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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1908년(융희2/순종2) 1월 1일부터 대한제국 종언시까지 시행된 관직 증직(贈職) 규정이다. 포달(布達) 제175호에 의한 '증직규례' 개정으로, 이전 규례(1905년 증직규례)와 비교할 때 증직 시행 기준이 대폭 개정되어, 규장각 관직을 증직하는 것으로 제도가 간소화되었다. 1908년 5월 7일자 관보4067호에 실린 내용에 근거하였다. 이미 설명한 '주(註)'는 생략하였으므로, 이전 문서 '대한제국 광무4년 관직 추증규례 (클릭)' 및 '대한제국 광무9년 관직 증직규례 (클릭)'를 참고할 것.
증직규례(贈職規例)
제1조. 증직은 특증(特贈:특별 추증)과 추증(追贈)의 2종(種)으로 정한다.
제2조. 특증은 군공을 세운 자와 전사[軍功及戰亡]한 자와 충효(忠孝), 학행(學行)이 탁월한 자에 한하되, 본직(本職)에 따라 승품 또는 초품[陞品或超品]으로 상당(相當)한 관직[官]을 증직한다. 명을 받들어 사신(使臣)으로 나아가[奉命出彊] 외국에서 사망한 자[身歿異域者]도 또한 같다[亦同]. 단, 제1항의 공로와 행적이 있으되, 본직이 없는 자는 상당한 품계와 관직[品職]을 증직한다.
제3조. 추증은 현재[現] 친임관주1 및 칙임관[親任官及勅任官]의 직에 있는 자와 예전[曾]에 동일한 관직에서 공무를 수행한 자의 죽은 아버지 이상 3대[考以上三代]에 한하여 증직한다.
제4조. 친임관의 선대추영(先代追榮)은 다음의 갑표[左開甲表]에 의하고, 칙임관의 선대추영은 다음의 을표[左開乙表]에 의한다.
제5조. 출계(出繼)한 사람으로 입후된 집안의 선세[后家先世]가 자궁(資窮)주2한 경우에는 태어난 선대[本生先代]에 옮겨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제6조. 수증인(受贈人)의 처(妻)는 남편의 직에 따라[從夫職] 법전[典] 규정에 준해 시행한다.
부칙(附則). 제7조. 본령(本令)은 융희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8조. 광무9년 4월 29일 주하(奏下) 증직규례는 본령 시행일로부터 폐지(廢止)한다.
다음(左開). 갑표(甲表). 고(考),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 조(祖), 규장각대제학. 증조(曾祖),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부제학(副提學) 정1품 친임관의 추영은 대제학을 대광보국(大匡輔國) 품계, 대제학을 숭정(崇政) 품계, 제학을 자헌(資憲) 품계로, 종1품부터 정2품 친임관의 추영은 각 관직[已職]에 준하되 대제학을 숭정 또는 자헌 품계, 제학을 자헌 또는 가선(嘉善) 품계, 부제학을 가선 또는 통정(通政) 품계로 한다.
을표(乙表). 고. 규장각제학. 조. 규장각부제학. 증조.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 정2품 이상 칙임관의 추영은 제학을 자헌 품계, 부제학을 가선 품계, 직각을 통정 품계로, 종2품부터 정3품 칙임관의 추영은 제학을 가선 푸몌, 부제학을 통정 품계, 직각을 통훈(通訓) 품계로 한다.
주1) 친임관(親任官)은 황제가 친히 임명하는 관원이다. 정1품에서 종2품 사이의 고위 관료군인 칙임관(勅任官)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시되던 대신(大臣)급 관직을 말한다.
주2) 자궁(資窮)은 품계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다. 정3품 당하관 품계(통훈대부, 어모장군 등)를 말하나, 여기에서는 증직될 관직이 정2품일 경우에 생전에 정2품 관직을 지냈거나 증직으로 이미 정2품에 도달한 상황을 의미한다. 양자(養子)로 들어간 양부모[養父母] 집안의 선조에게 증직을 시행할 때 증직을 받는 수증인(受贈人)이 자궁이면 친부모[生父母] 선조에게 대신 증직을 시행한다는 조문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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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1905년(광무9/고종41) 4월 29일부터 1908년(융희1/순종1) 4월 2일까지 시행된 관직 증직(贈職) 규정이다. 종전에는 법령 명칭이 '추증규례(追贈規例)'였는데, '증직규례'로 개칭되었다. 1905년 6월 1일자 관보3154호에 실린 내용에 근거하였으며, 붉은 글자로 추가 및 삭제된 부분은 1907년(광무11) 4월 10일자 관보3736호의 정오(正誤)로 정정된 내용이다. 이미 한 번 설명한 '주(註)'는 생략하였으므로, 이전 문서 '대한제국 광무4년 관직 추증규례 (클릭)'를 참고할 것.
증직규례(贈職規例)
제1조. 정1품 대광(大匡)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을 증경(曾經)한 자와 보국(輔國)으로 참정대신과 판돈녕(判敦寧)을 증경한 자는 다음[左開]에 의하여 증직한다[事]. 고(考), 의정부(議政府) 의정대신. 대광(大匡)의 고(考)는 대광 품계, 보국(輔國)의 고는 보국 품계. 조(祖), 의정부 참정대신. 종1품 숭정(崇政) 품계. 증조(曾祖), 각부(各部) 대신(大臣). 정2품 자헌(資憲) 품계.
제2조. 종1품으로 각부부(各府部) 대신, 내대신(內大臣)주1, 시종원경(侍從院卿), 의장(議長), 대학사(大學士)를 증경한 자는 다음에 의하여 증직한다. 고, 의정부 참정대신. 종1품 숭정 품계. 조, 각부 대신. 정2품 자헌 품계. 증조, 각부 협판(協辦). 종2품 가선(嘉善) 품계.
제3조. 정2품으로 첨사(詹事), 학사(學士), 부장(副將), 경(卿), 부의장(副議長)을 증경한 자는 다음에 의하여 부직(附職)한다. 고, 각부 대신. 정2품 자헌 품계. 조, 각부 협판. 종2품 가선 품계. 증조, 비서감승(秘書監丞). 정3품 통정(通政) 품계.
제4조. 종2품으로 부첨사(副詹事), 부경(副卿), 참장(參將), 협판(協辦), 총판(摠辦), 판윤(判尹), 관찰사(觀察使)를 증경한 자는 다음에 의하여 증직한다. 고, 각부 협판. 종2품 가선 품계. 조, 비서감승. 정3품 통정 품계. 증조, 예식원(禮式院) 좌장례(左掌禮). 종3품 통훈(通訓) 품계.
제5조. 수증인(受贈人)이 문과(文科) 급제자로서 홍문관[玉署], 세자시강원[春坊]을 증경한 자이면 대학사, 학사를 품계에 따라 예겸하고[隨品例兼], 산림(山林)주2으로 자의(諮議)주3와 남대(南臺)주4를 증경한 자는 경연관(經筵官)을 품계에 따라 예겸하고, 규장각[閣職]을 증경한 자는 규장각 직함[閣銜]을 품계에 따라 예겸하고, 군함(軍銜)주5을 증경한 자는 부장, 참장을 또한 품계에 따라 예겸한다.
제6조. 정3품으로 부첨사, 부경, 협판, 총판, 부윤, 관찰사를 증경한 자는 종2품 예(例)에 의해 증직한다.
제7조. 군공을 세워 전사한 자[軍功戰亡人]와 충효(忠孝), 학행(學行)이 탁월한 자[卓異者]는 그 본직에 따라[隨其本職] 승품, 증직한다. 명을 받들어 사신(使臣)으로 나아가 외국에서 사망한 자도 같다[奉命出彊身歿異域者同].
주1) 내대신(內大臣)은 궁내부(宮內府)에 속한 칙임관(勅任官) 관직이다. 궁내부 대신을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에서는 통상 시종원경(侍從院卿)이 겸직하는 궁내부 소속 내대신관제(內大臣官制)상의 별도 관직인 '궁내부 내대신'을 의미한다. 국새(國璽)와 어새(御璽) 등을 관리와 고문(顧問) 역할을 담당하였다.
주2) 산림(山林)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재야에 숨어 사는 선비를 말한다. 특히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국정이나 여론 방향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을 의미한다.
주3) 자의(諮議)는 산림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7품 관직이다.
주4) 남대(南臺)는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 관직에 임명된 경우를 말한다. 산림의 주요 출사 관직에 속한다.
주5) 군함(軍銜)은 군사 관계 관직이다. 즉, 무관직(武官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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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1년(영조47) 제천현(堤川縣) 김경추(金慶秋), 준호구(准戶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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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영조47(1771)년 준호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크기의 준호구(准戶口)주1 열람 가능.
내용을 풀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음.
신묘(1771년/영조47) 월 일주2, 제천현 관청 호적. 신묘년에 근좌면(近左面) 연박달리(硯朴達里)주3 제5통, 통수(統首)주4 사노(私奴) 윤윤업(尹允業)의 통(統) 내(內) 제3호 호적... (이하 내용)
유학(幼學)주5 김경추(金慶秋)주6, 년(年) 86, 병인(1686/숙종12)생(生), 본(本) 예안(禮安). 부(父), 증가선대부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우정(禹鼎). 조(祖), 증통정대부 호조참의 종윤(宗潤). 증조(曾祖), 통훈대부 사복시정 명(銘). 외조(外祖), 학생(學生) 홍우상(洪禹尙), 본 남양(南陽).
처(妻), 원씨(元氏)주7, 령(齡) 65, 정해(1707/숙종33)생, 적(籍)주8 원주(原州). 부(父), 학생 성중(聲重). 조(祖), 학생 후명(厚命). 증조(曾祖), 학생 진선(震善). 외조(外祖), 병절교위 행용양위부사과 어유평(魚愈平), 본 충주(忠州).
가족[率]. 자(子), 유학 순(純)주9, 년 47, 을사(1725/영조1)생. 아내, 권씨(權氏), 령 46, 갑진(1724/경종4)생, 적 안동(安東). 손(孫), 유학 홍련(弘鍊), 년 27, 을축(1745/영조21)생. 아내, 김씨(金氏), 령 27, 을축생, 적 선산(善山). 차손(次孫), 유학 응련(應鍊), 년 21, 신미(1751/영조27)생. 아내 조씨(趙氏), 령 18, 갑술(1754/영조30)생, 적 한양(漢陽). 차손(次孫), 동몽(童蒙) 품동(品同), 년 14, 무인(1758/영조34)생. 증손(曾孫), 뇌몽(雷夢), 년 10, 임오(1762/영조38)생.
이하 노비 옥춘(玉春) 등 (10명?) 내역은 생략.
...을 무자년(1768/영조44)의 호구대장을 비교하여 발급하며 관인을 찍음[戊午戶口相準印].
행현감(行縣監)주10. 押(수결)
주1) 준호구(准戶口)는 관청에 보관된 호적(戶籍)의 기재 내용에 근거하여 개인에게 발급하는 문서로서, 오늘날의 호적등본, 제적등본, 가족관계증명서 등의 제증명에 해당한다.
주2) 준호구 표준 양식에는 중국 연호를 쓰도록 되어 있다. 발급 월(月)과 일(日)은 정확히 기재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본 준호구에서는 일반 간지(干支:甲子)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호적 갱신을 위해 관청에 제출하는 호구단자(戶口單子)에는 십이간지를 쓰지만, 본 문서는 준호구이므로 해당 사항이 없다. 또 준호구에는 내용 말미에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 '주기자협기자개인(周幾字挾幾字改印)' 등과 같은 흑색 도장[墨印]이 찍히기 마련인데, 본 준호구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스캔 과정에서 누락된 것일 수 있음). 호적대장의 내용을 베껴 준호구를 발급할 때, 원본에 맞게 제대로 작성하였으면 '주협무개' 도장을 찍고 실수가 있어 고친 곳이 있으면 '주협자개인' 같은 도장을 찍는다. 따라서 본 준호구의 효력에 일부 의문이 있다.
주3) 근좌면(近左面)은 현재의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鳳陽邑) 지역이며, 연박달리(硯朴達里)는 봉양읍 연박리(硯朴里)이다.
주4) 통수(統首)는 통(統)의 책임자인 제1호(戶) 가주(家主)를 말한다. 통(統)은 면(面)-리(里)-통(統)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지방 행정구역 단위의 말단이다.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라고 하면 5개 호(戶)를 1개 통(統)으로 편제한 것이다. 노비 계층을 통수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주5) 유학(幼學)은 조선시대 직역(職役:직업)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는 양반층의 직역으로 설정되었으나, 조선 후기인 18-19세기에 들어서면 중인(中人)이나 평민층도 유학을 직역으로 사용하는 것이 묵인되었다. 유학 직역을 사용한 것만으로는 호주(戶主)의 신분을 단정할 수 없다.
주6) 김경추(金慶秋:1686-1780?)는 예안 김씨 19세(世)이다. [예안김씨세보]에 따르면 김경추는 노인직(老人職)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직함을 받았다. 본 준호구에 김경추 부(父), 조(祖), 증조(曾祖)의 직함이 증가선대부, 증통정대부, 증통훈대부으로 기재된 것은 김경추의 노인직 제수에 따른 추증(追贈)으로 보인다. 노인직은 장수한 노인에게 주는 명예직이며, 추증은 죽은 후에 관직을 올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父)의 직함이 종2품 가선대부인 것을 보면 준호구 발급 시점에 김경추 본인의 직함도 2품(종2품 가선대부, 가의대부 또는 정2품 자헌대부 등)이어야 하나, 유학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일성록(日省綠)] 1786년(정조10) 윤7월 9일(경진) 기사에 노인직을 이중으로 받은 제천현 김경추에게 노인직을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내린 기록이 있다(提川縣 嘉義帖疊授嘉義金慶秋...竝老職加資下批). 이미 종2품 가의대부 노인직을 받았는데, 같은 가의대부 노인직을 다시 받은 경우이기 때문에 가자하라는 것이다. 종2품 가의대부을 가자하면 정2품 자헌대부가 되므로 세보의 자헌대부 직함과 일치한다. 그러나 [예안김씨세보]에 따르면 김경추는 1780년 경자년에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므로 일성록의 기록(1786년)과 맞지 않다. 족보나 세보 수록 내용의 신뢰성이 높지 않은 점, 일성록의 기록이 1786년 당시 발생한 사안을 다룬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점(과거의 잘못된 행정 처리 내역이 충청도관찰사를 통해 뒤늦게 보고된 것), 작은 행정구역인 제천현 지역에 노인직을 받은 동명이인의 동시대 인물이 존재할 확률이 매우 희박한 점 등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생전에 노인직으로 가의대부가 되었다가 사후 자헌대부 직함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준호구 발급 당시의 나이(86세)만 보아도 80세 이상인 노인직 제수 요건은 충족된다.
주7) 원씨(元氏:1707-?)는 [예안김씨세보]에 따르면 김경추의 후처(後妻)이다. 역시 세보 기록에 따르면 전처는 밀양 박씨(朴氏)로, 처부(妻父)는 박수경(朴守敬)이다. '씨(氏)'는 양반층의 아내에게 붙는 호칭으로, 남편의 신분에 따르지 않고 여자 본인의 생부(生父) 신분에 따라 쓸 수 있었다. 여자에게 붙은 호칭은 씨(氏), 성(姓), 소사(召史)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씨(氏)는 양반층, 성(姓)은 준양반 및 중인(中人), 소사는 중인 및 평민층이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중반에 소사를 쓰던 계층이 성을 쓰고, 19세기 중반에 성을 쓰던 계층이 씨를 사용하면서 19세기 말이 되면 평민층도 씨(氏)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유학(幼學) 직역의 광범위한 사용과 더불어 신분제 동요와 관련 있는 부분이다.
주8) 적(籍)은 본적(本籍), 즉 본관(本貫)을 말한다. 본 준호구에서는 남자의 본관을 '본(本)'으로 기재한 반면, 여자의 본관을 '적(籍)'으로 적고 있다.
주9) 순(純)은 준호구의 내용대로 김경추의 독자(獨子)이다. 김경추가 39세 때 낳은 아들로, 순 이전에 태어난 자식들도 있었을 것이나 모두 어렸을 때 사망한 때문에 김순(金純)이 장자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예안김씨세보]에 따르면 김경추에게는 딸이 2명 있었으며, 각각 우세풍(禹世豊), 이천휘(李天徽)에게 출가하였다.
주10) 행현감(行縣監)은 제천현감 관직을 행직(行職)으로 수행하고 있는 관원의 직함이다. 준호구 발급 당시인 1771년(영조47)의 제천현감은 7월 이전 김명순(金命淳:?-?), 7월 16일 이후 이술원(李述源:?-?)이므로, 본 준호구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면 행현감 아래의 '수결(手決)'은 이들 가운데 한 명이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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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는 1900년(광무4/고종37) 6월 21일(양력)부터 1905년(광무9/고종42) 4월 29일까지 시행된 관직 추증(追贈) 규정이다. 보라색 글자 부분은 1903년(광무7/고종40) 10월 19일자 관보2647호의 정오(正誤)로 추가된 내용, 하늘색 글자 부분은 동년 동월 27일자 관보2654호로 추가된 내용, 갈색 글자 부분은 1904년(광무8/고종41) 8월 2일자 관보2894호로 추가된 내용.
별단(別單) 추증규례(追贈規例)
제1조. 정1품 증경(曾經)주1 의정(議政)주2인 자는 다음에 의하여 증직(贈職)한다. 증경 보국(輔國)주3 참정(輔國參政)과 판돈녕(判敦寧)인 자도 이에 의하여 증직한다. 고(考)주4, 의정(議政). 대광(大匡)주5의 고(考)는 대광 품계, 보국(輔國)의 고는 보국 품계를 증직한다. 조(祖)주6, 참정(參政). 종1품 품계. 증조(曾祖)주7, 찬정(贊政) 또는 각부(各部) 대신(大臣). 정2품 품계.
제2조. 종1품 증경 참정, 대신, 대학사(大學士), 의장(議長) 및 경(卿)과 판돈녕(判敦寧)인 자는 다음에 의하여 증직한다. 고, 참정. 종1품 품계. 조, 찬정 또는 각부 대신. 정2품 품계. 증조, 참찬(參贊) 또는 협판(協辦). 종2품 품계.
제3조 정2품 증경 대신, 찬정, 부장(副將), 관각학사(館閣學士)주8 및 경과 지돈녕(知敦寧)인 자는 다음에 의하여 증직한다. 고, 찬정 또는 각부 대신. 정2품 품계. 조, 참찬 또는 협판. 종2품 품계. 증조, 비서원승(秘書院丞). 정3품 품계.
제4조. 종2품 증경 참찬, 협판, 경, 첨사(詹事), 좌장례(左掌禮), 소경(少卿), 동돈녕(同敦寧), 참장(參將), 재판장(裁判長), 전권공사(全權公使), 판윤(判尹), 관찰사(觀察使)인 자는 다음에 의하여 증직한다. 고, 참찬 또는 협판. 종2품 품계. 조, 비서원승. 정3품 품계. 증조, 홍문관시독(弘文館試讀) 또는 장례. 종3품 품계.
제5조. 종2품 증경 찬정, 참찬(參贊), 정3품 증경 협판, 판윤, 관찰사인 자는 각각 그 거친 관직에 의하여 증직한다. 이상 수증인(受贈人)주9의 처(妻)는 남편의 관직에 따른다.
제6조. 수증인(受贈人)이 증경 관각(館閣) 직임자인 경우에는 품계에 따라 겸증(兼贈)한다. 추증 세칙(細則)은 통편(通編)주10을 참고하여 시행한다.
제7조. 증직안(贈職案)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주하(奏下)주11한다.
주1) 증경(曾經)은 관직 역임 경력을 말한다. 전직(前職)과 동의어로서, 여기에서의 '증경의정'은 '전현직 의정(議政)'을 의미한다.
주2) 의정(議政)은 의정부의 정1품 관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한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의정대신(議政大臣)이다.
주3) 보국(輔國)은 정1품 하계(下階)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품계이다.
주4) 고(考)는 아버지이다. 즉, 증직 시행 대상자의 부(父).
주5) 대광(大匡)은 정1품 최고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를 말한다.
주6) 조(祖)는 할어버지이다. 즉, 증직 시행 대상자의 조부(祖父).
주7) 증조(曾祖)는 증조할아버지이다. 즉, 증직 시행 대상자의 증조부(曾祖父).
주9) 관각학사(館閣學士)은 규장각의 학사(學士)를 말한다. 관각(館閣)은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관청의 통칭이나, 대한제국 시기에는 규장각 또는 홍문관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다.
주8) 수증인(受贈人)은 증직을 받는 사람을 지칭한다. 즉, 위에서 열거된 의정 이하 증경자의 고(考), 조(祖), 증조(曾祖) 3대(代).
주10) 통편(通編)은 1785년(정조9) 9월에 반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이다.
주11) 주하(奏下)는 신하가 황제에게 보고하여 재가(裁可)를 얻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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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문서는 김륵(金륵)주1의 문집인 '백암집(栢巖集)' 권5. 장계(狀啓)에 실린 것으로, 예안(선성)김씨문중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하였던 '백암선생문집'의 수록 내용을 일부 편집 및 주석 추가 후에 등록한 것이다. 원문 텍스트는 민족문화추진회(http://www.minchu.or.kr)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다.
경상도의 군정과 적세 진달의 장계[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3 안집사시(安集使時)주2 임진(壬辰)주3
신(臣)이 한쪽 구석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사방으로 적들에게 포위당한 채 경상우도로 향하는 길[本道右路])과 강원도, 충청도 등의 길이 전부 끊어지고 막혀 불통되었으므로, 장계[啓狀]을 받들어 올리려고[奉進] 몇 번이나 강행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앞에는 걸리고 뒤에는 막혀서 모두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서쪽의 소식을 아직까지 들을 길이 없었고, 지난달에 올린 장계를 받들고 이미 길을 떠났는데 잘 도착하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오늘 공손히 교서(敎書)를 받들고 보니, 곧 '백성을 깨우치고 적을 토벌하라'는 어명[旨]이었습니다. 경상우도[右道]로부터 틈을 내어 달려와 신이 교외에서 의식을 갖춰 맞이하고 꿇어앉아 두 번, 세번[再三] 읽고서는 비로소 어가[大駕]가 의주(義州)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쪽 하늘가를 바로보니 간과 폐[肝肺]가 타는 듯 하였고, 차사원(差使員) 안기찰방 강영(姜霙)주4과 함께 마주앉아 울부짓으면서 실성[失聲]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만 번 죽어도 부족할 남은 목숨이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보니 비록 지하에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전날 급히 군병을 모아 각 고을과 마을에 이장(里將)과 유사(有司)를 정하여 놓고 관군(官軍)과 향병(鄕兵)을 모두 함께 모집[招募]하여 한 곳에 모아놓기는 하였으나 별도의 명목(名目)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용궁이 한 번 퍠전하여 재차 수습하기 위해 본래의 군사 외에 특별히 향병을 모아 마을 사람[邑人] 가운데 지식과 재간이 있는 자로 장수를 삼고, 안동의 승문원 권지(權知) 김해(金垓)주5 등과 같은 사람으로 각각 그 고을의 양반과 노복을 인솔토록 하여 부오(部伍)를 편성하고 관군과 힘을 합칠 것을 함께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도 북부[上道] 사람들은 군사[武事]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군기(軍器)도 없이 다만 맨주먹으로 적들의 통로와 가까이하고 있고, 군의 사정에도 어두우며 그 가족과 재산이 모두 산 속에 있고 몸은 진중에 있으니, 식량마져 걱정해야 되므로 모여지고 흩어지는 형세가 일정하지 않아 참으로 걱정됩니다.
하도(下道)와 우도(右道)에 있어서는 성지(聖旨)에 따라 공문을 보낸[移文]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모두 회신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근일에서야 처음으로 김면(金沔)주6, 곽재우(郭再祐)주7 등이 이미 의병(義兵)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약 전후좌우에서 힘을 합쳐 세력을 형성한다면 적의 날카로운 기세가 비록 왕성더라도 장차 근심거리를 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알고 있는 승려 원오(原悟)주8를 만나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모집하도록 하였고 또 가까운 읍[近邑]에 공문을 보냈더니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들이 각자 말하기를, '처자(妻子)가 없어져 단지 한 몸뿐이다'라고 하니, 그 사람들은 당연히 생사를 헤아리지 않고 용감하게 적진에 뛰어들 것입니다. 근일에 적들이 눌천(訥川)주9을 넘었을 때 이를 맞은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였다고 하니, 이 또한 증험(驗)된 것입니다.
대개 근일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적으로부터의 환란[賊患]에 익숙하게 되었고 또 그들이 끝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들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려는 의지가 굳어졌으며, 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고을에서도 또한 병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력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염려되지 않고, 걱정되는 것은 군기와 군량을 조달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조령(鳥嶺)은 이미 적들의 통로가 되었고 또 죽령(竹嶺)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한 길로 치달아[一達] 청풍과 충주로 연결될 것이고, 다른 한 길로는 제천과 원주가 연결되어 좌우 왕래가 방해를 받지 않아므로 본도에 있는 적이 틈을 보아 그곳과 통하려고 할 뿐 아니라, 충주의 적 또한 동래에서 포로로 잡은 백성[被擄人]으로 하여금 형세를 정탐하던 것을 단양군에서 붙잡은 일이 있습니다.
만약 죽령의 요해지가 또 적들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면 본도의 풍기 이하 열읍(列邑)은 장차 어육(魚肉)이 될 것이고, 길을 나눠 서울[京城]을 바로 공격하게 되므로 근심이 더욱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신이 재 아래[嶺下]의 가까운 읍에 있으면서 여러 방법으로 차단시켜 다행히 보전은 하고 있으나, 적들이 방자하게 달려드는 기세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니 끝내 지킬 수 있을 것인지 또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하도(下道)와 간혹 내왕할 수 있는 형편이니 만약 이곳의 환란이 잠시 누그러진다면 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서 군병을 많이 모아 협공할 계책을 세웠기 때문에 이 일을 이미 공문으로 열읍에 보냈습니다.
그윽히 적세를 살피건대, 하도는 종횡으로 포진하고 있어서 때로는 강을 따라 오르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강을 건너 오기도 하니, 맞아서 공격하거나 따라가면서 공격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으며, 조령 이하에 있어서는 병력을 한 곳에 모아있어 매우 세력이 강하고 지형이 불리하여 쉽사리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상도(上道)의 군대는, 조령의 가까운 고을을 지키고 있는 숫자를 제외하고는 하도로 이송(移送)하려 하나 군량을 이어댈 수 없으므로 지극히 민망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이와 같이 열읍이 참수한 머리 수를 바치려는 것에 대하여는 좌병사에게 맡겼음을 이미 보고[啓]하였으므로 세세한 실상에 대한 마감 보고를 다시 계달하겠습니다.
신의 몸이 적의 소굴과 가까이 있고 또 적을 섬멸할 계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어, 마음으로 전하[天極]에게 달려가 호위할 길도 없으니 법으로 따진다면 한 번의 죽음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군병을 모으는 일이라면 지금 대략 완수하였으니 영남의 한 구석에 엎드려 있으면서 조정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주1) 김륵(金륵:1540-1616)은 선조(宣祖) 연간의 명신(名臣)이다. 이하 '장계 1'의 주석을 참고.
주2) 김륵(金륵)이 경상도안집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이다. 이하 '장계 1'의 주석을 참고.
주3) 선조25년이니, 곧 1592년이다.
주4) 강영(姜霙)의 주석은 예정.
주5) 김해(金垓)의 주석은 예정.
주6) 김면(金沔)의 주석은 예정.
주7) 곽재우(郭再祐)의 주석은 예정.
주8) 원오(原悟)의 주석은 예정.
주9) 눌천(訥川)의 주석은 예정.
주10) 좌병사(左兵使)는 곧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1597)을 말한다. 박진에 관해서는 '장계 2'의 주석을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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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문서는 김륵(金륵)주1의 문집인 '백암집(栢巖集)' 권5. 장계(狀啓)에 실린 것으로, 예안(선성)김씨문중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하였던 '백암선생문집'의 수록 내용을 일부 편집 및 주석 추가 후에 등록한 것이다. 원문 텍스트는 민족문화추진회(http://www.minchu.or.kr)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다.
경상도의 군정과 적세 진달의 장계[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2 안집사시(安集使時)주2 임진(壬辰)주3
신(臣)이 지난 5월 29일에 삼가 장계[啓狀]을 마련하고는 진중의 군민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하여 소리내어 울며 절한[拜哭]한 뒤에 공손히 사자(使者)에게 건내주니, 사자가 곧 출발하여 강원도 통천군에 도착하였다가 왜적이 진을 치고 있는 중이라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음달 27일[越二十七日]에 또 되돌아 왔습니다.
신이 명을 받든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미력이라도 적을 토벌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작은 정성이라도 전하께서 머물고 계신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가면 갈수록 더욱 하는 일이 막혀 목을 놓아 울부짖어도 소리조차 잃게 되므로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또 근간에 일어난 적의 정세와 동태, 그리고 전일의 장황들을 함께 기록하여 받들어 올립니다. 만약 길이 조금이라도 소통되어 미약한 정성이나마 올릴 수 있다면 비록 적중에서 말라 죽는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인들 회한이 있겠습니까.
대개 근래의 적세는 경상도[本道]의 문경, 함창, 상주 등지에 다수가 모여들어 관가를 점거하고 곧은길[直路]에 진을 치면서 떠나고 머무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며,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성읍(城邑) 공격할 때에는 그 세력을 합치며 촌락을 노략질할 때에는 그 무리들을 분산시켜 들판에 주둔시키고, 동서로 말을 달려 돌진하면서 백성들을 도륙하고 가옥에 불을 질러 우마(牛馬)와 재물[材貨]를 구석구석 찾아서 약탈하니,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환난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죽령(竹嶺) 아래로는 다만 몇몇 고을만이 겨우 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이에 비로소 암곡(巖谷) 등을 구석구석 찾아 다니면서 흩어지고 도망간 병졸들을 불러모아 현존한 수령들과 더불어 토벌할 계책을 함께 세우는 등의 일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는 주장(主將)이 없으니 결코 무너지고 흩어진[潰散] 마음을 수합하여 안정을 기할 수 없습니다. 쓸모 없게 될까 두렵고 민망하며 통한스러움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6월 초10일[去六月旬間]에 적들이 용궁현 경계를 침범하였는데 여러 읍[數邑]의 병력과 힘을 합쳐 쫓아버렸고, (병력을) 회군시킨 뒤에 적들이 또 다수의 무리를 이끌고 처들어오자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주4과 예안현감 신지제(申之悌)주5가 공교롭게도 그들과 마주쳤는데,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중에 혹은 쓸어져 죽는 자가 생겨나자 각지에 숨겨둔 병사[伏兵]들이 소문만 듣고도 또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적들이 학가산(鶴駕山)주6의 지름길을 따라 야반에 안동으로 직행하고 또 그 무리들을 나눠 예안으로 분산 수송시켜 주준하고 있으니, 이미 전일에 모였던 우리 군사들은 제각기 가솔과 재물을 거느리고 모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병력 소집[招集]의 어려움이 변란의 초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은 고을의 뜻있는 사람들과 모의하여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몸소 돌아다니며 나오게 하고 관문(官門)에다 진을 치니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씩 진작되고 인근 고을의 군사들도 또 약간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적도들이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방비를 엄밀하게 하고 있으니 고립된 군졸로서는 무너지기 일수입니다.
바로 처들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예를 선발하거나 또는 영(令)으로 병사를 모집하여 때로는 요충지[要害]에 매복시키기도[設伏] 하고 때로는 밤을 이용하여 기습하기도 한 결과, 화살을 맞아 쓸어진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날을 두고 계속 공격하였더니 예안의 적은 7월 초9일에, 안동의 적은 18일에 모두 달아났습니다.
좌병사 박진(朴晉)주7이 마침 근읍(近邑)에 왔기에 신이 그를 만나보고 안동의 진(鎭)에 머무르면서 이웃 고을들을 통제하도록 권하였더니 이를 수락하고 이미 안동(同府)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안동을 빠져나간 적들이 풍산현 근처에서 진을 치고 있는 지 10여 일이나 되는데 분탕(焚蕩)질이 극에 달하고 인명 살상과 재물 약탈이 무수합니다. 강원도의 적들은 또 울진 등지로부터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면서 이미 안동 소천 땅[小川地]에 당도하였으니 봉화, 영천, 안동이 모두 초반[初頭]에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어제 들으니[昨聞] '충주의 왜가 또 지름길로 이미 풍기, 예천의 경계까지 도착하였다'고 하니, 지금쯤은 병사(兵使)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습격할 만 하나, 상하열읍(上下列邑)이 적진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병력을 동원하여 팔이 이어지듯 합세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 번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헛되이 시일만 보낸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더욱 참혹할 것이고 나라의 치욕도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니, 용졸(庸拙)한 신은 한 번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경상우도[右道] 등은 적이 길을 중간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아득하여 소식을 들을 수 없으나 좌도 등지에서 경산, 하동, 신령, 의흥, 군위, 대구, 청도, 영천, 경주, 영일, 장기, 흥해, 청하, 영덕, 영해, 진보, 청송 등의 읍은 간혹 문자로서 서로 통할 수 있고, 의성, 안동, 예안, 봉화, 영천, 풍기, 예천, 용궁 등은 지세가 서로 가깝기 때문에 신이 자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외 군읍은 비록 전하여 들을 수 있으나 믿을 만한 것은 못 됩니다.
하양은 일찌기 적에게 곤궁을 겪지 않았으나 지금은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일의 장기는 적선이 바다로부터 곧바로 들어올 수 잇는 곳이기 때문에 모두 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고, 청송 이하의 고을들은 각각 군병을 거느리고 경주의 적을 치려고 나아가다가 도중에 적변(賊變)을 만나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수령들의 유무에 있어서는 간혹 들리는 바가 있으나 공문(公文)이 통할 수 없어서 감히 우러러 진달할 수 없습니다[未敢仰達].
의흥은 새로 임명된 현감[新差縣監]이 변란초에 의흥 가까운 곳까지 왔다가 부임하지 않은 채 가버렸고 의성현령 이여온(李汝溫)주8이 성을 버리고 달아난 죄는 이미 진달하였으나 6월 초10일에 처음으로 스스로 나타났으며, 영천군수 김윤국(金潤國)은 충주 땅까지 도망갔다가 7월 21일에 스스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죄상(罪狀)을 말한다면 진실로 나라에 법[憲]이 있으니 그 법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만, 고을에 난민들이 많아 그들 스스로가 말하기를 '법이 없어졌다' 하므로 무너지고 찟어진[潰裂] 민심의 형세를 수습할 수 없기에 '스스로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立功自效]' 하려는 뜻으로 일단 부임하도록 영을 내리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의흥, 풍기, 예천, 안동 등지와 같은 고을의 수령을 조속히 임명하여 보내주시고 또 박진이 홀로 좌도에 남아 있으니 남쪽의 위태로움과 북쪽의 다급한 형편상 구원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의 장수와 병사들이[京將士]이 내려오기를 백성들이 날마다 갈망하고 있는데, 만약 장병이 특별이 파견되는 은혜가 있다면 군병의 위세가 백배나 되고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적환(賊患)을 평정하는 일이 날짜를 지정하여 기다릴 수 있겠습니다.
감사 김수(金睟)주9는 지금 우도에 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좌도로 오려고 하나 길이 막혀 올 수 없다고 합니다.
대개 근래에 들어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며, 또 적의 정세에 익숙하여 전일에 겁내던 것이 비하면 조금은 나아지고 있습니다. 비록 대진(對陣)하여 잘 싸우지는 못할지라도 복병과 야습에 있어서는 용감하고 날센 사람들이 많아서 그 중에는 신에게 자청하여 오는 자가 또한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원수같은 적들[寇賊]이 성에 웅거하여 버티고 있는 고을에는 산과 골짜기마다 복병을 배치하여 놓았는데, 의병(義兵)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적을 쏘아 죽여버리는 것은 다른 여러 고을들도 모두 그러합니다. 다만 모든 적들을 사로잡지[全隊盡捕] 못하고 하나하나 머리를 베기[斬首]도 어렵기 때문에 수급을 바치는[獻馘] 숫자가 많지 않았으니 모든 것을 병사(兵使)에게 맡겨 하나씩 조사하여 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간 우리나라의 장기[我國長技]는 활쏘기[弓箭]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각 병영의 군기(軍器)가 모두 바닥났고 군인(軍人)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자도 드문데다 또 거의가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못하므로, 지금은 마련할 자재도 없고 이를 쓰기 위해 비축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영해 이상의 북도(北道)에서 들어오고 있는 화살용 대나무[箭竹]는 각 관청의 보고에 따라 이를 실어다 사용하라고 영을 내렸으니, 모둔 숫자는 결과를 보아가면 자세히 기록하여 품달(稟達)하겠습니다.
장전(長箭) 40부(部)는 부사 한효순(韓孝純)주10이 함께 실어왔기 때문에 이곳에 두었다가 변란에 대비하려 하였고 군랸은 변란 초기에 공사간에 쌓아 두었던 것(公私之蓄)을 보전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모두 산실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풍족한 것이 따로 없으니[貧富一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었고, 밭에 남아 있는 곡식도 농사의 시기를 잃은데다 6월 초순부터 가뭄이 심항 벼가 모두 오그라져 있으며 빨리 자란 벼는 왜구들의 점령지가 되었으니, 군량을 보충한다는 것이 만에 하나라도 그 길이 없어서 백방으로 생각하여도 다만 통탄스럽고 민망할 뿐입니다.
지금 병사(兵使)가 근읍에 와 있기에 신이 모집한 군병에 대하여 서로 상의하여 처리하고 있으나, 실날 같은 남은 목숨[如縷殘命]이 한쪽 구석에 엎드려 있습니다. 복병의 염탐[侯望]으로 겨우 여러 고을을 보전하고 있으나 죽령으로 가능 길이 만약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좌도의 첫길[初程]은 더욱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이에 대한 방어 계책[防守之策]을 마땅히 조치해 두어야 합니다.
다만 가까운 곳에는 적진이 접해 있고 병화가 하늘에 치솟으니, 쇠망하게[淪沒] 될 걱정이 조석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약 하늘의 신령스러운 도움을 얻어 사람들의 지모[人謨]를 왕성하게 하고 기회를 타서 계책을 세우고 점진적으로 승기를 잡아간다면 저 패망한 적의 잔당들은 장차 죽을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신은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슬퍼하면서 정성을 바치지 못하고 있으니, 쓸개가 타고 기운이 막혀[膽焚氣塞] 장차 죽고만 싶었으나[一死將迫], 신의 족친인 선비[族士人] 김계선(金繼先)주11이 강개하게 분발[慷慨發憤]하여 장계를 받들고[奉啓狀] 가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밤에는 길을 걷고 낮에는 숲속에서 잠을 자면서 강행할 것 같으면 전하께서 계시는 곳[御所]까지 거의 근접할 수 있을 것이나, 신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끝내 도달할 것인지를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이 어둡고 정신이 어지러워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1) 김륵(金륵:1540-1616)은 선조(宣祖) 연간의 명신(名臣)이다. 이하 '장계 1'의 주석을 참고.
주2) 김륵(金륵)이 경상도안집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이다. 이하 '장계 1'의 주석을 참고.
주3) 선조25년이니, 곧 1592년이다.
주4) 우복룡(禹伏龍:1547-1613)에 관해서는 '장계 1'의 주석을 참고.
주5) 신지제(申之悌:1562-1624)에 관해서는 '장계 1'의 주석을 참고.
주6) 학가산(鶴駕山)은 안동 읍치에서 서쪽으로 40리에 있는 산이다. 해발 882미터.
주7) 박진(朴晉:?-1597)은 심수경(沈守慶:1516-15199)의 천거로 등용된 뒤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밀양부사로 초기에 왜적과 싸워 패퇴하였으나 (임진년 8월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전공을 쌓고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전라병사, 황해병사,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의정부좌찬성으로 증직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본관 밀양(密陽), 자 명보(明甫), 시호 의열(毅烈)이다.
주8) 이여온(李汝溫)은 이후 군량 조달의 공로를 수립하였으나 1595년(선조28) 8월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면천군수에서 파직되었다. 통진현감, 부평부사, 옥천군수, 풍덕군수, 고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탄핵과 파직이 여러 차례였다.
주9) 김수(金睟:1537-1615)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으로, 1573년(선조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홍문관직제학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발발시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전쟁 수행 역량에 문제가 많았다.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 안동(安東), 자 자앙(子앙), 호 몽촌(夢村), 시호 소의(昭懿)이다.
주10) 한효순(韓孝純:1543-1621)은 당시 영해부사였다. 1568년(선조1)에 생원을 거쳐 1576년(선조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 홍무관수찬을 거쳐 부사가 되었고, 전쟁 중에는 경상좌도관찰사, 병조참판, 체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 시절에 이조판서로서 폐모(廢母) 논의를 발의(發議)하였으므로 1623년(인조1)의 인조반정 직후 관작(官爵)이 삭제되었다. 1864년(고종1)에 복구되었다. 본관 청주(淸州), 자 면숙(勉叔). 호 월탄(月灘), 시호 장헌(莊獻)이다.
주11) 김계선(金繼先:1550-1604)은 김륵의 당조카이다. 자는 성원(誠源)이며, 임진왜란시의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선무원종1등공신에 추봉된 후 호조참판이 증직되었다. 김륵의 가계도는 '예안 김문 세계도'를 참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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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문서는 김륵(金륵)주1의 문집인 '백암집(栢巖集)' 권5. 장계(狀啓)에 실린 것으로, 예안(선성)김씨문중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하였던 '백암선생문집'의 수록 내용을 일부 편집 및 주석 추가 후에 등록한 것이다. 원문 텍스트는 민족문화추진회(http://www.minchu.or.kr)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다.
경상도의 군정과 적세 진달의 장계[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1 안집사시(安集使時)주2 임진(壬辰)주3
신(臣)이 지난 4월 27일에 경상도[本道]의 풍기, 영천 등지를 지났는데 모든 백성들이 거의 몸을 피하여 산으로 숨었고, 찾아간 마을마다 적막하여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으니, 받들고 온 명(命)을 선유(宣諭)할 곳이 없게 되어 두렵고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같은달 29일에 보고 들을 것을 수집하여 대략의 계문(啓文)을 갖춰 준비하였으나, 받들고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신이 서울에서 대동하고 온 자에게 가져가게 하였는데 충청도 제천 지역에 도착하니 적군이 이미 조령(鳥嶺)을 넘어 길이 막혔으므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다음달 5월 초4일에 또 계문을 지어 신이 데리고 있는 자에게 받들고 가게 하였더니 경기도 양근 땅에 도착하였을 때 적이 서울을 침범하였으므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길이 막히고 끊겨서 소식을 들을 수도 없고 전하께서 서울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하여 듣고는 멀리서 바라보고 통곡하니 죽고자 하여도 죽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서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항하여 떠났다'고 하니, (전하께서) 어디에 머물고 계신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다만 그리운 마음에서 보잘것 없는 성의만을 품은 채 이곳 정세를 아뢸 방도가 없어 밤낮으로 허둥대어 모습이 모두 세어졌습니다[盡素].
그러던 중에 마침 신의 마을 사람이 신의 민망하고 절박한 사정을 알고 계문을 받들고 다녀오겠다고 하므로, 경비를 넉넉하게 주어서 가는 도중 산을 오르거나 물을 건너기도 하여 멀리 적들의 길만 피할 수 있다면 행여 전하께서 계시는 곳 가까이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끝내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 없으니 피눈물을 옷깃에 적셔 자제할 길이 없습니다.
신이 이곳에 온 후에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진 연유를 살펴 보았더니, 적의 형세가 성(盛)하게 날뛰고 연이어 두어 진(鎭)이나 함락하자 오래도록 안일에 젖어 있던 백성들 모두가 넉이 빠지게 되었고, 장수된 자들이 미리 겁을 먹어 수령을 단속하지도 못하고 수령된 자도 먼저 다 도망치고 인심을 합치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서로가 얽히고 설키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적과 싸우는 것이 두려워 숲속으로 달아나 숨어버리고 난민들은 무법천지인 것인양 날뛰고 있으니 비록 그 본심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관(官)의 지휘에 따르지 않는 것은 동일합니다.
인심이 한 번 흩어지니 정의(情意)가 어그러지고 노복(奴僕)들도 그 주인을 아랑곳 하지 않으며 이졸(吏卒)들은 그 수령이 있는 곳조차 모르는 채 마을 거리를 횡행하면서 대낮에 떼를 지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왜인 복장으로 변장하여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여 들판에 널려 있어도 누가 감히 그 잘못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으니, 군사를 뽑아 전쟁터로 나가라는 말[說]은 함부로 꺼낼 수도 없습니다.
혹여 사족(士族) 중에 뜻 있는 사람들은 매우 분개하고 분발하여 몸을 부딪치고자 하나 군사를 모집하면 한 사람도 응하지 않으니, 비록 그가 거느리고 있는 자제(子弟)나 노복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관군(官軍)도 없으니 협력한다 하여도 헛되이 적에게 죽음만 당할 뿐이고 더리어 적의 기세만 도와줄 뿐입니다.
더군다나 병사, 수사, 방어사, 조방장 등이 모두 재[嶺]를 넘어 달아났고 감사(監司)주4의 거처도 또한 알 수 없으니 본도에 있어서는 통제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랏일에 충성을 바치려고 하여도 의지하고 기댈만한 곳이 없어졌고, 사사로이 욕심을 꾀하려는 자들은 두렵거나 꺼리김없이 날뛰고 있으니 모든 고을 수령들은 거의 도망가서 숨었으며 백성을 위해 창의(倡義)하려 하여도 공사[官私]가 모두 어지럽게 된 것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또 광적(狂賊)들이 재를 넘어간 뒤에 잔당[餘黨]들이 본도에 흩어져 있으면서 혹은 본진[大鎭]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혹은 들판에 진을 치기도[結鎭] 하며, 혹은 촌락에 불을 지르고서 겁탈하기도 하니 사람들이 겁을 먹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병사를 징집한다는 말만 들어도 귀를 가리고 멀리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신이 잔약하고 옹졸하여 근왕(勤王)에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형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10월주5 보름 이후로는[自十月望後] 산으로 피신했던 자들 가운데 오랜 고생 끝에 간혹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어 마을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은 가슴이 아프고 민망함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나마 펼 수 있는 길이 있게 되자, 마을과 고을을 두루 찾아다니며 간곡하게 성지(聖旨)를 알리고 그에 더하여 신이 말로써 설득하여 감동을 시켰더니 그 중에 뜻 있는 선비[士]들은 비록 활쏘는 법은 모르지만 밥짓거나 말먹이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엉성하게 얾어둘 수는 없으므로 각 고을과 마을에 머물게 하고는 기개가 있는 사람을 이장(里將)과 유사(有司)로 임시 임명[差定]하여 각각 그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되돌아 오게 권유하였고, 또 건장한 장정[丁壯]을 뽑아 나라의 위급함을 타일러 따르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두어 고을이 대략적인 형태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아직 인심은 안정되지 못하여 장구한 계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가족과 식량이 모두 산에 있기 때문에 잠시 모였다 흩어지곤 하여 조석(朝夕)으로 그 상황이 다르게 되니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피신하지 않으려 할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인지라 근심의 끝이 없습니다.
설령 다 모인 후에라도 언제나 온화한 태도로서 달래 수만은 없을 것이므로 호령(號令)으로 눌러야 대사(大事)를 경영할 수 잇을 것인데, 신에게는 위엄도 없고 직책도 맞지 않아서 어떻게 조치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위급한 때에는 일을 순리에만 따르기 어렵고 가까운 고을의 존망이 조석에 달려 있으며 적들의 진퇴가 그 사이에 있으니, 사세를 시급히 처리하여야 함에도 명을 받든 사람이 신 혼자뿐이라서 민망스럽습니다. 절박한 속에서 직책의 월권[越職]을 헤아릴 겨를이 없이 관찰사[方伯]의 일을 하기도 하고 혹은 주장(主將)의 일을 하기도, 혹은 수령의 일을 하기도, 혹은 이정(里正)의 일을 하기도 하면서 촌락을 드나들기도 합니다.
관부(官府)를 순시하면서 크고 작은 사무[大小之務]를 그때 그때 처리하였습니다만, 만약 어떤 고을에 수령이 없으면 그 고을을 지킬[守城]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무에 안동은 전도사 안제(安除), 전검열 김용(金涌)주6, 풍기는 교서관박사[校書博士] 황서(黃曙)주7, 의성은 훈련원 권지[訓鍊權知] 권희순(權希舜), 예천은 전현감 이유(李愈)주8를 임시 장수[假將]으로 차송하여 그 관서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니, 네 고을[四邑]의 장정들은 거의 다 뽑았고 영천, 봉화, 예안은 대략 조치를 취하여 두었습니다.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주9과 전판관 조붕(趙鵬)주10에게 용궁현과 예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다인(多仁) 등지의 적을 공격 토벌하게 하였으며, 예안현감 신지제(申之悌)주11와 신급제 권전(權詮)주12에게 예안현과 안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의성 이하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봉화, 영주, 풍기 등의 군사에게는 양쪽으로 척후를 보낸 병력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 그 필요에 따라 적소에 분송(分送)시켜 다인, 의성 지방의 적을 소탕하게 하였는데, 여기에서 살상한 적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혹여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이 합세하게 되면 소수의 병력[孤軍]과 약졸(弱卒)로 지탱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만약 다인과 의성 지역의 적을 이미 소탕하였다면 정세에 따라 진군하여 서울로 곧바로 처들어간 왜군도 섬명할 수 있게 되어 경상우도[右道]의 길도 통할 수 있게 되고 서로가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도의 열읍(列邑)들이 혹여 보전되었는지의 여부를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없어서 아무리 격문을 초하여[草檄] 놓았어도 전달할 길이 없으니 난처함을 더욱 말할 수 없습니다.
청송, 진보, 영덕, 청하, 흥해 등의 고을은 적과 가까운 지역임에도 겨우 보전하고 있고 경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경주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합력(合力)하여 토벌하라고 명한 다음, 어제 영덕에서 보낸 문건을 살펴보니 적세를 탐지하러 나갔다고 합니다. 다만 이러한 고을들은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대거(大擧) 동원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때문에 민망합니다.
군량(軍量)과 군기(軍器)는 수령 등이 싸음에 패하여 도망할 때 들판에 버려져 있었고, 관청에 돌아와서 보면 도망하고 없는 사이에 도둑이 들어 한치의 칼[寸刃]과 한 말의 곡식[斗粟]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도둑질해 간 사람들에게 자수를 권하여 혹 돌려받기도 하였지만 백분의 일도 되지 않으며[百不得一], 이제 철물(鐵物)를 모아 병장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군량미에 있어서는 농민들이 시간을 두고 사사로이 쌓아 두었던 곡식을 수합한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고 바쁜 사이에 식량을 만들기[作米]어렵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운 이때에 모든 일이 어려우니, 우선 얼마라도 마련되는대로 용도에 따라 대비할 것입니다. 만약 개인적으로 쌓아둔 곡식을 넉넉하게 납부[優納]하는 사람에게는 계문(啓聞)하여 상을 내리겠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타일렀습니다.
대개 본도가 탕진하고 패배[蕩敗]하게 된 원인은 장수와 수령들이 모두 사람답지 못한데다 인심도 안정되지 못하고 또 방종에까지 이르게 된 때문이니, 말을 하려 해도 기가 막혀 실성(失聲)할 정도입니다. 장수된 자가 꾸물거리고 물러앉아 회피한다는 모습을 전해 들으니 지금으로서는 아뢰기가 어렵습니다.
안동 같은 곳은 사람도 많고 지역도 넓으며 또 성곽도 있어서 죽령으로 통하는 첫길목으로 보장되어야 할 곳이고, 군병의 수가 많기로는 의성이 제일인데 두 성을 굳게 지켜 이웃 고을과 힘을 합치게 하면 적들이 쉽사리 서쪽으로 공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사, 현령 등이 먼저 겁을 먹고 적이 수백 리 밖에서 새처럼 부리도 숨을 한 번 쉬지 않았는데 앞장서서 달아나 다른 고을의 나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안동판관을 비롯하여 풍기, 예천 등의 수령들이 서로를 이어서 멀리 도망가 관가의 업무를 쓸어 가듯이 비어버리는[蕩然] 지경에 이르니, 지극히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근처의 몇 고을[數邑] 이외에는 모두 적들의 길[賊路]가 되어 소식을 통할 수 없고 그 나머지 군읍(郡邑)들의 존망과 수령의 유무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안동, 의성, 풍기, 예천 등 고을의 수령들을 먼저 임명[差出]하여 즉시 부임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시간과 상황에 따라 처리토록 하였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본도의 좌감사(左監司)를 이미 임명하여 부임시켰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좌도병사(左道兵司)주13도 적임자를 뽑아 임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군정(軍情)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궁지에 몰린 적을 쓸어 제거하는 시기를 잃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이같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서는 사람을 얻는 것이 시급합니다. 예안은 현감 신지제가 열읍이 무너지고 도망치는 중에도 뛰어난 수비로서 관가의 일을 조금도 차질 없이 수행하고 있으며, 용궁현감 우복룡도 모든 조치를 방도에 따라 성심껏 수행하고 있어 비록 적들이 주변까지 육박하였으나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정성과 힘을 다해 적을 소탕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고을의 모든 아전과 백성[一邑吏民]이 즐거운 마음으로 어려운 위기를 독립적으로 타개하고 있으니, 지극히 가상한 일입니다. 안동 등지의 수령은 왕사(王事)에 충성을 쏟을 사람을 가려 임명하여 주신다면 한 지방의 여러 고을들이 패전으로 흩어진 형세를 그나마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정사성(鄭士誠)주14과 홍여율(洪汝栗)주15 등이 어진[御容]을 받들고 도성을 향해 가던 중에 원주에 이르니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침공하고 있어 길을 막혔기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예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신이 예안으로 달려가 여율을 보고 물으니 '적의 공격을 받아 인심이 극도로 사나우므로 의외의 변고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율이 있는 곳에 삼가 은밀히 받들어 소장하겠다고 하였습니다만, 신은 봉안할 곳이 마땅치 않아 통곡하고 실성하며 어느 곳에 봉안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산의 사찰[山刹]에서는 수호하기 어렵고 마을에서는 더욱 봉안할 곳이 못되어 잠시 몇날을 기다렸다가 의성과 예천의 적을 혹여 몰아낼 형세가 된다면 관사(官舍)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모셔다가 봉안하고 군졸을 배치하여 호위한 후 수령들을 인솔하고 배알[謁]한다면 인심의 감동됨이 전일보다 배가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이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임금[天威]을 지척에 뫼신 듯 하고, 어진을 받들어 모시니 임금의 행차[神儀]가 근엄하게 강림하여 계신 듯 합니다. 하늘의 신령스러움을 얻어 혹여 만에 하나[萬一]라도 사태가 수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도 북쪽[上道] 사람들은 본래 무사(武事)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이같이 위급한 때를 맞이하여 한 사람의 군대 지휘력[判兵之才]이 있는 자가 없습니다. 신과 같이 쓸모 없는 선비라도 비록 나라에 공헌하려는 마음은 간절하나 손을 쓸 계책이 없으니, 한 번 죽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판관 조붕, 전부장 박경신(朴慶新)주16, 전만호 김극유(金克裕)주17, 최대인(崔大仁)을 전란의 한 가운데서 만나게 되어 병무(兵武)의 지휘관으로 기용코자 하였으나, 이들은 군문[轅門]에서는 한 군졸[一卒]일 따름이니 군을 통솔할 사람이 없다면 군정(軍政)의 혼란을 누구라서 수습하겠습니까. 서울을 공격하는 광적들은 마치 폭풍과 소나기가 오듯 그 세력이 더욱 왕성할 것이니, 명나라 군대(天兵)이라면 반드시 섬명할 수 있을 것이나 길이 막혀 아직까지 그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피로에 지치고 분산되었던 군졸이라도 모이는대로 수습하여 병졸로 따르게 하고 있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삼도(三道)의 군사들이 이미 서울에 모여 있다'고 하니, 이로써 적이 만약 지탱하기 어렵게 되면 본도에 주둔하고 있는 적이 달려가 합세하여 그 성세를 도울 것 같기에, 우선 몇 고을의 여러 사람들[數邑大小之人]과 약속을 엄중하게 하고 향병(鄕兵)을 출진시켜 적이 주둔한 요해처를 잘라버리면, 위로는 왕실을 멀리서 호위하는 것이 되고 아래로는 부근 여러 고을을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이미 무너진 나머지 비마져 내려 농토를 모두 쓸어 묻으니 백성들의 살길이 막막하고, 흩어진 인심을 생각하면 수습하기가 극히 어렵게 되되었으니, 오장이 무너지는 듯 아륄 길을 차마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1) 김륵(金륵:1540-1616)은 선조(宣祖) 연간의 명신(名臣)이다. 본관 예안(禮安), 자 희옥(希玉), 호 백암(柏巖), 시호 민절(敏節)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576년(선조9)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안집사(安集使)로 경상도 지역을 수습했으며, 전쟁중에 경상우도관찰사,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53년(효종4)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1788년(정조12)에 시호가 내려졌다. 김륵의 연보(年譜)는 '예안 김문 문집 기록'을 참고한다.
주2) 김륵(金륵)이 경상도안집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곧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로서 경상(좌)도안집사에 임명되었다. 출신지가 경상좌도, 정확하게 말하면 경상도 북부 지역인 영천(榮川:현재의 영주)이므로 경상도 지역의 수습을 맡은 것이다.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에 따르면 이 임명일이 4월 24일이다.
주3) 선조25년이니, 곧 1592년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하였다.
주4) 감사(監司)는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김수(金睟:1547-1615)를 말한다. 김수에 관해서는 '장계 2'의 주석을 참고.
주5) 10월이 정확하다면 장계를 작성한 날짜는 1592년 10월 15일 이후가 된다. 김륵이 안집사의 명을 받든 지 약 4개월만에 (임금에게 유효하게 전달되는) 첫 장계를 올린 것인데, 이 날짜에 관해서는 문집 수록이나 원문 식별 과정에서 착오 가능성이 있다. + 내용 추가 예정 +
주6) 김용(金涌:1557-1620)은 퇴계 이황의 손녀사위로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조카이자 문인이다. 본관 의성(義城), 자 도원(道源), 호 운천(雲川)이며, 1590년(선조23)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상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주7) 황서(黃曙:1554-?)는 1576년(선조9)에 진사가 되고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박사, 파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파주목사를 지냈으며,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광원(光遠)이다.
주8) 이유(李愈:1522-?)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10)에 생원이 되고 천거를 통해 태천현감, 용궁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 연안(延安), 자 자흠(子欽), 호 매촌(梅村)이다. 임진왜란 중에 진중에서 죽었다고 한다.
주9) 우복룡(禹伏龍:1547-1613)의 1573년(선조6)에 진사가 된 후 학생으로 천거되어 김포현령, 용궁현감, 안동부사, 선청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용궁현감 우복룡은 임진왜란 초기에 군사를 이끌고 병영으로 향하다 영천(永川)에서 하양(河陽)의 방어사 소속 병력 수백을 반란군으로 몰아 모두 죽였으며, 이를 관찰사 김수가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로 승진된 후 곧 안동부사가 되었다. 본관 단양(丹陽), 자 견길(見吉), 호 구암(懼庵)이다.
주10) 조붕(趙鵬)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선조24) 4월에 형장을 남용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약간의 행적이 보인다.
주11) 신지제(申之悌:1562-1624)는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1589년(선조22)에 증광 문과에 급제한 후 예안현감,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 아주(鵝州), 자 순보(順甫), 호 오봉(梧峯)이다.
주12) 권전(權詮:?-1598)은 후일 축산포만호를 거쳐 적량포만호로서 충무공 이순신 아래에서 종군하다가 1598년(선조) 11월 19일에 이순신과 같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주13) 좌도병사(左道兵司)는 곧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1597)을 말한다. 8월(5월?)에 기존 이각(李珏)을 대신하여 박진을 신임 좌병사로 임명하였는데 아직 그 내역이 도달하지 않은 것이다. 이각은 동래성에서 핑계를 대며 도망하였고 밀양부사로 있던 박진이 이각 대신 왜적을 맞아 싸웠다. 이각은 나중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1534-1602)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박진에 관해서는 '장계 2'의 주석을 참고.
주14) 정사성(鄭士誠:1545-1607)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1)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1687년에 태릉참봉, 1591년에 천거로 경주에 있던 경덕전(集慶殿)의 참봉이 되었으며, 이후 내섬시주부, 양구현감을 역임하였다. 본관 청주(淸州), 자 자명(子明), 호 지헌(芝軒)이다.
주15) 홍여율(洪汝栗:?-1660)은 이조판서 홍진(洪進:1541-1616)의 아들이다. 본관이 남양(南陽)인데, 당시 어진을 들고 대피한 공로로 인해 1592년(선조25) 11월에 6품관에 임명되는 포상을 받았다.
주16) 박경신(朴慶新:1660-?)은 1582년(선조15)에 진사가 되고 동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해주목사, 전주부윤, 삼척부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 죽산(竹山), 자 중길(仲吉), 호 한천(寒泉)이다.
주17) 김극유(金克裕)는 이후 하양현감이 되었는데 1594년(선조27) 4월에 '비대하고 둔한 몸집에 글도 볼 줄 모른다[身體肥鈍目不知書]'는 사유로 파직되었다. 정유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