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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 객사(客舍) 진주관(真珠觀) 복원 문제에 집중했던 상편(링크)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삼척도호부 동헌(東軒)에 대한 내용이 계속됩니다.


삼척도호부 동헌 일대 지적도
7번 그림 - 삼척 동헌 일대 시대별 변천 지도


위 7번 그림은 동헌(東軒, 사또 공무 공간), 내아(內衙, 사또 생활 공간)를 비롯한 삼척도호부 관아 건물군의 배치를 추정한 것입니다.

[A]는 1916년 작성 지적도 위에 일제강점기 시기의 각 관공서 건물 부지를 표기한 것입니다. 14번지(14-1번지) 동헌은 당시 삼척군수 관사(官舍, 사택)로, 15번지 내아는 우체국(일제강점기 기관 명칭은 삼척우편국)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7번지 장관청(將官廳, 將廳) 자리는 상편에서 기술한 것처럼 헌병분대(憲兵分隊) 자리였습니다. 1919년에 경찰서로 개편되었으며, 1932년에 청사를 신축합니다.

동헌 왼쪽(서쪽)에는 1918년(?)부터 대구지방법원 삼척출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처음 설치된 곳은 동헌 부속 건물이 있던 14-2번지입니다. 이후 기존 부사(府司) 건물이 있던 곳으로 옮겨 개축되었는데, 부사는 지방 관아에서 일하던 향리(鄕吏), 즉 아전(衙前)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이 공무를 보던 공간이었습니다. 읍사(邑司)라고 해서 'O사'로 불렸기 때문에 지명에 따라 OO현에서는 현사(縣司), OO군에서는 군사(郡司), OO부에서는 삼척도호부처럼 부사, O주에서는 주사(州司)라고 하였습니다. 삼척출장소는 1930년경에 지도에 표기된 것과 같은 건물로 신축됩니다. 참고로 출장소 설치 이전에는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蔚珍支廳)에서 삼척군 지역의 법무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동헌과 부사 남쪽에는 작청(作廳), 군관청(軍官廳), 향청(鄕廳) 등의 삼척도호부 부속 관아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질청(秩廳, 人吏廳)이라고 하던 작청 지역(23-1번지)에는 삼척면사무소가 들어섰으며, 1933년에 신축되었습니다. 삼척면(三陟面)의 전신인 부내면(府內面)의 면사무소가 1910년에 군관청 자리에 처음 설치되었으므로, 넓게 보면 작청과 군관청 지역이 모두 훗날 읍사무소 경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읍사무소 부지는 작청 근처에 있던 보민청(補民廳), 진휼청(賑恤廳) 자리까지 포함합니다.


[B]는 국토지리정보원 공개 1975년 삼척 지도와 1916년 지적도를 겹친 것입니다. 분홍색 건물은 1975년 당시 군수 관사로 사용되던 건물, 초녹색은 우체국 건물, 보라색은 삼척등기소 건물입니다.

'관사'로 표기된 분홍색 건물이 관사(동헌) 건물이며, 그 아래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관사 부속 건물로 보이는데 어쩌면 동헌 내삼문 기능을 하던 행랑채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가능성 작음). 초록색 우체국 건물 가운데 남쪽 정사각형 건물(일제강점기 삼척우편국 신축 건물)은 1938년 측도된 삼척 지형도에도 보이는데, 정확한 신축 시기는 미확인입니다. 이 건물은 오십천로 확장 전인 1980년대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C]는 문화재청에서 공개한 삼척도호부 관아지 관련 자료에 수록된 1959년 지적도 표시 동헌, 내아 위치입니다. 현재 삼척시청을 필두로 한 삼척도호부 관아지(官衙址) 복원 관계 기관에서는 등기소 및 법원출장소가 있던 부사 터를 동헌 지역으로, 동헌이 있던 곳을 내아 자리로 추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는 삼척도호부 관아유적 발굴조사 보고서의 결론에 기반해 제작된 것입니다.


1916년 『삼척군지(三陟郡誌)』, 1955년 『삼척향토지(三陟鄕土誌)』, 1963년 『진주지(眞珠誌)』, 1988년 『삼척군지』 등에 수록된 동헌, 내아, 부사, 장관청, 작청 관련 내용을 각 한 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첨언하자면, 손쉽게 열람 가능한 조선시대,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삼척 읍지(邑誌)에는 관아 건물과 관련한 별다른 내용이 없는 편입니다. 아쉬운 부분이죠.

1) 동헌 칠분당(七分堂) : 1908년에 군청이 동헌 칠분당에서 객사 진주관으로 이전된 후, 군수 관사로 사용 [1979년 철거]
2) 내아(內衙) : 1908년에 우편국이 기존 향청에서 내아 자리로 이전 [일제강점기 삼척우편국 청사 신축]
3) 장관청(將官廳) : 순사주재소로 사용된 이래 1910년에 헌병분대로, 1919년에 경찰서로 개편 [1932년 경찰서 신축]
4) 부사(府司) : 일제강점기 대구지방법원 삼척출장소, 해방 후 삼척등기소 자리 [1930년 법원출장소 신축]
5) 작청(作廳) : 공립심상소학교 최초 설치 장소, 부내면 및 삼척면 면사무소 이전 위치 [1933년 면사무소 신축]

전술한 것처럼 삼척시 당국에서는 부사 터를 포함하는 13-3번지를 동헌으로, 본래 동헌(군사 관사)으로 사용되던 14번지를 내아 공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군수 관사로 사용되던 건물이 온돌 형태로 되어 있었고 1979년 관사 철거 당시 나왔던 상량문 기록에 해당 건물이 애초 내아로 건설되었던 점을 들어 14번지 중심 건물(발굴조사 Ⅲ-2구역 1호 건물지)을 '내아'로 확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서쪽 지역(발굴조사 Ⅲ-1구역 7호 건물지 중심)을 '동헌 터'로 간주하고 그곳에 삼척도호부 동헌을 복원할 예정입니다. [D]에 '발굴 건물지'로 표시한 부분입니다.

군수 관사 철거시 발견된 상량목(上樑木)에 1767년(영조43) 3월에 내아로 건물을 지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동헌을 군수 관사로 활용했다고 기록한 자료가 여럿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삼척군지』에서는 (건물 철거시에 나온 상량목 발견 이전에 이미) 1767년에 아사(衙舍, 동헌)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글에 따라 아사에 내아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해당 문단의 문맥을 보면 그렇습니다.


동헌 및 내아 관련 기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916년 『삼척군지』 행정(行政) 항목 기록
○ 1730년(영조06)에 (향사당 자리에서) 성내곡(城內谷)에 옛 아사(衙舍)를 옮겨 건립하였다.
○ 1766년(영조42) 2월에 관아를 옛터로 옮겼다.
○ 1908년(순종02), 군 청사를 객사로 옮겼다.
○ 1913년, 남문과 폐문루가 무너졌기 때문에 결국 부수어 철거하였다.

- 1916년 『삼척군지』 명승구적(名勝舊跡) 항목 기록
○ 1683년(숙종09)에 향사당(鄕射堂, 향서당의 오기로 추정)에 옮겨 세웠다.
○ 1731년(영조07)에 (원래 자리로?) 이건하였다.
○ 1767년(영조43)에 (1731년에 이건한 곳에) 다시 건립하였다.
○ 1908년(명치41)에 객사 즉 진주관(眞珠觀)에 군청을 이설(移設)하였다.

- 1955년 『삼척향토지』
○ 동헌은 내아(內衙)이니, 지금의 우체국 터이다.
○ (칠분당은) 동헌이니 매죽각(梅竹閣)이라고도 한다. 지금 군수의 사택이다.

- 1963년 『진주지』
○ 1685년(숙종11), 향서당(鄕序堂, 향청) 옛터로 이건하였다[移建于鄕序堂舊基].
○ 1730년(영조06), 동헌 옛 부지로 이건하고[移建于舊址] 내아 등 건물을 새로 지었다[新建內衙諸舍].
○ 1758년(영조34), 내아를 중수하였다[重修內衙]. 현재 우체국이다[今郵遞局].
○ 1769년(영조45), 폐문루(閉門樓, 동헌 정문)를 옛터로 옮겨 세웠다[移立舊基].
○ 1786년(정조10), 동헌을 중수하였다[重修東軒]. 현재 군수 관사이다[今郡守官舍].
○ 1908년(순종02), (군청을) 동헌 칠분당(七分堂)에서 객사 진주관(眞珠觀)으로 옮겼다.
○ 1908년(순종02), (우편국을 향청에서) 내아로 이설하였다[移設內衙].
○ 1911년, (폐문루가) 봄에 훼철되었다[春毁撤].


정리하면, 숙종 시대에 동헌을 옛날 향서당(향청) 터로 이전했다가 1730년 또는 1731년에 원래 동헌이 있던 자리로 환원했으며, 1766년에서 1767년 사이에 다시 고쳐 지었고 1769년에는 정문까지 원래 위치로 옮겨 지었습니다. 동헌을 환원한 때(1930년)와 정문을 옮겨 세운 시기(1769년)에 차이가 많은 것을 보면 본래 동헌 자리와 향서당 옛터가 인접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정문을 옮겨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죠.

1758년(영조34)에 내아를, 1786년(정조10)에 동헌을 중수한 기록이 있었던 것을 보면, 1767년에 내아로 처음 건축했을지 몰라도 이후 용도를 변경하여 동헌 건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1766년에서 1767년 사이에 동헌을 다시 지으면서 으레 동헌 옆에 있는 내아도 같이 건축했고, 1786년에 내아를 동헌으로 중수(개수)하면서 별도로 내아를 신축했거나 이미 있던 1758년 중수 건물로 내아를 환원했을 수 있습니다.

최초 용도가 어떠했든, 오래도록 동헌 건물로 사용되었으면 동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온돌을 갖춘 건물(내아)로 지어졌기에 1908년에 행정관청으로서의 용도가 사라진 후에 군사 관사로 활용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것은 추론에 불과하기에 아래에서 자료와 사진으로 보완점을 추가해 봅니다.


[D]는 동헌, 내아 건물의 추정 위치,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동원 복원 예정 지역), 동헌 외문루(外門樓, 폐문루) 추정 위치 등을 지적원도에 표기한 것입니다.

앞의 [C] 부분을 설명할 때 기술한 여러 문헌 기록과 분석 내용을 종합하면, 부사(府司) 지역 일부인 [D]의 '발굴건물지' 지점 건물의 용도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습니다.

ㄱ) 향서당 옛터, 즉 1685년부터 1730년까지 동헌 소재지
ㄴ) 동헌 옛터이자 1730년부터 1767년 또는 1786년까지 동헌으로 사용된 건물
ㄷ) 다른 시기 또는 기타 용도 건물

ㄱ)은 1730년 동헌 이건(移建) 이후 폐문루가 곧바로 옮겨 세워지지 않았던 것을 참작한 것입니다. 같은 경내로 이전했기에 폐문루(동헌 정문)을 굳이 옮기지 않고 정문에서 동헌까지 진입로를 보완하는 선에서 약 40년 동안 계속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ㄴ)은 1767년 상량문에서 내아로 신축된 군수 관사 건물의 위치를 감안한 것입니다. 지방 관아에서 동헌 대청과 내아는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내아 건물이 동헌으로 용도 변경되면서 역시 이웃한 곳(우체국 부지)에 내아가 조성됩니다. 그리고 ㄷ)처럼 이도 저도 아닐 수 있겠죠.

이 '발굴건물지' 포함 부지에는 1999년 11월까지 삼척등기소가 있었습니다. 1963년 『진주지』의 부사(府司) 항목에는 '정조 임자(1792년, 정조16)에 작청 옛터로 이건하였다[移建于作廳舊基]. 현재 등기소이다[今登記所].'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같은 기록의 인리청(人吏廳, 작청) 항목에는 '정조 임자년에 부사 옛터로 이건하였다[移建于府司舊基]'라고 되어 있어 이때 부사와 작청이 서로 부지를 교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호아문(都護衙門)' 편액에 걸려 있었을지 모를 2층 외문루 추정 위치에 주의합니다. 사실 도호아문 편액은 외문루보다는 내삼문에 걸려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외문루에 '포정문(布政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루 바깥쪽에는 포정문, 안쪽에는 도호아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고요. 외문루 위치 자체는 삼척읍성 남문 위치에서 동헌 대청(大廳)으로 진입하는 일직선 축선을 따라서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하늘색 사각형 지역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내아 건물 추정 위치와 걸친 곳에 2023년 현재 삼척우체국장 관사가 있습니다. 옛날 내아 공간이 여전히 우체국과 관련된 부지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척도호부 동헌(東軒) 및 내아(內衙) 관련 문서 자료
8번 자료 - 삼척도호부 동헌 및 내아 관련 자료


위 8번 자료는 1929년에 생산된 「강원도 고건축물」 보고 자료 및 1912년 간행 『우편국소요람(郵便局所要覽)』 중 삼척우체국(삼척우편국) 자료 일부입니다.

왼쪽 문서는 각 지역의 옛 건축물 내역을 보고하는 문서 가운데 하나로, 삼척군청에서 '동헌'을 고건축물로 중앙(조선총독부)에 보고한 것입니다. 삼척군 삼척면 성내리 14-1번지에 있던 건물의 명칭을 '동헌'으로, 규모를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기재하고 있으며(발굴 결과와 일치), '현재 군수 관사이다'고 현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관청에서 작성한 이와 같은 보고서는 나름대로 근거 조사를 거쳐 작성되었을 것이기에 어떤 건물이 동헌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근거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문서에 기재된 정면 5칸, 측면 2칸이 발굴조사 내용과 일치하기는 하지만, 이 문서의 기재 칸수는 건물 칸이 아니라 일본식 길이 단위으로 표기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1間=약1.82미터).


1908년에 군청이 동헌에서 객사 공간으로 이전한 지 불과 8년 후인 1916년에 편찬된 『삼척군지』에는 동헌이 군수 관사로 사용되고 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군 청사를 객사로 옮겼다', '객사 즉 진주관에 군청을 이설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단순 기록 누락일 수 있지만, 군청이 옮겨간 후에 동헌 건물이 곧바로 군수 관사로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일본군 수비대 또는 헌병대 병력이 각 지방 관청 건물을 접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삼척과 가까운 강릉에서도 동헌 칠사당(七事堂)에 일본군 강릉수비대가 주둔하자 군청이 작청에 소재한 사례가 있습니다. 삼척에서도 이처럼 일본 삼척수비대가 동헌 공간을 차지하자 군청이 객사로 옮겨갔을 수 있습니다. 원래 수비대는 1906년에 장관청을 사용하였는데, 1907년에 장관청이 순사주재소로 용도 전환됩니다. 이 즈음에 수비대가 동헌을 접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의병 진압을 전담하던 수비대가 철수하면서 동헌 공간이 남게 되자 비로소 군수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죠. 관련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아무튼 삼척 동헌이 관청(군청) 기능을 상실한 지 불과 21년 후, 충분한 증인이 남아 있었을 시절에 조사하고 작성한 기록물이 이렇게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향토 자료에 한두 줄 적힌 것이 아닌, 구체적인 문서입니다.

약 70년 동안 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내부 구조가 많이 변형되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23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유래를 두고 있던 건물이 1979년에 그냥 철거된 것이 참 아쉽습니다. 철거 당시 지역 언론이 촬영한 사진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군수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과 그 가족, 방문자들이 촬영한 사진도 제법 존재하고 있겠지요.


오른쪽 문서는 1912년 당시 삼척우편국 현황 기록입니다. 부지 면적 '592평'이 1916년 지적원도의 내아 필지(15번지) 면적과 일치합니다. 처음 우편국을 이설할 때는 내아를 구성하는 건물 가운데 일부(행랑채?)를 사용하다가 시간을 지나면서 점차 건물 규모를 확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아 본채까지 넓혀 사용했거나 별도로 전용 건물을 신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1907년 대한제국 시기 삼척 전경 사진
9번 사진 - 대한제국 시기 삼척 전경


위 9번 사진은 2019년에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약 130만 원에 달하는 기록적인 금액에 낙찰된 광무11년(1907) 삼척 전경 사진입니다. 웹에 남아 있는 이미지의 품질이 매우 좋지 않아서 정확한 개별 건물 형태가 확인되지 않는 점이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경매 제목에 기재된 '광무11년'은 아마도 사진 뒷면에 적힌 날짜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이유로 1907년이라 특정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미지를 확대한 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과 비교하면서 각 구조물 위치를 추정하면 동헌, 내아, 장관청 등의 건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어렴풋이 폐문루(동헌 외문루)로 보이는 건물도 보입니다.

ㄱ) 빨간색 화살표 : 폐문루(동헌 정문) 추정
ㄴ) 보라색 화살표 : 삼척읍성 남문 공진루 추정
ㄷ) 파란색 화살표 : 장관청 추정
ㄹ) 초록색 화살표 : 동헌 추정
ㅁ) 노란색 화살표 : 내아 추정

빨간 화살표 부분이 7번 그림의 [D]에서 '도호아문' 문루를 표기한 지점이자 문루 방향을 추정한 나름의 근거입니다. 무작위 속에서 어떻게든 패턴을 인식하려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자 한계라서 문루 비슷하게 보이는 것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추정임에 유의합니다.

이 삼척 전경 사진을 자세히 보면 객사 진주관의 외행랑(1912년 철거된 객사 대문의 동쪽 행랑채)으로 보이는 건물도 언뜻 보입니다. 1907년은 1912년 대문 철거 이전이므로 사진에 남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객사 대문 부분이 담장 아닌 행랑채로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헌 정문(正門)인 문루(門樓, 폐문루)가 있는 곳이 곧 동헌이고, 동헌 본청과 내삼문(內三門), 그리고 외문루(外門樓)가 함께 세워져야 제대로 된 동헌 건물 복원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 사진의 원본이 공개되거나 박물관, 삼척시청, 사학회 등의 기관 또는 단체에 확보되기 전까지는 삼척 관아에 대한 일체의 복원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업은 그 후에 진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현재 강릉시의 경우처럼 동헌이 2개(본래 동헌인 칠사당과 복원 동헌인 정체불명의 건물군) 존재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Ceremony of Conferring Imperial Gifts on Yangban class (Korea)
10번 사진 - 1911년 삼척헌병분대 건물 (한일합방 은사급 지급 장면)


위 10번 사진은 일제강점기 직후에 소위 '한일합방(韓日倂合)' 축하를 위한 은사금(恩賜金) 지급 행사 장면을 담은 조선총독부 1911년 발행 「애뉴얼 리포트(Annual Report) 1910-1911」 수록 사진입니다. 상편의 6번 사진 건물인 삼척도호부 장관청(將官廳)에 주재하고 있던 삼척헌병분대 앞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사진 표제는 'Ceremony of Conferring Imperial Gifts on Yangban class'입니다. 번역하면 '양반층에 대한 제국(일본 황실) 은사금 하사식' 정도가 됩니다.

이 사진 왼쪽에 2층 문루가 보입니다. 이것이 동헌 정문인 폐문루인지, 아니면 삼척읍성 남문루(南門樓)인 공진루(供辰樓)인지 명확하게 식별되지는 않습니다. 1층 기둥 일부가 보이는 것을 보면 흡사 동헌 폐문루로 보이지만, 위치와 난간 방향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후자인 남문루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촬영 화각이 조금 넓었으면 문루 용도와 위치, 방향을 구분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폐문루 또는 남문루 복원에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진입니다.

삼척도호부 동헌 및 객사 건물 배치 평면도
11번 그림 - 강원도 삼척도호부 객사 및 동헌 건물 배치도


위 11번 그림은 앞에서 살펴본 여러 내용을 토대로 삼척도호부 관아를 구성하던 여러 관청 건물의 위치와 평면을 1916년 지적도 위에 표시한 것입니다.

동헌, 내아, 작청, 군관청, 향청, 좌기청(坐起廳) 등의 건물은 유리건판 사진과 1915년 삼척 전경(상편 5번 사진), 각종 읍지에 수록된 작청, 군관청, 장관청, 부사 등의 변천 내용 등을 참고하였으며, 장관청은 삼척헌병분대 전경 사진을, 객사 진주관은 1931년 삼척군청 증축 도면에 기초하였습니다. 삼척읍성 남문 공진루 주변은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입니다.

추정입니다만, 부사와 동헌 사이, 하늘색 발굴건물지 필지(13-3번지 일부)에는 관청(官廳) 같은 기구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관아 음식을 담당하던 10칸[間] 규모 건물입니다.

삼척 객사 동헌 항공사진 건물 배치도
12번 사진 - 강원도 삼척시 객사 및 동헌 복원 항공사진


위 12번 사진은 11번 그림의 관아 건물 배치도를 2022년 항공사진 위에 겹친 것입니다.

옛날 조선시대 도로망과 각 관아 건물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주요 관아 건물지가 죽서루 주차장, 공터 등으로 확보되어 있고, 경찰서가 있던 장관청과 낭청방(郎廳房) 등의 부지에는 삼척문화원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체국장 관사도 삼척 지역의 우정(郵政)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게나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물입니다.


동헌 복원 예정지의 건물을 그 형태만 가지고 동헌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래 작청이나 군관청 추정 건물들의 평면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전통 관아 건물들은 본채, 좌우행랑채, 내행랑(내삼문) 등과 같은, 대체로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에서 7번 그림 본문에서 추론한 것처럼 그 건물이 옛날 어느 시기에 실제 동헌 건물로 사용되던 건물일 수 있습니다. 확률도 제법 있는 편이고요.

그러나, 비록 최초에는 내아 용도로 건축되었을지 몰라도 이후 동헌 칠분당 건물로 오래 사용되었고 사진 자료에 건물 지체가 드러나며, 각종 문서 및 문헌으로 확실한 증거가 존재하는 건물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발굴 유구(遺構)만 가지고 복원하는 건물은 잘해야 50% 정도 완성도를 갖춘 상상 속 건물이고(복원 예정지 본청, Ⅲ-1구역 7호 건물지 부분은 유구도 거의 없음), 사진 자료에 기초해 재건하는 건물은 그 외형과 구조를 상대적으로 충실히 복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건물(군수 관사, Ⅲ-2구역 1호 건물지)은 발굴조사로 위치가 특정되고 유구가 일부 존재합니다. 관청 편액을 거는, 동헌 건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관아 정문인 2층 외문루와의 연계 복원 여지도 빼놓을 수 없고요.

지금 시점에 과연 어떤 결심을 해야 할까요? 사업 예산이 이미 확보되었다는 이유로 관성에 따라 그대로 복원 사업을 진행해야 할지, 아니면 이런저런 이견이 제기되었으므로 일단 중지하고 충분하고 유효한 자료가 확보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지... 당국 관계자 여러분의 현명한 결단을 기대합니다.


사실, 동헌 건물을 보려고 멀리서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옛날부터 있던 문화재급 건물이 아닌, 최근 복원 건물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이는 전주 전라감영 복원 결과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시급하지 않은 사업입니다. 본 글이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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