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11시에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을 발표한 후, 같은 해 9월에 당시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제3대 통감(統監)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사내정의]가 창덕궁(昌德宮)을 방문하여 순종(純宗) 황제를 '이왕(李王)'으로 봉책(封冊)하는 문서를 전달[獻]한 후 복귀하던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단, 통감부와 일본 본토 사이의 전신(電信) 기록, 기타 관련된 사람들이 남긴 기술에 의하면, 경술국치(庚戌國恥) 직후인 9월 1일에 일제가 창덕궁에 칙사를 파견하여 일왕(日王, 일본 천황)의 한일 병합에 관한 조서(詔書) 사본과 하사품을 순종에게 전달할 때 별도로 이왕(李王) 책봉(봉책) 의식을 시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실제 위 사진과 같은 행동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
※ '창덕궁 돈화문 앞 비변사 청사 터 이야기'에 덧붙이는 글입니다. 본문은 앞서 올린 1편(링크)과 2편(링크)을 참고하세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창덕궁 매표소 주변 종합정비사업부지 내(와룡동 4-1번지)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가 지난 12월 4일에 공개 등록되었다. 창덕궁 매표소 종합정비 계획에 따른 통합관람종합지원센터 건립을 위한 발굴조사 결과 보고서인 것이다. 앞의 글(2편) 말미에서 매표소 권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비변사(備邊司) 건물과 관련된 담장 석렬(石列), 적심석(積心石) 등이 나왔다고 짧게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창덕궁 매표소 주변 종합정비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허가를 신청하기 위한 근거 발굴(2017년 7월 24일부터 7월 28일까지 5일간의 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었..
※ 11일에 올렸던 1편 글(링크)에서 이어지는 비변사 터 이야기입니다. 앞의 글 마지막에 살펴보았던 〈실측도(實測圖)〉에 한글로 주기(注記)를 달아 보면 아래와 같다. 한성부(漢城府)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의 '니동(泥洞) 의정부조방지원도(議政府朝房之原圖)'가 도면의 제목이다. 축척은 200분의 1. (1:200) 조선시대 한성부의 주소 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통(統)-호(戶) 순서로 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구(區)에 해당하는 부는 중부(中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의 5개로 되어 있었는데, 1894년(고종31)에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부를 서(署)로 개칭하여 중서(中署), 동서(東署), 서서(西署), 남서(南署), 북서(北署)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 궁궐 가운데 하나인 창덕궁(昌德宮), 그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 창덕궁 삼거리 교차로가 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비변사(備邊司)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5 또는 5-6번지이며, 기념표석에 새겨진 글귀는 아래와 같다. 비변사 터 備邊司 址 조선시대 외적의 방비와 국가 최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 때 창설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음. 비변사의 정확한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1510년(중종5)에 발생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기점으로 1510년 또는 1517년(중종12) 6월경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1592년(선조25)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기점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