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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돈화문 앞 비변사 터 (1910년 9월)한일병합 직후, 데라우치 통감의 창덕궁 방문 (이왕 봉책)


1910년 8월 29일 11시에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을 발표한 후, 같은 해 9월에 당시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제3대 통감(統監)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사내정의][각주:1]가 창덕궁(昌德宮)을 방문하여 순종(純宗) 황제를 '이왕(李王)'으로 봉책(封冊)하는 문서를 전달[獻]한 후 복귀하던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단, 통감부와 일본 본토 사이의 전신(電信) 기록, 기타 관련된 사람들이 남긴 기술에 의하면, 경술국치(庚戌國恥) 직후인 9월 1일에 일제가 창덕궁에 칙사[각주:2]를 파견하여 일왕(日王, 일본 천황)의 한일 병합에 관한 조서(詔書) 사본과 하사품을 순종에게 전달할 때 별도로 이왕(李王) 책봉(봉책) 의식을 시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실제 위 사진과 같은 행동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통감이 아닌 칙사가 순종을 李王으로 봉책한다는 조서를 단순히 전달하기만 함)

9월의 다른 어느 날일 수 있고, 다른 목적으로 통감이 창덕궁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데라우치 통감(총독)의 사진이 아닐 수도 있지만요.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에도 같은 기간에 통감이 창덕궁 또는 덕수궁을 방문한 기록이 없습니다. 즉, 1910년 9월에 촬영된 사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위 사진은 『日本之朝鮮(일본지조선)』[각주:3] 97면 하단 왼쪽에 수록되어 있으며, 국내에는 『일제가 강점한 조선』[각주:4]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사진 설명에는 '德壽宮(덕수궁)'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오른쪽에 보이는 궁궐 문의 형태가 명백하게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입니다. 붉은색 화살표로 표기한 부분의 나무가 (창덕궁 매표소 자리에 있던) 보호수[각주:5]로 추정(!!)됩니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는 비변사(備邊司) 관청이 있었고, 고종(高宗) 즉위한 후 비변사가 광화문 앞에 있던 의정부(議政府)에 통합되면서 그 청사는 의정부의 조방(朝房) 용도로 사용됩니다. 이 건물군(群)이 거의 그대로 대한제국 시기까지 남아 있었는데, 1909년 연말 또는 1910년 무렵에 대부분 헐리고 그 자리는 도로, 관사, 공터, 잔디밭 등으로 전용됩니다.


위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의 위치와 모습, 창덕궁 궁궐 담장 구역 등을 두루 살펴보면, (왼쪽과 중앙의 무성한 나무 때문에 그 아래 건물의 형태가 잘 식별되지 않지만) 비변사 자리는 아마도 사진 촬영 시점에는 이미 공터가 된 것으로 같습니다. [추정1]

다만, 보기에 따라서는 마차 뒷바퀴 부근에 멀리 보이는 백색 제복을 입은 사람이 등지고 있는 담장이 비변사 동쪽 담장인 것 같기도 합니다. 더불어 보호수로 추정되는 붉은색 화살표 나무의 기둥이 건물 지붕(기와) 뒤쪽으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아직 훼철되기 이전 모습일 수 있습니다. [추정2]

1910년 9월경 비변사 청사1910년 9월경 비변사 건물 (추정)


위 이미지는 사진을 촬영한 시점에 비변사 건물(의정부 조방 건물군)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을 경우(추정2)에 사진에서 드러난 몇몇 부분을 강조한 것입니다. 앞에서 추론한 것처럼 비변사의 동쪽 담장, 대청(大廳) 기와, 은행나무(보호수) 추정 형태가 관측됩니다.

『조선과 일본』 책에 수록된 사진의 해상도로는 더 이상의 분석 또는 추론에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화질 사진이 있어야 더 확실히 판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쩌면 일본에는 고해상도 원판 사진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계 관청에서 주일대사관을 통해 사진 자료를 수집하는 이벤트라도 열면 혹시 가능할는지, 아니면 역사학계에서 조선말-대한제국-일제강점기 시절에 외국인 특히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들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촬영한 기념사진들도 적지 않을 테니까요. 부임하거나 여행할 때 의례적으로 사진 몇 장 찍는 것처럼요.

비변사 청사 배치 평면도창덕궁 돈화문 앞 비변사 청사 및 인근 건물 배치 평면도 (추정)


위 이미지는 본 아정(雅亭) 블로그에 그간 수록한 비변사 청사 관련 문서의 내용을 종합한 결과물입니다. 앞의 이미지에서 추정한 와룡동 은행나무, 비변사 대청 기와, 비변사 동쪽 담장 부분을 화살표로 표기하였습니다.

※ 비변사 청사에 관한 상세 내용은 2018년 11월과 12월에 올린 '창덕궁 돈화문 앞 비변사 청사 터 이야기' 문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편, 2편,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변사 청사가 훼철되기 이전, 즉 1910년 4월 또는 5월(추정) 이전에 돈화문 왼편의 비변사 자리를 촬영한 사진이 한두 장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일제가 발행한 돈화문 그림엽서[絵葉書, 繪葉書]에 비변사 대청으로 보이는 건물의 지붕이 약간 보이는 정도, 그리고 이미 철거된 비변사 건물지(址)에서 돈화문을 바라보고 찍은 정도 제외하면, 현재까지 비변사 청사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의미한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9.03.24 - 처음 등록
2019.03.31 - 2번, 3번 이미지 및 관련 내용 추가


  1. 1910년 10월 1일자로 초대 조선총독(朝鮮総督)이 됨 [본문으로]
  2. 일본 궁내성(宮內省) 식부관(式部官) 자작(子爵) 이나바 마사나와[稻葉正繩] [본문으로]
  3. 『日本之朝鮮』, 有楽社, 1911년 1월. [본문으로]
  4. 정성길, 『일제가 강점한 조선』, 한국영상문화사, 2006년 10월. [본문으로]
  5. 수령 470여 년의 와룡동 은행나무, 보호수 고유번호 서1-8 (1972.10.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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