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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잡기

금오산인기(金烏山人記)

도필리 2007. 11. 17. 23:37

임신년(1992)에 동양제과(東洋製菓)에서 포도과즙의 젤리형 사탕을 출시하였으니, 이름하여 '마이구미'이다. 당시 자못 인기가 있어 월 20억 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 마이구미 때문에 지명도를 올렸던 곳이 바로 '구미(龜尾)'인데, 구미는 경상도 대구부(大邱府)와 상주목(尙州牧) 사이에 있던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 일대의 지명으로서, 여러 차례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무오년(1978)에 구미읍이 선산군에서 분리되어 구미시(龜尾市)가 되었다. 이후 읍세(邑勢)를 확장하며 인근 지역을 점차 흡수하다 을해(1995) 정월 초1일에는 선산군을 거꾸로 통폐합하여 도농복합시 형태의 구미시가 되었으니, 세간에서는 이를 이르러 '구미가 당겼다'라고 하였다.

이 구미에 영조척(營造尺, 1척=31.22cm)으로 해발 삼천이백구십사 척(尺, 997m) 높이의 금오산(金烏山)이 있다.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李重煥, 1690-1756) 선생께서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이르시기를,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嶺南)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善山)에 있다'고 하실 정도로 현재의 구미 금오산 주변에서 여러 위인들이 태어났으니, 호(號)를 야은(冶隱) 혹은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 하던 충절공(忠節公) 길재(吉再, 1353-1419) 선생도 그 중에 한 분이셨다. 그러나 충절공 야은 선생은 허다한 선산 출신의 인재 가운데 한 분이 아니다. 바로 충절공으로부터 수많은 인재가 비롯된 것이니,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충절공 야은 길재, 문강공(文康公) 강호산인(江湖山人) 김숙자(金叔滋, 1389-1456)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헤아려 보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천어망(天漁通)을 확장한 조망궁(釣網宮) 어물전(漁物展)의 천어(天漁) 선생이 구미 지역사(地域事)를 정리하여 널리 알리는 일에 뜻을 두고는, 따로 거처를 마련하여 액호(額號)를 '금오산인'이라 한 후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무릇 구미 지역에 인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오산에 애착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금오산에 연정을 둔 사람이라면 충절공 야은 선생을 숭모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거소(居所)의 이름을 금오산인이라 한 것이 어찌 심상한 일이겠는가. 내가 천어 선생의 웅대한 포부와 금오산인이라 작명한 연원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고, 또 정리(情理)로 보아 어렵게 청한 것을 끝까지 거절할 수 없기에 이렇듯 기문을 짓는다. 선산에서 나온 구미가 선산을 흡수하듯, 충절공 야은 선생으로부터 수많은 인재가 자라나듯, 처음 거처를 마련한 뜻을 잘 펼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정해년(2007) 11월 17일, 선성(宣城) 김하은(金河銀) 근서(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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