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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글 제5편입니다. 1월도 어느덧 월말이네요. 바쁘게 지나간 한 달이 이처럼 열두 번 반복되면 2024년 한 해도 훌쩍 지나가지 않을까 합니다. 세월이 유수(流水, 흐르는 물)와 같다더니, 정말 빠릅니다.
위 사진은 조선시대 평안도 북쪽 국경의 의주부(義州府) 읍성 남문(南門)을 안쪽에서 촬영한 사진엽서입니다. 의주는 본래 정3품 목사(牧使)가 있던 의주목(義州牧)이었는데 1603년(선조26)에 종2품 부윤(府尹)이 부임하는 곳으로 승격되었죠. 읍성 남문을 바깥에서 찍은 사진은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성 내부에서 바라보고 찍은 사진은 이게 거의 유일한 것 같습니다.
의주읍성 남문은 2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일명 '내남문(內南門)'으로 의주성 남쪽에 있었던 정식 남문이고, 이 문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외성문(外城門)이 하나 더 있었죠. 이를 '구남문(舊南門)'이라 하였는데, 문루(門樓) 없이 거대한 돌[石]로 된 홍예(虹霓, 무지개 문)만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의주성 남문 정면에는 각종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2층에 거대한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쪽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바깥 편액과 비슷한 규모의 '장변루(壯邊樓)' 편액이 2층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왼쪽 위 편액 그림은 사진 속 예서체(隷書體) 편액 글자를 모사한 것이고, 오른쪽 위 글자는 눈에 익숙한 해서(楷書)로 표기한 것입니다.
19세기 중반까지 기록에 따르면 바깥 중루(重樓, 2층 누각) 윗층[上層] 편액이 '해동제일관', 아래층[下層] 편액이 '용만남루(龍彎南樓)', 안쪽 편액이 '내훈문(來薰門)'이었다고 합니다. 내훈문 편액이 2층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 남문루(南門樓, 남문 누각)를 '내훈루(來薰樓)'라고도 하였는데, 현재 북한 국보유적 제52호로 지정된 '의주남문(義州南門)'에는 바깥쪽 2층에 해동제일관, 1층에 내훈루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해동제일관 편액 글자와 색상이 옛날 사진과 다른 것을 볼 때 (1958년경 남문 복원 이후) 1990년대에 다시 수리하면서 다시 제작해 부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전쟁 시기에 의주성 남문이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때 편액도 함께 소실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872년 간행된 『관서읍지(関西邑誌)』에 의하면 장변루 편액은 1849년(헌종15)에 의주부사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내훈루를 중수(重修, 개수)한 후에 새로 고쳐 단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49년 이전 : 정면 2층 편액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 ', 정면 1층 편액 '용만남루(龍彎南樓)', 안쪽 편액 '내훈문(來薰門) '
1849년 이후 : 정면 2층 편액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 , 정면 1층 편액 '내훈문(來薰門)', 안쪽 편액 '장변루(壯邊樓)'
현재 : 정면 2층 편액 '해동제일관', 정면 1층 편액 '내훈루(來薰樓)', 안쪽 편액 없음
고증에 맞춰 현재 의주성 남문에 걸린 편액을 보완했으면 하지만, 과연 북한 문화재 담당자들이 이 글을 볼지 모르겠네요.
P.S. 1월 30일에 블로그 방문자 25만을 달성했습니다. 기록차 적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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