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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조거리 고증에 관한 소고(小考)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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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오는 2009년 8월 1일에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가 완료될 예정으로 있다. 2008년 5월 27일에 착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한 이래 약 1년 2개월만에 완공을 보는 것으로, 세종로(世宗路) 16차선을 10개 차선으로 축소하고 대로(大路) 중앙에 길이 550m, 폭 34m 규모의 광장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여가 공간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지난 2월경 언론보도에 공개된 청사진에 따르면, 광화문 앞에 있던 해태주1가 원래 위치로 옮겨지고 월대(月臺)가 복원되며 육조거리 위치 재현 라인(line)이 그어지고 축소모형도 배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 세종대왕 동상, 분수대, 메모리얼 수로(水路), 교통 쉼터, 광화문 탐방로, 황토현 등도 설치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본 문서에서 다룰 내용이 바로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육조(六曹)주2 각 관청의 시대 변천에 따른 위치 고증이다.

즉, 정부주3에서 광화문 광장에 설치할 육조거리 위치와 설명, 축소모형의 내용은 무엇이고, 그 정확성이 어느 수준일까 하는 궁금증이 본 문서 작성의 출발이 되었다.

학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여 그 정수를 뽑아 광화문 광장에 축소모형을 만들고 관련 설명문을 함께 비치할 것으로 보이는데, 관련 전문가들의 고증을 충분히 거친 내용일 것이기에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정확할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공간적, 시간적인 제약 등을 이유로 광장에 설치한 육조거리 모형과 설명에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광화문 광장 완공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육조거리에 관한 내용을 하나의 문서로 정리하였다. 특히, 개인적으로 육조거리에 관한 자료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몇 가지 사항이 있기에 그 내용을 담아 보았다.


본(本)

세종로는 조선시대의 의정부, 육조, 한성부, 중추부, 사헌부 등의 중앙 관청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흔히 육조거리[六曹街], 관아거리[官衙街]주4 등으로 호칭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내부(內部), 외부(外部), 탁지부(度支部) 등의 중앙 관청이 육조 관청의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위치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에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개칭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10월 1일에 세종로라고 명명되었다. 현재도 세종로에는 정부중앙청사와 정부중앙청사 별관,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정부기관이 소재하고 있어 조선왕조 개국 직후의 한양(漢陽) 천도 이래 행정 중심지로서의 명맥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배치(모습)에 관한 추정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그림 [가] - 육조거리 (그림 클릭)

그림 [가] - 육조거리 (그림 클릭)

그림 [나] - 육조거리 (그림 클릭)

그림 [나] - 육조거리 (그림 클릭)

위 그림 [가]와 그림 [나]가 그것이다.주5 그림 [가]는 광화문 우측의 의정부에 면한 이조, 한성부, 호조 관청들이 기로소(耆老所)까지 계속 이어져 있는 모습이고, 그림 [나]는 호조 청사가 대로(大路) 건너편의 형조 청사와 비슷한 선(ㄱ)에서 끝나고 호조와 기로소 사이는 민가가 들어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는 모습이다.

즉, 그림 [가]와 그림 [나] 사이의 차이점은, 호조 관청이 그림 [나]의 ㄱ에서 끝나는가, 건너편 공조 청사 위치인 ㄴ까지 연장되었는가, 아니면 기로소와 붙어 있는 ㄷ까지 이어져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ㄱ에서 끝이면 그림 [나]이고, ㄴ 또는 ㄷ에서 끝나면 그림 [가]이다. 역시 추정이지만, 기로소는 그림 [나]에서 화살표로 표시된 지점부터 청사 영역이 시작되어 그림에 표시된 것만큼 면적이 넓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성부, 육조거리 등의 복원 모형이나 복원도는 대체로 그림 [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림 [가] 형태는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한성부 모형,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서울옛모습 모형, 디지털한양 사이트의 한성부 복원배치도 등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그림 [나] 형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경복궁(景福宮) 복원모형주6에서 채택하고 있다.

그림 [나]는 학계 논문에서 추론하고 있는 형태에 가까운데,주7 그림 [나]보다 그림 [가]의 형태가 건축 모형과 같은 결과물로 많이 채택된 것에는 일부 의문이 있다. 특히 서울역사박물관 모형과 디지털한양 사이트는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것이기에 최근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나, 그 자세한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림 [1]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한성부 건축모형

그림 [1]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한성부 건축모형

위 그림 [1]은 서울역사박물관 전시품으로, 그림 [가] 형태를 채택한 대표적인 모형이다. 육조거리 동편 상단 관청부터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의정부(議政府) : 국정 전반을 통솔하는 최고 관청이다. 현재의 국무총리실에 해당한다.
이조(吏曹) : 문관(文官)에 대한 인사 행정을 담당한 관청이다. 현재의 행정안전부(舊행정자치부)와 비슷하다.
한성부(漢城府) : 도읍지 서울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현재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한다.
호조(戶曹) : 국가 재정을 담당한 관청이다. 현재의 기획재정부와 비슷하다.
기로소(耆老所) : 60세 이상의 고급 관료를 우대하기 위한 관청이다.

예조(禮曹) : 국가 의례, 외교, 교육을 담당한 관청이다. 현재의 교육과학기술부와 외교통상부를 결합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중추부(中樞府) : 정식 관직에서 물러난 고급 관료를 우대하기 위한 관청이다. 원로 자문기관과 같은 격이다.
사헌부(司憲府) : 공직 기강, 관원 감찰을 담당한 관청이다. 공직자부패수사처와 비슷한다고 볼 수 있다.
병조(兵曹) : 국방, 군사 분야를 담당한 관청이다. 현재의 국방부에 해당한다.
형조(刑曹) : 법령, 판결, 노비 업무 등을 담당한 관청이다. 현재의 법무부, 재판소와 비슷하다.
공조(工曹) : 토목, 공업 등을 담당한 관청이다. 현재의 지식경제부, 조달청 등과 비슷하다.

그림 [1[에서 호조와 기로소 청사가 담장을 맞대고 붙어 있다. 이 모형에서 특이한 점은 각 관청의 중심 청사가 녹색 막대처럼 남향(南向)이라는 점이다.

경복궁이 남향을 하고 있고 전통적으로 남향, 동향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각 관청의 청사도 남향일 것으로 간주하고 모형을 제작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는 노란색 막대처럼 의정부, 이조, 한성부 등 육조거리 동편 건물은 서향이었고, 예조, 중추부, 사헌부 등 육조거리 서편 건물은 동향이었다. 여러 자료를 판단하건데 기로소는 남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주8 참고로, 기로소 왼쪽 아래의 사각형 건물은 현재 교보빌딩(대한교육보험빌딩) 앞에 있는 '기념비전(記念碑殿)'이다.

이제 그림 [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2] - 청구요람 도성전도 (19C 중반)

그림 [2] - 청구요람 도성전도 (19C 중반)

위 그림 [2]는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철종12)에 목판본(木板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기 전에 필사(筆寫)로 제작했던 《청구요람(靑邱要覽)》 중 〈도성전도(都城全圖)〉의 육조거리 부분이다.

호조와 기로소 사이에 공간이 있고 그곳에 징청방(澄淸坊)이라고 표시된 것이 보인다. 징청방의 방(坊)은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날의 동(洞)에 해당한다.주10 즉, 호조와 기로소 일대 지역이 징청방이라는 행정구역 권역이었음을 표시한 것이다.주11 그림 [1]과 달리 각 관청 청사의 방향(동향, 서향)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참고로, 호조 청사 아래에 파란색 선으로 표시된 골목 부분은 나중에 고찰할 내용이다.

그림 [3] - 도성대지도 (18C 중반)

그림 [3] - 도성대지도 (18C 중반)

위 그림 [3]은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의 육조거리 부분이다. 이 지도는 조선시대 중엽의 당시 한성부의 지명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연혁, 지리, 관청 위치 연구 등에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 사료이다. 역시 그림 [2]처럼 호조 청사와 기로소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방(坊) 아래의 행정구역 단위인 계(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이에 관한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

ㄱ) 《만기요람(萬機要覽)》주12 군정편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 수성자내(守城字內) 中
: (전략)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내계(吏曹內契), 한성부내계(漢城府內契), 후동계(後洞契), 호조내계(戶曹內契), 후문계(後門契), 고예조계(古禮曹契), 판정동계(板井洞契), 전함사계(典艦司契), 변종견계(卞宗堅契), 두석동계(豆錫洞契), 비변사계(備邊司契)... (하략)

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 비고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주13 제2편, 한성부(漢城府) 中
: (전략)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내계(吏曹內契), 한성부내계(漢城府內契), 한성부후동계(漢城府後洞契), 호조내계(戶曹內契), 호조후문계(戶曹後門契), 고예조계(古禮曹契), 판정동계(板井洞契), 전함사계(典艦司契). 이상은 훈국우영(訓局右營)에 속한다. (하략)

중부 징청방의 계(契) 구성이 이조내계, 한성부내계, 한성부후동계, 호조내계... 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계의 나열 순서와 지도상 계의 위치가 대략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서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기록된 순서가 문헌상의 기재 순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에는 호조후문계 근처에 있어야 할 고예조계(古禮曹契)주14가 없다. 문헌의 기재 순서와 지도의 공백을 두고 판단해 보면 고예조계의 위치는 지도에서 표시한 지역(물음표 위치).으로 추정된다. 지도에서 흰색으로 표시된 계 명칭이 중부 징청방에 속한 계이다. 다른 색상으로 표시된 계, 예를 들어 의정부내계는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이고, 사복시전계(司僕寺前契), 사복시천변계(司僕寺川邊契), 개정동계(盖井洞契), 청성군계(淸城君契) 등은 중부 수진방(壽進坊)이다.

일단, 고예조계의 추정 위치를 기억해 두자. 그리고 그림 [2]처럼 호조 청사 아래 골목이 두 번 꺾인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4] - 한성부 지도 (1899년경)

그림 [4] - 한성부 지도 (1899년경)

위 그림 [4] 지도는 대한제국 시기의 육조거리 일대 지도이다. 탁지(度支)는 탁지부(度支部), 농부(農部)는 농상공부(農商工部)인데, 지면 부족 때문에 각각 탁지와 농부로 기재하였다. 탁지부 아래, 농부 위의 量地衙門(양지아문)에 한글을 병기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 지도를 보아도 농상공부와 기로소 사이에는 민가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이외의 문헌 기록, 예를 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육조거리 소재 각 관청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주15

의정부(議政府). 광화문(光化門) 남쪽 왼편에 있고,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서쪽에 있다.
이조(吏曹). 의정부 남쪽에 있으며, 문관의 선임(選任), 훈봉(勳封), 고과(考課)를 관장한다.
호조(戶曹). 한성부(漢城府) 남쪽에 있으며... (하략)
예조(禮曹). 광화문 남쪽 오른편에 있으며... (하략)
병조(兵曹). 사헌부 남쪽에 있고, 또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으며... (하략)
형조(刑曹). 병조의 남쪽에 있으며... (하략)
공조(工曹). 형조의 남쪽에 있으며... (하략)
중추부(中樞府). 예조 남쪽에 있으며... (하략)
사헌부(司憲府). 중추부 남쪽에 있으며... (하략)
장예원(掌隸院). 공조 남쪽에 있으며... (하략)
예빈시(禮賓寺). 의정부 남쪽에 있으며... (하략)
기로소(耆老所). 중부 징청방에 있으며, 2품 이상으로 나이 70세가 된 이들이 서로 모이는 곳이다.

관청이 서로 인접해 있으면 '무슨무슨 관청 남쪽에 있으며'와 같은 식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로소는 '호조 남쪽에 있으며'라고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보면 호조와 기로소가 연접하지 않았음을 간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 그림 [3], 그림 [4]와 같은 고지도의 표기와 문헌 기록 등을 참작하면 그림 [가]보다는 그림 [나]의 관청 배치 형태가 사실에 보다 가까웠음을 추론할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2003년에 부산광역시 소재 정부기록보관소에서 육조거리 실측평면도가 발견되어 그림 [가] 형태의 육조거리 관청 배치도는 존재 근거를 거의 상실했다.주16 물론, 육조거리 실측평면도가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 무렵의 도면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관아 배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조선시대의 청사 각 간물의 세부 배치가 대한제국 시대와 다를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실측평면도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그림 [나]의 모습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추정한 조선 초기의 육조거리 배치도는 다음과 같다. 덧붙이자면, 사실 그림 [나]의 세부적인 관청 건물 배치 자체가 2003년에 발견된 실측평면도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였다.

그림 [A]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그림 [A]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위 그림 [A]는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 무렵의 육조거리 모습이다.주17 조선 중기와 후기를 묘사한 그림 [나]와 달리 조선 초기에는 후기의 예조 자리에 삼군부(三軍府) 청사가 있었다. 삼군부는 군사 업무를 총괄한 관청으로, 조선 초기에 존재하였다가 폐지된 후 1868년(고종5)에 다시 복설되었다.

예조 자리에 삼군부가 있었으므로, 예조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추측해야 한다. 이 지도에서는 그림 [3]에서 추정한 고예조계(古禮曹契)의 위치를 감안하여 호조 아래에 예조 청사가 있었던 것으로 표시하였다. 예조가 삼군부 위치로 옮겨가면서, 예조가 있던 자리가 '옛날 예조계' 또는 '옛날 예조동'이라는 명칭으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그림 [A]는 조선 초기의 육조거리 관청 배치로 여겨지는 통상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각종 문헌 기록에는 한성부(漢城府) 청사의 위치가 이조(吏曹) 청사 아래에 조선왕조 개국(開國) 초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나온다. 예를 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吏曹) 아래 남쪽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세웠다.주18

로 기술된 것이 그 일례이다. 그런데 《태조실록(太祖實錄)》 1395년(태조4) 9월 29일자 기사에,

(전략) 후에 궁성(宮城)을 쌓고 동문은 건춘(建春), 서문은 영추(迎秋),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칸[間]이 상층과 하층이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 삼군부(三軍府), 육조(六曹), 사헌부(司憲府) 등 각 관청 청사가 벌여 있었다.주19

의 내용이 보인다.

경복궁 완공 직후의 광화문 일대를 묘사한 것인데, 기사 본문의 '후에 궁성을 쌓고[後築宮城]'라는 부분의 문맥을 감안하면 경복궁의 궁성 축조와 광화문 남쪽 좌우 의정부, 삼군부 등의 관청 청사 건립은 1395년 9월 29일의 완공 이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주20 이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서 그대로 반복된다.주21

(전략) 궁성. [둘레 1,813보(步)]. 동문을 건춘, 서문을 영추, 남문을 광화라 한다. [문의 다락이 2층이며,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을 경계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 중추원, 육조, 사헌부 등 각 관청 청사를 벌려 놓았다.]주22

《태조실록》은 1413년(태종13)년 3월에 최초 완성된 후, 1442년(세종24) 9월, 1448년(세종30)년, 1451년(문종1)에 일부 개수된 바 있으며, 《세종실록》은 1454년(단종2) 3월에 완성되었다. 《태조실록》의 해당 내용이 1413년에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개수될 때 추가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복궁 궁문(宮門)의 이름을 정한 때가 1426년(세종8) 10월이므로주23 1442년 이후 개수시에 보충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후자라고 하더라도, 궁성 축조와 광화문 앞 육조거리 조성에 대한 부분은 1413년 실록 완성시에 이미 기록되어 당시의 전경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고, 궁문 명칭 정도만 나중에 추가된 것일 확률은 여전하다.주24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 중에 하나인 의정부는 1400년(정종2) 4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개칭하여 설립되었다.주25 이때는 관청 이름만 바뀌고 내부 직제(職制)는 도평의사사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다가 1401년(태종1) 7월 13일에 문하부(門下府)를 흡수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도평의사사 청사를 새로 건축한 때가 1398년(태조7) 윤5월이다.주26

의정부가 출범 초기에 도평의사사의 직명(職名)을 그대로 계승한 것처럼, 청사 역시 도평의사사 청사를 그대로 승계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평의사사 청사는 바로 육조거리의 의정부 청사일 것이고, 따라서 육조거리의 각 관청 청사 건설 시점은 도평의사사를 신축한 1398년 무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주27 이 시기에 궁성(宮城), 문묘(文廟) 조성이 집중된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다. 삼군부 영건(營建) 명령이 1397년 6월이라는 사실도 그 가능성을 높여준다.주28

즉, 육조거리 조성 시기는 빠르면 경복궁 완공 직후인 1396년(태조5), 아마도 1398년 전후(태조7),주29 늦어도 《태조실록》 완성 시점인 1413년(태종13) 3월 이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주30

그런데 이처럼 육조거리 일대의 관청 조성에 관한 묘사를 담고 있는 《태조실록》과 《세종실록》 지리지 기사에 유독 한성부만 누락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한성부 청사가 육조거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록을 찬술하는 과정에서의 단순한 기록 탈락에 불과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순간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406년(태종6) 6월 5일자 기사에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도(新都) 성황신(城隍神)을 예전 터[舊基]로 옮겨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기를 빕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양부(漢陽府)는 성황당(城隍堂)의 옛 터였다.주31

한성부 청사 위치가 성황당(城隍堂)의 옛날 터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그림 [A]로 추정한 육조거리 배치도의 한성부 위치에 따르면 성황당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따로 유추하기 어렵다. 또 민심을 모으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지만 유학(儒學)이 통치 이념이던 조선왕조가 성황신의 사당을 중앙 관청이 밀집한 육조거리에 다시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다.

실록에서 한성부가 누락된 기사와 한성부 청사가 선황당의 사당 터라는 기사를 볼 때, 과연 한성부는 국초부터 이조와 호조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세종실록(世宗實錄)》 1426년(세종8) 2월 15일자 기사에 한성부 청사 남쪽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날 점심 때 서북풍(西北風)이 크게 불어, 한성부의 남쪽에 사는 인순부(仁順府)의 종[奴] 장룡(長龍)의 집에서 먼저 불이 일어나 경시서(京市署) 및 북변 행랑 106칸[間과] 중부의 인가(人家) 1,630호와 남부의 350호와 동부의 190호가 연소되었고... (중략) 중궁(中宮)은 불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남아 있는 모든 대신과 백관에게 전교(傳敎)하기를, "화재가 일어났다 하니,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구제할 수 없게 되더라도, 종묘 와 창덕궁 은 힘을 다하여 구(救)하도록 하라." (하략)주32

그림 [A1] - 조선초기 한성부 5부 행정구역 (15세기)

그림 [A1] - 조선초기 한성부 5부 행정구역 (15세기)

위 그림 [A1]는 실록의 화재 기사를 상황을 그려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화재 발원지가 한성부 청사 남쪽에 살던 인순부 소속 노비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성부라는 행정구역의 남쪽(남부 지역)에 사는 노비'라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으나, 서북풍이 불고 있었고 중부(中部)에 대부분의 피해가 집중된 반면, 동부와 남부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손실이 발생한 점을 생각하면 통상적인 국역(國譯) 내용대로 한성부 청사 남쪽 가옥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 한성부가 그림 [A]처럼 육조거리의 이조와 호조 청사 사이에 있었으면 이런 가정이 힘들어진다. 한성부 청사 남쪽에 호조 청사가 인접해 있었고, 만일 그 사이에 노비의 집이 있어서 화재가 발생했더라면 관청 청사들에도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을 텐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한성부 청사는 그림 [A]처럼 육조거리에 위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세종실록》 1446년 3월 7일자 기사에는 당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집을 넓히기 위해 이웃한 민가(民家) 10호(戶)를 강제로 사들여 민폐를 유발한 문제에 대해 사헌부 관원이 지적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서 그 기사의 말미에,

(전략) 이때 여러 대군들의 저택이 규정에 지나쳤으니, 한성부(漢城府)를 철거하여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저택을 세우면서 웅장하고 화려함을 지극하였고, 또 안국방(安國坊)의 민가를 철거하고 장차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저택을 세우려고 하니, 건축하는 비용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주33

라고 부기(附記)하였다. 1446년(세종28년) 무렵에 평원대군(平原大君)주34의 저택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한성부 청사 영역을 침범하였다는 것이다. 평원대군의 저택 위치가 조선 초기의 한성부 청사 위치를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원대군이 1445년(세종27) 1월 16일에 홍역으로 죽자 묘소 남쪽에 평원대군의 묘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주35을 두었는데, 그곳이 현재의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壽進洞)이다. 이 '수진궁'이라는 궁호(宮號)는 평원대군의 집이 있던 한성부 중부 수진방(壽進坊)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진방에도 수진궁이 있었다. 평원대군의 집이 수진방에 있었다는 근거는, 왕비(王妃)의 혼궁(魂宮)을 논의한 《세종실록》 1446년(세종28) 3월 25일자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주36

(전략) 평원대군의 저택은 당초 조성할 때에 정부(政府)에서 정한 척도로 지었는데, 사람들이 지나치게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비록 평원대군을 위하여 세웠지만, 그 후손되는 자가 또한 능히 지켜 낼 수가 없을 것이니, 지금 혼궁으로 삼으려 한다. 단, 의금부(義禁府)가 너무 가까워서 무릇 죄수를 신문할 때에는 반드시 소리가 서로 들리게 될 것이다. 반드시 이 집을 혼궁으로 하려면 의금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 혼궁을 건축해야 될 것이니, 그것을 의정부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략)

이상의 실록 기사들은 조선왕조 초기의 한성부 위치가 종래의 통설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원대군의 저택이 마련된 시기는 평원대군이 대군(大君)으로 책봉된 후 혼인하여 궁궐 밖에서 거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1438년(세종20) 무렵이다. 《세종실록》 1443년(세종25) 1월 23일자 기사에서 평원대군과 영흥대군(永興大君)주37의 집을 짓는 중이라는 내용이 보인다.주38

그림 [A2] - 조선초기 한성부 위치 추정 (15세기)

그림 [A2] - 조선초기 한성부 위치 추정 (15세기)

위 그림 [A2]는 실록 기록에 근거하여 평원대군의 저택, 즉 수진궁 근처에 있었던 조선 초기 한성부 청사의 위치를 추정한 것이다.

그림 [A2]에서 51번지, 53번지로 표시된 곳이 바로 수진궁이 있던 곳이며,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서도 이 위치에 수진궁이 기재되어 있다.주39 이것은 의금부(義禁府) 가까이에 평원대군의 저택이 있었다는 실록 기사로도 간접 증명된다. 만약 한성부가 그림 [A]의 이조와 호조 사이, 또는 그림 [A2]의 호조 위치에 있었다면 평원대군의 저택도 그 근처에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의금부와 너무 떨어져서 죄수 심문 소리가 들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성황당의 위치와 관련한 비합리성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주40

의금부 청사가 그림 [A2]에 표시된 위치에 국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 공산도 있으나, 의금부에 종루(鍾樓)의 경비를 맡긴 실록 기사주41와 당시 종루 인근 전옥서(典獄署)의 위치가 언급된 기사주42를 참작하면 의금부는 설치 초기부터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주43

그림 [A2]에서 한성부의 추정 위치는 남북 방향 도로에 면한 ①번일 가능성이 높지만, 육조거리에 가까운 ②번 방향 도로에 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 본, 한성부 남쪽에서 일어난 1426년(세종8) 2월의 화재에서 의금부와 종루에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생각해 보면 ③번일 수도 있으나, 그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참고로, 이 그림에는 당시 화재에서 소실된 운종가 북쪽 가로의 북변행랑(北邊行廊) 106칸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한성부는 원래 수진궁 근처에 있었는데, 평원대군에게 청사 영역을 침탈당한 시기(1443년 전후)와 예조 청사가 삼군부 터로 이전된 시기를 전후로 수진궁 인근에서 육조거리 지역으로 이전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한성부가 조선 초기부터 육조거리에 있었다고 여러 문헌에 기록된 것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아마도 한두 문헌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 별다른 검증 없이 답습되고 인용된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한성부 청사의 시대별 이전 내역을 살펴보자.

그림 [A3] - 16세기 이후 한성부 청사 위치 변동

그림 [A3] - 16세기 이후 한성부 청사 위치 변동

위 그림 [A3]은 16세기 이후의 청사 이전 내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각 표시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警(경) : 1909년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청사주44
機(기) :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청사,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宮(궁) : 최초 궁내부(宮內府) 청사, 예전 승정원(承政院) 권역
濟(제) : 1885년 설립 제중원(濟衆院)주45 최초 위치, 재동(齋洞) 35번지
外(외) : 재동(齋洞) 외아문(外衙門), 즉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청사
安(安) : 안동별궁(安洞別宮)주46
生(생) : 조선 초기 제생원(濟生院)주47 터, 계동(桂洞) 142-2번지
景(경) : 경우궁(景祐宮)주48 터, 계동 146번지
桂(계) : 계동궁(桂洞宮)주49 이재원(李載元) 집터
雲(운) : 운현궁(雲峴宮)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저택
朴(박) : 박영효(朴泳孝) 집터
李(이) : 의친왕(義親王) 사저
郵(우) : 우정총국(郵政總局),주50 1884년 12월 9일 갑신정변(甲申政變) 현장
育(육) : 육영공원(育英公院),주51 수송동 82번지 일대
法(법) : 의금부(義禁府),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평리원(平理院), 대심원(大審院),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 등의 청사주52
電(전) : 1898년 설립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주53 사옥
靑(청) :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주54 회관
東(동) :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주55 사옥
農(농) : 1907년 12월 이후 농상공부(農商工部) 청사, 동현(銅峴) 대동구락부(大東俱樂部)주56
皇(황) : 원구단(圓丘壇) 황궁우(皇穹宇)
中(중)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중추원(中樞院)주57 청사
高(고) : 1930년 이후 고등법원((高等法院)주58
度(탁) : 1908년 2월 이후 탁지부(度支部) 청사, 정동(貞洞) 내각(內閣) 신건축 청사주59
기타 : 군기시 아래 삼각형은 현재의 서울특별시청 앞 서울광장이며, 태평로(太平路)는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에 개설되었다. 분홍색 국명(國名)은 구한말 각국 영사관이다.

수진궁 인근에 있던 한성부 청사가 1443년(세종25)을 전후에 육조거리로 이전하여 ㉠ 자리에 위치하였고, 이 상황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계속된다. 1865년(고종2)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예조 청사 자리에 삼군부가 복설되고 예조는 한성부 자리로 이전하였다.주60 예조에 청사 자리를 내준 한성부는 경희궁(慶熙宮) 앞의 훈국신영(訓局新營), 즉 ㉡의 훈련도감(訓練都監) 자리로 이전하였다.주61

이로부터 약 30년 가량 훈국신영 자리에 있던 한성부는 1895년에 5월 1일에 군기시(軍器寺)가 있던 현재의 서울특별시청 자리로 이전하게 된다. 신설된 경무청(警務廳)에 예전 훈국신영 청사 자리를 내주고 ㉢ 위치로 재차 이전하게 된 것이다.주62 이곳에서 약 6년간 존속하던 한성부는 1901년 5월 22일에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의 경비를 위해 서울로 상경시킨 '평양(平壤) 제2대대'에 자리를 내주고 다시 전동(典洞) 신정가(新定家)로 이전한다.주63 전동 신정가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대략 ㉣ 근방으로 추정한다.주64

이듬해 1902년 4월에 평양 제2대대를 위해 다시 청사를 내주고 예전의 경기감영(京畿監營) 빈관(賓館) ㉤ 자리로 이전하는데,주65 1901년에 군기시 자리에 주둔하였던 평양 제2대대가 전동의 신정가로 다시 이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08년 9월에 법부(法部) 청사, 즉 예전에 형조(刑曹)가 있던 ㉥ 자리로 이전하였다가주66 1910년 3월에 ㉦의 예전 이조(吏曹) 청사 자리로 이전하는 것으로 한성부 청사 이전(移轉) 역사의 마지막을 기록하였다.주67

이상으로 한성부 청사의 시대별 이전 내역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앞의 정황 증거들을 근거로 한성부가 육조거리에 있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다음과 같이 조선 초기의 육조거리 관청 배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림 [B]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그림 [B]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위 그림 [B]는 한성부 자리에 예조가 있는 모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육조거리 관청 배치도이나,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조 서열대로 관청을 배치한 것에 맞지 않고, 고예조계(古禮曹契)의 추정 위치와도 어긋난다.

그림 [C]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그림 [C]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위 그림 [C]는 육조 서열대로 관청 순서를 배치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동쪽이 상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호예병형공의 순서대로 동편에 이조, 호조, 예조를, 서편에 병조, 형조, 공조를 배치했을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고예조계라는 지명 유래가 어느 정도는 들어맞게 된다.

관청 서열대로 배치하였으나, 실제 관청의 영역은 호조 청사가 호조, 예조의 공간으로 표시된 부분을 모두 차지하고 예조는 그림 [A]처럼 징청방으로 표시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조선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기점이 된 1952년(선조25)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관청 청사들이 완전 손실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가 시일을 두고 복구되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자료를 가지고 조선 개국 초기의 각 관청별 구역(넓이)나 청사(건물) 배치를 정확하게 추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주68 따라서 각 청사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는 선에서 각 그림 [A], [B], {C]와 아래 그림 [D]를 열람하기 바란다.

그림 [D]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그림 [D]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위 그림 [D]는 1418년 12월 이전의 관청 서열에 따라 각 관청을 배치해 본 조선왕조 개국 초창기의 육조거리 모습이다. 조선 초기에는 육조 관청의 서열이 고려(高麗)의 제도를 답습하여 이조, 병조, 호조, 형조, 예조, 공조였으나, 1418년(태종18) 12월 5일부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순서로 개편되었다.주69

그런데, 문관(文官)을 대표하는 의정부가 육조거리 동편의 제일 상단에 위치하고, 무관(武官)을 대표하는 삼군부가 육조거리 서편의 제일 상단에 위치한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육조거리 순서에 따라 동쪽 먼저 채우고 나머지 관청을 서쪽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그림 [C]처럼 문관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를 동편 차상단에 놓고, 그 다음 서열로서 무관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를 서편 차상단에, 그 다음 서열인 호조를 이조 아래에, 그 다음 형조를 병조 아래에 놓는 식으로,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하나씩 배치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치해도 당시 이병호형예공조(吏兵戶刑禮工) 육조 관청의 서열을 준수한 것이 되며, 동편에 이조, 호조, 예조가, 서편에 병조, 형조, 공조가 있게 되므로, 1418년의 육조 서열 개편에도 불구하고 관청의 청사를 교환 이전할 필요가 없게 된다. 동편을 우선 채우고 나머지를 서편에 배치한 것으로 이론을 정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의 관청 배치는 한성부가 수진궁 인근에 있었던 것을 가정한, 예조 청사가 고예조계로 추정된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는 상태의, 그림 [A]와 그림 [C]의 절충 형태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그림 [E]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그림 [E] - 조선초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5세기)

위 그림 [E]가 그림 [A]와 그림 [B]를 절충한 것이다.

그림 [D] 또는 그림 [E] 형태가 1395년(태조4)에서 1413년(태종13) 사이의 육조거리 조성 초창기 모습이었고, 1418년(태종18) 12월에 육조 서열이 재편되면서 그림 [E] 형태로 정착되었다가, 한성부 청사가 평원대군의 저택 신축을 피해 육조거리에 진입하는 1443년(세종25)을 전후로 그림 [A]와 같이 재편되었을 것으로 조선왕조 전기 중 15세기 중반 이전의 육조거리 관청 배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가정을 하나 더 해보면, 의정부 바로 아래에 예빈시(禮賓寺)가 있었던 것처럼, 그림 [E]의 삼군부 아래에 표시된 위치에 사헌부 청사가 존재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사헌부 아래의 병조, 형조, 공조가 육조거리 동편의 이조, 호조, 예조와 동일한 규모로 청사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좌우 균형이 맞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체제가 육조 서열 재편 또는 한성부의 육조거리 진입, 삼군부 폐지, 예조의 삼군부 이전, 중추부 청사 할당, 임진왜란 발발 등을 기점으로 변형되어 현재 알려진 곳에 사헌부 청사가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가능성이 매우 낮다. 고종 초년에 이전 예조 자리에 복설된 삼군부 청사 본청 건물군은 중앙의 총무당(總武)을 중심으로 좌우에 덕의당(德義堂), 청헌당(淸憲堂)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세 건물은 육조거리에서 총무당을 바라봤을 때 삼군부 영역과 이웃 중추부 영역을 모두 포함한 대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사헌부가 삼군부 바로 아래에 국초부터 존재했다면 삼군부 본청 건물군이 중추부를 제외한 삼군부 영역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주70 즉, 조선 초기의 삼군부 터에 예조가 진입하면서 삼군부의 후신인 중추원-중추부가 삼군부 아래의 한정된 공간으로 밀려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림 [F] - 조선중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8세기)

그림 [F] - 조선중기 육조거리 관청 배치 (18세기)

위 그림 [F]는 15세기 중반 이후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육조거리 배치도이다. 그림 [나]에서 묘사된 형태로서, 조선 중기와 후기를 포괄하는 가장 기본적인 육조거리 관청 배치도라라고 할 수 있다. 광화문 광장의 육조거리 축소모형이나 설명도 조선시대 대부분 기간에 해당하는 그림 [E] 형태의 배치도를 기준으로 할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인 15세기 중반 이전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삼군부가 1401년(태종1) 7월에 승정원과 통합되어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면서 폐지되고 이후 여러 차례의 개편을 거치다가주71 1432년(세종14) 3월에 다시주72 중추원이 되고주73 1466년(세조12) 1월 15일에 최종적으로 중추부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예조가 삼군부 자리로 옮겨가고 중추부가 예조 남쪽으로 밀려난 것이다. 예조가 삼군부 청사로 이전된 시기는 예조의 낭청(郞廳) 건물에 관한 1432년(세종14) 7월 26일자 《세종실록》 기사 내용을 감안하면 1432년 이전이다.

문헌에 따르면 삼군부를 의정부와 대등한 관청으로 설정하고 의정부 청사 맞은편에 삼군부 청사를 같은 규모로 세운 것은 정도전(鄭道傳)이었다고 하며, 정도전이 1398년(태조14) 8월 26일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몰락(사망)한 후에 삼군부의 위상이 격하되면서 예조가 삼군부 청사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주74 예조가 외교 사절을 맞이하고 과거 시험을 설행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다른 관청에 비해 규모가 있고 너른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주75

육조거리 실측평면도와 그림 [2], 그림 [3], 그림 [4] 등의 여러 고지도에 표시된 골목길 형태를 참작해 볼 때 그림 [F]에서 '호조A'로 표시된 구역까지 호조 청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림에서는 편의상 호조A 구역을 제외한 것으로 호조 청사 영역을 설정하였다.

이상으로 조선 초기와 중기 육조거리 배치에 관해 간단히 점검해 보았다.


ps. 다음 [하편]에서는 조선 후기, 고종 연간의 경복궁 중건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의 육조거리의 변천 내용에 대한 고찰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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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1) 해태는 상상의 동물이다. 해태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해태의 원래 위치가 사헌부(司憲府) 관청 앞이라는 경우가 일부 있으나, 구한말에 촬영된 사진 자료를 보면 광화문 앞의 월대(月臺)가 끝나는 부분, 즉 의정부(議政府)와 예조(禮曹) 또는 의정부와 삼군부(三軍府) 청사의 중심부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달리,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조선 전기에는 사헌부 앞에 해태가 있었거나 사헌부 청사의 위치가 월대에 근접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사헌부의 상징이 해태(해치)이기 때문에, 또는 사헌부 관원의 흉배(胸背) 문양이 해태(해치)이기 때문에 빗어진 설명 착오일 것이다.

2) 육조(六曹)는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 조선신대 중앙정부의 핵심 6개 관청이다. 육조 각 관청의 장관은 정2품 판서(判書), 차관은 종2품 참판(參判)이다.

3) 광화문 광장 조성에 관계된 정부 관청은 지방 정부인 서울특별시청, 중앙 정부 관청인 문화관광부의 외청 문화재청이다. 공사 주관 관청은 서울특별시청, 계획 및 협의 관청은 문화재청인 것으로 파악된다.

4) 관아거리[官衙街]라는 호칭은 육조 체계가 아문(衙門) 체계로 개편된 구한말-대한제국 시기에 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1894년(고종31) 7월에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일환으로 이조, 호조, 예조 등이 내부(內部), 탁지부(度支部), 학부(學部) 등으로 개편되어 더 이상 육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례적으로 계속 육조거리로 호칭되었을 것이다.

5) 그림 [가], [나]는 조선시대 중기(17-18세기)의 육조거리 모습으로, 사이버 조선왕조(www.1392.org) 사이트의 육조거리 자료 구축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가]는 초기 판본이며, [나]는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 등록된 최근 판본이다.

6)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舊조선총독부, 중앙청 건물에 있던 시기에 전시되었던 경복궁 복원모형은 육조거리 부분이 그림 [나]에 가까우나, 2009년 현재는 상설 전시가 되지 않아 일반인 관람이 불가능하므로 정확한 분류를 하기 어렵다. 입수 가능한 사진으로는 호조 아래에 민가가 들어서 있으나, 기로소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7) 그림 [나]에 해당하는 학계 논문은 다음과 같다.
홍성구. "조선시대 한양의 육조거리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민경태, "조선시대 한양의 가로공간 구성과 경관 특성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건축공학 석사학위논문, 1994.
위 두 논문의 수록 내용을 비교한 결과, 아래 논문의 수록 그림 3-11 '육조거리 관아의 배치'는 위 논문의 수록 그림 4-7 '조선조 한양의 육조거리 및 주변배치 복원도'를 기본 자료로 삼아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8) 주석 예정.

9) 기념비전은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보령 60세를 바라보는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40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이다. 고종의 기로소 입소(入所) 일자는 1902년(광무6/고종39) 5월 4일, 건립 시기는 1903년(광무7/고종40) 9월 2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적 제171호이며, 사적명은 '고종즉위40년침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 사적 지정일은 1969년 7월 18일이다.

10)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구역은 크게 5개 부(部)로 나눠져 있었다. 부가 곧 현대의 구(區)에 상당하고, 부 아래에 있던 방(坊)은 현재의 동(洞)과 비슷한 단위 행정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방 아래에는 계(契)가 있었다.

11) 한성부(漢城府) 행정구역 중 5부(五部)는 청사를 가지고 있었다. 방(坊) 단위에까지 현재의 동사무소와 유사한 청사가 마련되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으나,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만약 협소하게나마 방(坊) 단위 청사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방 단위 지명이 표시된 곳이 바로 청사 위치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지도의 표기 여백 문제로 인해 적당한 곳에 방 단위 지명이 표시된 것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12) 『만기요람(萬機要覽)』은 1808년(순조8)에 간행되었다.

1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1530년(중종25)에 간행되었으나, 본문에서 인용한 판본은 1969-1970년 사이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행한 국역판이다. 특히 조선 후기인 고종(高宗) 초년에 간행된 저자 미상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의 경도(京都)편과 한성부(漢城府)편을 부록 형식으로 '비고편'이라 표제하여 수록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인용 내용이 『만기요람(萬機要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4) 고예조계(古禮曹契)는 실록(實錄) 등에서 고예조동(古禮曹洞)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풀어쓰면 '옛날 예조동'이다.

1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 경도하(京都下) 문직공서(文職公署).

16) 육조거리 실측평면도 자료의 정식 표제는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건축학전공 전봉희(田鳳熙) 교수팀이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지하문서고에서 발견하였으며, 2003년 8월 31일자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되었다. 세로 68cm×100cm 크기이며, 축척은 1:600이다. 세부 모습은 그림 [7]을 참조.

17) 이하 수록된 그림 [A]부터 그림 [G]까지의 시기별 '육조거리 관청 배치 추정도'는 1907년경에 제작된 육조거리 실측평면도인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에 의거하여 제작되었으므로 각 관청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선에서 열람해야 한다. 관청별 각 건물의 세부 배치는 단순 참고하는 선에서 그친다.

18)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관부(官府).

19) 『태조실록』 권8, 태조4년(1395년) 을해 9월 29일 경신조 "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 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以限晨夕警中嚴 門南左右分列議政府三軍府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20) 궁성(宮城)은 궁궐(宮闕)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성벽(담장)이다. 도읍지 한성부 외곽의 도성(都城)과 구분된다. 경복궁 궁성의 축성 시기는 1398년(태조7)이며, 도성 축조는 1395년(태조4) 윤9월에 부지를 정해 1396년 1월과 9월에 1차 완료하였다.

21) 『세종실록』 편찬 당시에 문종-단종 시대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 기록하지 않고 『태조실록』의 수록례를 별다른 가감 없이 그대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단, 『태조실록』의 '삼군부(三軍府)'가 『세종실록』에서는 '중추원(中樞院)'으로 기록된 점은 당시의 상황을 일정 부분 반영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중추원을 개편하여 출범하였던 삼군부는 여러 차례 직제 개편을 거치면서 1432(세종14) 3월에 다시 중추원으로 개칭 환원되었다.

22)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京都) 한성부(漢城府) "宮城 [周回一千八百十三步]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 [門樓二層 樓上懸鍾皷以限晨夕 警中嚴 門南左右分列議政府中樞院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23) 『세종실록』 권34, 세종8년(1426년) 병오 10월 26일 병술조 "命集賢殿修撰 定景福宮各門及橋名 勤政殿前第二門曰弘禮 第三門曰光化 勤政殿東廊夾門曰日華 西曰月華 宮城東曰建春 西曰迎秋 勤政門前石橋曰永濟".
광화문의 처음 명칭은 '정문(正門)'이었다. 이때 '광화(光化)'로 명명된다.

24) 한성부 청사가 육조거리 지역으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1443년 전후)를 감안하면, 광화문 앞 관청 전경에 대한 묘사는 1413년 실록 완성시에 이미 기록되었고 1442년 9월 개수시에 궁문 명칭만 추가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한성부가 육조거리로 진입한 후에 첨삭한 것이라면 '한성부'를 기입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성부 청사가 처음부터 육조거리 지역에 있지 않았다는 것과 육조거리 진입 시기에 대한 추정은 뒤에서 다루고 있다.

25) 『정종실록』 권4, 정종2년(1400년) 경진 4월 6일 신축조 "改都評議使司爲議政府 改中樞院爲三軍府".

26) 『태조실록』 권14, 태조7년(1398년) 무인 윤5월 4일 기묘조 "幸興天寺 遂如都評議使司新造廳 觀之".

27) 1394년(태조3) 10월 25일에 한양부(漢陽府)로 천도(遷都)하여 이듬해 1395년(태조4) 6월 6일에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도읍지 조성에 들어갔으나, 1399년(정종1) 3월 13일에 개성부(開城府)로 환도(還都)하였다가 다시 한성부로 정도(定都)한 것이 1404년(태종4) 10월 6일이다. 개성부 환도 시기에는 각 관청의 청사 건설 사업이 중단 또는 지연되었을 것이다. 정종이 환도훈 후에 개성에 종묘(宗廟)를 옮겨 지으려다 한성에 종묘와 궁실(宮室)이 모두 있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그 시도가 좌절된 것을 감안하면 한성부 소재한 각 관청의 기능도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었을 수 있다(『정종실록』 권1, 정종1년 기묘 6월 27일 병인도 4번째 기사).

28) 『태조실록』 권13, 태조7년(1398년) 무인 4월 26일 임인조 2번째 기사에 정도전(鄭道傳)의 「팔경시(八景詩)」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세 번째가 도성 관청들이 늘어선 것을 묘사한 '열서성공(列署星拱)'이다("三曰列署星拱: 列署岧嶢相向 有如星拱北辰 月曉官街如水 鳴珂不動纖塵"). 따라서 1398년 중반 무렵에 이미 주요 관청들이 한 지역에 집중 건설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열서성공'은 별들이 북극성을 도는 것처럼 관청들이 늘어서 있다는 뜻이다.

29) 『태조실록』 권11, 태조6년(1397년) 정축 6월 1일 신사조 "命營三軍府".

30) 육조거리 조성 시기를 추정과 관련한 『태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궁성(宮城) 묘사 및 도평의사사 신축 부분은 다음 논문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다.
김동욱. "조선초기 경복궁의 공간구성과 6조대로." 『건축역사연구』 제17권 4호 통권59 (2008.08): 25-42.
위 논문에서는 본격적인 육조 관청들의 청사 건설 시기를 태종 연간(태종7년인 1407년 전후)으로 추정하고 있다.

31) 『태종실록』 권11, 태종6년(1406년) 병술 6월 5일 계해조 "禮曹啓 新都城隍之神 乞就舊基立堂以祭 從之 漢陽府城隍堂舊基也".

32) 『세종실록』 권31, 세종8년(1426년) 병오 2월 15일 기묘조 "是日午時 西北風大起 漢城府 南住仁順府奴長龍戶始火 延燒京市署及北邊行廊一百十六間 中部人家一千六百三十戶 南部三百五十戶 東部一百九十戶 (中略) 中宮聞火發 傳敎留都大臣與百官曰 火氣已發 錢穀廨舍 如不可救 宗廟與昌德宮 須盡力救之".

33) 『세종실록』 권111, 세종28년(1446년) 병인 3월 7일 갑술조 "時諸大君第宅踰制 撤漢城府起平原大君第窮極壯麗 又撤安國坊民家將起永膺大君第 營繕之費不可勝紀".

34) 평원대군(平原大君)은 세종의 적출(嫡出) 7자(子)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소생이며, 자(字)는 진지(珍之). 호(號) 근행당(謹行堂), 본명은 이임(李琳). 시호는 정헌(定憲), 생몰은 1427년(세종9)-1445년(세종27)이다. 1434년(세종16)에 평원대군으로 책봉되고 1438년(세종20) 4월에 홍이용(洪利用)의 딸과 혼인하였다. 처음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35)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위해 수진궁(壽進宮)을 둔 것이 아니라, 평원대군의 저택에서 유래된 수진궁(壽進宮)이 후대에 여러 종실의 제향을 전당하게 됨에 따라 평원대군 묘소 앞의 건물이 수진궁으로 불려지게 된 것일 수 있다.

36) 『세종실록』 권111, 세종28년(1446년) 병인 3월 25일 임진조 "平原第 當初造成時 以政府所定尺度而作之 人有言過於壯麗 雖立平原後 爲之後者 亦未能持守 今欲以爲魂宮 但 義禁府逼近 凡訊囚時 聲必相聞 必欲以此第爲之 則移義禁府於他所 否則可於他處營之 其與議政府同議以啓".

37) 영흥대군(永興大君)은 세종의 적출(嫡出) 8자(子)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소생이며, 자(字)는 명지(明之). 호(號) 서곡(西谷), 본명은 이염(李琰). 시호는 경효(敬孝), 생몰은 1434년(세종16)-1467년(세조13)이다. 1441년(세종23)에 영흥대군으로 책봉되고 1443년(세종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세종29)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38) 『세종실록』 권99, 세종25년(1443년) 계해 1월 23일 기묘조 "平原永興兩大君之第 今方營造 而功未告訖 又興此役 臣等恐民力困矣 乞停是擧".

39) 1483년(성종14)에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아내 홍씨(洪氏) 죽자, 평원대군의 후사(後嗣)로 들어간 제안대군(齊安大君)이 계속 평원대군의 저택에 거주하였다. 제안대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수진궁은 평원대군보다는 제안대군의 저택으로도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대에 봉작(封爵)하기 전이나 출합(出閤)하기 전에 죽은 대군(大君), 왕자(王子), 공주(公主), 옹주(翁主) 등을 제사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각종 문헌이나 지도 표기를 보건대 수진궁 소재지는 조선 초기, 중기, 후기를 통틀어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0)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가 1977년부터 1996년까지 20년에 걸쳐 발간한 『서울600년사(六百年史)』에 기초하여 제작한 '서울육백년사(seoul600.visitseoul.net)' 시이트의 '한성부(漢城府)의 설치' 및 '한성부지(漢城府址)' 항목에도 성황당과 평원대군 저택 부분이 언급되어 있으나, 한성부 청사가 육조거리 이외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데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41) 『세종실록』 권31, 세종8년(1426년) 병오 3월 3일 정유조 3번째 기사.

42) 『세종실록』 권31, 세종8년(1426년) 병오 2월 16일 경진조 2번째 기사.

43)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 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편 경도(京都)의 의금부(義禁府) 항목과 『임하필기(林下筆記)』 권13,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각사(各司) 항목에 '세상에 전하기를, 세조조(世祖朝)에 감찰 정보(鄭保)의 재산을 몰수한 후에 그의 집으로 관청의 정아(正衙) 대청을 삼았다.'는 식의 기록이 있다. 감찰은 사헌부의 정6품 관직이다. 정보의 집이 넓었더라도 일개 관원의 저택이 청사로 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필자는 그 가능성을 낮게 본다. 정보가 죄를 받고 집이 적몰(籍沒)된 것은 1457년(세조3)년 3월 무렵이며, 당시 실록 기사에는 전소윤(前少尹) 윤사흔(尹士昕)에게 적몰된 정보의 집을 하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 것인지, 원래 의금부 청사와 감찰 정보의 집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청사를 옮긴 것인지 건물을 옮긴 것인지, 의금부 청사를 옮긴 것이라면 최초의 의금부 청사는 어디에 있었는지, 윤사흔이 하사받은 집이 나중에 의금부 청사가 된 것인지 등은 불분명하다. 의금부 청사가 1457년 이후에 정보의 적몰 집터로 옮긴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수진궁(壽進宮)의 위치를 감안하면 이전 전의 청사 터와 이전 후의 청사 터가 인접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보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이며, 1699년(숙종25)에 복관(復官)되어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1906년(광무10) 1월 23일에는 자헌대부 내부대신이 추증되었다.

44) 주석 예정. (이하 59번까지 같음)

59) 주석 예정. (이상 44번부터 같음)

60) 『고종실록』 권2, 고종2년(1865년) 을축 5월 26일 경신 "禮曹則移設於漢城府 漢城府則移設於訓局新營".

61) 한성부 청사의 훈국신영 이전은 1865년(고종2) 5월 26일에 국왕의 재가를 받았으나, 실제 이전이 완료된 것은 1868년 4월 하순이다. 『승정원일기』 고종5년(1868년) 무진 4월 24일 임인 기사에 한성부를 훈국신영으로 옮긴다는 한성부의 어전(御前) 보고와 이를 윤허하는 전교가 있다. 26-28일경에 이전하였으며, 28일에는 예조가 한성부로 이전하였다.

62) 구한말 『관보(官報)』 제29호, 개국504년(1895년) 5월 4일자 "官廳事項 警務廳은今月一日에漢城府로移接하고漢城府에同日에前"軍器寺로移接함". 여기에 더하여 『내첩존안(來牒存案)』 제1책에 내부(內部)에서 내각(內閣)으로 보낸 1895년 5월 2일자 내무내첩(內部來牒) 제11호에 경무청이 이달(5월) 1일에 한성부로 이전하고 같은 날 한성부가 전(前) 군기시로 이전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63) 『관보』 제1889호, 광무5년(1901년) 5월 17일자 "詔曰漢城府與漢城裁辦所移接於典洞新定家徵上平壤二大隊留駐處所移定於漢城府 光武五年五月十五日 議政府贊政度支部大臣 閔丙奭".
『승정원일기』 고종38년(1901년) 3월 27일 계사(양력 5월 15일) 기사 "한성부와 한성재판소를 전동(典洞) 신정가(新定家)로 이접(移接)하고, 징상평양제2대대(徵上平壤第二大隊)가 머물 장소를 한성부로 옮겨 정하라.".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5년(1901년) 5월 25일자 "平隊入漢 三昨日에平壤鎭衞隊兵丁四百名이上來하야前漢城府로入處하얏더라".

64) 『서울600년사』 등의 자료에서는 그림 [A2]의 ① 지역, 즉 의금부 청사 자리에 있는 1987년 신축 제일은행 본점 건물의 위쪽 인근으로 한성부 이전 전동 신정가사 위치를 추정하고 있다. 다음의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도 신정가사 위치를 추정하는데 참고할 수 있다.
『황성신문』 광무5년(1901년) 5월 25일자 "新舍修費 漢城府報告를據한則本府을典洞新定家舍로移接하는데諸員에居處할房舍及隷屬의住在할廳廨에舖寘變通과本府所管漢城公立小學校도新定家舍中一所를劃分而學堂六間은不容不新建故로諸般費額을並以籌摘한則四千七百六十九元七十四錢이라하얏더라".

65) 『관보』 제2177호, 광무6년(1902년) 4월 18일자 "詔曰漢城府與漢城裁判所以前畿營賓館通用仍住而徵上平壤第二大隊留駐處所則分定於該府內 光武六年四月十六日 議政府贊政 尹定求".

66) 『관보』 제4169호, 융희2년(1908년) 9월 5일자 "內部告示第三三號漢城府廳은本月五日로부터京城西署積善坊(光化門前舊法部)로移轉홈 隆熙二年九月四日 內部大臣 宋秉畯".

67) 『관보』 제4619호, 융희4년(1910년) 3월 5일자 "內部告示第二三號漢城府廳은三月五日로붓터京城中署澄淸坊(舊統監府法務院)으로移轉홈 隆熙四年三月三日 內部大臣 朴齊純".
『황성신문』 융희4년(1910년) 3월 2일자 "漢府移接期 漢城府를中樞院內前統監府法務院으로移接키爲하야修理한라함은已報하얏거니와該修理의工役이竣工됨으로來五日에移接하기로決定하얐다더라".

68)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육조거리 관청들은 다시 복구되었으나, 원상태를 끝내 회복하지 못한 건물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곳이 많았기 때문에 고종 초년에 경복궁을 중건한 직후 대대적인 정비를 하였다. 경복궁 중건은 1865년(고종2) 4월 13일부터 1868년(고종5) 7월 2일까지이며, 의정부 중건은 1865년(고종2) 2월 9일에 하명되어 동년 10월 1일에 끝났다. 경복궁 중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868년 9월에 중추부(中樞府), 사헌부(司憲府), 육조(六曹) 등의 아문(衙門) 청사를 중건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각 내용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의정부 중건 하명(下命) : 『고종실록』 권2, 고종2년(1865) 을축 2월 9일 을해조 2번째 기사.
의정부 중건 완료 : 『고종실록』 권2, 고종2년 을축 10월 1일 임진조 3번째 기사,
중추부, 사헌부, 육조 아문 중건 : 『고종실록』 권5, 고종5년(1868) 무진 9월 7일 신사조 1번째 기사.

69) 세종실록』 권2, 세종즉위년(1418년) 무술 12월 5일 경진조 2번째 기사.

70) 최초의 청사 건축 이후 여러 차례 중수, 중건을 거치면서 각 건물의 위치가 이동했을 수 있지만, 각 관청의 당상대청(堂上大廳) 건물은 육중한 기단(基壇)을 가지고 있었고 그 상징성이 적지 않기 때문에 위치 자체는 불변이었을 것으로 본다. 삼군부 본청 건물군이 한쪽에 치우쳐 마련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으로 추정한다.

71) 삼군부가 승추부로 개편된 후, 그 기능은 1403년(태종3)년에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1409년(태종9)에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와 의흥부(義興府), 1418년(태종18)의 의건부진무소(義建府鎭撫所) 등으로 이어졌고 1432년(세종14) 3월에 중추원이 되었다가 1466년(세조12) 1월에 중추부(中樞府)로 개칭되었다. 직무가 없는 당상관(堂上官)을 우대하기 위한 산직(散職) 관청이 되었으며, 본래의 삼군부 업무 중 하나인 궁궐 숙위(宿衛)는 1457년(세조3)년 4월에 신설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로 계승되어 중추원이 중추부로 개칭될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가 되었다.

72) 1400년(정종2) 4월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할 때 중추원이 삼군부로 개편되었다.『정종실록』 권4, 정종2년(1400년) 경진 4월 6일 신축조 "改都評議使司爲議政府 改中樞院爲三軍府".

73) 『세종실록』 권57, 세종14년(1432년) 임자 7월 26일 임오조 "許稠語臣云 中樞院卽古三軍府也".

7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 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편 경도(京都) 예조(禮曹) 항목.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0. "今禮曹是古三軍府 鄭三峯 掌軍國重事 見議政府所搆之制 乃曰 政府軍府一體 遂依其制而搆之 屹然東西相對 其棟宇宏壯 非他官府之比 其後革三軍府 而置中樞院 不任軍務 以禮曹掌五禮 且接異國之使 其任重大 以其府爲禮曹 而中樞院反寓曹之南廊".
『임하필기』 권13,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각사(各司) 항목.
『임하필기』 권21, 문헌지장편 삼군부지론(三軍府之論) 항목.

75) 문과(文科) 합격자를 결정하는 복시(覆試)를 예로 들면 예조(禮曹)와 성균관(成均館)을 각 1소(所), 2소로 시험장을 나눠 시행한다. 이처럼 분소법(分所法)에 의해 과거 시험장을 나누는 것은 응시자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시험장 장소를 확보하고 시관(試官)과 상피(相避) 관계에 있는 응시자가 다른 시장에서 시험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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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6월에 '사이버 조선왕조(www.1392.org)'의 메인 화면 치장 및 왕실(王室) 가동을 위한 안내문 삽입 용도로 제작한 이미지 모음.

+ 국왕, 왕비, 세자, 세자빈, 공주(옹주), 상궁, 나인, 선비, 새색시, 당상관, 참상관, 참하관, 지방관(사또) 등 13명.

+ 작업 방식은 언제나 그러하듯 Dot Dokata.

ps. 육조거리 고증에 관한 글은 이달 안에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답니다. 큰 기대는 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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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 한명숙 장의위원장 조사(弔辭) MP3

+ 영결식장 낭독 시간 : 11분 40초
+ 조사 작성자 : 윤태영(尹太瀛) 前청와대대변인
+ 언론사에 사전 배포된 조사 전문과 실제 낭독된 조사에 일부 차이가 있음 (낭독본 기준으로 수정)
+ 첨부용량 제한으로 인해 MP3 품질을 일부 저하시킴 (그래도 파일 용량이 9M에 달하므로 로딩 시간에 유의)


조사(弔辭).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홀로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5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길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험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천 5백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 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대통령님,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잔인한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님,
보이지 않습니까? 끊이지 않는 저 추모의 행렬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정성어린 마음을 대통령님께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님을 향해서 날리려고 들고 있는 노란 풍선을 보고 계십니까.
오열하며 슬퍼하고 있지 않습니까.
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우리 국민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소서.
대결로 치닫고 있는 남북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 꽃피우게 해 주소서.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 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홀로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대통령님,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故 노무현 前대통령 국민장 공동장의위원장 한명숙(韓明淑)

- 故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의 한명숙 前국무총리 조사 전문

평(評). 이것이 바로 '조사(弔辭)'다. (조사는 '칭송'이 기본이므로, 업적 내용의 수긍 여부는 논외)
노무현, 영결식, 조사,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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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 한승수 국무총리 조사(弔辭) MP3

+ 영결식장 낭독 시간 : 4분 52초


조사(弔辭).

오늘 우리는 노무현 前대통령님이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노무현 前대통령님과 마지막 이별하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애석하고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한없이 가슴이 무겁습니다.

故 노무현 前대통령님,
돌이켜보면 대통령님의 일생은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타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삶이었습니다.

빈농의 아들에서 인권변호사로, 민주투사에서 국회의원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참으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장학금을 받아 고등학교를 겨우 마칠 수밖에 없었던 힘든 가정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 이후,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일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 약하고 가난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늘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던 고인은 13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정치의 오랜 과제였던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낙선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러한 신념과 원칙을 지키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역간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던 노력은 고인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었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고되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노무현 前대통령님,

대통령께서는 취임사를 통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열어갈 것을 천명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재임기간동안 대통령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국민과 함께하는 서민대통령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더 이상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력은 용납될 수 없다'는 뜻을 끊임없이 피력하였습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께서 숱한 역경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이룩한 업적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노무현 前대통령님,

고인께서는 '대통령직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촌로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벗어버리고 우리 농업과 농촌, 그리고 환경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던 모습은 우리 국민에게 따뜻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오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우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당혹감과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前대통령님,

우리 국민은 평생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감내하며 입지전적 길을 걸어온 대통령님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고인께서는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라고 유언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많은 눈물이 먼 길 떠나시는 그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나 않을까 저어됩니다. 뒤에 남은 우리는 대통령님의 뜻을 되새기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다짐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고인께서 그토록 열망하시던 화합과 통합을 반드시 실현하고 세계 속에 품격 있는 선진일류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생전의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권양숙 여사님과 유가족 한 분 한 분에게도 거듭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큰 슬픔을 이겨내시고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온 국민과 더불어, 삼가 故 노무현 前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5월 29일,
故 노무현 前대통령 국민장 공동장의위원장 국무총리 한승수(韓昇洙)

- 故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의 한승수 국무총리 조사 전문

평(評). 무미건조한, '의례적(형식, 격식만 갖춤)'으로 작성되고 낭동된 조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표본.
노무현, 영결식, 조사, 한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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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前대통령, 2002년 대통령선거 CF - 편지 MP3

오늘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의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세상.

어느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어느 꿈은 아직 땀을 더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략)

- 제16대 대통령선거 기호2번 노무현 후보 TV CF  '편지' 中
노무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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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 | 2009/06/05 23:56 | 수정/삭제 | 쪽글 달기
연설 메일 보내주신점 감사드립니다(__)

황지성 | 2009/06/08 22:48 | 수정/삭제 | 쪽글 달기
hjs98036250@naver.com으로 보내주실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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