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지역에서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가 근무하던 관청인 감영(監營) 시설을 복원하거나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해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의 전라감영이 얼마 전에 복원되었고, 공주(公州)와 원주(原州)에서 충청감영과 강원감영 구역에 대한 정비를 본격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에 경상감영이 있던 상주(尙州)는 감영 건물을 복원해 공원을 조정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가장 격이 높았던 관아 건물(랜드마크)을 내세워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거나 자치단체장이 스스로 치적을 쌓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물론 가장 큰 목표는 관광객 유치겠죠. 이번 글은 이러한 감영 건물에 걸려 있었던 편액(현판) 글씨에 대한 이야기입..
예전에 한국어 위키백과를 위해 제작하였던 조선시대 18세기 무렵의 한성부(漢城府, 서울)지도를 오랜만에 일부 보완하여 올려봅니다. 각 지명, 관청, 궁실의 위치와 형태를 대략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완벽한 고증을 거친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P.S. 2010년 10월에 본 블로그에 등록한 '조선시대 한성부 실측지도 (클릭)' 역시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웹 브라우저에서 플래시(Flash) 파일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므로 링크를 해제합니다.
조선시대 각 도(道)의 행정, 사법을 책임지던 관청이 감영(監營)이다. 감영은 오늘날의 도청(道廳)이라 할 수 있고, 감영의 수장(首長, 長官)이 바로 관찰사(觀察使)였다. 관찰사의 품계는 종2품으로 현재의 차관급에 해당하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 권한까지 관찰사가 가지고 있었다. 감영의 정청(政廳)을 선화당(宣化堂)이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팔도(八道)의 모든 감영이 동일했다. 경기도의 행정을 맡고 있던 경기감영(京畿監營)의 선화당 건물에 관해서는 2018년 7월에 올린 '조선왕조-구한말-대한제국 시기 한성부 관청 편액(현판) 이야기' 문서에서 짧게나마 한 번 다룬 바 있다. 이번 글은 그 선화당 건물의 1902년경 모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이다. 위 사진은 대한제국 주재..
서설. 지난해(2018년) 6월에 본 블로그(아정)의 글을 일부나마 공개 문서로 전환하고 다시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후 새로 올린 글들은 주로 조선시대 중앙 관청(관아)의 형태, 변천, 자료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때 계획하기를 한 달에 최소 하나의 새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꿔 2019년, 새해 1월을 맞이하여 '이미지 위주의 글'을 급조해 올려봅니다.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고, '역사-관아' 카테고리가 아닌 '역사-일반' 카테고리의 글이 되었습니다.) 이하 본문.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경북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어가 서울특별시청과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驛..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서울시내 관광 명소인 '인사동길(Insadong-gil)'은 남쪽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仁寺洞), 북쪽으로 역시 종로구의 관훈동(寬勳洞)에 걸쳐 있다. 인사동길의 북단, 그러니까 율곡로(栗谷路)와 우정국로(郵政局路)가 만나는 안국동(安國洞) 사거리에 인접한 공간에 '북인사마당(北仁寺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충훈부 터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과 해방병단 결단식 터 기념석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 지도 참고) 1번 지도 - 현재 지도상의 충훈부 터 위치 (Daum 지도) 충훈부(忠勳府)는 조선시대 관청의 하나로서,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를 지칭하는 공신(功臣)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본래는 한성부 북부(北部) 광화방(廣化坊, 현재의 종로구 원서동 일대, 즉 창..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경복궁 광화문 앞길, 즉 세종로(世宗路, 세종대로, 광화문로)에 위치했던 조선왕조-대한제국 시기의 관청 건물 배치도를 만들어 보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됨) 각 관청별 구역 및 건물의 위치 오차는 수 미터 이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이 길(세종로)을 육조거리[六曹街], 육조전로(六曹前路), 광화문전로(光化門前路, 광화문 앞길) 등의 명칭으로 불렀다.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 6개[六曹] 관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사 배치도를 만들 때 참고한 주요 자료는 아래와 같다. 1)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 1908년경 2) 경성광화문통관유지일람도(京城光化門通官有地一覽圖)..
이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에 촬영된 한성부(漢城府) 관청의 청사 사진이다. (사진 제일 오른쪽에 등장한) 외국인이 한성부 청사를 방문한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자료나 논문, 문헌에서 이 사진을 광화문 세종대로(육조거리)에 있던 한성부 청사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는 돈화문(敦化門, 서대문) 밖, 지금의 서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3, 4번 출구 인근에 있던 경기감영(京畿監營)의 본청인 선화당(宣化堂) 건물이다. 즉, 한성부 청사가 (사진을 촬영하던 1902년부터 1908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예전 경기감영이 있던 자리로 옮겨 있었던 것이다. 경기감영은 경기관찰부(京畿觀察府)로 개편되어 1896년(고종33)에 이미 수원(水原)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 위 한성부 청사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