실에 수록된 운현궁 아재당 관련 보고서 자료를 접하고 보니, 2022년에 복원을 진행한 재단 측에서 이미 2018년 무렵부터 상세한 근거 자료와 연구 내용을 토대로 필자와 동일한 결론을 내려놓았더군요. 아직 웹상에서는 그 내용을 안내하는 곳이 없기에, 혹시 파주에 복원된 건물을 실제 운현궁 아재당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이미지 몇 장을 간단히 설명하는 형태로 해당 건물 내력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어서 짧게(?) 금위영 대청(大廳) 등 배치에 관해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본 글의 중심 주제인 고종(高宗) 탄생 건물 자리에 건립된 '어사각(御賜閣)'이라는 건물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위 사진은 1964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수록 이미지입니다. 기사 제목은 '운현궁 자리에 고급요정(高級料亭)'이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사이트(새창 열기)에서 키워드 검색으로 손쉽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건물의 특징적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현재 파주시 탄현면 전통건축부재보존센터 내에 복원된 아재당 건물과 전체 외형이 동일합니다. 파란색 화살표의 기와는 영주각 요정 남서쪽에 있던 건물의 지붕 일부입니다.
첨언하자면, 영주각 명칭이 붙은 건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춘향전(春香傳)』의 무대가 되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광한루원(廣寒樓苑, 광한루 누원) 영주도(瀛洲島, 영주섬)의 누각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요정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위 사진은 영주각 요정의 영업 인가로부터 약 3년 3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에 촬영된 이미지입니다. 국유가 아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 후손 소유로 남아 있던 운현궁이 재정 위기에 처하자, 부지 일부를 주한일본대사관에 매각하려 하였고, 이 소식을 《동아일보》 1968년 2월 12일자에서 '빚더미에 밀린 한말풍운(韓末風雲)의 터전, 운현궁에 일대사관(日大使館)'이라는 기사로 소개하면서 게재한 사진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1번 사진의 영주각 요정 지붕 일부, 파란색 화살표는 역시 1번 사진의 파란색 화살표 기와의 전면(=운현궁예식장 본관 건물), 초록색 화살표는 운현궁에 있던 사우(祠宇, 사당) 건물이며, 보라색 화살표 지점은 사진 촬영 지점인 동시에 옛 아재당(또는 아재정) 건물 추정 위치입니다.
왼쪽 콘크리트 3층 건물은 당시 운현궁 부지를 빌려 쓰던 동원영화사(東苑映畫社)의 신축 건물인데, 건물을 짓다가 망해서 기사 취재 시점으로부터 3년 전인 1965년경에 빚에 팔려 넘어갔다고 합니다. 운현궁 운영 생활비와 문중 사업으로 인한 이자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운현궁예식장이 사용하던 본궁(本宮) 부지를 빌려주고 건물도 짓게 했지만 허망하게 망하면서 결국 부동산을 완전 매각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상징과도 같던 흥선대원군의 궁 소재지에 일본대사관이 들어선다는 것은 당시 국민감정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내무부(內務部)에서 대지 매매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등의 진통 끝에 중학동(中學洞) 지역으로 주한일본대사관 이전 후보지가 최종 변경됩니다.

위 3번 사진의 왼쪽 이미지는 역시 운현궁 부지를 일본 측에 매각하는 내용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1968년 2월 15일자 기사 '쇄국의 본영(本營) 운현궁, 일장기(日章旗) 입궁(入宮)의 가계약(假契約)' 기사에 실린 것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영주각 요정, 파란색 화살표는 2번 사진의 건물, 갈색 화살표는 영주각 앞 행각(行閣), 노란색 화살표는 휘문중고등학교 교사(敎舍, 교실) 건물입니다. 휘문중고 본관 건물과 일부 겹쳐서 기와집 지붕 형태처럼 보이고 있죠. 갈색 행각은 현재 파주 아재당의 부속채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위 이미지는 1967년경 휘문중고 일대를 바라보고 촬영한 컬러 사진입니다. 아래 일부만 간추려 강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운현궁예식장(파란색 화살표)과 영주각 지붕(빨간색 화살표) 일부가 보입니다.
오른쪽 아래 이미지는 1950년대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운현궁예식장 전경 사진입니다. 이때는 파란색 화살표의 예식장 본관 건물이 신축되기 이전이라서 녹색 화살표의 운현궁 사우 건물 2동(棟)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사이에 ㉡ 사우 자리에 예식장이 들어서면서 2번 사진의 ㉠ 건물만 남았습니다.
㉠과 ㉡ 중에서 중앙에 있는 ㉡이 1900년에서 1902년 사이에 건립된 흥선대원군인 대원왕(大院王) 내외(內外)의 사우 정당(正堂)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의 사우[家廟]가 아닐까 합니다. 본래 양반 집안에 설치된 사당에는 여러 대(代) 조상의 신주를 한 공간(건물)에 모시지만, 대원왕으로 추봉(追封)되고 흥친왕으로 책봉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운현궁에는 2개의 큰 사당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8년 1월 19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대원왕과 흥친왕의 뒤를 이어 운현궁을 지키던 대원군의 손자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이 1917년 3월 22일에 사망한 후, 그해 5월 28일에 양자로 입적된 이우(李鍝, 1912-1945)가 상주(喪主)로 있는 운현궁을 당시 왕세자인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 방문하여 '궁의 북방에 있는 대원왕의 사묘(祀廟)'에 참배하고, 이어서 '리희공(흥친왕)의 사묘'에 참배했다는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문' 글자가 표시된 문은 파주 아재당에 복원된 사주문(四柱門, 기둥 4개 문)으로 보입니다. 영주각 신축 과정에서 근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부암동을 거쳐 해체 이전 및 복원되는 과정을 겪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사진 속 흑백으로 찍힌 운현궁 사당 외형과 규모는 현재 칠궁(七宮, 육상궁)의 본전 사진을 참고하면 됩니다(국가유산청 칠궁 소개 페이지 링크)

위 4번 사진은 운현궁 북쪽 지역을 촬영한 1960년대 항공사진입니다. 3번 사진 오른쪽 아래 운현궁예식장 담장을 '담장A', '담장B'로 표시하였습니다. A가 도로변, B가 '문(사주문)'이 있는 안쪽 담입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운현궁 영역을 대폭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종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사용하던 경근문(敬覲門)과 공근문(恭覲門)이 금위영 서쪽 담장과 운현궁 사이에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경근문과 공근문의 위치 고증에 관한 주장이 크게 2개로 나뉘는데, 위 항공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운현궁 북쪽에 있었다고 가정하면 담장A와 담장B 사이의 길이 왕이 드나드는 어로(御路)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경로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외문(外門)인 경근문은 '담장B' 글자 아래쪽에 하얀색 화살표로 표시된 운현궁과 금위영 경계에, 내문(內門)인 공근문은 운현궁 본궁의 옛 대문(大門)으로 이어지는 왼쪽 하얀색 화살표 지점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또는 노란 화살표가 놓여 있는 어로 추정 경로의 어느 선상에 있었겠죠.
경근문과 공근문이 활용되던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던 시기, 즉 초록색 화살표로 표시된 사당 ㉠, ㉡가 세워지기 전이라는 점을 경로 유추에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원군 사후 1900년(고종37)에 대원군 사우가 건축되면서 주변 지형, 경관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건물은 대원군 사당과 함께 건립된 이안청(移安廳) 또는 배설청(排設廳)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우 2동 남쪽 경내에 2품송, 즉 정2품 품계를 하사받은 소나무가 있습니다. 소나무가 지금 중앙 행정부처 장관급에 해당하는 2품 품계를 받은 것은 고종이 어렸을 때 장난처럼 타고 오르며 놀던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징적으로 품계를 받은 소나무가 전국에 여럿 있죠. 그리고 아마도 2품송 앞쪽(서쪽)에 실제 아재당 건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운현궁 영역이 확장되기 전의 본궁 영역은 대문과 아재당 추정 건물을 중심으로 외곽에 담장이 둘러싸인 지역입니다. 아주 넓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지도 않은 적당한 면적의 종실제군(宗室諸君) 군가(君家)입니다.
아재당 추정 건물 동쪽 옛 금위영 경내에 정면 6칸(間), 측면 2칸의 12칸 규모, 전후좌우 퇴칸(退間)을 포함하면 32칸의 육사당(六四堂) 건물이 있습니다. 이 육사당 건물을 '왕비가 될 집안에서 혼례를 준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하는 내용이 종종 보이는데, 1969년에 걸린 건물 편액(현판)의 글자에서 유추한 것으로, 실제 그랬을 확률은 매우 낮다고 판단합니다. 육사당 건물 유래에 관해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도록 제8책 『이왕직아악부 유성기 음반 - 조선아악(朝鮮雅樂)』에서 '금위영 대청으로 쓰였다(김천홍 회고)', '창덕궁에 있던 선전관청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고 한다(선경린 회고)'라는 두 가지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필자 판단으로는 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육사당 건물 동북쪽에 1960년대까지 현존하던 약 18칸(9x2) 규모의 금위영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분홍색 화살표). 이들 금위영 영내 건물에 관해서는 후술합니다.

위 5번 사진은 4번 항공사진에 등장했던 2품송 이미지입니다. 운현궁에 관한 내용을 조금 찾아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봤을 사진이죠. 소나무 뒤쪽으로 경송비(慶松碑)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있는 것이 '구름 아래 벼룻물을 담은 연못'이라는 뜻의 '운하연지(雲下硯池)' 수조입니다. 대원군이 붓글씨를 연습하기 위해 벼루를 갈던 물을 담아 두던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이로당(二老堂) 앞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운하연지 수조의 본래 위치는 2품송이 있던 정원 안이었으며, 바로 이곳이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면서 고종을 비롯한 아이들을 가르치던, 운현궁 본궁의 사랑채가 있던 공간임을 거듭 증명합니다. 아재당이라는 당호(堂號)를 가진 운현궁 안에 있었다면 이 2품송 바로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고종 승하 직후인 1919년 1월 26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아재정(我在亭) 앞뜰에 2품 솔나무(소나무)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현대어로 기사 내용을 정리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략)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태왕전하(고종)께서 6~7세(1858~1859년)부터 즉위하시던 12세 전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때때로 올라앉아 '말[馬]이라'라고 하시며 재미를 보면서 놀던 소나무이다. (중략) 이 소나무는 대원군께서 기거하시던 아재정(我在亭) 앞뜰에 있고 기암괴석을 그 주위에 놔두셨다. 태왕전하께서 즉위하시고 원년(1864년) 9월에 본 저택 되시는 운현궁에 임하셨다가 주위 신하에게 이 소나무를 가르치시며 '이것이 내가 날마다 타고 놀던 말이라' 하시고 2품의 가자(加資, 품계)를 내리셨고 다음 해 10월에 대원군께서 당시의 관상감사(觀象監事, 영의정 겸임 관상감 영사) 조두순(趙斗淳)으로 비문을 짓게 하시고 수어사 김병기(金炳冀)로 하여 글씨를 쓰게 하여 비를 세우시고 이를 '경송비'라 하였더라.

위 6번 이미지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운현궁 지역 지형도입니다. 왼쪽 1915년 측도 지형도에서 보라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 즉 옅은 갈색으로 채색된 지역이 다른 곳보다 다소 높은 언덕 또는 구릉 지역입니다. 실제 지형도 주변 지역보다 높고 근처에 관상감이라는 관청이 있었기 때문에 '고개 현(峴)' 글자를 써서 관상감재(觀象監峴) 또는 관현(觀峴, 관재), 관상감의 별칭인 서운관(書雲觀)에 착안하여 운현(雲峴, 운재)라고 하였고 이곳에서 자란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운현궁(雲峴宮)라고 하였습니다.
정조(正祖)와 순조(純祖) 시대에 관직생활을 한 무관인 노상추(盧尙樞, 1746-1892)가 쓴 일기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00년(정조24) 4월 8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전략) 밤에 비가 그쳤다. 금위영 언덕의 높은 곳에 올라 초파일에 단 등(燈)을 보았는데, 구름이 끼고 습해서 날이 맑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원문] 夜雨止, 登營岸高處, 見懸燈, 雲濕不明是欠.
이날 노상추가 입직한 곳은 금위영 신영(新營)으로 위 6번 지형도의 금위영 위치입니다. 금위영 안에서 시내 다른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제법 높은 언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을 훗날 흥선군(興宣君, 이하응) 저택이 처음 들어선 운현궁 본궁 지역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즉, 운현궁이 되는 지역은 본래 금위영 영내(營內) 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1815년(순조15)에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恩信君, 1755-1771)의 후사로 결정된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의 넷째 아들 흥선군이 장성하여 분가(分家)할 때 (금위영으로부터?) 금위영 한켠의 언덕 공간을 확보한 후, 집을 지어 거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은신군-남연군-흥녕군(남연군 장자)의 저택은 위 왼쪽 지형도 상단에 '계동궁(桂東宮)'으로 표시된 곳이며, 흥선군의 독립 시기는 이르면 대략 20세 무렵인 1840년 전후, 늦어도 1840년대 중후반입니다. 작성 시기가 특정되는 철종(哲宗) 즉위년인 1849년(기유년) 작성 문서인 〈운현(雲峴) 대감의 생신 의차(衣次) 발기 〉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덕 안쪽에 담장으로 분명하게 구획된 운현궁 본궁 지역에 ㉠, ㉡의 사당 2채가 존재하며, 2품송을 정원에 품고 있는 ㉢ 건물이 있습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살펴본 본궁 사랑채(아재당? 아재정?) 건물일 것입니다. 대문 앞(왼쪽)에 제법 긴 계단석이 있는데, 본궁 지역이 언덕 지형임을 잘 보여주는 설치물입니다.
운현궁 오른쪽은 금위영 지역입니다. 파란색 화살표 지점에 금위영 최고 지휘관인 금위대장이 공무를 보는 대청(大廳, 堂上大廳) 있었고 그 서쪽으로 중문(中門), 대문(大門)이 위치했을 것으로 봅니다. 빨간색 화살표 건물은 4번 사진에서의 금위영 부속채이며, 초록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점들은 1915년경 금위영 터가 경성은사수산제사장(京城恩賜授産製絲場)으로 활용되던 시기에 부속상원(附屬桑園)이 설치된 곳, 즉 뽕나무밭이 펼쳐진 범위입니다.
오른쪽 1921년 지형도는 6년 사이의 금위영 터 변화 내용을 보여줍니다. 여러 건물이 철거된 상태이며, 뽕나무밭이 사라진 곳 중앙에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현재 육사당 건물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915년에서 1921년 사이에 육사당이 이건(移建) 또는 신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사당 북쪽에는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관사(官舍) 형태의 건물이 3채 신축되어 있습니다. 4번 항공사진에서도 이 건물들의 지붕이 잘 보입니다. 큰 검은색 화살표 부분에 출입문이 개설되었으며, 바로 옆의 이왕직(李王職) 주마과(主馬課) 차고(車庫) 사무실 또는 조선총독부 고위 직원의 관사로 활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작은 검은색 화살표는 금위영의 본래 북문(北門) 추정 위치입니다.
오른쪽 지형도에서 갈색 작은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은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 담장에 있는 문 또는 행랑채입니다. 만일 문이라면 경근문 흔적일 수 있을 텐데, 1915년 지형도에서는 표시가 안 되어 있던 것이 의문입니다. 물론, 대원군 사당이 건축될 때 마련된 외삼문(外三門) 이외 2개 문인 사각문(四角門)과 일각문(一角門)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또는 그냥 담장 구실을 겸해서 세워진 작은 외행랑(外行廊)이겠죠.

위 7번 사진 및 건물 배치도는 앞에서 기술한 운현궁 아재당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는 이미지입니다.
왼쪽 1962년 항공사진에서 빨간색 사각형 부분이 2층으로 건축된 운현궁예식장 본관 건물이 신축된 곳이며, 그 동쪽에 부속 행랑채(부속채)가 있고 동북쪽에 영주각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실제 영주각과 행랑채가 들어선 것은 1964년경이기 때문에 영주각, 행랑채 등은 합성한 것입니다.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보고서 중에 2022년 12월 발행한 『멸실위기 건축문화유산 재건 - 운현궁 아재당』 연구보고서에는 영주각 건립 이후인 1968년 촬영 항공사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재당 추정 건물 왼쪽 아래 양관(洋館) 후문으로 통하는 문 옆에 '운하연지' 수조가 있던 곳을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하였습니다.
오른쪽 1912년 지적원도(地籍原圖)에는 운현궁과 금위영의 주요 건물을 표시하였습니다. 운현궁 북쪽 지역에 고종 임금이 행차하던 어로가 있었을 경우를 가정한 경근문 진입 방향(초록색 화살표), 공근문 추정 위치(초록색 네모), 3번 사진의 운현궁 사당 북쪽 문 자리(갈색 화살표), 운현궁예식장과 영주각 및 행랑채 위치, 2품송 왼쪽에 사각형으로 표시된 동원영화사 신축 건물 위치, 운현궁 본궁 대문 앞 계단(분홍색), 금위영 대청과 현재 육사당 위치 등입니다. 2품송 동쪽 건물을 '아재당'이라고 기재했지만, 그 명칭이 '아재정'이거나 대원군 시절 사랑채가 아닌 다른 건물이었을 가능성은 여전합니다.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에 옅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도로 부분은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에 존재하던 담장이 하나가 아니라 2개였고 그 사이에 운현궁과 금위영 부지를 명확하게 분리하는 남북 방향 통로가 있었을 경우를 가정한 것입니다(10번 지도 설명 참고).
1960년대 초중반 시기에 대원군 사당, 이안청 등을 비롯한 귀중한 건물이 대다수 철거되어 영주각이라는 요정 건물의 건축자재로 재활용되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아쉬울 뿐입니다. 영주각을 지을 때 사용되었던 자재의 연륜연대측정 결과를 참작하면 아재당 또는 아재정 추정 건물이 1840년대 또는 1850년대에 운현궁 본궁이 처음 마련될 때 건축된 건물의 일부인가 하는 것에 일부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요. 당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인식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 운현궁 사당의 경우에 특히 그때 기준으로 불과 60년 정도밖에 안 된 건물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겠죠. 지금 기준으로는 125년이나 된 건물이지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당 1채를 제외한 부지 내 모든 건물을 밀어버리고 아재당 추정 건물을 철거한 것까지 이해되지는 않네요. (뒤에 기술할 어사각 건물 훼철도 만만치 않지만...)

위 8번 사진은 『임시은사금수산사업사진첩(臨時恩賜金授産事業寫眞帖)』에 수록된 1913년경 촬영 경성은사수산장(京城恩賜授産場) 시기 금위영 전경입니다. 정확하게는 6번 지도의 1915년 지형도에 표시된 뽕나무밭(부속상원)이 금위영에 설치된 모습이죠. 일왕(日王), 즉 일본 천황이 1910년 병합(경술국치) 직전에 하사한 임시은사금(臨時恩賜金)의 이자 수입을 기반으로 각종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종의 직업 교육장으로 수산장(授産場)이 전국에 설치되었고, 경성(서울)에는 예전 금위영 신영(新營) 자리에 경성은사수산장이 들어섰습니다. 각 화살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파란색 화살표 : 금위영 대청(大廳) 추정 건물 (현재 육사당의 이설 전 건물?)
2) 빨간색 화살표 : 4번 항공사진, 6번 지형도에서 살펴본 금위영 부속건물
3) 보라색 화살표 :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지붕 일부
4) 노란색 화살표 : 창덕궁 정전 인정전(仁政殿) 지붕 일부
5) 초록색 화살표 : 금위영 북문(北門) 추정 위치 (양쪽 대형 행랑채 사이)
6) 갈색 화살표 : 다음 9번 사진 자료의 D 건물 추정
7) 검은색 화살표 : 현재 육사당 건물 자리
1)번 파란 화살표 건물이 금위영 대청으로 보이는데, 현재 육사당 건물과 사진에 보이는 남측면 형태가 매우 유사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이 건물 위치가 북쪽 행랑채에 다소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약간 남쪽(7번 지도의 1912년 지적원도에서 '이설?' 보라색 화살표 중간 아래의 빨간색 건물 표시 부분 위치)에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건물 전면의 구조물 등을 참작하면 7번의 1912년 지적원도에서 '대청'으로 표시된 녹색 건물 자리의 건물임이 확실합니다. 6번의 1915년 지형도에서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 건물이죠.
필자는 이 대청 건물이 1910년에 후반에 남쪽으로 이설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종로캠퍼스 안에 있는 육사당(六四堂) 건물의 원형으로 판단합니다. 은사수산장 경내에 있던 뽕나무밭이 철거되고 그 북쪽에 관사 등 건물 3채를 신축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해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재래 건물 가운데 대청 서쪽의 행랑 일부는 철거하고 대청은 남쪽 약 80미터 지점인 현재 육사당 위치로 이전하면서 건물 구조를 기존 ㄱ자 형태에서 동향의 일자 형태로 변경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육사당 건물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는데 1915년 지형도에서 단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형도 제작을 위한 측량 담당자가 1914년에서 1915년 사이에 수산장을 방문하자 '이곳에 뽕나무밭을 본격 조정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 건물(현재 육사당)은 철거할 것'이라는 계획을 접하고 지형도에 미리 반영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진 촬영 구도를 생각하면 검은색 화살표 부분에 육사당 일부가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 확률은 극히 낮을 것 같습니다.
4번 사진 설명에서 언급한 관련 증언도 있으니, 이러한 필자 추정이 사실이면 좋겠습니다. 무려 삼군영(三軍營) 가운데 하나인 금위영 대청이 기단부가 제거되고 구조가 변형된 상태로나마 실존하는 것이니까요.

위 9번 사진은 일제강점기 당시 신문, 사진엽서 등에 수록된 금위영 건물 이미지입니다.
사진 A는 8번 은사수산장 전경 사진의 대청 건물 정면이며, B는 해상도가 약간 높은 회엽서 사진인데 건물 북쪽 일부만 나와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으로 금위영 북쪽 행랑채 일부가 보이는 것을 보면 북행랑 가까이에 해당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건물 정면 규모가 전체 6칸(4칸 + 좌우 퇴칸 각 1칸)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와 B 사진에서 파란 화살표와 보라색 화살표로 표시된 가건물 및 가벽 구조물이 8번 사진에도 보이고 있죠. 빨간색 화살표 부분을 보면 2단 높이의 장대석 기단 위에 건물이 올려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가단석과 함께 용마루 양쪽에 취두(鷲頭)가 있으므로 금위영 고위 관원이 업무를 보는 대청(大廳) 건물임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
사진 C는 왕세자 이은이 은사수산장을 시찰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입니다. 대청 바로 남동쪽을 걸어 지나는 모습인데, 파란 화살표 부분이 대청 남측면입니다. 8번 사진 대청과 동일한 부분이죠. 그리고 멀리 검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에 운현궁 사당의 동측면이 보입니다. 7번 지적원도에서 '사우'와 '대청' 위치를 참작하면 사진을 찍은 장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 눈에 띄는 부분 초록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입니다. 문처럼 보이는 것이 운현궁 담장 북쪽에 거의 동향으로 존재합니다. 문의 방향을 볼 때 3번의 1950년대 운현궁예삭장 사진에 보이는 문은 아닌 것 같고 6번의 1921년 지형도에서 갈색 작은 화살표로 표시한 곳에 있었을 문처럼 보입니다. 진짜 출입문이고 경근문-공근문이 운현궁 북측에 존재했다면 이 사진에 보이는 문이 경근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또는 대원군 사당을 건립할 때 만든 사각문 또는 일각문일 수도 있겠지만요. 사진 품질이 매우 아쉽습니다.
사진 D는 은사수산장 경내에 있던 건물인데, 8번 사진에서 갈색 화살표로 표시한 건물로 추정합니다. 사진 E는 행랑채 일부입니다. 금위영 북쪽과 동쪽에 존재하던 행랑이거나 6번 지형도의 빨간색 화살표 맞은편 행랑으로 보입니다. 사진에 멀리 우물 지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추가 사진이나 도면 자료가 있어야 해당 사진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네요.

위 10번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 및 일제강점기 시대에 발행된 지도 가운데 금위영 터 부분입니다.
왼쪽 1903년 지도를 보면 파란색 화살표 부분에 ㄱ자 평면의 건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앞 8번 및 9번 사진에서 살펴본 대청 건물 자리입니다. 이를 오른쪽 1925년 지도에서 보면 ㄱ 형태로 표시한 부분입니다. 6번의 1921년 지형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1920년대 중반 이전에 금위영 터 주요 건물에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기 때문에, 오른쪽 1925년 지도는 건물 배치 부분이 최신 데이터로 갱신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1915년 지형도에 수록된 건물과 일치하는데, 보다 정밀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각 건물 배치를 추론하는 데 도움이 되며, 8번의 1913년 전경 사진에 등장하는 건물과 같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초록색 화살표로 표시된 행랑채 부분은 1903년 지도와 이어집니다.
1903년 경성지도 제작시 담당자들이 당시 대한제국 친위대 제2대대가 군영으로 활용하고 있던 옛날 금위영 소재지를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띈 건물이 파란색 ㄱ자 대청, 빨간색 긴 부속채, 그리고 녹색 행랑채들입니다. 현재 육사당 자리에 대청 건물이 있었는데 '親衛第二大隊(친위제2대대)'라는 글자를 넣으면서 생략한 것일까요? 오른쪽 1910년대 건물 지도에도 없는 것을 보면 역시 그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왼쪽 1903년 지도에서 보라색 화살표는 운현궁과 금위영의 경계인데, 마치 골목길처럼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에서 실제 도로가 없이 구획만 나눠진 곳을 실선 하나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렇게 골목길처럼 그리기도 하므로 남북을 가로지르는 통로가 존재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금위영 영역이 보라색 화살표 지점에서 남쪽으로 쭉 이어져 있다는 부분은 사실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이 경계는 운현궁 양관 양관을 건축할 즈음에 동남쪽 일부가 운현궁 부지로 편입되면서 이동되고 최종적으로 위 1925년 지도의 보라색 화살표 지점까지 양측 필지가 조정됩니다. 1925년 지도에서 빨간색 사각형 부분이 현재 육사당 위치입니다.

위 11번 지도는 금위영 신영 청사의 건물 배치도를 추정한 것입니다. 조선왕조 수도 방위의 일익을 담당하던 전통적 군영인 금위영은 1884년(고종21)에 해체되면서 친군별영(親軍別營)으로 개편되고 이후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신식 군대인 친위대대(10번 1903년 지도), 일본군 제13사단 사령부, 은사수산장 등이 들어서면서 건물 구성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관아 건물의 변천을 탐구한 결과를 고려하면 그리 급격한 변경이 많지 않았던 것이 또한 구한말-대한제국 시기의 한성부 소재 관청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1910년대 초중반 사진과 지형도에 묘사된 건물들이 어느 정도는 옛 금위영 전경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별 금위영 주요 건물 기록을 일부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738년(영조14), 『금위영등록(禁衛營謄錄)』
대청(大廳), 24칸(間)
천총소(千摠所), 16칸
파총소(把摠所), 11칸
장관청(將官廳), 11칸
군색고(軍色庫), 43칸
향색고(餉色庫), 45칸
책응소(策應所), 54칸
군기고(軍器庫), 48칸
사정(射亭), 3칸
- 1754년(영조30), 『금위영초등록(禁衛營抄謄錄)』
대청(大廳), 12칸
- 1854년(철종5) 『금위영등록』
대청(大廳), 22칸
낭청대청(郎廳大廳), 6칸
사정(射亭), 6칸
천총직소(千摠直所), 12칸
파총직소(把摠直所), 8칸
군향색고(軍餉色庫), 54칸반(間半)
책응소(策應所), 63칸
기사장직소(騎士將直所), 6칸
장관청(將官廳), 8칸반
전차소(戰車所), 30칸
궁방대청(弓房大廳), 14칸
군기고(軍器庫), 45칸
대동문(大東門), 1칸반
북문(北門), 2칸
소동문(小東門), 2칸
중대문(中大門), 3칸
- 1922년판,『조선총독부 관유재산목록(官有財産目錄)』
운니동(雲泥洞) 98번지, 이왕직용지(李王職用地)
금위영 병사(兵舍), 조와(朝瓦 = 朝鮮式 瓦葺, 조선 기와집) 173.49평
금위영 병사, 朝瓦 64.98평
금위영 병사, 朝瓦 31.22평
금위영 병사, 朝瓦 80.15평
창고(倉庫), 朝瓦 25.51평
대청(大廳), 朝瓦 67.88평 [현재 덕성여대 육사당 건물과 동일 면적 건물]
물치(物置), 朝瓦 11.41평
위관실(尉官室), 朝瓦 17.58평
구사(廐舍, 마구간), 朝瓦 36.45평
응접실(應接室), 朝瓦 9.36평
공소(控所, 휴게실), 朝瓦 12.26평
문사(門舍, 문), 朝瓦 2.17평
변소(便所), 朝瓦 3.30평
식당(食堂), 朝瓦 41.10평
욕실(浴室), 朝瓦 13.42평
숙사(宿舍), 朝瓦 8.20평
사무실(事務室), 朝瓦 19.75평
숙사, 朝瓦 18.97평
병사, 朝瓦 17.05평
취사장(炊事場), 朝瓦 17.21평
물치, 朝瓦 18.18평
문사, 朝瓦 1.18평
1738년과 1754년 대청이 같은 건물을 이르는 것이라면 퇴칸(협칸)의 포함 여부에 따른 차이로 보이며, 가장 늦은 1854년 기록의 '대청 22칸'을 위 지도에서 녹색 ㄱ자 형태로 표시된 대청 건물의 전체 규모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위 건물 배치도에서는 현재 육사당 규모인 고주(高柱, 內陳柱) 12칸(6x2)을 참작하여 정면 4칸, 북측면 4칸, 남측면 2칸의 12칸 규모로 금위영 대청 평면을 추정 배치하였습니다. 만약 현존 육사당 건물을 과거 금위영 대청의 이건으로 본다면 문헌 자료를 통해 금위영 개별 건물의 규모, 위치, 형태를 검증해야 하는데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꽤 난해한 것이 현실입니다. 1922년 『관유재산목록』에 현재 육사당이 '대청'으로 기재되어 있음에도 100% 확신하기 어렵죠. 도면, 회화, 사진 등의 관련 자료가 더 많이 발견 및 확보되어 금위영 및 운현궁 주요 건물의 실체를 확고하고 상세하게 규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 건물 배치도에서 ㉠은 고종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사용했던 어로를 운현궁 북측방으로 추정했을 경우를 가정(어로A)했을 때의 경근문 위치이며, ㉡은 8번 사진의 갈색 화살표 및 9번의 D 사진 건물입니다. 어로가 양관 남쪽에 있었다면(어로B) 보라색 화살표 방향 경로를 따라 국왕의 행렬이 이동했을 것입니다. 즉, 돈화문을 나와 비변사 동문(東門, 대문)과 서문(西門), 그리고 금위영 대동문(大東門, 대문)과 중문(中門)을 지나 어로A 또는 어로B로 운현궁에 진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B일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참, 비변사가 의정부로 흡수 통합된 1865년(고종2) 3월 28일 이후에는 비변사 청사가 의정부 조방(朝房, 궐밖 대기 장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도에서 운현궁 본궁 남쪽의 '(경수궁)'은 정조 임금의 후궁이었던 화빈윤씨(和嬪尹氏, 1765-1824)의 궁가인 경수궁(慶壽宮)을 의미합니다. 흥선군이 운현(구름재)에 처음 자리잡은 시기에 남쪽에 화빈윤씨 가문의 제례를 주관하는 경수궁 궁가(宮家)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었는데, 훗날 서남쪽 민가를 포함하여 이 지역까지 모두 운현궁 영역에 편입됩니다.

위 12번 사진은 5번 운현궁 정2품 경송(慶松) 사진이 수록된 책자에 함께 실린 어사각 건물 모습입니다. 왼쪽 아래는 1919년 간행된 고종 황제의 문집인 『주연선집(珠淵選集)』에 실린 같은 사진이죠. 또 5번 사진 설명에서 인용한 《매일신보》의 같은 기사에 어사각에 관한 내용이 어사각을 서남쪽에서 촬영한 사진과 함께 게재되어 있는데, 현대어로 정리해 게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태왕(李太王) 전하의 탄생하신 구기(舊基, 옛터)의 어사각(御賜閣)
어사각은 어디 있는가, 지금 경운동이라고 하는 동네는 60여 년 전에는 말할 수 없는 빈촌으로 조그마한 초가만 즐비하였는데 태왕전하의 본 저택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태왕가에서 당시에 어떠한 사정이 계셨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본 저택되시는 지금 운현궁에서 탄생치 아니하시고 그 부근에 있는 다른 가옥을 빌려 쓰신 모양인데 지금 교동보통학교의 윗골목 막다른 집이 그곳이라. 태왕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에 그 터에 집을 지어 내리신 까닭에 당시의 탄생하시던 집 그대로는 볼 도리가 없으나 이곳이 태왕전하께서 탄생하신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날때에 67년 전 탄생하실 때의 광경이 눈앞에 어리는 것 같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 운현궁이 아니라 별도의 건물이었음을 말해주는 기사입니다. 6번 지도 설명에서 언급한 사료(1849년 운현 대감 표현)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흥선군이 처음 본가에서 독립할 때 1952년(철종3) 고종을 낳았던 경운동(慶雲洞) 어사각 자리에 거처를 정했다가 이후에 니동(泥洞) 운현궁 자리로 이사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운현에 저택이 그 전부터 있었고 당시 역병을 피해서 혹은 산달이 되어 처가가 마련한 곳(어사각 자리)에서 고종을 낳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사각이 '임금이 하사한 누각(집)'이라는 뜻이므로,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생가 자리에 이를 기념하는 건물을 지어 운현궁에 하사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었을 것입니다.
기사 내용에서 어사각 건물의 소재지를 비교적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에서 그 위치만 찾아보면 됩니다.

위 13번 지도는 경운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 초등학교인 교동보통학교(校洞普通學校) 인근 지적도의 변천 내역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A는 1912년 지적원도입니다. 당시 교동보통학교는 경운동 18번지에 있었는데, 그 위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앞의 《매일신보》 기사에 등장하는 교동보통학교 위쪽 골목길입니다. 그리고 막다른 길에 489평(약 1,614제곱미터) 면적의 경운동 1번지가 있습니다. 1912년 당시 해당 주소지의 소유주는 운니동 114번지인 운현궁과 동일한 이준공(李埈公), 즉 영선군 이준용입니다. 신문기사 내용대로 적당한 필지의 땅이 있고 소유자도 운현궁 주인이기 때문에 어사각이 경운동 1번지로 특정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곳이 고종 태황제(太皇帝)의 일대기를 서술한 행장(行狀)에서 고종이 탄신(誕辰)한 '청니방사저(靑泥坊私邸)'라고 기재된 장소라고 할 수 있죠, (최소한 1912년 지적원도에서부터 어사각 소재지가 운현궁 소유로 있었고, 실제는 그보다 많이 이른 시기인 즉위 직후 1860년대 하사했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고종이 운현궁에서 태어났다'라는 문장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A 지적도에 대해 약간 설명을 덧붙이자면, 연녹색으로 채색된 경운동 4번지도 1912년 당시 국유지였습니다. 그리고 운현궁 지역에 운현궁 남쪽에 어로가 있었을 경우를 가정한 경근문, 공근문 추정 위치를 ㉠, ㉡, ㉢, ㉣로 표시하였습니다.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에 통로가 있었으면 그 양쪽 담장을 두고 ㉡에 공근문, ㉢에 경근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지 구획, 경사로 시작 부근 등을 감안하여 경수궁 원문(園門) 자리에 근접한 ㉠을 공근문, ㉣을 경근문 위치로 추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B는 1929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壹筆每地形明細圖)〉입니다. 1927년 4월 15일에 교동보통학교에 화재가 발생해서 1921년 신축했던 2층 본관 사무실과 10학급 교사(校舍)가 소실됩니다. 그래서 이듬해 1928년 1월에 3층 18학급 규모로 본관 건물을 신축하는데, B 지적도는 그 직후 필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운동 1번지가 1-1(어사각) 및 1-2, 1-3의 3개 필지로 분할되어 1-2와 1-3이 교동보통학교 부지로 편입된 상황입니다. 1-2 필지 바로 아래의 작은 사각형은 1936년 8월이 준공된 제2본관 9학급입니다.
C는 1936년 이후 필지 현황입니다. 어사각 건물 부분은 1962년 항공사진을 합성한 것인데, 교동보통학교에서 어사각 남쪽에 강당을 증축하면서 부지가 더 축소되었습니다. 파란색 화살표는 1930년에 교동보통학교 졸업앨범에 수록된 경운동 1-2번지 아동도서관 건물입니다.
D는 동일 지역의 현재 지적도입니다. 토지대장 조회 결과 어사각이 존재하던 1-1번지가 1965년 10월 11일에 1-1, 1-5, 1-8, 1-9 등의 필지로 분할되었습니다. 노란색 테두리로 표시한 부분이 1912년 시점의 경운동 1번지이며, 연한 하늘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어사각 건물이 있던 시기의 기와집 건물 배치를 추정한 것입니다. 운현궁 남쪽에 덕성여대 종로운현캠퍼스 교육대학교와 평생교육원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교동초등학교 부지에 서울경운학교가 같이 설치된 오늘날 경운동 어사각 일대 모습을 보여줍니다.

위 14번 사진은 어사각 건물을 촬영한 시대별 항공사진입니다.
A는 1928년 간행된 『경성도시계획조사서(京城都市計畵調査書)』 일부입니다. 보라색 화살표는 어사각을 둘러싸고 있던 행각들이며, 파란색 화살표는 13번의 C 지적도에 표시한 교동보통학교 아동도서관 건물, 녹색 화살표는 어사각 부속 건물입니다.
B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촬영 사진입니다. 어사각과 어사각 주변 행각, 그리고 남쪽 학교 건물들이 보입니다.
C는 1962년 촬영 항공사진입니다. 역시 어사각과 행각 건물이 잘 보이며, 남쪽 교동국민학교를 구성하는 여러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D는 1978년 사진인데, 앞의 13번 D의 현재 지적도에서 본 것처럼 1965년에 필지가 여러 개로 분할된 후, 일제강점기부터 본격 유행하던 도시한옥(근대식 개량한옥) 4채가 들어서 있는 모습이 관측됩니다. 남쪽 교동국민학교는 기존 3층을 1977년에 4층으로 개축한 상태입니다.

위 15번 사진은 중부교육디지털박물관 사이트에서 공개하고 있는 교동보통학교 졸업앨범 수록 사진과 교동보통학교 관련 사진엽서 일부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어사각 본청 건물, 보라색 화살표는 주변을 둘러싼 행각 일부, 초록색 화살표는 14번 항공사진 A의 어사각 남서쪽 부속 건물, 파란색 화살표는 13번 지적도와 14번 항공사진에 등장하는 아동도서관 건물입니다.

위 16번 사진 역시 중부교육디지널박물관 소장 교동보통학교 졸업앨범 중에서 어사각이 아동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을 시기인 1934년 사진첩 사진입니다. 보라색 화살표를 보면 어사각 주변 행각 형태가 잘 보네요. 새로 신축된 아동도서관(13번 사진 파란색 화살표) 외에 추가로 도서를 소장하고 열람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사각 공간을 빌려 사용했을 수 있고, 당시 학급 증설로 교실이 부족하자 기존 아동도서관 건물을 교사로 활용하고 도서관 장서를 어사각으로 옮겨 임시 도서관으로 활용했을 수 있습니다. 도서관 현판이 옮겨 걸린 것으로 보이므로 후자가 유력한데, 이유가 어찌 되었든 어사각 건물을 교동보통학교에서 사용한 시기가 있었기에 이처럼 해상도 높은 소중한 사진 자료가 남을 수 있었네요.
이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략) 밀려드는 입학난을 조금이라도 줄일 양으로 여섯 학급을 증가하게 되니 교실이 부족하여 지금은 이우공(李鍝公) 전하께서 고맙게 빌려주신 기지(부지)를 닦아서 역시 3층 교사를 증축하고 있는 중인데 그동안 아동을 가르칠 교실이 없어 혹은 강당을 또는 재봉실 가사실까지 교실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특히 운현궁의 호의로 빌려주신 학교 동북쪽에 있는 묵은 기와집 한 채는 황송하게도 옛날 고종께옵서 탄생하신 곳인데 이 속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아동이며 선생님들도 감격에 넘쳐 한층 더 배움과 가르침에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 (후략)
- 《조선일보》 1936년 5월 7일, 우리 아들딸 학원돌이 - 교동공보편
교동초등학교 교내 4층에 학교 역사관(교동사료관)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곳에 아직 온라인상에 공개되지 않은 어사각 본채 또는 주변 건물 풍경을 담은 사진 자료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물 내부 찍은 사진이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운현궁에 여러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에는 각각의 건물 명칭이 편액(扁額)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본 글에 첨부한 여러 운현궁 지역 지도에 표기한 것처럼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 아재당 또는 아재정, 영로당(永老堂) 등의 그것이죠. 그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자를 집자(集字)한 것[노안당, 이로당]이거나 대원군[이재당]), 신헌(申櫶, 신관호 1810-1888)의 글씨[노락당]입니다. 그리고 운현궁에 전해지는 또 하나의 편액이 있는데, '희죽헌(戲竹軒)'이라는 이름으로 고종이 직접 쓴 글씨인 어필(御筆) 편액입니다.
1867년(고종4) 4월 6일에 '(왕울 태운 가마가) 돈화문을 나와 금위영 대문을 거쳐 경근문, 공근문으로 들어와 희죽헌에 이르렀다[敦化門 由禁衛營大門 入敬覲門恭覲門至戱竹軒]'는 『승정원일기』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인물이 희죽헌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이것 단 하나이고, 이외에 희죽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기록은 봉심(奉審), 즉 '담당관을 희죽헌에 파견해 살펴봤다'는 1874년(고종11)부터 1894년(고종31)까지 약 20년간 시행된 40여 건의 『승정원일기』 수록 내용입니다. 당시 호조(戶曹) 관청에서 매년(연1회), 봄가을(연2회), 계절마다(연4회) 정기적으로 봉심하는 목록에 희죽헌이 포함되어 있던 것입니다. 관련 기록에 수록된 주요 봉심 대상은 니동축대(泥洞築臺), 추모동(追慕洞) 비각(碑閣), 정업원(淨業院) 등인데, 추모동 비각은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탄생했던 곳에 세운 비각이고 정업원은 단종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거처하는 터입니다. 이처럼 봉심 장소가 대체로 왕실과 관련이 깊은 곳이기 때문에 희죽한 편액이 어사각에 걸려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종이 탄생한 곳이었기 때문이죠. 니동축대는 다소 높은 지대에 있던 운현궁 본궁(고종의 잠저) 지역일 수 있겠죠.
만일 희죽헌 편액이 어사각에 있었다면 고종이 자신의 탄생지에 번듯한 건물을 지어 운현궁에 내리면서 어필 편액도 같이 하사했을 것이며,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어로는 운현궁 남측(11번 지도의 어로B)이 유력해집니다. 어사각이 교동보교 아동도서관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시기 또는 1965년 경운동 1-1번지가 민간에 매각되면서 어사각이 철거될 때 편액을 떼어 운현궁에서 보관하다가 1996년에 운현궁 유물이 서울시에 기증되는 절차를 거쳐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추정에 추정을 더한 것입니다.
라고 길게 적었는데, 1880년(고종17)에 세워진 고종의 장자인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 1868-1880)의 묘비 뒷면에 희죽헌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진년(1868년) 윤4월 10일 정사일에 운현궁의 희죽헌에서 태어났다. 병자년(1876년)에 (완화군에) 봉작되고 정축년(1877년)에 관례를...
戊辰閏四月十日丁巳生于雲峴宮之戱竹軒 丙子膺爵 丁丑冠禮
즉, 희죽헌은 고종의 첫째 아들인 서자(庶子) 완화군이 태어난 건물이었습니다. 생모인 영보당(永保堂) 귀인이씨(貴人李氏, 1843-1928)가 궁궐이 아닌 운현궁 소재 건물에서 완화군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당시 궁궐 안에 호산청(護産廳)이 설치된 기록이 없고 출산 직후에 '산모를 보살펴 주는 등의 일을 운현궁에서 대령하라[護産等節 待令于雲峴宮]'는 고종 임금의 당시 전교가 있었던 전후 상황과 잘 들어맞습니다. 희죽헌 봉심 부분은, 희죽헌이 고종의 서장자(庶長子)가 태어난 곳이었기 때문에 국가 관청에서 정기 점검하는 건축물로 관리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화군에 대한 고종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합니다.
완화군이 태어난 것은 1868년(고종5) 윤4월인데, 고종이 희죽헌을 방문했던 날짜는 그보다 1년 전인 1867년 4월인 것으로 봐서 희죽헌 편액은 완화군 출생 이전에 이미 어필로 제작되어 걸려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영보당 이씨가 그때 이미 민비(閔妃, 1851-1895)의 눈의 피해 궁궐 밖 운현궁에 살고 있었기에 고종이 방문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희죽헌이 운현궁 내의 특별한 전각이라서 나중에 자신의 후궁이 자식을 낳을 때 출산 공간으로 활용하라고 배려한 것일까요? 그리고 놀다, 장난하다라는 뜻의 글자 '희(戲, 戱)'와 대나무 '죽(竹)'이 결합한 편액이라서 어사각에 어울리지 않기에 그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그곳이 운현궁 본궁 또는 노안당 남쪽 지역에 있던 미상의 건물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생가(生家) 터에 마련된 어사각이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아직 밝혀내야 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본 글을 세 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종 황제가 태어난 곳에 건립된 어사각(御賜閣) 건물은 현재 지번 주소로 종로구 경운동 1번지에 있었다. (희죽헌 편액?)
2)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 있는 육사당(六四堂) 건물은 예전 금위영 대청을 이축(移築)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3) 파주에 복원되었다는 아재당(我在堂) 건물은 실제 운현궁에 존재하던 전통 건물인 아재당 또는 아재정과 외형이 크게 다르다.
이상입니다. 주절주절 쓰다 보니 상당히 길어졌네요.
100여 년 전에 대원군 사당, 아재정 등이 있던 운현궁 본궁 지역은 2025년 현재 종로소방서 임사청사 건물 및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소방서 자리인 수송동에 2028년경 소방합동청사가 완공되면 운현궁 본궁 터가 어떻게 활용될지 궁금합니다. 그 부지 현재 삼성물산 소유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운현궁 본궁 지역 복원이 가능할지... 그리고 육사당 건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실제 금위영 대청 건물을 옮겨 개축한 것일 가능성에 대한 것이죠. 어사각 건물이 있던 필지에는 현재 5층 높이의 빌딩 3채가 들어서 있어서 국가가 매입한 후 어사각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고종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역사적 평가 및 호불호가 상반되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겠죠. 그래도 간단하게 '고종 황제가 태어난 장소'임을 알리는 표석 정도는 설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 참고 자료 링크 : 사이버조선왕조 - 금위영 청사 안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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