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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글을 올린 지 3개월여 시간이 지났습니다. 12월 말부터 한 달 가량은 평소처럼 움직이기 힘들었고, 그 이후로도 글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2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이 시기를 잘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본 문서에 첨부하는 이미지 파일들의 최초 생성 날짜를 살펴보니 2018년 7월이었습니다. 글을 써나가는 동시에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략 머릿속으로 어떻게 써야겠다고 생각한 상태에서 이미지를 먼저 제작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그 당시에 '이런 내용을 설명하려면 여기에 화살표를 넣고 이런 표시를 하고..' 했던 이유가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 되었네요. 1년 반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 때문에 글 쓰는 방식과 절차를 조금은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같은 제목의 글 1편(링크)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905년 8월경 탁지부(度支部) 청사 추정9번 이미지 - 1905년 8월경 탁지부(度支部) 청사


위 9번 이미지는 1편에서 살펴봤던 6번 이미지, 즉 1905년 8월 당시 탁지 청사의 도면에서 확인되는 부분을 호조(戶曹) 〈본아전도〉와 비교하여 강조 표시한 것이다. 도면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은 옅게 처리하였다. 푸른색, 녹색, 빨간색 등의 두꺼운 실선은 호조(탁지부) 관청의 각 구역을 적절하게 나눈 것으로, 아래 11번 이미지와의 비교를 위해 기입한 것이다.

1905년 8월 당시 탁지부는 이전 호조 청사의 전체 면적 가운데 분홍색으로 표시된 당상대청 권역과 노란색으로 표시된 낭청대청 구역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번 이미지의 도면이 당시 탁지부 청사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고 있었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관련 기록을 고려하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탁지부 청사의 중심 지역을 측량한 것으로, 일부 건물이 도면을 작도할 때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위 이미지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건물 자리에는 1905년 8월 도면에서 금고(金庫)가 들어서 있었다. 본래의 온돌 한옥 건물을 허물고 연와조(煉瓦造)[각주:1] 건물로 신축한 것이다.

호조(戶曹) 청사 추정 평면도 #110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 추정 #1


이상의 자료를 토대로 호조 청사의 원형을 추정해 보면 위 10번 이미지와 같다.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1편 2번 이미지에서 화살표로 표시한 직선 담장 부분으로, 〈본아전도〉의 남쪽 담장이 역(逆)ㄴ자 형태였다고 가정했을 때의 평면이다.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문은 대한제국 시기에 개설된 것으로, 탁지부 청사 터에 더부살이하던 기관[각주:2]을 위해 만든 1칸 대문이다.

㉠의 본래 건물이 1907년 4월 3일에 발생한 화재[각주:3]로 연소된 후, 동년 10월경에 목재 2층 양옥(洋屋)의 ㉡ 건물로 신축된다.

가장 옅은 갈색으로 표시된 건물들은 〈본아전도〉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를 참작하여 폭넓게 추정한 것이다. 특히 ㉢ 부분이 그렇다.

호조(戶曹) 청사 추정 평면도 #211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 추정 #2


위 11번 이미지는 호조 청사 배치를 추정한 두 번째 평면도이다. 10번 이미지와 다른 점은, 호조 남쪽 담장을 1편 2번 이미지 〈본아전도〉와 동일하게 직선 형태로 추정한 것이다.

9번 이미지에서 푸른색, 녹색, 빨간색 등의 두꺼운 실선으로 표시한 각 건물군을 위 이미지의 실선과 비교하면 상당 부분 두 그림의 평면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88년(정조12)의 〈본아전도〉와 1908년(순종2)의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사이에 120년가량의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관청의 건물 배치에는 큰 변화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조 청사의 실제 모습은 10번 이미지에 가까울까, 아니면 11번 이미지에 근접할까.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 및 수선전도(首善全圖)12번 이미지 - 청구요람 도성전도(左) 및 수선전도(右) 육조거리 부분


위 12번 이미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지도(古地圖) 두 점이다. 왼쪽은 1848년(헌종14)에 만들어진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 오른쪽은 1864년(고종1)경에 판각된〈수선전도(首善全圖)〉[각주:4]의 경복궁 앞 육조거리[六曹街] 부분이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것처럼 호조 관청 아래의 도로가 직선이 아니므로, 호조 청사 평면이 10번 이미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왼쪽 부분이 약간 꺾여 있으므로 호조 남쪽에 한성부(1870년), 경무청(1895년), 농상공부(1900년) 등이 차례로 들어서고 호조가 탁지부로 개편된 후, 탁지부 경내에 양지아문(1900년), 지계아문(1902년), 한성재판소(1904년) 등이 연이어 입주하면서 그 일대를 중심으로 일부나마 구획 및 도로 정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란색 바탕의 글자인 호조내계(戶曹內契), 호조후동계(戶曹後洞契)[각주:5]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部)-방(坊)-계(契)-통(統)-호(戶)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한성부 주소체계의 한 단계인 계(契)가 호조 청사 앞과 뒤에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호조 청사 평면도상에 등장하는 건물 가운데 몇 채일지 모르지만 민가(民家)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각주:6] 이는 의정부내계(議政府內契), 이조내계(吏曹內契), 병조내계(兵曹內契) 등도 같다.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모형13번 이미지 -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모형 (2012년 촬영)


위 13번 이미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소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육조거리 모형의 호조 부분이다. 전체적인 모습이 1편 1번과 4번 이미지상의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평면을 그대로 적용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탁지부 재정고문실이 한옥 팔작지붕 건물로, 1907년에 목재 2층 양옥으로 신축되었던 1편 4번 이미지의 파란색 화살표 ㄱ자 건물이 ㉠과 ㉡의 한옥 건물 두 채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10번 이미지에서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1900년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 부분의 문(門)도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각주:7]

조선 후기 호조(戶曹) 청사 평면 배치도14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추정 배치도


위 14번 이미지는 호조 청사 배치도를 10번 이미지(평면도 #1) 형태였다고 가정할 경우의 각 구획별 건물 칸[間]을 산정해 본 것이다.


참고로, 한옥 건축물에서 1칸은 기둥 2개 사이의 공간을 뜻한다. 즉, 건물의 전체적인 길이를 말할 때는 정면열의 기둥 숫자를 헤아려 계산하고, 면적을 말할 때는 정면열 2개 기둥 사이와 측면열 2개 기둥 사이의 장방형 넓이(=기둥 4개로 둘러싸인 바닥 면)를 1칸이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 기둥이 6개, 측면에 3개이면 길이로는 5칸 건물, 면적으로는 10칸(5x2) 건물이 된다. 참고로, 일반적인 한옥의 각 기둥 사이 너비는 약 2m 정도였다.


1편에서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에 기록된 호조 관청의 건물 목록을 살펴봤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상청사(당상대청)는 전체 12칸인데, 『숙천제아도』 및 『탁지지』의 〈본아전도〉 그림을 보면 정면 4칸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4x3) 규모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 모두 퇴(退, 튓마루)가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으로 보였을 것이다.[각주:8]

낭관청사(낭청대청)는 4칸의 작은 건물인데, 앞으로 퇴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8칸(4x2) 규모에 가까웠다.

고사(庫舍), 즉 창고는 127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 이미지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한다. 정확한 칸수를 추정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략적인 수준에서 가늠해 보면, 당상청사 북쪽의 고사 40여 칸(20?+24?)은 판별고(版別庫) 44칸, 남쪽의 좌우 고사 약 50칸(24?+32)은 판적사고(版籍司庫) 52칸, 동쪽의 나머지 고사는 세폐고(歲幣庫), 잡물고(雜物庫), 은색고(銀色庫), 별례방고(別例房庫) 등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에 추정을 더해본다.

청사 북서쪽의 산학청(算學廳)[각주:9]은 6칸이며,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서리장방(書吏長房)을 비롯한 기타 건물군이다. 특히 아래쪽 서리장방 건물군(10번 이미지의 ㉢ 부분)의 배치와 형태에는 상상이 많이 가미되었다.

청사 서쪽과 남쪽의 분홍색 건물은 호조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12번 이미지를 살펴볼 때 언급하였던 호조내계(戶曹內契)의 민가(民家)로 일부나마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각주:10]

9번 이미지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했던 부분은 한옥을 대신해 연와조 금고가 들어섰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 추정이 어렵다. 조선시대 각 관청마다 있었던 부군당(府君堂), 즉 신당(神堂)의 위치도 필자가 임의 추정한 것이다.

1900년경 서울 전경 촬영 사진 (서울의 추억)15번 이미지 - 1900년경 서울(한성부) 전경


위 15번 이미지는 1900년(광무4) 무렵의 당시 탁지부 청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해상도가 조금 더 높고 선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13번 이미지의 ㉣ 문(門)이 보이지 않는다.

1897년 11월경 서울 육조거리 일부 (명성황후 장례식 행렬)16번 이미지 - 1897년 11월경 육조거리 탁지부 일대


위 16번 이미지는 1897년(광무1) 11월경 촬영 사진이다. 명성황후의 장례식 행렬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5번 이미지보다 약간 이른 시기의 육조거리 모습을 담고 있다. 한때 한성부 청사가 들어 있던 경무청(警務廳) 대문(大門)과 대청(大廳)이 보인다.[각주:11]


- 본 2편의 요약
1) 호조 청사 평면도 추정 : 1편의 4번 이미지 평면도 보완 [10번 이미지]
2) 호조 청사 남쪽 담장 경계 추정 : 조선시대 고지도 비교 [12번 이미지]
3) 호조 청사 배치도 추정 : 호조 주요 건물의 규모 산정 [14번 이미지]


3편으로 이어집니다.



  1. 벽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 [본문으로]
  2. 1904년 2월 한성재판소, 1906년 9월 또는 1907년 3월 탁지부 건축소(建築所). [본문으로]
  3. 탁지화재(度支火災),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04월 04일. [본문으로]
  4. 수선전도 원판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4) 제작으로 추정되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수선전도는 갑자완산중간본(甲子完山重刊本)이다. [본문으로]
  5. 호조후문계(戶曹後門契). [본문으로]
  6. 민가가 있었다가 관청 부지로 편입되면서 지명만 남은 것일 수 있지만, 구휼(救恤) 명단 등을 비롯한 행정 기록에 이들 명칭이 자주 등장하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실제 민호(民戶)가 존재했을 확률이 있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에 작성된 호적 문서에서는 호조후동(戶曹後洞), 탁지후동(度支後洞), 군부후동(軍部部後) 등의 몇몇 기록을 제외하면 관련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관청 청사 권역 내에 존재하던 민호들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다른 지역으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본문으로]
  7. 1900년경 육조거리 일대를 촬영한 사진(15번 이미지)과 1897년 11월 명성황후 장례식 행렬 사진(16번 이미지)에는 이 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8. 대한제국 시기에 건물 바깥 기둥까지 벽을 올리고 유리창호 내는 형태로 건물이 개조된 후에는 더욱 그렇다. 1편 7번 이미지에 재정고문실과 연결된 문이 개설된 종래의 퇴칸(退間)이 보인다. [본문으로]
  9. 정조(正祖) 임금이 즉위한 1776년에 주학청(籌學廳)로 개칭된다. 왕의 이름인 이산(李祘)과 발음이 겹쳤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육조대로(세종로) 방향으로 난 출구가 없기 때문에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민가의 일반 백성이 호조 대문(大門)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 때문이다. 여러 개의 작은 문이 관측되는 의정부 청사의 외행랑(外行廊) 부분과 비교된다. [본문으로]
  11. 경무청은 1900년 7월에 경부(警部)로 개편되고, 10월에 육조거리 서편의 사헌부 자리에 있던 농상공부(農商工部)와 청사를 맞교환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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