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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 편액(扁額)
무자년(2008) 2월 11일 술시(戌時, 19-21시)에 숭례문(崇禮門)에 화재가 일어나 이튿날 축시(丑時, 01-03시)에 문루(門樓)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상당 부분이라 함은 전소(全燒)를 말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중층(重層)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축(石築) 부분과 홍예문(虹霓門)이 무사하고 1층 이하는 목부재(木部材)가 제법 남았기 때문이다.
편액(扁額, 현판) 역시 부분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건재하다. 전각(殿閣)의 백미(白眉)와 점정(點睛)이 바로 액자(額字)이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 숭례문 편액의 서자(書字)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설(說)이 적지 아니하다. 문헌에 따라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유진동(柳辰仝:柳辰同, 1497-1561), 신장(申檣, 1382-1433) 등으로 숭례문 편액 석 자(字)를 쓴 인물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중종 경인년(1530)에 편찬된 이행(李荇, :1478-1534)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도(京都) 항목에서, '(경성의)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고 하였으니, 이 설이 광해 갑인년(1614)에 간행된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등에 답습되어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고종 신미년(1871)에 쓰여진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벽려신지(薜茘新志)에, '숭례문이란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데, 이것은 『지봉유설』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봉유설의 어떤 구절을 근거로 든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여간 숭례문 편액이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이야기는 상식(常識)처럼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유원은 같은 글에서,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重修)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柳辰仝)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주1고 기술하여, 19세기 당시 숭례문에 걸려 있던의 편액의 서자가 양녕대군이라는 설을 곧바로 부인하고 있다.
도성 남문에 '숭례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태조 병자년(1396), 명(明) 연호로는 홍무(洪武) 29년 9월 24일이다주2. 숭례문 건립 공사가 병자년에 시작되어주3 무인년(1398) 2월 8일에 종료되었으니, 당연히 완공과 동시에 편액이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녕대군의 출생년이 태조 갑술년(1394)이므로, 최초의 편액 글씨가 양녕대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안평대군의 출생년은 태종 무술년(1418)으로 양녕대군보다도 늦다.
만약 양녕이나 안평의 글씨라면, 필시 최초의 숭례문 편액을 어떤 사정에 의해 교체할 때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일까. 실록 등에 별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아마도 숭례문을 크게 중수한 직후일 가능성이 높다. 편액을 새로 써 달아야 할 계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숭례문을 처음 고쳐 지은 때는 세종 정묘년(1447) 8월인데,주4 이때 지반을 높이는 등 전면 개수를 하여 실록에서 '숭례문을 새로 짓는(新作崇禮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 시기에는 양녕과 안평이 모두 생존해 있었으므로 만약 양녕의 글씨라면 이때 부착되지 않았을까 싶다. 제2차 중수는 성종 기해년(1479)이다.주5 기반이 일부 침하되자 이를 방지하는 개축을 하였다. 「상량문(上樑文)」의 '因舊制而用新'라는 기록으로 보아 기본 골격은 예전 것을 따르면서 자재만 새로 교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점은 양녕이나 안평이 죽은 지 이미 10년 이상 흐른 때이니, 집자(集字)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편액 글자를 썼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숭례문 편액이 유진동의 글씨라는 이승보(李承輔, 1814-1880?), 윤성진(尹成鎭, 1826-?)의 전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 글에서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라는 것은 분명 『임하필기』가 완성되기 이전일 것이니, 이승보와 윤성진의 생몰년 등을 감안하면 철종 연간에서 고종 초년 사이일 것이다. 고종 신미년(1871) 8월에 숭례문 동쪽 체성(體城)을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임하필기가 동년 12월에 이룩되었으니, 혹시 이 시점에 관찰한 결과를 전한 것일지 모르겠다.
정동유(鄭東愈, 1744-1808)가 순조 을축년(1805)에 저술한 「주영편(晝永編)」에서, '판서 유진동의 집안에 숭례문(崇禮門) 석 자를 연습하여 쓴 종이가 수백 장 전해진다.'고 전하면서, 숙종 때 장신(將臣) 유혁연(柳赫然, 1616-1680)이 숭례문 다락을 수리하다가 편액 후판에 '가정 모년에 죽당이 쓰다(嘉靖某年竹堂書)'라는 적힌 것을 보고는 비로소 유진동의 글씨임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주6 세간에서는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알고 있는데 무룻 이것은 잘못된 소리라는 내용이다.
'가정(嘉靖)'은 중종과 명종 연간의 명나라 연호로서 유진동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유혁현은 유진동의 후손이기에 그대로 믿기에는 신빙성에 일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야이기가 훗날 약 200년 후에 이승보, 윤성진 등이 전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민국(民國) 임인년(1962)주7에 숭례문을 해체 보수하면서 편액을 살핀 결과에 따르면 그러한 '후판대서'나 '가정모년죽당서' 등의 흔적이 없었다고 하므로 이 설을 확신하기가 더욱 어렵다.주8
한편, 이규경(李圭景, 1788-?)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내용에 따르면, '도성 남대문의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주9라고 하면서, 여전히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이어,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라고 단정하고,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이 어째서 다시 썼다는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것을 써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주10라고 적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신형(身形)편에서도 '이는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鄭公蘭宗所題也).'라고 반복하고 있다. 과연 숭례문 편액의 글씨는 정난종의 솜씨일까.
조선 후기 예원(藝苑)의 종장(宗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그의 문집 『완당선생집(阮堂先生集)』에 실린 서간(書簡) 〈홍우연에게 써서 주다(書贈洪祐衍)〉에서 '지금 숭례문(崇禮門) 편액은 곧 신장(申檣)의 글씨인데 깊이 구의 골수에 들어갔고...'주11라고 적고 있다. 양녕대군이나 유진동, 정난정이라는 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일설에는 추사 김정희가 일이 있어 숭례문을 드나들 때마다 편액을 보고 감탄하며 해질녘까지 한참을 쳐다 보았다고 한다. 추사는 금석학(金石學), 고증학(考證學)의 대가(大家)이며 명필(名筆)이다. 한낱 간찰에 적은 글이기는 하지만, 그런 추사가 아무런 근거 없이 기존의 설을 타파하고 신장의 글씨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양녕의 글씨라는 세간의 이야기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간찰에서 그러한 단정을 하기 전까지 나름대로 고증하고 연구하여 결론을 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민국 임인년 보수시에 숭례문 편액 후판에 '중군총제신장서(中軍摠制申檣書)'라는 내용이 써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따로 증거할 길이 없다. 신장이 중군총제로 있던 때는 세종 정미년(1427) 12월 초6일이다. 이듬해 7월에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옮겨졌으니,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세종 정미년에서 무신년(1428) 사이에 글씨를 썼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기존 편액을 교체해야 할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숭례문 화재로 파손된 편액이 지금 경복궁(景福宮) 경내의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에 임시 보관되어 있다. 편액 후판에 '가정모년죽당서', '중군총제신장서' 등의 글귀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실로 오랫만의 기회 아닌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본판(本板) 뒤에 한 치가 넘는 두께의 목재 15개가 덧붙여 보강되어 있으므로, 글귀가 있다고 하더라도 보강재를 걷어내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에 쉽지 않을 것이다.
후판 보강재 위에 글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구한말에서 민국 임인년 사이에 숭례문을 중수하면서 기존 보강재를 교체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금 후판에 글귀가 없다고 하여 유진동이나 신장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임인년 등의 중수 사업에 참여한 자의 증언이나 당시 중수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는 길이 남은 셈이다. 편액의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글귀를 검증할 수 있을 것이기는 하나, 관계자에게 편액 서자에 대한 관심이 있어 그러한 것을 검토하고 발표할 것인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결론하여 말하면, 현재로서는 기존의 편액 서자에 대한 추론에서처럼 이렇다 할 확정을 내릴 근거가 아직은 없다. 양녕대군이나 신장의 글씨일 가능성이 그나마 높고, 안평대군이나 유진동, 정난종일 확율은 상대적으로 낮다. 영원히 고증하기 어려운 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제학(諸學) 여러분들의 관심이 있다면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주12 성과 없는 잡론(雜論)을 이만 마친다.
무자(2008년) 2월 16일, 선성(宣城) 김하은(金河銀)
주1) 양녕대군의 사당(祠堂)인 지덕사(至德祠)에 숭례문 탁본이 전하고 있는데, 양녕대군의 후손들 주장에 의하면 이 탁본은 약 120년 전에 (본 주석의 본문에 기술된) '양녕대군의 사손인 이승보 대감'이 뜬 것이라고 한다. 실제 양녕대군의 친필이라서 편액을 걸던 당대에 탁본을 뜬 것은 아니라,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것이 상식처럼 퍼져 있었기에 후대에 탁본을 뜬 것이라는 내용인데, 이러한 주장은 '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는『임하필기』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만약 양녕대군 16대손인 이승보가 탁본을 뜬 것이라면 1870년 전후일 것이다.
주2) 『태조실록』 권10. 태조5년 9월 24일 기묘조
주3) 숭례문의 입주상량일(立柱上樑日)은 1396년(태조5년 병자) 10월 6일이다.
주4) 숭례문 제1차 중수의 입주상량일은 1448년(세종30년 무진) 3월 17일이다.
주5) 숭례문 제2차 중수의 입주상량일은 1479년(성종10년 기해) 4월 초2일이다.
주6) 원문 '柳判書辰同 以書名於世 其家傳藏判書所寫崇禮門三字屢百紙 以爲南門揚額時寫習字云 亦未有證矣 肅廟時大將柳赫然 卽其後也 因修理門樓脫下扁額 則扁背書 嘉靖某年 竹堂書 始知其爲柳公書也 世稱爲讓寧大君者盖誤也'
주7) 숭례문 제3차 중수는 1961년 8월경부터 1963년 5월 14일까지 진행되었다. 상량식은 국보 지정 직후인 1962년 12월 27일에 있었으며, 대대적인 해체 보수 작업을 통해 목부재 37점 등의 교체가 있었다. 이후 1997년 12월에도 기와를 상당수 교체하였다.
주8) 한국전쟁 당시 또는 그 이후, 아마도 1962년의 중수 이전에 숭례문을 보수하면서 서예가로 명망이 있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 등이 입회하여 편액 후판을 면밀히 살펴 보았으나 아무런 글씨나 낙관 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주9) 제목 「숭례문과 대성전 편액에 대한 변증설(崇禮門大成殿額辨證說)」, 원문 '我國宮殿題額字 未知其誰某之書 而都城南大門 名以崇禮門者 鄭三峯道傳所製也 其額字 世傳爲讓寧大君筆也 壬辰之亂 倭賊斫下遺失 平亂後 南門外蓮池近傍 每夜放光怪 掘其處復得此額揭之云'
주10) 원문 '崇禮門額 鄭蘭宗書 然則國初所揭之額 必有之 而讓寧何故更書耶 平亂後因光怪 復得縣揭云 則鄭公復何書揭耶 而況鄭公 世祖朝人 以善書 碑版鍾銘 承命多書 則崇禮門額 亦爲公筆云者不誣 且看其字體 則卽公之書體也明矣 壬辰後倭所袪 而亂平後更得而揭之 仍訛傳爲讓寧筆 而又傅會光怪之說也'
주11) 원문 '今崇禮門扁卽申檣書而深入歐髓...'
주12) 이 글은 「崇禮門 扁額 書者에 關한 考察 : 巖軒 申檣先生과 崇禮門 扁額 (1997)」 등과 같은 학계의 관련 논문을 섭렵하지 않고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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