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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관리하는 사이트에서 역사적 인물의 관직을 추증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만들 때 육조판서(六曹判書)의 서열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정2품 판서로 추증(追贈)하더라도, 이조판서로 추증할 때와 공조판서로 추증할 때가 달랐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추증 관직이 판서급인 경우는 대개 '이조판서'였던 것에서 비롯된 궁금증과도 무관치 않다.

추증을 설명하자면, 어떤 인물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생전 관직(직함)을 올려주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계급, 훈장 추서(追敍)와 비슷한 일종의 포상(褒賞)이라고 할 수 있다.

증직(贈職)도 추증과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생전에 관직이 있었던 경우는 증직,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던 경우는 추증이라고 하는 것 같다(양자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님). 가증(加贈)은 추증한 관직을 다시 올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전에 통정대부(정3품 품계) 이조참의(정3품 관직)에 있었던 사람을 자헌대부(정2품 품계) 이조판서(정2품 관직)로 추증하면 그 직함은 다음과 같게 된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 행통정대부이조참의 아무개
資憲大夫吏曹判書 通政大夫吏曹參議 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된[贈],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지낸[行] 아무개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행(行) 자는 행수법(行守法)의 행 자와 용례가 다르다.

물론, 위 직함은 일반적인 표기이고, 문서나 묘비 등에 어떤 식으로 직함을 기록할 것인지는 쓰는 사람 마음이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 행통정대부이조참의 아무개
통정대부이조참의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아무개
이조참의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아무개
이조참의 증이조판서 아무개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아무개
증이조판서 아무개
증판서 아무개
참의 아무개
등등...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관직 표기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술할 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육조판서 서열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판서는 오늘날의 중앙 정부부처 장관(長官)에 해당한다. 물론, 그 비중이나 사회적 대우는 오늘날의 장관급 이상이다. 20여 개에 달하는 장관직, 대학 총장(국립대 총장은 장관급), 기타 장관급 위원장, 정무직 공무원 등, 지금은 장관급 자리가 한둘이 아니고 장관보다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기업, 기관, 단체장의 직위도 적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판서급 관직이 달랑 9개에 불과했고 '관직이 출세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중요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2품인 판서급 관직은 다음과 같다.

1) 의정부좌참찬
2) 의정부우참찬
3) 이조판서
4) 호조판서
5) 예조판서
6) 병조판서
7) 형조판서
8) 공조판서
9) 한성부판윤

이외에도 지돈녕부사, 지중추부사, 지의금부사, 지경연사, 도총관, 대제학 등이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명예직 아니면 겸직이다. 관료들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실무가 없는 관직이거나, 판서들이 의례 겸하는 관직이기 때문에, 통상 판서급이라고 하면 위 9개만 해당한다.

판서는 다른 말로 '정경(正卿)'이라고 하는데, '육경(六卿)'이라고 하면 육조판서이고, 여기에 의정부의 좌참찬과 우참찬, 한성부의 수장인 판윤(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을 더해 '구경(九卿)'이 된다. 판서 아래의,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하는 종2품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별칭하였다.

삼공육경(三公六卿)에서 비롯된 동양권 전제군주국의 재상 제도는 멀리 중국의 주나라, 한나라까지 그 전통이 소급된다. 사마천의 『사기』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어 본 사람에게는 육경이나 구경이니 하는 단어가 기억에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다 보면 길어지기 때문에 그만 끊고 넘어간다. -_-?)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되는 구경의 서열은 위에 번호를 붙여 나열한 그대로이다. 실권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정의 최고 관청인 의정부에 설치된 좌참찬과 우참찬을 육조판서보다는 앞에 두었고, 판윤은 판서의 한 등급 아래로 보았다.

문제는 동일한 관직 명칭('판서')을 가지고 있었던 육조 내에서의 서열인데, 조선시대 초기인 1418년(태종18) 12월까지는 육조의 차서(次序), 즉 순서가 이조, 병조, 호조, 형조, 예조, 공조였으나 그 후부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굳어졌다.

- 1392년(태조1) 7월 28일부터 1418년(태종18) 12월 4일까지의 6조 공식 서열
1) 이조 : 이조판서
2) 병조 : 병조판서
3) 호조 : 호조판서
4) 형조 : 형조판서
5) 예조 : 예조판서
6) 공조 : 공조판서

- 1418년(태종18) 12월 5일 이후 6조의 공식 서열
1) 이조 : 이조판서
2) 호조 : 호조판서
3) 예조 : 예조판서
4) 병조 : 병조판서
5) 형조 : 형조판서
6) 공조 : 공조판서

최고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의 순서가 이전(吏典),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순으로 되어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 조정 주요 관원의 명단을 나열할 때 위 순서대로 직함과 이름이 기록된 경우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공식적인 서열, 즉 의전 서열이 그러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육조판서의 서열에 관해 더 쓸 내용이 없다. 앞에서 번호를 붙인대로 이/호/예/병/형/공조판서 순서였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

그러나,

『정조실록』 권44. 1796년(정조20) 5월 28일 임신일 기사에서

하물며 이조판서는 서열이 정승[中書] 다음이고 호조판서[度支]와 병조판서[司馬]가 그 다음이다.
況冡宰亞於中書, 度支司馬又次之


라는 정조 임금의 비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예조가 빠지고 병조가 들어간 것인데, 이는 병조과 무관들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조는 문관 인사권을 맡고 있으므로 그 중요성은 다른 판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호조 역시 막강한 재정권을 행사하므로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즉, 이조, 호조, 병조의 판서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조는 학업과 의례를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문(文)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있어 그 중요성이 결코 낮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조판서나 병조판서가 실세이기는 하지만, 명예상으로는 호조판서보다 예조판서가 높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다음은 『정조실록』 권54. 1800년(정조24) 4월 21일 계묘일 기사에 수록된 조항진(趙恒鎭, 1738-?)의 상소문 가운데 일부이다.

옛날에는 명공거경(名公鉅卿, 공경대신)의 자식이라도 증직하는 관직은 굳이 이조(吏曹)만 아니라 병, 호, 공, 형조의 관직도 다 줬으며, 선조(先朝) 때 법을 정해 3대를 옥서(玉署, 홍문관)에 벼슬한 집안으로 한계를 짓고 그 나머지는 명문거족[名家盛族]이라 해도 모두 호, 병조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법이 너무 한계가 없어, 품관(品官)을 지내지 못한 먼 시골 사람들도 수직(壽職)으로 동지(同知,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을 경우 호, 병조의 벼슬을 추증하면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며,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응당 증직을 받을 자는 호, 병조를 수치로 생각하여 간혹 받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상소의 요지는, 이조판서로 추증되는 것만을 영예롭게 여길 뿐, 호조판서나 병조판서 증직은 정계를 주름잡던 명문가는 물론이고 일반 양반가에서도 그리 만족하게 여기지 않거나 오히려 꺼리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라는 내용이다. 조선 전기 때와 달라진 당시의 풍조를 꼬집고 있다.

헌데, 이 상소에서도 유독 예조만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예조판서는 당대의 지성으로 대표되는 대제학(大提學) 관직을 예겸(例兼, 자동으로 겸하는 관직)으로 추증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 찾아보면 예조판서에 증직된 사례도 적지 않고, 이조판서 증직시에도 대제학을 함께 추증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궁금증만 더해 간다.

판서급의 서열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신도비, 묘갈(묘비) 등에 기록된 내용을 추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조판서 아무개'라고 비석에 직함이 새겨진 인물이 실제로 어떤 관직을 지냈는지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당시 각 관직의 사회적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참찬을 두루 지냈는데, 비액(碑額)이나 비제(碑題)에 대표 직함으로 '예조판서'가 기록된 것이 그 예이다.

아직 몇 건의 사례밖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의정부의 좌참찬이나 우참찬이 판서보다는 덜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다. 좌/우찬성이 공식 서열은 판서보다 앞이었지만, 앞서 기술했던 것(의정부 관직이므로 판서보다는 서열을 앞에 두었다는 내용)과 달리 아무래도 직함의 무게가 여느 판서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판서는 어엿한 한 관청의 장관(長官)이지만 좌/우참찬은 정1품인 영/좌/우의정과 종1품인 좌/우찬성의 뒤를 이어 의정부 관청의 서열 6-7위에 불과하니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상의 내용을 조합해 보면, 대체로 육조판서의 (의전상 서열이 아닌) 실제 정치적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 이조판서
2) 병조판서 > 호조판서
3) 예조판서
4) 형조판서 > 공조판서

추증은 죽은 후에 관직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생전의 실권은 (허울뿐인 군권을 맡은) 병조판서보다 재정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던 호조판서가 앞섰을 수 있지만, 명예라는 측면에서는 병조판서가 호조판서 앞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식과 품행을 상징하는 예조판서가 그 다음이고, 형조와 공조가 마지막이다. 토목, 공업 분야를 담당하는 공조판서보다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형조판서가 높았을 것이다. 판윤보다는 앞이지만.

정치적 서열이나 권세 순위가 아닌, 사회적 지위는 다음과 같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1) 이조판서
2) 예조판서 > 병조판서
3) 호조판서 > 형조판서 > 공조판서

예조는 비록 청직(淸職)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급으로 우대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왕조는 문관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 나라였고, 글[文]과 예(禮, 예의, 예법, 의례)를 중시하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그 때문에 예조 관청의 명망이 병조에 비견될 정도로 높았다. 또 호조는 많은 사례에 있어 형조, 공조와 같이 취급하여, 호/형/공조를 삼조(三曹)로 묶고 조선 후기에 문과 급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널리 개방한 바 있다. 호조판서는 재정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병조판서와 버금갈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하급 관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다른 문헌이나 자료를 찾게 되면 그때 다시 고증하기로 하고, 이만 '날림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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