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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지역에서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가 근무하던 관청인 감영(監營) 시설을 복원하거나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해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의 전라감영이 얼마 전에 복원되었고, 공주(公州)와 원주(原州)에서 충청감영과 강원감영 구역에 대한 정비를 본격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에 경상감영이 있던 상주(尙州)는 감영 건물을 복원해 공원을 조정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가장 격이 높았던 관아 건물(랜드마크)을 내세워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거나 자치단체장이 스스로 치적을 쌓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물론 가장 큰 목표는 관광객 유치겠죠. 이번 글은 이러한 감영 건물에 걸려 있었던 편액(현판) 글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작합니다.
현재의 광역자치단체장인 도지사(道知事)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관원인 종2품 관찰사(觀察使)가 근무하던 청사를 감영(監營)이라 하였다. 관찰사의 별칭이 감사(監司)였고, '영(營)'은 '영문(營門)' 또는 '영아(營衙)', 즉 군영(軍營)을 의미하는데, 관찰사가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예겸(例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마절도사 군영은 병마영(兵馬營), 병영(兵營), 수군절도사 군영은 수군영(水軍營), 수영(水營)이라 한다. 1 2
조선시대에는 전국이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의 8개 도(道)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팔도(朝鮮八導)'라는 명칭이 익숙하다. 이들 8개 도에 위치하였던 8개 감영은 다음 2개의 건물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ㄱ) 대문(大門)에 해당하는 문루(門樓) 3
ㄴ) 관찰사가 근무하던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 4
이외에 징청각(澄淸閣), 관풍각(觀風閣), 내아(內衙) 등의 건물도 여러 감영 경내에 공통으로 등장하지만, 본 글에서는 일단 가장 중요도가 높은 2개 건물의 편액(扁額)에 대해서만 살펴보려 한다. 5
1번 이미지 - 경기감영 대문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 및 선화당(宣化堂) 편액
1. 경기감영(京畿監營) :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소재 6
ㄱ) 문루 편액 : 한성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신문) 밖에 위치하던 경기감영 정문에는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1882년(고종)에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일본인이 발행한 사진첩인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에 수록된 사진 등을 참고하여 편액 글자를 그려본 것이다. 이 편액은 현존하지 않는다.
ㄴ) 선화당 편액 : 193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 발행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에 수록된 사진을 참고하였다. 사진에 찍힌 이 건물은 본래 의정부(議政府) 중심 대청인 정본당(政本堂)이었는데 사진을 촬영할 당시에는 경기도청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선화당 편액이 달려 있었다. 옛날 경기감영에 달려 있던 바로 그 편액인지, 수원(水原)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관찰사 소재지를 옮겨갔다가 다시 서울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 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편액이 아래쪽 절반만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에 추정하여 그린 것이다. 역시 편액은 현존하지 않는다. 7
2번 이미지 - 경상감영 대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및 선화당(宣化堂) 편액
2. 경상감영(京尙監營) :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소재
ㄱ) 문루 편액 : 경상감영 문루에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건판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사진 해상도가 높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글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루는 현재 대구 달성공원 관풍루(觀風樓)로 현존하는데, 문루 안쪽에 이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글자 형태가 거의 유사하지만, 예전 사진의 편액과 면적에서 일부 차이가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동일한 편액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색상도 흑백이 반대로 도색되어 있다. 8
ㄴ) 선화당 편액 : 문루와 같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자료를 참고하였다. 이 사진 이외에도 교차 검토 가능한 사진이 여럿 전해지고 있다. 경상감영 선화당은 원래 위치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걸려 있는 현판은 정체불명의 것이다. 아마도 1966년에 경북도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 후, 원래의 도청 부지에 중앙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글씨로 새겨서 걸었던 것 같다. 9
3번 이미지 - 전라감영 및 평안감영 선화당(宣化堂) 편액
3. 전라감영(全羅監營) : 전주부(全州府)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전라감영 외삼문(外三門)이 촬영된 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 수를 참작할 때 확신하기 어렵다.
ㄴ) 선화당 편액 : 일제강점기에 촬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몇 점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토대로 비슷하게나마 글자를 추정하면 위와 같다. 선화당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전소되었고, 최근 전라감영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원래 위치에 선화당과 관풍각을 재건축하였다. 이 선화당 복원 건물에는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디지털 복원한 글씨의 편액을 걸었다. 위 이미지의 전라감영 편액과 거의 비슷한 형태이다.
4. 평안감영(平安監營) : 평양부(平壤府) 소재
7-1.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대한제국 시기에 문루 정면을 촬영한 사진이 전해지나, 이 사진에는 '평안남도관찰부(平安南道觀察府)'라는 간략한 형태의 낡은 현판이 걸려 있다. 감영 시절의 편액에는 아마도 '관서포정사(關西布政司)'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7-2. 선화당 편액 :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 선화당을 촬영한 사진과 1890년대 추정 사진 하나, 그리고 위 문루를 촬영한 사진 등이 전해진다. 이들 사진을 토대로 선화당 글씨를 추정해 보면 위 사진과 같다.
4번 이미지 - 함경감영 대문 관북포정아문(關北布政衙門) 및 선화당(宣化堂) 편액
5. 함경감영(咸鏡監營) : 함흥부(咸興府) 소재
ㄱ) 문루 편액 : 함경감영 포정문(布政門)에는 '관북포정아문(關北布政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함흥 지역에서 활동하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던칸 맥래(Duncan M. Macrae, 1868-1949)가 촬영한 사진이 전해지고 있는데, 보통의 감영 문루와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기반으로 편액의 글자를 그려 보면 위와 같다. 글씨에 힘이 넘치고 각 글자가 조화롭다. 10
ㄴ) 선화당 편액 : 대한제국 시기 또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발행된 사진그림엽서에 선화당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을 토대로 편액을 그려본 것이다. 문루와 선화당의 편액이 모두 흑색 바탕의 백색 글씨로 되어 있어 함경도 지역의 고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현재 함흥 선화당 11에 걸려 있는 편액의 글자 형태가 확연히 다른 것을 볼 때, 해방 이후에 북한에서 새로 제작해 걸어둔 것으로 보인다. 12
다음 3개 감영(충청, 강원, 황해)은 문루 또는 선화당 편액의 형태에 관한 사진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필자가 확인하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5번 이미지 - 충청감영 및 강원감영 선화당(宣化堂) 편액
6. 충청감영(忠淸監營) : 공주목(公州牧)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문루 사진은 여러 장 확인되지만, 모두 '충청남도포정사(忠淸南道布政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리된 1896년(고종33) 8월 이후에 새로 걸었던 편액이므로, 이전 편액은 어떤 글자로 이루어진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호서포정사(湖西布政司)' 또는 '충청포정사(忠淸布政司)'일 가능성이 높다.
ㄴ) 선화당 편액 : 위 이미지의 편액은 공주시문화재관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편액 왼쪽에 새겨진 낙관(落款)에 '우당(羽堂)'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우당은 1833년 무렵에 공충감사(公忠監司,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조병현(趙秉鉉, 1791-1849)의 호(號)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편액이 현존하는 조선시대 제작 유일의 선화당 편액이라고 할 수 있다. 편액은 조선시대의 것이지만, 선화당 건물 자체는 충청남도 도청으로 계속 활용되다가 1932년에 도청이 대전(大田)으로 이전하면서 청사 기능을 상실한 후, 1938년경 앵산공원(櫻山公園, 櫻丘) 위치로 이전되어 백제박물관(百濟博物館)이 되었다가 1992년에 다시 현재 위치인 웅진동의 국립공주박물관(國立公州博物館) 옆으로 옮겨졌다. 공주박물관 시기에도 계속 걸려 있던 선화당 편액은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몇 곳에 균열이 생겼기에 1992년 이전시에 정밀한 복제품을 만들어 다시 걸었다. 지금 선화당 건물의 편액이 그것이다. 13
7. 강원감영(江原監營) : 원주목(原州牧)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문루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지만 1895년(고종32) 6월에 23부제가 실시되면서 강원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忠州府)의 원주군(原州郡)이 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광역행정기관인 관찰부(觀察府)가 춘천(春川)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포정사 편액이 걸린 사진 자료가 남기 힘들었다. 편액 명칭은 '관동포정아문(關東布政衙門)'으로 추정되고 있다. 14
ㄴ) 선화당 편액 : 역시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문루 편액과 같은 사유다. 명필로 알려진 석봉(石峯) 한호(韓灝, 1543-1605)의 글씨로 만들어진 선화당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강원감영 선화당에 걸린 편액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1919-2006)의 글씨로서 1980년 3월 제작된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출생지가 강원도 원주였던 인연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위 이미지를 보면 선화당 세 글자가 (전통 방식과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선화당 건물 자체는 감영 문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건물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8. 황해감영(黃海監營) : 해주목(海州牧) 소재
ㄱ) 문루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 때 감영이 있던 해주(海州) 전경을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으나 문루라고 특정할 수 있는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건물(해주성 남문)에 가려진 것일 수 있고, 일본인 관리의 관사(官舍) 건축을 위해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루를 해체한 때문일 수 있다. 문루 2층을 망월루(望月樓)라고 했는데, 어떤 명칭의 편액이 붙어 있었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황해포정사(黃海布政司)' 또는 '해서포정사(海西布政司)'일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
ㄴ) 선화당 편액 : 확인되는 자료가 없다. 조선 후기 8개 감영 가운데 유일하게 사진 한 장 전해지지 않는다. 원거리에서 선화당 건물 일부만 찍힌 사진그림엽서가 있긴 하다. 황해도 해주(海州) 지역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일본인)에게 그리 흥미를 끌 만한 지역이 아니었기에 관련 자료가 매우 희박한 것 같다. 지금 북한 지역이기에 더 열악한 형편이겠지만.
이상으로 팔도(八道) 감영의 문루와 선화당 편액에 관해 살펴보았다.
6번 이미지 - 매원(梅園) 서기순(徐箕淳)의 선화당(宣化堂) 편액 탁본
위 이미지는 매원(梅園)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선화당(宣化堂) 팬액의 탁본(拓本)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 소장 자료인데, 탁본을 뜬 선화당 편액이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는 미상이다. 본 문서에서 살펴본 어느 편액의 글자와도 모양이 일치하지 않는다.
전주성(全州城) 남문인 풍남문(豊南門) 안쪽에 걸려 있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편액을 1842년(헌종8)에 전라감사로 부임했던 서기순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전라감영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나, 서기순 본인이 1849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므로 확신할 수 없다.
감영 선화당을 복원할 때, 전라감영 선화당의 사례처럼 옛날 편액의 정확한 형태를 고증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자료 부족으로 그럴 수 없다면 이 선화당 탁본을 기초로 편액을 제작해 거는 것은 어떨까 싶다. (경기감영, 황해감영이 그렇고, 경상감영과 강원감영 편액도 고쳐서 다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강원감영 선화당은 한석봉의 천자문 글자를 집자해도 좋을 듯.)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을 책임지던 한성부(漢城府) 관청의 편액을 살펴보자.
6번 이미지 - 한성부 대문 및 본청 대청 편액 (경기감영 건물 사용 시기)
위 사진은 돈의문 밖 경기감영 청사를 사용하던 시절의 한성부(漢城府) 대문 편액이다. 1번 이미지의 기보포정사 사진과 같지만, 촬영 시기가 약 20년 정도 늦다. 사진을 확대하여 글자를 그려본 것이기에 형태가 정확하지는 않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따르면 유혁연(柳赫然, 1616-1680)이 '경조부(京兆府)' 편액을 썼다고 한다. 경조(京兆)는 한양(서울)의 별칭이다. 한성부가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을 때는 경조부 편액을 걸고 있었으나, 한성부 청사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어느 순간에 (특히 경기감영 문루 2층에 걸기 위해) 새로 '한성부'라는 글자로 편액을 만들어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15
아래 사진 역시 경기감영 청사를 사용하던 시절의 한성부 본청 건물 편액이다. 사진에서 글자 윗부분과 낙관 부분이 보이지 않으나, 대략적인 글자 형태는 추정 가능하다. 글자는 '경조좌당(京兆坐堂)'으로, 이에 관해서는 2018년 7월에 올린 '한성부 관청 편액(현판) 이야기' 글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 편액이 유역현의 글씨일 수도 있다.
본문 요약.
1) 경기감영(돈의문 밖), 경상감영(대구), 함경감영(함흥)의 대문 편액 글자 확인 가능
2) 경상감영(대구), 전라감영(전주), 평안감영(평양), 함경감영(함흥)의 선화당 글자 확인 가능
3) 경기감영(돈의문 밖) 선화당 편액과 한성부 청사의 정문 편액은 대략적인 형태만 확인 가능
4) 충청감영 선화당의 편액은 현존 유일의 조선시대 제작 편액으로 추정됨 (더 찾아보자!!)
- 예겸(例兼)은 으레 겸하는 관직이다. 즉 어떤 관직에 임명될 때 자동으로 겸하는 관직. [본문으로]
- 병마절도사를 겸직하는 관찰사 옆(감영 영내 또는 인근)에는 전임 무관인 중군(中軍)이 임명되어 관찰사의 군사 업무를 보좌하였는데, 중군이 있던 곳을 중영(中營) 또는 중군영(中軍營)이라 한다. [본문으로]
- 감영 정문을 포정사(布政司), 포정문(布政門)이라고 한다. 그 형태가 대개 2층 누각 형태로 되어 있었기에 문루(門樓)라고 기재하였다. [본문으로]
- 선화당(宣化堂)의 '선화(宣化)'는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글에서 딴 것이다. 임금의 덕화를 널리 편다는 뜻의 선화승류(宣化承流)와도 의미가 통한다. [본문으로]
- 현대에는 편액(扁額)이 현판(懸板)이라는 용어와 혼용되고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건물 처마나 문 위에 다는 것은 편액이라고 해야 옳다. 현판은 더욱 포괄적인 범위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 현재 지번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34 일대. [본문으로]
- 경기도청 선화당이라는 표현은 1917년 11월 무렵까지 신문지면에 등장한다. [본문으로]
- 1917년에서 1920년 사이에 경상감영 포정사 문루가 기존 위치에서 달성공원(達城公園)의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본문으로]
- 1970년에 개원한 중앙공원(中央公園)은 1997년에 경상감영공원(京尙監營公園)으로 개칭되었다. [본문으로]
- 포정문(布政門) 안쪽에 순찰문(巡察門)이 있었다. 포정문과 순찰문 사이는 군영 위주 공간이었고 순찰문과 선화당 사이에 다시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는 관풍문(觀風門)이 있었으므로, 실제 포정문(외대문) 기능을 하던 것은 순찰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본문으로]
- 사진그림엽서를 한자로는 회엽서(繪葉書)라고 한다. 일본 한자는 絵葉書. [본문으로]
- 북한 국보유적 제109호. [본문으로]
- 이때 선화당 건물을 이전하면서 건물 규모가 약간 축소되었다고 하나, 사진상으로는 용마루의 회반죽 양성바름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러한 모습이 특별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면에서 볼 때 건물 좌측 후면의 3칸(間)이 축소된 것은 확실하다. [본문으로]
- 「강원도정선군일록 (江原道旌善郡日錄)」 1887년(고종24) 윤4월 15일자 기록, 『정선총쇄록(旌善叢鎻錄)』, 오횡묵(吳宖默, 1834-1906?) [본문으로]
- 경조부(京兆府) 편액이 정문 문루가 아니라 본청(당상대청) 건물에 달았던 것일 수 있다. 또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실제 편액의 글자가 '한성부(漢城府)'였는데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단순히 한성부를 경조부라고 표현(기재)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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