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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에 해당하는 글 : 6개
2008/07/06   진무(進武)
2007/11/24   조선왕조 왕실 계보도(가계도) 정리 작업
2007/07/29   각하(閣下)
2007/07/03   조선시대 육조판서의 서열 (1)
2007/06/17   책상머리 역사학 : 늦어버린 고증에 대한 아쉬움
2007/03/25   충무공 이순신의 무과 과거 급제 이야기


진무(進武)
문도공(文度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그의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제안한 과거(科擧) 제도 개정안.

현행.
- 문과(文科)를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2단계로 구분.
- 소과는 향시(鄕試)인 초시(初試)와 회시(會試)인 복시(覆試) 2차로 구성되며, 최종적으로 생원(生員) 100명, 진사(進士) 100명 선발.
- 대과는 향시, 복시, 전시(殿試)의 3차로 구성되며, 복시에서 급제자 33명 선발 후 전시에서 급제자 갑을병(甲乙丙) 등급 결정.
- 무과(武科)는 초시인 향시 및 원시(院試)와 복시, 전시의 3차로 구서되며, 복시에서 급제자 28명 선발 후 전시에서 급제자 갑을병 등급 결정.
- 정기 과거인 식년시(式年試)와 특설 과거인 증광시(增廣試) 이외의 별시(別試)는 통상 복시, 전시만 시행하며, 급제자 수는 유동적.

개정안.
- 문과의 소과, 대과를 통폐합하여 1단계로 함.
- 소과의 명경과(明經科), 즉 생원시(生員試)를 폐지하여 진사시에 통합.
- [경세유표] 권2. 하관병조(夏官兵曹) 정관지속(政官之屬) 및 권3. 천관수제(天官修制) 삼반관제(三班官制) : 대과 문무과 회시에서 각 200명 선발 후, 도시(都試)에서 36명을 급제시킴. 즉 36명이 급제출신(及第出身)이고 나머지 164명은 문과의 경우 진사(進士), 무과의 경우 진무(進武).
- [경세유표] 권15. 춘관수제(春官修制) 과거지규(科擧之規) 및 하관수제(夏官修制) 무과(武科) : 대과 문무과 회시에서 각 240명 선발 후, 도시에서 40명을 급제시킴. 나머지 200명은 진사 또는 진무. (앞의 하관병조 정관지속 및 천관수제 삼반관제 수록 내용과 상충)
- 진사와 진무 중 일부를 천거로 발탁 등용.
경세유표, 정약용, 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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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왕실 계보도(가계도) 정리 작업
+ 조선왕조 왕실 계보도 정리 작업이 마무리되어 한글판 버전을 아래 사이트에 등록함(2007.11.24).

* 사이버 조선왕조 - 한성부 : 좌측 하단의 '종묘' 클릭 후, 화면 상단에서 '조선왕조 계보도' 클릭

+ 한문판 버전을 아래 사이트에 등록함(2008.01.01). 내림(2008.06).

* 작은 세상 - 조선왕조 - 왕실 : 제2면, 제3면의 수록 내용 및 '종묘' 메뉴의 컨텐츠를 아울러 참고

* 이하 본문은 2007년 6월 3일에 등록한 내용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왕조 왕실 계보도 (未)


일전에 책을 읽다가 조선왕조 왕실 계보가 궁금해졌다.

을사오적 이지용(李址鎔)이 고종, 순종과 어떤 관계였고, 헌종의 후계로 거론되었던 이하전(李夏銓:1842-1862)이 선조 임금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라고 하던데 헌종과의 촌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하는 것들이 순간 궁금했던 것이다.

* 계보도 제작 결과, 이지용은 흥선대원군(대원왕 추존)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고, 헌종과 이하전(경원군 추봉) 사이는 혈연상으로 25촌이다. 철종 및 문조익황제(효명세자)와 고종 사이는 호적상으로는 11촌이지만, 혈연상으로는 17촌. (2007.11.24 추가)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자료를 끌어다 조선왕조 왕실 계보도를 끄적거려 만들기 시작했다. 위 그림은 작업중인 왕실 계보도의 말단 일부분이다. 일종의 샘플(오류 있음).

그런데, 나름대로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부분이 몇 있었다.

생전에 군호(君號)를 받지 못했거나 그 군호가 삭제된 경우는 그냥 이름만 기재할 것인가, 아니면 추봉(追封)된 군호까지 표기할 것인가, 대한제국으로 승격된 후에 친왕(親王)에 봉해진 인물은 왕호(王號)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군호를 기재할 것인가 등등... (이 문제들은 추봉 군호까지 적는 것으로 대충 확정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난감한 것이, 대한제국 시기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영친왕(英親王)의 둘째 아들 이구(李玖:1931-2005)씨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흔히 이구씨를 '황태손(皇太孫)'이라고 지칭한다. 황태자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라는 뜻이다. 혹자는 황세손(皇世孫)이라고도 하는데, 황세손보다는 황태손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다. 중국 명나라 제도에 의하면 친왕의 장자는 세자(世子), 장손은 세손(世孫)이긴 하다. 고증을 더 해봐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느 친왕이 아닌 태자(太子) 계통은 태손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런데 이구씨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황제국 대한제국은 망했고, 일제 강점하에서는 단지 일본의 왕족 신분으로 격하되어 이왕직(李王職) 통제하에 있었다.

그래도 고종, 순종은 황제로 즉위했고 순종이 살아 있었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황실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한 후에 이왕(李王) 자리를 계승했던 영친왕의 경우는 황제 즉위식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호칭상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황제 즉위식은 고사하고 왕위 즉위식이라도 했는지 순종실록(부록)에 기록이 없다. 그저 일본의 왕공족(王公族) 제도에 따라 자동으로 그 지위를 계승했을 뿐.

다시 말해, 이구씨는 순종 황제가 승사하고 난 지 5년 후에 태어났다. 이 경우에, 과연 황태손이라는 명호가 합당한 것일까? 순종의 계후 윤씨가 살아 계셨으니 황태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황제국에서 이왕가로 강제 격하된 후이고, 영친왕의 황제 즉위식도 없었으므로 친왕(親王)의 아들 또는 계승자라는 의미에 충실하게 단지 '세자(世子)' 또는 '왕세자(王世子)'라고만 해야 할까? 이왕직의 건의를 거쳐 계후 윤씨로부터 세자 승인은 받았다고 하는 소리도 있으니 말이다.

어쨋든,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일단 '세자(世子)'로 표기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얼마나 적합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구씨 이하는 계보도에 수록하지 않았는데, 대한제국의 황통(皇統)은 이구씨를 마지막으로 종언을 고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구씨의 양자라는 이원씨가 있지 않느냐 하겠지만, 사후 양자 입적은 대한민국 민법(民法)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법적 효력 없음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이다. 혹자는 명종-선조, 철종-고종, 은신군-남연군의 사후 입적을 예로 들어 말하기도 하나, 그 때에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주체(왕실)가 엄연히 있었고, 그런 결정이 곧바로 국법(國法)으로서의 실효성을 갖게 되는 국가 시스템이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양자를 주거나 들일 때에도 문중에서 그냥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으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관청의 정식 허가를 받았다. 이를 입후(立後)라고 하며, 관청의 승인서인 입안(立案)을 받는다(통상 예조 관청).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사후 입적될 때에 받은 입안 문서도 전해지고 있다(繼後禮曹立案). 조선시대에도 주먹구구식으로 양자 관계가 공인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역시 대한민국 현행법에 근거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판단이고 의견이지만, 그 양자라는 이원씨는 굳이 따진다면 사손(嗣孫)이 아닌 사손(祀孫)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군주제 아래에서라면 적통(嫡統)과 종통(宗統) 같은 것이 분리될 수 없지만, 지금은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이니.

즉, 제사를 맡아 주관하여 지내고 족보 같은 사문서에는 '계자(繼子)'라는 식으로 표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은 가문이나 문중 안에서 개별적으로 하는 것들이고, 현행 법령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양자 입적을 주도하여 추진한 '대동종약원'이라는 단체가 곧 황실(왕실) 자체가 아닌, 한낱 사단법인인 다음에야.

이원씨를 이구씨의 양자로 설정한 것이 황족 어른들의 의견이 합치된 결과에 따른 것이라면 혹시 그런 주장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여황제까지 추대된 상황이니 이건 뭐...

결론은, 이원씨는 황손을 대표하여 선대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일 뿐이지, 고종-순종으로 이어지던 황실의 적통은 이구씨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는 판단이다.

제사 지내는 사람에게 황실의 적통이 승계된 것이 아니냐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그네들 주장이자 생각이고. 가문이란 원래 자손이 없으면 대가 끊기기도 한다. 신라나 고려 왕실처럼.
가계도, 계보도, 대한제국, 왕실, 이하전, 조선시대, 조선왕조,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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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閣下)

공식 석상 등에서 대통령를 호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대통령님'이다.

그런데 도통 이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냥 '대통령께서' 정도로 하면 어감도 좋고 뜻도 충분히 전달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대통령이라는 단어에 이미 최고 존칭으로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님' 자를 붙여 장관님, 국회의원님, 사장님, 선생님 하고 있기에, 대통령에게만 안 붙이면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혹은 지나친 격식 파괴라고 생각되어서 '님'을 붙인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제5공화국까지는 '각하(閣下)'라는 경칭을 붙여 '대통령 각하'라고 했고, 제6공화국, 즉 '보통사람'을 강조하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적으로 각하 호칭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대통령 비서실, 경호실 등에서 대내적으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국민의 정부라고 하는 김대중 정권 때부터 공식적으로 각하 호칭을 폐기하고 '대통령님'이라는,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드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에서 '각하' 호칭을 폐기한 명분은 대략 2개로 압축된다.

하나는 권위주의 청산,
나머지 하나는 '각하'라는 호칭 사용이 일본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군사독재 이미지가 강한 권위주의 청산이야 잘 알려진 명분이니 그렇다치고, 곁가지로 이야기 되는 일제 분위기 청산 이야기는 무엇일까?

일제시대에 '각하' 호칭이 일본국 고위 관료(일본 천황이 임명하는 칙임관 및 육군소장 이상)에게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도 그러한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 고위 관리에 대한 경칭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또 실제 조선시대에는 '각하' 호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각하'는 본래 중국에서 사용된 단어로, 중국 조정의 고위 관원에 대한 경칭이다.

폐하(陛下), 전하(殿下)라는 경칭이 그러하듯, 각하 역시 각(閣)에서 근무하는 고위 관원을 지칭할 때, 그 관원을 직접 지칭할 수 없으므로 각 아래에서 그 대상을 모시는 사람(하인 등)을 불러 말을 전달하게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보통 알려진 것처럼 호칭자가 각 아래에서 고하는 것을 두고 각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아래에 있는 사람을 불러 고하는 방식에서 유래되었다.

중국의 서적 [사물기원(事物起源)]이라는 책에 각하 호칭의 유래가 나와 있다고 하는데, 원문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폐하가 황제(皇帝), 전하가 제후(諸侯)를 지칭하는 것처럼, 각하는 중국 역사에서 고위 관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참고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보면, 황제국 체제였던 고려시대에도 각하 호칭을 신하들 사이의 경칭으로 사용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을 방문하거나 중국인과 교류한 사람들의 서신, 기록 등에서 각하 호칭이 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일부는 합하(閤下)와 혼동 or 혼용되기도 하지만.

이 각하 명칭은 일본에도 수입되어 중국에서처럼 고급 관리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되었다. 유교 문화권의 변방에 위치한 탓에 다른 제도들이 엉성하게 정착된 것처럼 각하 호칭 역시 특이하게 정착된 측면이 강하지만, 하여간 대마도주 등이 올린 문서에 각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이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일본과의 외교에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에서는 주로 외국의 고위 관료에 대하여, 특히 외교 문서 등에서 각하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조선왕조 내부에서 전혀 사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1649년(인조27)에 왕세손(王世孫)에 대한 경칭으로 이 '각하'가 사용된다.

다음은 [인조실록] 인조27년(1649년) 2월 19일 무신조 기사이다.

강서원(講書院)에서 아뢰기를,
"왕세자는 신하들이 저하(邸下)라 칭합니다만, 세손은 어떤 명호로 칭해야 하며, 본 세손강서원의 관원이 말하거나 글을 쓸 때에는 또한 어떻게 자칭(自稱)해야 합니까? 예관을 시켜 결정하게 하소서."
하고, 예조가 아뢰기를,
"전례(典禮)에는 세손의 칭호에 관한 글이 없으며, 우리 나라에 책봉한 적이 있기는 하나 문적(文籍)이 없어져서 상고할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신들이 고루하여 감히 경솔히 결정할 수 없으니, 대신(大臣)을 시켜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또 임진란 이전에는 강관(講官)이 왕세자 앞에서도 소인(小人)이라 자칭하였으나 그 뒤에는 신(臣)이라 칭한 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세손 앞에서는 소인이라 칭하는 외에 다시 의논드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좌의정 이경석(李景奭), 우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왕세손의 칭호는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므로 의리에 따라 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각하(閣下)'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세자와의 차별화를 위해 합당한 호칭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채택한 듯 하다.

저하는 세자의 호칭이고, 그렇다고 정1품 신하이 호칭인 합하(閤下)를 세손에게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동안 조선 내에서는 그리 많아 사용되지 않았던 각하 호칭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임)

이렇게 잠시 각하 호칭이 사용되다가 1752년(영조28)에 다시 실록에서 각하 호칭이 언급된다.

다음은 [영조실록] 영조28년(1752년) 6월 28일 정사조 기사이다.

임금이 승지와 유신(儒臣)을 불러 '편집절목(編輯節目)'을 강정(講定)하라 명하였다. 승지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세손궁(世孫宮)의 경우 '상서(上書)'를 '상장(上狀)'으로, '저하(邸下)'를 '각하(閣下)'로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세손은 없지만 절목을 만들어 후세에 전한다면 명료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조조의 전례를 감안하여 왕세손에 대한 경칭을 '각하'로 결정한 것이다. 이 전교에 따라 영조 말년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에게, 순조 연간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헌종에게 각하 호칭이 사용되었다.

...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 2품 이상 대신급 관료에 대한 경칭으로 확대 사용되었다. 외국 각국과 교섭통상시에도 사용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체제가 황제국 체제로 개편된 때문일 것이고, 세계 각국과 앞서 수교했던 일본(과 같은 칙임관 체계 도입)의 영향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

아, 결국에는 언제나 횡설수설이 되고 마는 이 글을 어떻게 수습한다? 어떠카지?

각하, 대통령, 저하,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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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조판서의 서열
사이버 조선왕조(http://www.1392.org)에서 역사적 인물의 관직을 추증하는 데 필요한 자료('종합안내 관리편')를 만들 때 육조판서의 서열이 궁금했던 적이 있다.

정2품 판서로 추증(追贈)하더라도, 이조판서로 추증할 때와 공조판서로 추증할 때가 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추증 관직이 판서급인 경우는 대개 '이조판서'였던 것에서 비롯된 궁금증과도 무관치 않다.

추증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떤 인물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생전 관직을 올려주는 것이 바로 추증이다. 증직(贈職)도 비슷한 단어인데, 생전에 관직이 있었던 경우는 증직,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던 경우는 추증이라고 하는 것 같다(양자간에 명확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님). 가증(加贈)은 추증한 관직을 다시 올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전에 통정대부(정3품 품계) 이조참의(정3품 관직)에 있었던 사람을 자헌대부(정2품 품계) 이조판서(정2품 관직)로 추증하면 그 직함은 다음과 같게 된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 행통정대부이조참의 아무개
贈資憲大夫吏曹判書 行通政大夫吏曹參議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된[贈],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지낸[行] 아무개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행(行) 자는 행수법(行守法)의 행 자와 용례가 다르다.

물론, 위 직함은 일반적인 표기이고, 문서나 묘비 등에 어떤 식으로 기록할 것인지는 쓰는 사람 마음이다.

통정대부이조참의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아무개
이조참의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아무개
이조참의 증이조판서 아무개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아무개
증이조판서 아무개
증판서 아무개
등등...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관직 표기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술할 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육조판서 서열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판서는 오늘날의 중앙 정부부처 장관(長官)에 해당한다. 물론, 그 비중이나 사회적 대우는 오늘날의 장관급 이상이다. 20여 개에 달하는 장관직, 대학 총장(국립대 총장은 장관급), 기타 장관급 위원장, 정무직 공무원 등, 지금은 장관급 자리가 한둘이 아니고 장관보다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기업, 기관, 단체장의 직위도 적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판서급 관직이 달랑 9개에 불과했고 '관직이 출세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중요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2품인 판서급 관직은 다음과 같다.

1) 의정부좌참찬
2) 의정부우참찬
3) 이조판서
4) 호조판서
5) 예조판서
6) 병조판서
7) 형조판서
8) 공조판서
9) 한성부판윤

이외에도 지돈녕부사, 지중추부사, 지의금부사, 지경연사, 도총관, 대제학 등이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명예직 아니면 겸직이다. 관료들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실무가 없는 관직이거나, 판서들이 의례 겸하는 관직이기 때문에, 통상 판서급이라고 하면 위 9개만 해당된다.

판서는 다른 말로 '정경(正卿)'이라고 하는데, '육경(六卿)'이라고 하면 육조판서이고, 여기에 의정부의 좌참찬과 우참찬, 한성부의 수장인 판윤(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을 더해 '구경(九卿)'이 된다. 판서 아래의,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하는 종2품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별칭하였다.

삼공육경(三公六卿)에서 비롯된 동양권 전제군주국의 재상 제도는 멀리 중국의 주나라, 한나라까지 그 전통이 소급된다. 사마천의 [사기]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어 본 사람에게는 육경이나 구경이니 하는 단어가 기억에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다 보면 길어지기 때문에 그만 끊고 넘어간다. -_-?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되는 구경의 서열은 위에 번호를 붙여 나열한 그대로이다. 실권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정의 최고 관청인 의정부에 설치된 좌참찬과 우참찬을 육조판서보다는 앞에 두었고, 판윤은 판서의 한 등급 아래로 보았다.

문제는 동일한 관직 명칭('판서')을 가지고 있었던 육조 내에서의 서열인데, 조선시대 초기인 1418년(태종18)까지는 육조의 순서가 이조, 병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였으나 그 후부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굳어졌다.

최고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의 순서가 이전(吏典),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순으로 되어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 조정 주요 관원의 명단을 나열할 때 위 순서대로 직함과 이름이 기록된 경우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공식적인 서열, 즉 의전 서열이 그러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육조판서의 서열에 관해 더 이상 쓸 내용이 없다. 앞에서 번호를 붙인대로 이/호/예/병/형/공조판서 순서였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

그러나,

[정조실록] 권44. 1796년(정조20) 5월 28일 임신일 기사에서

이조판서는 서열이 정승 다음이고 호조판서[度支]와 병조판서[司馬]가 그 다음이다.

라는 정조 임금의 비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예조가 빠지고 병조가 들어간 것인데, 이는 병조과 무관들에 대한 인사권을 지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조는 문관 인사권을 맡고 있으므로 그 중요성은 다른 판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호조 역시 막강한 재정권을 행사하므로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즉, 이조, 호조, 병조의 판서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조는 학업과 의례를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문(文)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있어 그 중요성이 결코 낮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조판서나 병조판서가 실세이기는 하지만, 명예상으로는 호조판서보다 예조판서가 높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다음은 [정조실록] 권54. 1800년(정조24) 4월 21일 계묘일 기사에 수록된 조항진(趙恒鎭:1738-?)의 상소문 가운데 일부이다.

옛날에는 명공거경(名公鉅卿:공경대신)의 자식이라도 증직하는 관직은 굳이 이조(吏曹)만 아니라 병/호/공/형조의 관직도 다 줬으며, 선조(先朝) 때 법을 정해 3대를 옥서(玉署:홍문관)에 벼슬한 집안으로 한계를 짓고 그 나머지는 명문거족[名家盛族]이라 해도 다 호/병조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법이 너무 한계가 없어, 품관(品官)을 지내지 못한 먼 시골 사람들도 수직(壽職)으로 동지(同知:동지중추부사)를 지냈을 경우 호/병조의 벼슬을 추증하면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며,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응당 증직을 받을 자는 호/병조를 수치로 생각하여 간혹 받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상소의 요지는, 이조판서로 추증되는 것만을 영예롭게 여길 뿐, 호조판서나 병조판서 증직은 정계를 주름 잡던 명문가는 물론이고 일반 양반가에서도 그리 만족하게 여기지 않거나 오히려 꺼리고 있는 요즘 세태라는 내용이다. 조선 전기 때와 달라진 당시의 풍조를 꼬집고 있다.

헌데, 이 상소에서도 유독 예조만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예조판서는 당대의 지성으로 대표되는 대제학(大提學) 관직을 예겸(例兼:당연 겸직)으로 추증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 찾아 보면 예조판서에 증직된 사례도 적지 않고, 이조판서 증직시에도 대제학을 함께 추증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궁금증만 더해 간다.

판서급의 서열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신도비, 묘갈(묘비) 등에 기록된 내용을 추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조판서 아무개'라고 비석에 직함이 새겨진 인물이 실제로 어떤 관직을 지냈는지 세부적으로 살펴 보면 당시 각 관직의 사회적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참찬을 두루 지냈는데, 비액(碑額)이나 비제(碑題)에 대표 직함으로 '예조판서'가 기록된 것이 그 예이다.

아직 몇 건의 사례밖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의정부의 좌참찬이나 우참찬이 판서보다는 덜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다. 좌/우찬성이 공식 서열은 판서보다 앞이었지만, 앞서 기술했던 것(의정부 관직이므로 판서보다는 서열을 앞에 두었다는 내용)과 달리 아무래도 직함의 무게가 여느 판서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판서는 여엇한 한 관청의 장관(長官)이지만 좌/우참찬은 정1품인 영/좌/우의정과 종1품인 좌/우찬성의 뒤를 이어 의정부 관청의 서열 6-7위에 불과하니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상의 내용을 조합해 보면, 대체로 육조판서의 의전상 서열이 아닌 실제 서열이나 사회적 지위는 다음과 같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 이조판서
2) 병조판서 > 호조판서
3) 예조판서
4) 형조판서 > 공조판서

추증은 죽은 후에 관직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생전의 실권은 병조판서보다 호조판서가 앞섰을 수 있지만, 명예라는 측면에서는 병조판서가 호조판서 앞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식과 품행을 상징하는 예조판서가 그 다음이고, 형조와 공조가 마지막이다. 토목, 공업 분야를 담당하는 공조판서보다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형조판서가 높았을 것이다. 판윤보다는 앞이지만.

참고로, 예조는 비록 청직(淸職)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급으로 우대되었고, 호조는 많은 사례에 있어 형조, 공조와 같이 취급하여, 호/형/공조를 삼조(三曹)로 묶고 조선 후기에 문과 급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널리 개방한 바 있다. 호조판서는 재정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병조판서와 버금갈 정도의 사회적 명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하급 관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조판서를 호조판서와 비슷하게 놓거나 오히려 그 앞에 설정할 수도 있겠다.

나중에 다른 문헌이나 자료를 찾게 되면 그때 다시 고증하기로 하고, 이만 '날림글'을 마친다.
관직, 구경, 삼공육경, 서열, 육조판서, 조선시대,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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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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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머리 역사학 : 늦어버린 고증에 대한 아쉬움

조선시대 '거북선[龜船]'의 정확한 형태가 어떤지에 관해서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철갑을 두르고 있었느냐, 쇠못이라도 꼽고 있었느냐, 거북이 머리에서 연기를 뿜었는지 총통 설치했는지, 2층과 3층의 내부 구조는 어떻고, 크기와 승조원 규모 등은 또 어떠했는지.

이런 논란에 오늘날까지 가중되는 원인은, 실제 거북선의 형태를 확정해 줄 수 있는 사료가 현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북선을 촬영한 사진, 하다못해 실물을 보고 그린 정교한 그림이라도 한 장 전해지고 있다면 논쟁의 대부분은 대부분 종식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아쉬움이 크다.

일제강점기, 아니 해방 직후에라도 거북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조선시대 수영(水營) 인근들 돌아다니며 관련 증언을 채록했더라면 오늘날처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관련 문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의 구체제 군대가 해산되기 전까지는 중앙이든 지방 군영이든 장비와 무기의 법제화된 수량은 대략이나마 갖추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

관원들에 대한 인사 평가, 업무 인계 등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녹이 슬고 망가진 수준이었을망정 문서상으로 규정된 수량은 구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조선후기의 군 편제 체계가 공식적인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은 1895년(고종32) 7월 15일인데, 이때 삼도통제영(칙령 제139호), 팔도의 병영 및 수영(제140호), 진영(제141호), 진보(제142호) 등이 대군주(고종)의 칙령 형식을 빌려 갑오-을미개혁의 연장선상에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곧 근대식 형태의 군대 편제로 중앙군과 지방군(진위대)이 신설된다.

그렇다면,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시대 전선[戰船]은 최소한 이 시점까지는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와해된 것을 칙령으로 공식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고종실록에 전선이라는 단어가 1890년(고종27)까지, 거북선이라는 단어가 1886(고종23년)년까지 보인다.

그 전선이나 거북선에 복무하였던 관리, 군인, 그리고 그 인근 지역에 살던 백성들 가운데 어렴풋이나마 거북선의 모습을 죽는 날까지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만약 1880년대 중반까지 각 수군영에 거북선이 실존하였고, 그 형태를 목격했던 사람의 당시 나이가 20대였다면 얼추 1930-1940년까지는 거북선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수영 인근에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다.

그 증언자가 오래 살았더라면 해방 후에도 충분히 채록 가능했을 것이다.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지, 희미한 추억이었을 것인지는 모르지만.

충무공 이순신이나 거북선에 관해 뜻 있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어서,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에 수군영이 있었던 해안가를 돌아다니며 관련 증언을 채록하였더라면, 거북선의 실제 모습에 관한 많은 의문이 해소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과 조선 후기의 거북선이 다르고, 같은 거북선이라고 하더라도 크기와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상 내지 아쉬움은 거북선에만 그치지 않는데, 아직도 조선 후기에 양반이 70-80%를 넘었다는 글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양반층 급증설은 시카다 히로시(四方博:사방박)라는 일본인 학자의 1938년 논문에서 시작하였다. 아직도 국사 교과서 등에서 이러한 설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카다의 이 논문 내용은 1980년대에 국내 학자들이 논파한 바 있다.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

시카다 논문의 요지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구 지역의 호적 자료인 대구장적을 분석하여 전체 호(戶) 중에 양반호의 비율을 계산한다.

2) 호적의 수록 내용에서 직역(職役:직업)에 따라 신분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직역이 생원, 진사, 유학, 학생이면 모두 양반 신분으로 간주.

3) 이러한 분석에 따라 전체 호 대비 양반호의 비중은 1690년에 9.2%, 1729-1732년에 18.7%, 1784-1789년에 37.5%, 1858년에 70.3%로 급증.

문제는, 2)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유학(幼學)'이 양반 직역이었음은 확실하지만,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중인은 물론 평민층들도 호적에 직역을 유학으로 기재하는 것이 널리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양반인 유학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무늬만 유학도 있었던 것이다.

최근 논문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양반층의 비중은 5% 내외에 불과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폭넓게 늘려 잡아도 전체 인구의 15%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양반은, 조선 후기의 통칭적 양반이 아니라 조선 초기의 실체적 양반층 개념에 따른 것이다.

그럼, 왜 시카다가 쓴 것 같은 논문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 해방 후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상당한 기간 동안 그대로 답습했을까?

그것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사료, 문헌, 장적을 분석한 때문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만약 시카다가 조선시대 사람이었다면, 아니 조선시대 향촌 사회를 경험하기라도 했더라면, 그래서 실제 조선시대 사회의 양반이나 중인, 평민의 생활상을 경험했더라면, 분명 자신의 대구장적 분석 결과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직후까지도 향촌에는 조신시대적 분위기가 농후했음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수긍 가능한 상상이다. 실제 향촌 사회에 대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대구장적에 수록된 마을에 찾아가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라도 수집했었으면, 장적을 정리했던 지방 관청의 관속, 아전들의 경험을 듣고 기록으로 남겨 두었더라면 말이다.

사료, 기록, 문헌에만 의지하여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행동이 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는 '대륙삼국설'이라는 것도 책상머리 역사학의 결과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심지어는 대륙조선설도 있다. 임진왜란 직후, 혹은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로 우리 민족이 대륙(중국)에서 한반도로 축출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책상 위에서 몇몇 문헌의 문구만 뒤척이지 말고, 제발 한반도 각지에 남아 있는 우리 조상들의 삶, 그 흔적을 찾아봤으면 과연 이런 대륙삼국설이니 대륙조선설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성립 가능할 것일지?

우리 산하에는 수많은 유적이 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이 아니라도라도, 국보나 문화재로 지정될 수준의 유물이 아니더라도,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때 흩어지고 사라진 게 많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고 널린 게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다.

각 고을마다 전해지는 이야기, 마을 이름에 얽힌 전설, 수많은 사람들의 묘지와 비문, 비석, 건축물, 서원, 사우, 사적, 고문서 등.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이어진 옛날 기억들.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고 싶다. "뇌가 있으면 생각을!!"


역시나 횡설로 끝나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냥 몇 자 주절거린 정도로 이해해 주시길...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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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무과 과거 급제 이야기

+ 2004년 11월 20일에 네이버 블로그 등록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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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5일에 티스토리로 이전


가끔 웹상에서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그 가운데 이순신의 무과(武科) 과거 급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늦게 급제했다 = 무관 소질이 없었다", "등수가 낮았다 = 역시 별볼일 없었다" 등의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들은 "최하위 등급 합격으로, 오늘날의 하사급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03년 8월에 발행한 [軍史(제49호)]에 '무과합격, 군관생활, 전술능력에 나타난 이순신의 무학연구(論.張學根)'라는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의 내용을 토대로 몇 자 적어 본다.


1) 너무 늦게 급제했다는 논란

위 논문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해당 과거 급제자들의 평균 연령은 34세였다. 이순신의 급제 당시 나이가 32세였으니, 평균 연령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2년이나 빠른셈이 된다. 인원수로는 전체 29명의 급제자 가운데 17명이 이순신보다 연장자였고 1명이 이순신과 동년배, 10명이 이순신보다 어렸다(최연소 23세 박대남과 성영길, 최고령 52세 구사직).

급제자 평균 연령이 높은 것은 이순신이 급제했던 과거만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실시되었던 문과, 무과, 소과(생원, 진사)의 급제 및 입격자 연령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높았다.

일례로, 이제까지 파악된 무과 급제자(모든 무과 급제자 명단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파악된 인원 가운데 조선후기 16,000명만 분석)들의 평균 연령은 33.2세이다. 또 조선시대 전체 소과 입격자 평균 연령은 34.5세, 문과 급제자 평균은 33.7세이다. 즉, 이순신의 무과 급제 당시 연령은 그저그런 평균 연령대에 속해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2) 급제 등위가 매우 낮았다는 논란

아시다시피, 이순신의 무과 급제 등급은 '병과(丙科) 제4인(第四人)'이다. 여기에서 '병과'란 '과거 급제 등급'을 말하는데, 등급순으로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로 되어 있었다. 단순히 외면만 본다면 가장 낮은 3등급인 셈이다. 갑과 1등은 '장원'이라고 하고 종6품을 주며, 나머지 갑과 인원에게는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정9품의 품계을 준다.

그러나 법제상의 선발 인원이 갑과, 을과, 병과 모두 동수였던 것이 아니라, 갑과는 3인, 을과는 5인, 병과는 20인이었기 때문에 병과에서 가장 높은 사람(병과 제1인)은 종합 9위가 되고 최하위자(병과 제20인)은 종합 28위가 된다. 즉, 이순신은 병과 제4인이었기 때문에 12등이다. 28명 중에 12등이면 중간(+) 정도가 된다.

이순신이 급제한 1576년(선조9)의 병자식년(丙子式年) 무과에서는 29명(갑과 3, 을과 5, 병과 21)을 뽑았기 때문에 상위 42% 성적이다. 그리 높은 등급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과 급제자 29인 중에서 이순신 등 4인을 제외한 '25인'이 현직 군관(軍官:하급 장교 등 현역)이었다. 음직(음서제도)이나 천거, 자원, 징집 등의 형식으로 이미 군문(軍門)에 들어선 사람들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문과와 무과 과거 시험에는 정3품 당하관 이하 전현직 관리도 응시할 수 있었는데, 급제하면 정식 관직에 임명하거나 품계를 승진시켜 주는 특혜을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관직에 있었음에도 과거에 응시했다.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문과 또는 무과에 급제해야 선망받는 관직이나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독학(獨學)으로 (혹은 장인 방진의 조력이 있었다고 해도) 무예를 연마한 이순신이 전현직 군관들 속에서 상위 42%를 차지한 것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실전 무예 기술을 익히기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현직 군관들은 자연스럽게 부대에서 언제나 무예를 연마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무과 기술을 익히기 위한 별도의 교육 기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무과 독학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문과는 동네 서당이나 향교, 서원 등이라는 공간이 있기라도 함).

활 쏘는 것이야 그냥 활터에 가서 하면 된다지만, 말 타고 훈련하는 과정은 일단 말(馬)을 부릴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당시 경제적으로 어렵던 이순신 가족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보성군수를 역임한, 재력이 있었다고 알려진 방진)이 이순신의 무과 연마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과는 3단계 시험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방에서 치르는 1단계에서 무예(무술 실력)를 보고 여기에 합격한 인원을 대상으로 2단계 시험을 실시해 무예 + 학문 + 군사학을 본다. 2단계 시험에서 급제할 인원 28명을 선발하고(2단계 시험까지 합격하면 과거 급제는 기정 사실화됨), 최종 3단계 시험에서 급제 등급만을 결정하는데, 이 3단계 시험이 이순신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던 말타고 활쏘기, 달려가며 활쏘기, 격구(擊逑) 등으로 되어 있었다. 다년간 말을 타며 연습해야 하는 종목이니, 아마 그냥 활쏘기나 군사학 같은 것으로 등위를 결정했으면 결과는 달랐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간, 이순신의 급제 나이나 등수는 최고 수준은 아니였지만, 낮은 수준 역시 아니었다는 것이 본 글의 결론 되겠다. 설령 나이가 많고 등수가 낮았으면 어떤가.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모두 명장이 아니고, 꼴등 혹은 현지임관을 했어도 명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많거늘.


ps1. 이렇게 따지고 보면,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한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元俊良)은 원균의 무과 급제에 참 큰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원준량의 아들 8인 가운데 장남 원균과 5子 원지가 무과에 급제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ps2. 여건이 되시면 '무과합격, 군관생활, 전술능력에 나타난 이순신의 무학연구'라는 위 책의 논문을 구해서 읽어보는 것을 권장한다. 이순신이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둔전관으로 있을 때 상관이 경흥부사 이경록(이순신과 무과 동기생으로, 이순신보다 4년 연하)이었으며, 당시 사건 때문에 같이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는 등... 흥미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군사편찬위 서적이 원문 서비스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웹상에서 공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 이 논문에서 '신흠(申欽)'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용은 동명이인에 의한 착오이다.

ps3. 종9품이 조선시대 관직 중에 최하위라지만, 그렇게 낮은 관직이었을까? 종9품과 지금 공무원 계급 체계하에서의 9급 공무원이나 하사급 군인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할까? 모든 관리들을 문과나 무과 과거로 뽑지 않아서 의외로 관직에 진출하는 길(음서제도나 천거, 수령취재 등)이 많이 있었기는 했지만, 역시 엘리트 코스를 가려면 문관은 소과를 거쳐 문과에 급제해야 했고, 무관은 무과에 급제해야 했습니다.

     헌데 이 문과나 무과라는 것이, 정규 선발 인원은 3년에 30명 남짓이었다. 물론, 왕의 생일이다 뭐다 해서 별시(別試) 같은 특별 과거가 상당히 많이 시행되었고, 무과의 경우에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만과(萬科)라고 해서 1회에 수천 명을 뽑기도 했지만, 적어도 3년마다 시행되는 정기 과거에는 정규 인원(30명 내외)를 선발하려고 노력했다. 이순신은 그러한 과거의 무과에 급제한 것이다(병자 식년 무과).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직없이 없었고, 고향 마을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것이나 향리에서 유지 노릇 하는 것을 나름대로 '좋아라' 했을 수는 있지만, 일단 거의 모든 양반들과 상당수 평민들은 과거 급제를 통한 '일신의 영달' 쟁취를 위해 매진했다. 전국적으로 아무리 낮게 잡아도 수천, 수만 명의 경쟁자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서 급제하기란, 오늘날에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종9품 무관직에 권관(權管)과 초관(哨官)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초관은 1개 초(哨)의 지휘관으로 대개 80-125명의 군졸로 편성되어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대장(대위)급 장교인 셈이다.

    물론, 이렇게 힘들게 급제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부모님의 공로나 연줄을 통해 쉽게쉽게 관직을 얻는 사람들도 있고 또 임진왜란을 전후로 무차별 실시된 무과에 덩달아 급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과거 급제 여부에 따라 관직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본인에게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승진하는 기간에서부터 차이나 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직에 부임할 수 있느냐 마느냐가 과거 급제 경력에서 갈리니까... 예를 들면, 문과 출신이 아니고서는 청현직, 청요직이라 불리는 관직에 임명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정도이다. 終.

이순신,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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