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조선시대 관아(관청) 건물을 복원하는 움직임이 많이 보이고 있다. 명분은 지역 랜드마크 건립, 지역 주민의 자긍심 고취, 관광자원 건설을 통한 지역 활성화 등을 내세우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시장, 군수 등의 자치단체장 치적 쌓기 사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민선 시장 또는 군수가 자신의 임기 내에 추진하는 이러한 관아 복원의 문제점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짧은 글을 적어 본다.



1. 강원도 원주시 강원감영 복원 (2005년)

옛날 원주(原州)에는 강원감영(江原監營)이 있었다. 감영(監營)은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기관이었다. 즉, 조선시대 강원도의 도청이 바로 원주에 있었다. 특히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강원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宣化堂)과 감영 정문인 포정문(布政門, 포정루)이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다만 선화당, 포정문 외에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므로 2000년 이후에 일부 건물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2005년에 1단계 사업으로 선화당과 포정문 사이에 있던 중삼문(中三門, 중문)과 내삼문(內三門, 징청문)이, 2018년에 2단계 사업으로 선화당 북쪽의 후원 공간에 있던 연못, 정자(관풍각, 봉래각) 등의 복원되었다. 후원 권역 복원도 고증 여부에 논란이 있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중삼문, 내삼문의 형태가 사진 자료와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강원도 원주시 강원감영(江原監營) 복원 사례
강원도 원주시 소재 강원감영 내삼문 복원 사례


당시 감영 터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D번 사진처럼 일반적인 맞배지붕 형식으로 복원하였는데, 실제는 C번 사진처럼 가운데 문의 지붕이 좌우 양측보다 높은 솟을삼문 형태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A 사진 : 강원감영을 촬영한 사진 중 내삼문 부분 (솟을삼문 맞배지붕)
B 사진 : 《관동지(關東誌)》에 수록된 〈강영감영도(江原監營圖)〉 중 일부 (우진각지붕 형태)
C 사진 : 강원감영 부재에 있는 '강원감영 사료관' 전시물인 강원감영 모형 일부 (솟을삼문 맞배지붕)
D 사진 : 2005년에 복원된 일반적인 맞배지붕 형태의 내삼문 사진 (중삼문도 동일하게 복원됨)

강원감영 전경을 촬영한 A 사진은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고 오래전부터 존재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째서 이처럼 분명한 자료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보통의 맞배지붕 형태로 내삼문과 중삼문이 복원된 것인지 의문이다. (1986년 간행된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책자에도 확인되고, 내삼문과 외삼문 복원은 2005년에 완료되었다.)

발굴조사의 어려운 점은 실제 지표, 지하 조사에서 드러난 주춧돌, 기단석 등의 기초부 유구가 정확히 언제 것인지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특히 조선시대 관청 터는 수백 년 동안 거의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세월에 걸쳐 여러 차례 건물이 들어섰다가 사라지고 다시 지어지는 과정을 거쳤기에 더욱 그렇다.

만일 복원사업 진행 당시에 사진의 존재를 몰랐다고 가정하면, 발굴 결과 출토된 주춧돌, 기단, 적심 등의 배치와 모양만을 토대로 전통 건축물을 복원하는 것과 실제 건물의 원형 사이에 어떤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자료와 발굴 결과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2. 강원도 강릉시 강릉대도호부 동헌 복원 (2012년)

다음에 살펴볼 것은 2012년에 진행 완료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동헌의 복원 사례이다. 동헌(東軒)은 부목군현(府牧郡縣) 지방 관청의 수령(사또)이 공무를 보는 관아의 중심 건물이다. 현재의 시청, 군청 가운데 시장, 군수의 직무실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구역 단위인 부목군현 가운데 대도호부는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의 관아였다.

1) 부(府) : 종2품 부윤
2) 대도호부(大都護府) : 정3품 대도호부사
3) 목(牧) : 정3품 목사
4) 도호부(都護府) : 종3품 도호부사
5) 군(郡) : 종4품 군수
6) 대현(大縣) : 종5품 현령
7) 소현(小縣) : 종6품 현감

강릉은 강원도, 즉 관동(關東) 지역의 핵심 지역이었기에 대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대도호부 동헌이 복원되었는데, 문제는 발굴조사 결과에 의존하여 복원 사업이 진행된 결과 현재 강릉에는 두 개의 동헌 건물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하나는 문헌, 사진 등으로 존재가 확실하게 입증되는 기존 동헌인 칠사당(七事堂)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별다른 근거 없이 복원된 동헌 건물군(群)이다.

강원도 강릉시 강릉대도호부 동헌(東軒) 복원
강원도 강릉시 소재 강릉대도호부 동헌 복원 사례


위 사진에서 A 사진을 보면 파란색 화살표가 칠사당이고 녹색이 칠사당 앞에 있던 내행랑(內行廊, 행랑채) 및 행랑의 문, 그리고 노란색 화살표가 동헌 앞에 있던 문루(門樓)이다. 빨간색 화살표는 국보 제51호의 임영관(臨瀛館) 삼문(三門)이 있는 강릉 객사인데 임영관 앞쪽, 즉 현재 동헌이 복원된 지역이 거의 공터임을 알 수 있다.

지방 관청 중심지에서 2층으로 된 문루(외문루)가 설치되는 대표적인 공간은 다음과 같다.

1) 동헌(東軒)
2) 객사(客舍)
3) 향교(鄕校)
4) 기타 군영(軍營, 군부대)의 원문(轅門, 군영의 군문)

1910년대의 강릉 전경을 보여주는 A 사진을 보면 동헌(칠사당)-내문(內門, 중문)-문루가 일직선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 사진은 1954년에 촬영된 항공 사진인데, 여기에서도 희미하지만 칠사당-내행랑-문루의 모습이 확인된다. 분홍색 표시 부분은 문루 앞으로 이어져 있던 직선 도로이다.

각종 문헌에서는 칠사당 건물이 명백하게 동헌 건물이라고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A와 B 두 사진에서 확인되는 문루 위치를 참작하면 칠사당이 바로 외아(外衙), 즉 동헌의 중심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C 사진은 현대 항공지도에 조선시대 강릉대도호부 관아 건물들의 대략적인 배치를 기재한 것이다. 문헌 기록상 동헌 동쪽에 있던 ㉡ 위치의 부사(府司), 부사 앞에 있던 작청(作廳, 질청), 문루 앞에 있던 군관청(軍官廳), 그리고 나중에 강릉측후소가 들어섰던 향청(鄕廳) 등을 표시하였다. 동헌과 부사 사이에는 지방관이 생활하던 내아(內衙)가 있었는데, 내아 권역을 넓게 보면 ㉠ 자리로 추정된다. ㉢은 현재의 강릉 중앙동우체국 건물이다.

만일 1950년대까지 있었던 동헌의 문루를 복원한다면 우체국 인근 부지를 발굴해야 할 것이다. 현존하고 있는 내행랑 역시 사진 자료에서 보이는 실제 내행랑과 외형, 위치에 일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완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절 강릉수비대를 촬영한 사진에서는 내행랑, 즉 내문(內門)과 문루 사이에 중문(中門) 또는 외문(外門)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이기도 한다. 각각 삼문(三門)이 아니기에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이 아닌 내문, 중문, 외문 등으로 표기하였다.

발굴조사 유구를 토대로 복원된 강릉시의 신축 동헌 건물들이 과거 어느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지점에 동헌 건물이 있었다가 임진왜란 등으로 불타고 다시 현재의 칠사당 위치로 이전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장의 사진과 기록으로 확실하게 입증되는 동헌 건물을 놔두고(A 사진의 존재 역시 강원감영 전경 사진처럼 최소 198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음), 엉뚱한 곳에 상상으로 만든 건물을 왜 '동헌'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특히 외아문(外衙門, 외문루)이 전통 건축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디자인으로 복원되어 고개를 더 갸우뚱 하게 만든다.


문루에 대해 조금 더 적어보자면, 동헌이었던 칠사당 앞 외문루(外門樓)는 1950년대 무렵까지 존재하였다. 1953년 항공 사진에 찍힌 것은 물론이고 1953년 휴전 결사반대 집회 사진에서도 문루 일부가 보인다. 또 1956년 신문 기사에서는 명주동 폐문루(閉門樓, 문루)의 보수와 신축 필요성에 대한 내용 언급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또는 1960년대에 철거되었을 이 강릉대도호부 문루에는 '예성아문(蘂城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사진과 문헌에서 교차 확인됨). '예성(蘂城)'은 예국(蘂國)의 성(城)을 뜻하며, 예국은 강릉의 별칭이다.

칠사당 앞 내행랑에 있던 내문(內門) 편액 2개 중 아래쪽 것은 '계명아문(啓明衙門)'인 것으로 보이는데 사진 해상도가 낮아서 정확도는 30% 이하이다. 위쪽 편액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만일 내문 편액 중 하나가 계명아문이라면, 원래는 외문루에 달아 동헌 대문의 이름을 '계명문(啓明門)'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문루에 예성아문 편액을 새로 달면서) 내문으로 옮겨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다.



3. 강원도 삼척시 객사 및 동헌 건물군 복원 (2022년 현재)

인구 6만6천 명의 소도시 강원도 삼척(三陟)에서는 2022년 3월 현재 객사(客舍) 건물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 제일루(第一樓, 제1누각)'으로 알려진 삼척의 명물 죽서루(竹西樓) 인근에 있던 객사를 무려 70억 원 사업비로 복원하고 있는 것인데, 몇 가지 자료를 살펴보니 과연 정확한 위치에 제대로 복원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든다.

강원도 삼척시 객사 진주관(眞珠觀) 복원
강원도 삼척시 소재 객사 건물 복원 공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910년대 삼척 객사 유리건판 사진(A 사진, B 사진)과 3D 복원도(C 이미지)의 형태가 너무 다르다. 빨간색 화살표가 객사 본체인 중앙의 정청(正廳)과 좌우 익헌(翼軒)인데, 한눈에 봐도 좌익헌과 우익헌의 규모가 크게 차이나 보이는 것이다. 즉, 사진에서는 아무리 봐도 좌익헌(B 사진 ㉠ 부분)과 우익헌(B 사진 ㉡ 부분)이 각 2칸(최대 3칸)[間]인데, 최종 복원도에서는 각 5칸으로 그려졌다. (전통 건축에서 건물 1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을 의미한다. 2칸은 기둥 3개 너비이다.)

녹색 화살표는 중문(中門)이고, 파란색 화살표는 중문이 있는 행랑 (B 사진 ㉢ 부분) 부분이다. 이 역시 사진에서는 좌행랑이 4칸, 우행랑이 3칸으로 보이는데, 3D 복원도에서는 각 7칸, 5칸 규모로 묘사되었다. 좌우 행랑의 구조와 지붕 형태의 차이도 유리건판 사진과 복원도 그림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이러한 간격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발굴조사보고서의 초기 3D 복원도는 유리건판 사진에 근접하는 규모로 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에 이처럼 변형되었다. 아마도 사진 자로보다 발굴조사 결과에 중점을 두고 객사 복원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D 이미지는 발굴조사 결과인데, 주춧돌과 기단, 적심 같은 유구에 따라 '나'를 객사 정청과 좌우 익헌으로, '다'를 객사 중문 부분으로 확정하고 복원 건물을 디자인하였다. 그러나 1931년 제작된 삼척군청 증축 도면을 보면 D 이미지의 '가' 위치에 당시 군청 건물이 있었고, '나' 위치에 삼문(三門)을 비롯한 행랑이 있었다. (객사 건물을 사용하던 삼척군청은 1934년에 기존 건물 철거 후 신축되었으므로 증축 도면을 만들던 1931년에는 객사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다'에 있었을 객사 대문은 1912년에 이미 철거된 상태였다.)

 구분  현재 복원  필자 추정  비고 (1931년)
 가열 건물  -  객사 정청(正廳)  군청 사무실 : 2동(棟)
 나열 건물  객사 정청(正廳)  객사 중문(中門)  군청 정문 : 삼문(三門)
 다열 건물  객사 중문(中門)  객사 대문(大門)  (1912년 철거)


D 이미지에서 노란색 테두리 안에 옅은 파란색으로 채색된 부분이 1931년 당시 도면에 기초에 객사 건물 위치를 추정해 본 것이다. 즉, '가'와 '나'가 A 사진과 B 사진에서 보여지는 객사 건물 그 모습 그대로의 위치일 가능성이 높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복원은 '나'와 '다'를 중심으로 복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건물 외형도, 규모도, 위치도 조금씩 실제와 다르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론한다(각 건물 측면이 1칸씩 작게 복원).

복원 공사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C 이미지의 3D 복원도대로 삼척 객사 복원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측한다. 복원이 완료된 후에 A 사진 각도에서 사진을 촬영해 보면 잘 된 복원이었는지 아닌지가 결과로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일제강점기 당시 삼척군청으로 활용될 당시의 객사 사진을 최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런 사진 자료를 면밀히 참고한다면 보다 정확한 건물 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위 이미지에 수록한 삼척도호부 객사 정청의 편액 글자 '진주관(眞珠觀)'은 그 사진에 기초한 것이다. 흔히 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 하여 건물 명칭에 '관(館)' 글자가 붙는데 '관(觀)'이 사용된 것이 특이하고, 진(眞) 글자를 약자(略字)인 '真'으로 쓴 것도 남다르다.

객사 복원이 완료되면 2023년부터 46억 원을 들여 삼척도호부 동헌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어질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부분도 참 걱정이 많다. 발굴조사 결과만을 가지고 부사(府司, 부청) 자리에 동헌을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면밀한 검토와 계획을 통해 오류 없이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로, 앞에서 언급한 삼척군청 당시 사진에 '도호아문(都護衙門)'이라는 편액이 정문(본래 중문) 안쪽에 있었다. 군청 위치를 동헌에서 객사로 이전하면서 옮겨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척 객사 및 동헌 복원 관련 상세 이야기 (클릭) : 2023년 4월 추가 링크



4. 천안 객사 및 화축관 복원

마지막은 아직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행이 유력한 복원 사업에 관한 내용이다. 천안시에서는 천안(天安)에 있던 화축관(華祝館)과 객사, 동헌 건물군에 대한 복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특히 2021년 7월에는 천안중앙초등학교 운동장 일대에서 천안 관아지(官衙址) 시굴 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화축관은 온양 온천을 행차하였던 임금이 머물던 행궁(行宮)으로 일종의 객사 별관(別館)이었다. 관아(동헌) 서쪽에 있었으며, 화축관 서쪽에는 객사가 있었다. 그리고 관아 동쪽에는 지방관 처소인 내아(內衙)가 위치하였다.

천안시 오룡동 천안군 객사(客舍) 및 화축관(華祝館) 배치도
충청남도 천안시 소재 객사 및 화축관 건물 배치도 (추정)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와 각종 자료를 토대로 천안현(天安縣, 천안군)의 객사, 화축관, 동헌, 내아의 위치와 건물 배치를 추정하면 위 이미지와 같다.

객사 : 천안시 오룡동 191번지 일대 (천안중앙초등학교 후문 남쪽)
화축관 : 오룡동 189번지 일대 (천안중앙시장 제2공영 주차장 중심)
관아(동헌) : 오룡동 187번지 일대 (중앙동 주민자치센터 부지 포함)
내아 : 오룡동 184번지 일대 (오룡동 우체국 일대)

화축관은 2013년 7월에 주차장을 조정하면서 아스팔트로 덮어 버린 189번지 일대에 있었다. 내삼문(內三門) 남쪽으로 도로(큰재빼기길)가 개설되면서 화축관 정청(正廳)과 화축관의 정문인 영남루(永南樓) 부지가 남북으로 크게 분리되었다. 또 일제강점기 당시의 필지 분할을 토대로 추론하면, 객사 건물군은 위 이미지에서 추정한 곳에 자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현재 천안중앙초등학교 부지에서는 아무리 발굴 조사를 해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2021년 시굴 조사에 대해 후속 보도가 없는 것이겠지만.

결론적으로, 중앙시장 주차장 대체지를 확보하면 화축관 복원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멀리서 찍은 사진이기는 하지만 화축관과 객사 일대 건물이 포착된 사진 자료도 남아 있고, 무엇보다 영남루가 (비록 원형이 일부 변형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현존하고 있다. 여느 객사, 동헌과 달리 상징성도 충분하다.


졸속 복원이 아닌, 제대로 된 복원 사업이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언제나 그러하듯 허술한 글을 마친다.


PS.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2020년에 복원한 전주(全州)의 전라감영 관풍각(觀風閣)도 실제 모습과 완전 다르게 건축되었다. 고적 복원에 참여한 모든 사람, 즉 계획하고 심의하고 결재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재정 집행 내역을 자세히 기록한 동판이라도 만들어서 건축물 앞에 영원히 세워둔다면 조금은 신중하지 않을까?



2022.04.03 - 처음 등록
2024.02.16 - 강릉도호부 내용 중 중문 부분 취소선 표시 (고증 착오 보정)



음료 한 잔 후원 블로그 주인장(글 작성자)에게 음료 한 잔 후원하기 : 토스로 익명 선물 (클릭)    토스로 익명 선물하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