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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에 올린 '조선시대 공조 청사...' 제목의 글에서 조선왕조 공조(工曹) 당상대청(堂上大廳) - 대한제국 통신원(通信院) 청사의 촬영 사진을 살펴보았다. 당상대청은 말 그대로 공조의 당상관(堂上官, 국사를 논하는 정당 위에 올라 앉을 수 있는 고위 관료)인 판서(判書, 정2품, 오늘날의 장관), 참판(參判, 종2품, 차관), 참의(參議, 정3품 당상, 차관보) 관원이 근무하는, 대청(大廳, 큰 마루)을 갖춘 건물이다.

비록 건물 전면부의 대청과 주춧돌 및 기둥 부분이 대한제국 시기에 유리창호를 갖춘 벽면 형태로 개조되면서 외형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6개 청사의 중심 건물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면에서 촬영된 사진 자료였다.

공조 당상대청 사진 이외에도 아래 이미지와 같은 호조(戶曹) 대청(大廳) 사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중구 장사동 묘심사(妙心寺) 선당(禪堂)
장사동 묘심사 선당 (호조 청사 대청)


그러나 이 사진은 호조 또는 호조의 후신인 탁지아문(度支衙門, 1894년)이나 탁지부(度支部, 1895년 4월 이후)가 정부 한 부처의 청사로 기능하던 시절에 바로 그 위치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을 전후하여 기존 탁지부 청사 부지의 용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탁지부(호조) 당상대청 건물을 해체 이전하여,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장사동(長沙洞) 위치에 세운 묘심사(妙心寺)라는 절의 선당(禪堂)으로 만들었는데, 그 선당을 촬영한 사진이다.

위 사진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 1919년 3월 15일자 제3면에 실린 것이며, 이외에도 같은 건물(묘심사 선당)을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https://www.minjok.or.kr/archives/88702에서 열람할 수 있다. 관아건축 전문가 이순우 선생의 민족문제연구소 기고 글이다.)

묘심사 선당 건물 지붕의 용마루, 기와, 건물 규모 등을 헤아려 볼 때 탁지부(호조)의 당상대청급 건물임을 확신할 수 있지만, 1788년(정조12)에 간행된 『탁지지(度支志)』 문헌에 기록된 호조 당상대청의 모습과는 일부 차이를 보인다.

1) 위 사진(묘심사 선당) 건물 : 정면 7칸(間) 규모 [중심 5칸 + 좌우 2칸]
2) 문헌의 호조 당상대청 건물 : 12칸 규모 [정면 6칸 : 중심 4(4x3)칸+ 좌우 퇴(退) 2칸]

『탁지지』에는 호조 청사를 그린 〈본아전도(本衙全圖)〉 그림도 있는데, 역시 정면 4칸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1839년경(또는 1878년)에 그려진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도 〈본아전도〉와 거의 동일한 호조 관청 그림이 실려 있다.

고종 초기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육조거리의 여러 관청 건물들도 일제히 중건(重建)하였기 때문에 정조 시대의 호조 청사와 고종-대한제국 시대의 호조-탁지부 청사 규모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여러 관청의 사례를 볼 때 호조의 당상대청도 기본 골격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정비를 마쳤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묘심사 선당 건물은 (위 링크 글에 있는 묘심사 대전기념선당 설계도처럼) 기존의 탁지부(호조) 대청 건물을 해체한 후, 선당이라는 용도에 맞게 해당 자재로 새로 설계하여 건다한 것이기에, 본래의 호조(탁지부) 청사 건물 형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호조 당상대청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만 화제를 다음으로 넘긴다. 호조(戶曹) 청사에 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의 '호조(탁지부)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 글 참고.)


조선시대 주요 관청에 관한 평면도, 배치도, 건물 사진 등의 자료를 찾던 도중에 아래와 같은 웹상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위 이미지 출처 사이트(cb465mhz)는 일본 생활무전(Citizens Band Radio, CB무선)의 역사를 일본인 개인이 매우 방대한 자료를 통대로 정리해 놓은 곳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주도하에 우리나라 땅에서 처음 실시되었던 라디오 무선방송 실험에 관한 내용을 담은 웹페이지(J1PP J8AA)의 일부분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최초의 방송전파(방송무전)는 1924년 11월 29일 오후 4시에 사진 속 건물에서 '발신(發信)'되었다.

사진의 건물은 방송전파를 실험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朝鮮総督府) 체신국(遞信局, 逓信局)의 무선실험실(無線實驗室, 無線実験室)이었다.


위 사진은 1933년경의 무선실험실 모습이다. 앞의 사진이 1925년경 것이므로 약 8년간의 세월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에는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두 사진의 원출처는 해당 웹페이지 본문에 기재되어 있다.)

이땅에서 처음 방송전파를 내보낸 역사적인 공간인 이 '무선실험실' 건물의 위치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선방송협회(朝鮮放送協会, 경성방송국) 회장을 지낸 시노하라 쇼조(篠原昌三)의 회상에 따르면, 이 무선실험실은 경성중앙전화국(京城中央電話局, 京城局) 광화문분국(光化門分局) 뒤뜰에 있었다.

"광화문 전화국의 뒤뜰에 있었던 옛 건물의 서고 같은 가옥을 체신국 방송실험실로 개조하여, 학교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 기술자인 시노하라는 구라마에(藏前)의 2년 후배인 노창성(盧昌成) 군과 한 팀이 되어 그야말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식으로 미지의 기술에 도전하게 되었다." -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 中에서


이 회상에서 언급된 '옛 건물의 서고 같은 가옥'을 1929년경 촬영된 항공사진에서 살펴보면 바로 이 위치에 있었다. 회상 기록의 '광화문 전화국'이 바로 '경성중앙전화국 광화문분국'이다.

일제강점기 세종로(광화문통, 육조거리) 항공사진
일제강점기 경성부 광화문통 항공사진 (1929년경)


이 건물은 병조(兵曹) 당상대청 건물이(었)다!! 건물 바로 오른쪽 앞에 있었던 무선 안테나 기둥도 항공사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당상대청 바로 아래의 병조 낭청대청(郎廳大廳) 건물도 당시까지 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 형조(刑曹) 당상대청, 사역원 대청, 공조 당상대청 이건(移建) 추정 건물(형조와 사역원 사이의 남향 건물)도 존재하고 있다.

공조 이외에 또 하나의 육조 관청인 병조 관청의 당상대청 건물 실물 사진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정면에서 촬영된 사진이 아니지만, 전체적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공조 당상대청과 동일하게 정면 6칸(대청 4칸+좌우 퇴 2칸) 규모이고, 건물 중심의 대청 마루도 공조와 동일하게 좌측에서부터 4번째 칸임을 알 수 있다.

사진 해상도가 너무 낮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몇 달에 걸쳐 여러 경로로 원전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이 글을 쓰는 9월 현재까지 더욱 고품질의 이미지(1925년경 조선총독부 체신국 무선실험실의 원출처 사진)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진을 합성하고 편집하여 아래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보았다.

조선시대 병조(兵曹) 당상대청 추정도
병조 청사 당상대청


위 추정도 이미지처럼 유리창호 벽면 형태가 아닌, 본래의 조선시대 병조(兵曹) 당상청사(堂上廳事, 堂上廳舍)-대한제국 시기 군부(軍部) 본청(本廳)의 대청마루 형태로 충분히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 1920~30년대에 이 지역(조선총독부 체신국, 광화문분국)에서 근무하거나 견학 혹은 방문한 사람들이 촬영한 기념사진도 분명히 전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주로 일본인이겠지만.

마지막 사진으로 조선총독부 체신국 무선실험실의 1933년경 모습을 올려본다. 앞에서 살펴본 일본 사이트에 수록된 두 번째 이미지의 고품질 사진이다. 병조 당상대청, 낭청대청 형태를 확인할 수 있고, 1929년경 항공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였던 안테나의 세부 형태도 잘 보인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 무선실험실 (병조 당상대청)


현재 광화문에는 병조 청사 터가 이웃한 사헌부 청사 터와 함께 거의 온전하게 '세종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확보되어 있다. 위치는 외교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 세종문화회관 북쪽이다. (단, 병조 당상대청과 낭청대청 위치를 가로질러 정부서울청사 별관의 지하주차장 출구가 있다.)

조용히 병조 당상대청과 낭청대청에 대한 복원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사헌부 청사의 중심 건물인 대청(大廳)과 집의청(執義廳) 두 동(棟)은 선명한 유리건판(琉璃乾板, 유리원판) 사진이 전해지고 있으니 더더욱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특히 병조 대청은 조선왕조 500년 군권(軍權)의 상징 건물이고, 방송역사를 담은 한반도 최초의 방송전파 발신 공간이기에...


※ 참고 자료 링크 : 사이버 조선왕조 병조(兵曹) 홈페이지 - 병조 안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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