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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기존 자료나 논문, 웹페이지에 볼 수 없었던 사진들을 담은 사진첩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첩 수록 사진 가운데, 현재의 부산광역시 권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시기의 동래(東萊) 지역에 관계된 몇 장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잠시(?)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 본 글에 올린 사진은 시인성을 높이기 위해 사진첩 수록 사진에 일부 편집(사이즈 조절, 흑백 전환, 명암 조정 등)이 적용되었습니다. (사진첩 출처 및 열람 주소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링크합니다.)


조선시대 경상좌수영 경상좌도수군절도사1번 이미지 - 경상도 동래 소재 경상좌수영 운주헌(運籌軒),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위 1번 이미지는 예전에 잠시 유행하던 조선시대 사진입니다. '조선시대 선글라스', '선글라스를 쓴 조선 관리', '조선 최고의 아이템 선글라스' 등의 키워드로 한때 회자되었습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사진의 등장인물들 뒤에 보이는 건물 안쪽에 편액(扁額, 건물 처마에 걸린 현판)에 '운주헌(運籌軒)'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글자 모양은 대략 사진 좌측 하단에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운주헌, 운주당(運籌堂) 글자의 편액은 주로 종2품 병마절도사, 정3품 수군절도사와 같은 지휘관이 있는 군영(軍營)의 정청(正廳, 東軒)에 걸려 있었습니다. 즉, 이 사진의 등장인물은 병마절도사 또는 수군절도사인데, 정답은 이미지에 표시한 것처럼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약칭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입니다.[각주:1]


조선시대 구식 군대는 1895년(고종32) 7월에 폐지되었습니다.[각주:2] 사진첩에 실린 여러 사진의 촬영 시기를 참작할 때 1893년(또는 1890년)에서 1895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아직 정확한 촬영 시점과 촬영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 사진 왼쪽에 등장하는 서양식 양복을 입은 인물과 관계된 사람이 군영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지만, 한국인일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됩니다.[각주:3]

1890년(고종27)부터 수군이 폐지되는 1895년까지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인물은 아래와 같습니다. 앞 날짜가 음력 기준 임명일이며, 아마도 사진의 주인공은 이병승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을 듯합니다. 그다음 유력 후보는 정용기입니다.

1890(고종27).03.18 - 이재호(李在頀, ?-?)
1890(고종27).11.20 - 김중현(金中鉉, 1844-1914)[각주:4]
1891(고종28).07.29 - 정용기(鄭龍基, 1862-1907)
1893(고종30).03.30 - 이병승(李秉承, ?-?)


참고로, 위 사진이 촬영된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은 당시 동래(東萊) 지역에 있었습니다. 현재 지번 주소로 부산광역시 수영구(水營區) 수영동의 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 일대입니다.

동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외삼문 및 객사2번 이미지 - 동래 소재 경상좌수영 외삼문(내해절도영문)과 객사(망일관)


위 2번 이미지는 1번 사진과 같은 사진첩에 실려 있는 경상좌도수군영(慶尙左道水軍營)의 외삼문(外三門)[각주:5]입니다. 조선시대 관청은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대문(大門, 외삼문)-중문(中門, 내삼문)-대청(大廳, 청사)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좌수영 청사 앞이 상당한 경사의 비탈이고, 삼문(三門)에 '내해절도영문(萊海節度營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동래 바다'라는 뜻의 '내해(萊海)'가 비교적 생소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편액 글자이기에 더욱더 반갑습니다. 혹시 옛날의 경상좌수영을 일부나마 복원하게 된다면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겠죠. 동래부(東萊府) 관아의 내삼문인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과 규모와 형태가 비슷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같은 지역에 소재한 건물이라서 동래부와 좌수영의 내삼문, 외삼문 등이 거의 같은 규모와 형식으로 건축된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좌수영 정청(동헌)인 운주헌으로 들어가기 위한 외삼문 오른쪽 너머로 '망일관(望日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ㄱ자 형태의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편액 끝에 '館(관)'이 들어가면 관청[公廨] 건물에서는 통상적으로 객사(客舍, 客館)[각주:6]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외형이 통상적인 객사와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객사인가 하는 물음표가 생깁니다.

경상도좌수영관아배설조사도(慶尙道左水營官衙配設調査圖) 일부3번 이미지 - 경상도좌수영관아배설조사도(慶尙道左水營官衙配設調査圖) 일부분


위 3번 이미지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의 〈경상도좌수영관아배설조사도(慶尙道左水營官衙配設調査圖)〉의 일부입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면인데, 같은 시기에 측량된 지적원도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각 건물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좌수영(左水營) 관아 건물 배치도에서도 녹색 글자의 객사(客舍)가 90도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한 기역(ㄱ) 자(字)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2번 이미지에서 망일관 편액이 걸린 건물과 같은 배치입니다. 외삼문[外門] 오른쪽(동쪽)에 표시한 붉은색 화살표가 사진을 찍은 장소 및 촬영 방향입니다. 가능성은 작지만 노란색 화살표 지점에서 촬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2번 이미지의 삼문은 내삼문(內三門)이 됩니다.


2번 이미지의 사진이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와 형태가 다르지만, 좌수영 객사 건물 형태가 일부나마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객사 이름도 문헌에 기록된 '영파당(寧波堂)'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기존 객사가 화재 등으로 철거되고 다시 중건되는 과정에서 모양과 명칭에 이러한 변동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각주:7]


참고로, 위 배설조사도와 1912년 제작된 지적원도, 현대 지도 등을 조합해 보면 경상좌수영의 동헌(東軒)[각주:8]인 운주헌은 현대 주소로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51-19번지와 수영사적공원 남문 입구에 걸쳐 있었습니다. 홍예문(虹霓門, 무지개 모양 돌문)만 남아 있는 좌수영성 남문을 전혀 엉뚱한 곳인 동헌 터 바로 뒷편에 옮겨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복원이라 할 수 없지만, 비용 문제로 공원 경내 어딘가에 두어야 했을 테니 누군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겠죠.

경상도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관아 망미루(望美樓)4번 이미지 - 경상도 동래도호부 문루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


위 4번 이미지는 동래 지역의 행정을 관장하던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관아(官衙, 관청)의 정문, 즉 문루(門樓)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이 문루의 통상 명칭이 '망미루(望美樓)'이며, 원래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되어 있다가 최근 동래관아 경내로 재차 이전 복원되었습니다.

이 서문루(西門樓)[각주:9]를 찍은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었지만, 이 각도에서 촬영된 것은 이 사진이 처음입니다. 다른 사진에서 보이는 동일한 문루와 달리, 양성(兩城, 양성바름) 마감이 되어 있고 주변 담장도 비교적 깨끗합니다. 관아 건물에 대한 정비 내지 보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면 청사가 쇠락하기 전에 찍은 사진일 것입니다.)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곳에 동래부 관아 내부 건물군이 보입니다.[각주:10] 또 문루의 가운데 문 안쪽으로 담장 일부가 보입니다. 이것 때문에 동래부 관아 복원과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사진입니다.

동래 부산항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전경5번 이미지 - 1892년 7월 이후 부산항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전경


위 5번 이미지는 같은 사진첩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진[각주:11]입니다. 바로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개항장(開港場)인 부산항(釜山港)과 조계(租界) 지역의 행정 및 대외 통상(通商) 사무를 맡아보던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관청의 전경이기 때문입니다.[각주:12]

부산 지역 감리서는 처음에 초량(草梁)과 부산진(釜山鎭) 사이의 두모포(豆毛浦)에 설치되었는데, 증가하는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1891년(고종28) 9월부터 새로 청사를 마련하는 공사를 시작했으며[각주:13], 이듬해 1892년(고종29) 3월에 다수 관원이 신청사로 입주하고[각주:14], 그해 7월에는 위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태로 완공 낙성(落成)되었습니다.[각주:15] 청사 내부가 작은 담장과 문(門), 그리고 각각의 건물로 구성된 여러 구역으로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감리서 건물 각 부분에 흰색 컬러가 돋보이는 것을 보면 건축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에 촬영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당시 감리서에서 근무했던 민건호(閔建鎬, 1843-1920)가 작성한 『해은일록(海隱日錄)』에는 1892년(고종29) 7월 30일 을묘일 기록에 '본 감리서의 사진도를 오늘 찾아왔다[本署寫眞圖 今日覓來].'는 내용이 있습니다. 건물 완공을 기념하는 7월 25일 신서(新署, 신축 감리서) 낙성식 때 감리서 전경 사진이 촬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 기록이 위 사진을 찍은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면, 이 시점부터 늦어도 1895년 정도를 촬영 시점으로 추정합니다.


사진 오른쪽 위에 감리서의 정문 문루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 역시 같은 사진첩에 실린 것입니다. 문루 정면에 '감리아문(監理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네요. 4번 이미지의 '동래도호아문'처럼, '아문'이 관아를 의미하므로 '감리서 청사'라는 뜻이 됩니다. 문루 가운데 문 안쪽으로 저 멀리에 본청 건물로 들어가는 내삼문(內三門) 일부가 보입니다. 그리고 건물 안쪽에 2층으로 된 건물이 보이는 것도 눈에 띕니다.


이 5번 사진에 찍힌 감리서의 현재 위치는 현재 부산광역시 영주동의 부산 봉래초등학교 부지와 거의 일치합니다.

부산 동래감리서 자료 사진 (회엽서)참고 이미지 1번 - 부산 동래감리서 자료 사진 및 동래부청 시기 사진


위 참고 이미지 1번은 관련 논문, 언론 등에 부산항감리서 또는 동래감리서 건물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사진입니다. (감리서 앞길의 도로 상태가 좋지 못하네요.) 주로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건물을 동래감리서라고 지목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감리서 본청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오른쪽(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던 건물입니다(아래 8번 이미지 설명 참고).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작은 사진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발행된 회엽서(繪葉書, 사진그림엽서) 이미지입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참고 사진은 감리서의 정문 2층 문루(門樓)가 철거된 이후[각주:16]의 신설(新設) 감리서 건물을 촬영한 것입니다. 1886년(고종23) 6월에 설치한 감리서 분서(分暑)가 일본인 거류지 내에 (일본인 가옥을 빌리거나 구입해서) 있었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감리서 본서(本署)가 아닌 분서일 가능성도 일부에서 제기되지만, 사진에 멀리 보이는 능선과 풍경, 문루가 있던 곳 근처의 건물(파란색 화살표) 형태 등을 두루 감안할 때 5번 이미지의 감리서 청사가 맞습니다. (특히 위 5번 이미지의 감리서 정문 사진과 서로 비교하면 문루가 사라진 이후의 감리서 내삼문과 건물을 찍은 사진임을 한층 확신하게 됩니다.)


오른쪽 아래의 회엽서 사진에는 기존의 문루 자리에 세워진 기둥에 세 개의 현판이 차례대로 걸려 있는데, 각각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동래부(東萊府)', '부산지방재판소(釜山地方裁判所)', '구재판소(區裁判所)'라고 되어 있습니다. 1910년(융희4) 8월 29일의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경술국치) 직후인 동년 10월에 동래부 행정구역 명칭이 부산부(釜山府)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이 사진은 부산구재판소(釜山區裁判所)[각주:17]가 설치된 1908년(융희2) 8월 이후부터[각주:18] 1910년 9월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1906년(광무10) 10월에 동래감리서가 폐지되자 곧 동래부 청사가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재판소가 부청(府廳) 이웃 공간에 들어서고 1914년경 동래군청(東萊郡廳)이 원래 위치(4번 이미지)로 돌아간 후, 이 예전 감리서 터에는 부산공립보통학교(봉래초등학교 전신)가 연이어 자리 잡게 됩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동래군 청사가 환원된 시기를 1911년으로 보기도 하네요.

동래감리서 청사 수신당(守信堂)5-1번 이미지 -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대청(大廳) 신구(新舊) 수신당(守信堂)


위 5-1번 이미지는 '수신당(守信堂)'이라는 편액[각주:19]이 걸린 건물 사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해은일록(海隱日錄)』을 보면 '守信(수신)'이라는 글자 뒤에 '本署 堂號(본서 당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각주:20] 즉, 수신당이 감리서 본서(本暑)의 건물 당호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과 사진에 등장하는 편액을 토대로 추정하면, 위 이미지에서 상단 사진은 감리서 구청사(舊廳舍)의 본청사(本廳舍)인 대청(大廳, 東軒) 건물[각주:21]로 추정되고, 하단 사진은 감리서 신축 청사의 본청[각주:22] 건물로 보입니다. 5번 이미지의 감리아문 전경에서 안쪽 위로 하단 이미지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단의 구청사 건물 사진에서 기둥에 써 붙인 주련(柱聯)이 많이 뜯겨져 나가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하단의 신청사 건물은 서양식 창호(窓戶)를 절충한 한옥(韓屋)이라는 점이 특색입니다. 사진 해상도 문제로 하단 신축 수신당 사진의 오른쪽에 걸린 편액 글자를 정확하게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각주:23] (하단 신청사 수신당 사진의 촬영 시기는 5번 이미지의 감리서 전경 사진과 동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처럼 경상우수영, 동래도호부, 감리아문의 구청사, 신청사 사진들이 두루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제물포, 서울, 여순항(旅順港, Port Arthur) 지역의 사진이 여럿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수집가 내지 사집첩 소유자가 아마도 당시 부산 지역에서 일정 기간 생활했던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프랑스 파리에 이 사진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일테죠.

부산항 감리서 영원문(寧遠門)5-2번 이미지 -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내삼문(內三門) 영원문(寧遠門)


위 5-2번 이미지는 해당 사진첩에 실린 것이 아닌, 네덜란드 민속학박물관(Museum Volkenkunde)의 소장 컬렉션 가운데 하나입니다.[각주:24]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을 보면 앞의 5-1번 이미지 상단의 감리서 구청사 건물과 난간 부분 형태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모든 부분이 중첩되기 때문에 이 사진은 감리서 구청사 수신당(守信堂)의 내삼문(內三門)[각주:25]이 확실합니다. 또 내삼문을 직진하여 수신당이 있으므로, 이 수신당이 당시 감리서의 제1건물(동헌 대청)임을 유력하게 합니다.

내삼문에 걸린 편액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영원문(寧遠門)'인데, 기록에 따르면 아래 9번 이미지 설명에서 추정할 초량객사(草梁客舍, 大東館)의 중문(中門)도 동일한 명칭의 영원문이었습니다.[각주:26] 1880년(고종17)에 초량객사가 두모포 지역으로 이전되는데, 그로 인해 용도가 사라진 구객사(舊客舍)의 편액을 감리서로 옮겨 달았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각주:27] 만약 그렇다면, 편액의 테두리 틀 장식이 화려한 것과 (문과 비교할 때 편액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커서) 편액이 비교적 큰 각도로 문에 달려 있는 것이 그 방증일 것입니다.


감리서 설치 초기 감리서 청사는 본래 부산의 판찰관(辦察官)[각주:28]이 근무하던 판찰소(辦察所)[각주:29]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각주:30] 부산항 감리서 수장(기관장)의 직급이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설정되고 감사(監司, 종2품 관찰사), 유수(留守, 종2품), 병사(兵使, 종2품 병마절도사), 수사(水使, 정3품 수군절도사) 등의 관청과 동급으로 공문을 주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판찰관의 개칭 전 관직인 정9품 훈도(訓導)[각주:31]와는 차원이 다른 당상관급 신설 관청의 위상에 걸맞게 내삼문, 외삼문 체계를 갖추는 등의 방식으로 기존의 판찰소 건물 내외에 적지 않을 변동이 가해졌을 것입니다.[각주:32]

감리서 구청사의 외대문(外大門)은 위 내삼문과 비슷한 외형의 솟을삼문이 아닌, (5번 이미지에서 확인되는 신설 청사의 2층 문루와 같은 대형 규모는 아니겠지만) 문루(門樓)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각주:33] 판찰소 청사를 정비하는 선에서 해당 공간을 감리서로 사용하였을 것이기에, 기존 청사(아래 6번 이미지의 두모진)에 있던 문루를 계속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대문 편액은 역시 '감리아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각주:34]


감리아문 구청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려 할 때 위 5-2번 이미지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삼문 오른쪽으로 담장이 이어져 있고, 그 담 안에 기와집이 보입니다. 또 사진을 찍은 위치와 내삼문 위치, 내삼문 안쪽의 대청 건물까지 거리를 감안하면 대문에서 대청까지 구역의 대략적인 너비를 추정 가능합니다. 이러한 정보를 기반으로 해서 감리서 구청사 위치를 추론하는 것이 숙제로 남았네요.

동래 두모진 및 개운진 위치 추정도6번 이미지 - 1914년 동래 두모진(豆毛鎭) 및 개운진(開雲鎭) 일대 지적원도


위 6번 이미지는 부산만 일대의 두모진(豆毛鎭), 개운진(開雲鎭) 일대 지적원도(地籍原圖)입니다. 1914년에 측량된 지적도이기에 약 20년 전의 현지 지형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각주:35] 감리서 초기 청사가 들어설 수 있을 만한 중대형 필지(대지)를 어느 정도는 가려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 1872년(고종9)에 제작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지방도(地方圖)》의 〈두모진지도(豆毛鎭地圖)〉, 〈개운진지도(開雲鎭地圖)〉 등을 토대로 추론해 보면 두모진의 진사(鎭舍, 鎭營) 위치는 적색 숫자로 표시된 수정동 288번지[각주:36], 해운진의 진사는 좌천동 514번지[각주:37] 일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각주:38]

위 지적도의 현재 지도상의 위치와 비교하기 위한 참고 표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지점 : 부산지하철 부산진역 위치 (해안을 매립하기 전이므로 바다 지역임)
㉡ 지점 : 부산광역시 동구청 위치
㉢ 지점 : 부산지하철 좌천역 위치
㉣ 지점 : 금성고등학교 위치


좌측 두모진 지적원도에 부속된 작은 지도는 1891년(고종28)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규장각 소장 〈부산항약도(釜山港略圖)〉입니다. '두모포(豆毛浦)' 민가 지역 오른쪽 위에 감리서가 약간 비스듬히 자리하고 있습니다.[각주:39] 지적원도에 〈부산항약도〉 청사 방위를 대입하면 정동(正東) 방향입니다. (지적원도에서 동쪽을 향한 부지는 174, 175, 181번지 일대입니다.) 감리서 왼쪽에 구객사(舊客舍)[각주:40]가 있었다는 1888년 음력 8월 『동래통안(東萊統案)』 기록[각주:41]도 초기 감리서 위치 추정시에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76년(고종13) 10월 22일에 두모진을 폐지하여 개운진에 통합하고 개운진 만호(萬戶)가 두모포 지역까지 관리하게 하고, 부산훈도(釜山訓導)를 판찰관(辦察官)으로 개칭하고 별차(別差)는 역학(譯學)이라고 고쳐서 임소(任所)에 두었습니다.[각주:42] 그리고 1883년에 감리(監理) 제도를 도입해 관리를 임명하였으며, 이렇게 임명된 부산항 초대(初代) 감리[각주:43] 이헌영(李𨯶永, 1837-1907)이 현지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업무를 개시한 시기가 1884년(고종21) 1월입니다. 이때 부임한 곳이 이른바 초량진사(草梁鎭舍)인데, 이 진사(鎭舍)가 앞의 5-2 이미지 설명에서 언급한 판찰소이며, 그 청사 위치는 예전 두모진(두모포)에 있었습니다.

결론하면, 두모진의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었던 두모포만호영(豆毛浦萬戶營)[각주:44]이 1876년(또는 1877년)부터 판찰소 청사로,[각주:45] 그리고 판찰소(초량진사) 청사가 다시 초기(제1차) 감리서 청사[각주:46]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초기 감리서가 정확히 어느 필지에 소재하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관해서는 어느 곳도 그 위치를 확신하기 어렵습니다.[각주:47] 국유지로 표시된 필지가 남아 있었으면 더 수월하게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을 텐데, 학계에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각주:48]

부산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터 지적원도7번 이미지 - 1914년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부근 지적원도(地籍原圖)


위 7번 이미지는 5번 사진의 동래감리서 지역을 실측한 1914년 제작 지적원도입니다. 1914년 시점에 동래감리서가 있던 지역이 학교 부지로 활용되고 있었기에 '垈(대지) 國(국유지) 學(학교부지)'로 지목(地目)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지역에는 현재 부산 봉래초등학교(蓬萊初等學校)가 들어서 있는데,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개성학교(開城學敎)는 지적도 아래쪽에 초록색으로 칠한 640번지[각주:49]에서 개교(改校)하였습니다.


1886년(고종23) 1월 25일자 개성학교 개교식 사진(640번지 촬영)을 보면 지적도 왼쪽에 옅은 보라색으로 칠한 671번지[각주:50], 668번지 구역에 관청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입니다. 일부 향토사학자는 이 671, 668번 필지를 역관(驛館)이 있던 처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017년 7월 보도 기사 링크).

역관인 훈도(訓導)가 있는 곳을 '임소(任所)'라고 하였으며, 임소는 성신당(誠信堂) 건물을 중심으로 남쪽에 별차(別差)가 거주하는 빈일헌(賓日軒), 동쪽에 출사관(出使官)이 거주하는 유원각(柔遠閣, 柔遠館, 出使廳), 통사(通事)가 거주하는 유원당(柔遠堂, 通事廳)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개성학교 개교식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 형태가 일본인 통역관 소전기오랑(小田幾五郞, 오다 이쿠고로, 1754-1831)이 자신의 1796년 저술 『초량화집(草梁話集)』에서 그린 임소지사(任所之事)의 '훈도가(訓導家, 성신당 건물)' 평면도와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임소지사의 임소(任所)는 역관이 머물던 역소(驛所)이고 역소의 대표 건물이 성신당인데, 개교식 사진에 보이는 건물(외곽 돌담)을 위 이미지에 표시하면 671, 668번 대지 위에 진한 보라색으로 표시한 부분처럼 되고, 이 모습이 '훈도가(訓導家) 평면'과 흡사한 것입니다. 역학당(譯學堂) 앞뜰[譯學堂前坪]에 감리서를 신축하였다는 기록이 『해은일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합니다.[각주:51] 개교식 사진을 자세히 보면 위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칠한 554번[각주:52] 국유(國有) 필지에 건물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통사청인 유원당(柔遠堂)인 것 같기도 합니다.


본 글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규장각 소장 〈부산항조계도(釜山港租界圖)〉를 보면 감리서기지(監理署基址, 동래감리서 자리) 뒤쪽(위 지적도에서는 왼쪽)으로 좌측(위 지적도에서는 아래쪽)에 전보국(電報局), 우측(위쪽)에 역학소(譯學所)가 비교적 넓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전보국은 대체로 671번 대지, 역학소는 555번 대지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도면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554번 국유지를 전보국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산항조계도〉의 제작 시기가 1893년(고종39) 3월 이후로 추정되는바,[각주:53] 1882년 7월에 감리서가 신축된 후에 감리서 뒤편에 전보국, 역학소 등이 새로 개설 또는 이설(移設)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계도 도면 자체가 매우 개략적인 형태로 그려졌으므로 전보국, 역학소 등의 정확한 위치나 면적에 관해서는 보다 면밀한 자료 분석이 필요합니다.

부산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건물 배치도8번 이미지 - 부산항 동래감리서 건물 배치 평면도 (추정)


위 8번 이미지는 앞의 5번 사진과 대한제국 시기 도면 자료 등[각주:54]을 토대로 감리서 건물 평면을 추정해본 것입니다. 정확도는 대략 80% 이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5-1번 이미지에서 살펴본 신축 수신당(守信堂)이 청사 서북쪽에 있습니다. 청사 한편에 수신당이 있고, 내삼문 정면에는 붉은색으로 칠한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수신당이 감리서의 중심 건물(동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설 감리서에서 어떤 건물이 대청이었는가 하는 점을 판별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을 헤아려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건물의 정면 사진, 당시 사람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 확인되는 건물이 현재로서는 수신당임 : 우연한 결과일 수 있으나, 건물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자료임 [수신당이 감리서의 본청(대청, 동헌)일 가능성을 높게 함]

ㄴ) 감리서 건물 명칭(당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현재 수신당이 유일함 : 기록물을 남긴 인물(민건호)이 감리서의 최고 관원이 아니었고, 해당 기록에서 수신당과 대칭으로 등장하는 건물명 '천추재(淸秋齋)'가 동래도호부 백화당(百和堂)인데, 백화당은 하급 무장인 비장(裨將)이 일하는 비장청(裨將廳)의 당호였음[각주:55] [가능성 감소]

ㄷ) 건물에 걸려 있던 수신당 편액이 1925년 시점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었음 : (붉은색 건물보다) 수신당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건물의 편액이었기에 건물 철거 이후에도 보관되고 있었을 수 있음 [가능성 증가]

ㄹ) 구청사 시기의 수신당이 장대석 기단 위에 건축되어 있었고, 건물 내삼문(內三門)이 있었음 : 내삼문 외형이 완전하지 않으나, 독립된 명칭(영원문)이 부여된 진입문을 갖추고 있음 [가능성 증가]

ㅁ) 신청사 수신당의 위치가 부지 한쪽에 치우쳐 있고 내삼문 정면에 있지 않음 : 사진에서 관측되는 규모는 수신당이 붉은색 건물보다 큰 것으로 보임 [가능성 중립]

ㅂ) 감리서가 운영되던 시기에 감리서에 독립된 기관장이 있었던 것은 짧은 기간이었고, 대부분의 시기에는 동래부사가 감리를 겸임하였기 때문에 (붉은색 건물이 실제 대청이었음에도, 동래부사가 자신의 본직을 수행하기 위해 주로 동래부 관아에 머물렀던 관계로) 주요 행정이나 활동이 수신당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음 : 일부나마 합리적인 가정임 [가능성 감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수신당이 감리서의 대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수신당을 비롯한 감리서 각 건물의 지위와 용도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추가 사료가 발견되기를 기대합니다.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건물을 5번 사진에서 보면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합니다(5번 이미지에도 파란색 화살표로 표기). 감리서 내에 부산항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관(警察官)이 있었기 때문에, 죄인을 가두는 일종의 유치장 내지 감옥이 아닐까 합니다. 또 이 지역과 이웃한 일부 지역을 합쳐서 별도의 필지(7번 이미지에서 583번지)를 구성하고 있었던 점에 유의합니다. 1894년(고종31) 8월, 갑오경장(甲午更張, 갑오개혁)으로 각 항구에 배치된 경찰관이 경무관(警務官)으로 개칭되고 중앙의 경무청(警務廳) 소속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감리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또는 외부(外部) 직속이고, 감옥 시설을 포함한 경찰서(경무서)는 다른 관청(경무청, 내부, 법부 등)의 통제하게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필지가 구분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각주:56]


현재 넓은 운동장을 가진 초등학교가 이 감리서 터에 있습니다. 구한말에 기존의 행정 관청(동래도호부)과 별개의 관청(감리서)이 설치되자 이를 위해 기존의 다른 관청 건물을 활용하지 않고 넓은 부지에 이런 건물군을 신축했던 것이 새삼 흥미롭습니다. 수출입과 여객 입출국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주요 항구라서 많은 외국인을 상대해야 했기에 어느 정도 격을 맞춰야 했을 것 같습니다.

동래 초량객사 및 설문 위치 추정9번 이미지 - 초량객사(草梁客舍) 및 설문(設門) 위치 추정


위 9번 이미지는 초량 지역이 있던 초량객사(草梁客舍) 위치 추정도입니다. 왼쪽은 1871년(명치4)에 일본해군이 측량한 부산항 해안실측도에 표기된 객사 태동관(太東館, 大東館)[각주:57]과 설문(設門)입니다. 대동관(태동관)이 바로 초량객사이며, 설문은 일본이 거류하는 초량왜관(草梁倭館)과 조선인 거주 지역을 구분하던 경계선이 있던 6칸[間] 규모의 출입문입니다.

이 해안실측도가 1871년(고종8) 시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정확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실측도와 지적원도, 현대 지적도, 현재 지도 등을 중첩해 객사(客舍)와 설문 위치를 추정하면 대략 오른쪽 지도와 같습니다. 초량객사는 붉은색으로 채색한 지점[각주:58] 인근에(또는 '초량객사' 글자 근처에), 설문은 부산지하철 부산역 부근(㉡ 지점[각주:59])에 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초량객사 위치를 신설(新設) 동래감리서가 있었던 현재의 봉래초등학교 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초량객사 자리에 (두모포에 있던) 동래감리서를 신축 이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해안실측도를 보면 작은 개천이 객사 남쪽(객사를 등지고 보면 오른쪽)을 지나고 있고, 객사와 임소 위치가 제법 떨어져 있습니다. 위 9번 이미지 우측 지도를 보면 1914년 지적도상에 개천이 감리서(봉래초) 위쪽(왼쪽)에 있기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 추정하는 초량객사 위치에 의문이 더해집니다.

이에 더하여 현재 학계에서 설문 위치를 ㉠ 지점[각주:60]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예과부장(豫科部長)인 역사학자 소전성오(小田省吾, 오다 쇼고, 1871-1953)가 1925년 당시 초량 지역 현지답사, 증언 채록 등에 의한 고증 결과입니다.[각주:61] 또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초량객사가 있었다고 하는 것도 이 학자의 같은 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옛날의 그 시기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답사하고 연구한 것이라서 정확도가 상당할 것이지만, 앞에서 기술한 이유로 인해 (초량각사 위치 비정에) 재검토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임소 위치는 앞의 7번 이미지 설명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임소 바로 위의 노란색 채색 부분은 554번 국유지입니다. 참고로, 위 9번 이미지만 보면 7번 이미지의 640번지 부지 개성학교 개교 당시 터가 성신당이 있던 임소일 수 있습니다.)


앞의 의문을 보강하는 내용을 더 적어보자면, 감리서를 신설하면서 '동래부(東萊府) 사하면(沙下面) 신초량(新草梁) 신지(信地) 안에 감리서(監理署)와 경찰서(警察署)를 옮겨 지을 터의 전답 1결 13부 4속[田畓結 一結十三負四束]에 대해 부세를 면제'하는 문제가 중앙에 보고됩니다. 신지(信地)는 '예정지'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적힌 면적(1결 13부 4속=약 3,400평)[각주:62]이 당시 신축된 감리서 면적(약 2,400평?)을 간단히 초과합니다. 초량객사 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각주:63], 나머지 땅만 확보하면 되었을 것이기에 기타 부속되었을 부지를 참작하더라도 1결 이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초량객서 터에 감리서를 새로 건축한 것이라면 관련 문서에 '초량객사 옛터에..', '전(前) 객사 자리..' 같은 표현이 등장했을 법한데, '초량 사정 북쪽[草梁射亭北]', '역학당 앞뜰[譯學堂前坪]' 등으로 표현될 뿐 그러한 표현이 전혀 없는 것도 고려할만 합니다.


초량객사는 1880년(고종17)에 북쪽의 부산진(釜山鎭, 부산진성) 방향에 더 가까운 두모포 지역(최초의 감리서 근처)으로 이전됩니다. 본 글에서 원래의 객사 터로 추정하는 지점은 이전(移轉) 이후(以後) 밭[田]이 되었습니다. 어디에 있었던 그 지역이 관유지(官有地), 국유지로 계속 남아 있었으면 정확한 객사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입니다.[각주:64]

동래 부산진성 객사 공진관(拱辰館)10번 이미지 - 동래 부산포진(釜山浦鎭) 객사 공진관(拱辰館)


위 10번 이미지는 부산포진, 즉 부산진성(釜山鎭城) 내에 있었던 객사(客舍) 공진관(拱辰館)의 정면 사진입니다. 객사는 지방 행정구역인 부목군현(府牧郡縣)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병마진(兵馬鎭, 육군진), 수군진(水軍鎭) 등이 근무하던 중소규모 군진(軍鎭)에도 있었습니다.

사진처럼 중앙의 정청(正廳)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익헌(東翼軒, 左翼軒), 오른쪽에 서익헌(西翼軒, 右翼軒)을 갖춘 이런 형태의 건물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객사 모습입니다. (2번 이미지에서 본 경상좌수영 객사 형태와 다음에 설명할 다대포 객사 모습이 그래서 특이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부산진 객사의 규모는 36칸[間]입니다. 사진을 보면 정청이 12칸(정면 3칸x측면 4칸), 서익헌(사진 왼쪽 부분)이 8칸(정면 2칸x측면4칸)이므로, 동익헌이 나머지 16칸(정면 4칸x측면4칸)이었음 알 수 있습니다.[각주:65]

정청에 걸린 편액 글자를 대략적이나마 그려 보면 사진의 왼쪽 아래 모습과 같습니다. 부산진성을 원거리에 찍은 사진에 객사 측면이나 일부가 몇 확인되고 있었지만, 객사 정면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의 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동래 다대포진(多大浦鎭) 전경11번 이미지 - 동래(東萊) 다대포진(多大浦鎭) 전경


위 11번 이미지가 마지막으로 특별하게 본 사진입니다. 사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조선시대 제작 지도, 일제강점기 지적원도, 기타 사진 등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현재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던 옛날의 다대포진(多大浦鎭) 전경을 촬영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면 5칸의 객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객사 정면에 문루 형태의 원문(轅門)[각주:66]이 있습니다.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 안에 있던 객사의 명칭은 '회원관(懷遠館)'이며, 1872년 제작 《지방도》의 〈다대진지도(多大鎭地圖)〉에 따르면 객사 우측 뒤로 아사(衙舍)가 있었고, 객사 정면에 문루(원문)가, 다시 그 아래에 진성(鎭城)의 남문(南門)[각주:67]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판옥선(板屋船) 같은 전선(戰船)이 한두 척 정박해 있었을 포구 선창(船艙)에는 작은 고깃배가 서너 척 묶여 있을 뿐입니다.[각주:68] 그리고 선창 바로 앞에는 배를 수리하는 서평선소(西平船所, 서평진 선박 수선소)가 있었습니다.


아사(衙舍)는 즉 다대포진을 책임지던 정3품[각주:69] 다대포수군첨절제사(多大浦水軍僉節制使)가 근무하던 동헌(東軒, 鎭舍)[각주:70]인데, 최근 관련 논문에서는 '아사?'로 표시한 건물을 동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동래 다대포진성 삽화참고 이미지 2번 - 부산 인근 마을, 동래 다대포진성 일러스트 (1891년경)


위 참고 이미지 2번은 다른 책자[각주:71]에 실린 일러스트 가운데 하나입니다.[각주:72] (책자의 같은 페이지에 11번 이미지와 거의 같은 곳을 그린 일러스트도 있으나, 이 일러스트는 위 삽화와 달리 건물 묘사가 대폭 간소화되어 있어 고증 자료로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정밀하게 그려진 위 삽화는 사진 원판을 저본으로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의 11번 이미지에서 볼 수 있었던 원문(轅門) 문루가 있고 그 앞에 남문(南門)이 있습니다. 원래는 이 사진이 어떤 곳을 촬영한 것인지 미상이었는데, 11번 이미지로 인해 다대포진의 일부를 촬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1번 이미지와 위 일러스트를 조합하면 아래 그림처럼 1890년대 무렵의 다대포진 전경이 그려집니다.


다대포진의 건물 하나가 부산광역시 사하구 몰운대(沒雲臺)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다포 객사'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최근인 2020년 7월에 부산시 문화재위원 심의를 거쳐 '대대진(多大鎭) 동헌(東軒)'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으로 인해 그 결정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근거에 의한 것이었는지 관해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 관련 논점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현존하는 건물이 〈다대진지도〉 등에 묘사된 객사 건물과 그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객사가 아니라는 주장 : 위 사진으로 주장의 근거가 사라짐

ㄴ) 문헌에 따르면 객사 건물은 15칸[間]인데 현존 건물은 10칸(정면 5칸x측면 2칸)이기 때문에 객사가 아니라는 주장 : 위 사진의 객사 건물이 15칸(정면 5칸 x 측면 3칸)임

ㄷ)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촬영된 현존 건물 사진을 보면 건물 뒤쪽에 축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은 부지(윗운동장)가 있는데, 만일 이 건물이 객사라면 맞지 않는다는 주장 : 사진을 보면 (해상도 때문에 식별이 쉽지 않지만) 객사 뒤쪽에 작은 문이 있는데 문에 이르는 계단이 있는 것을 축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층위를 두고 객사 뒤쪽으로 상당히 넓은 면적이 있음 (전자의 주장이 맞다면 동헌 뒤쪽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축대가 있어야 하거나 학교 부지가 전체 3단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상황?)

ㄹ) 일제강점기 때 다대진 부지가 학교 용도로 사용될 때, 현존 건물이 '첨사청(僉使廳)'으로 불렸기에 객사가 아니라는 주장 : 현존 건물 이전시 관계자들이 '객사'로 인식하고 있었고, 본래 있던 객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본래 첨사청을 객사 용도로 전환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음[각주:73]

위와 같은 세 가지 논점에 더해, 위 참고 이미지에 해안가 도로(㉠), 남문(㉡), 원문(㉢)으로 표기한 부분에 주목합니다. 도로, 남문, 원문, 그리고 객사 건물까지를 직선으로 이어보면 거의 비슷한 간격으로 네 지점이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고, 객사 건물은 ㉠ -㉡ -㉢을 잇는 직선에서 약간 왼쪽에 위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점을 1913년 당시 지적원도에 대입하면 대략적인 남문, 원문, 객사 건물의 위치가 특정됩니다. 즉, 1960년대에 다대포 지역을 촬영한 사진의 건물 위치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ㄷ)에서 언급한 '윗운동장'이 존재하기 위한 객사 뒤 공간도 충분합니다.

문제는, 11번 이미지의 객사 건물이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상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각주:74], 양성바름이 제거되어 있으며, 이 시점의 건물 규모도 위 이미지에 담긴 다대포 전경의 객사와 비교할 때 약간은 작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문헌에 따르면 동헌 건물도 13칸이므로, 어차피 10칸인 현존 건물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과연, 현재 '다대진 동헌'으로 개칭된 현존 건물은 다대포 객사(客舍)일까요, 동헌(東軒)일까요, 아니면 그 둘도 아닌 제3의 건물이었을까요. 동헌(첨사청)을 객사 용도로 사용하고 안쪽에 동헌을 신설하거나 다른 건물을 동헌으로 만들었다면, 원래의 동헌 건물은 객사일까요, 여전히 동헌일까요. 더욱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참고] 다대포진에 관한 추가 글은 '동래(부산) 다대포 진성, 객사, 동헌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및 조선군 병사12번 이미지 - 경상좌도수군절도사(좌), 조선군 병사(우)


마지막으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선글라스를 벗은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제물포에서 촬영된 조선군 병사 사진을 올려봅니다. 같은 사진첩에 실린 사진들입니다. 100여 년 전의 격변하던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입니다. 그 표정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본 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경상좌수영 외삼문, 객사 모습과 편액을 담은 사진 확인 (경상좌수영 외삼문, 객사 원형 자료)
2) 동래도호부 관아를 새로운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 확인 (동래부 관아 건물 배치 참고)
3) 동래감리서 전경, 감리서 대문, 감리서 신구(新舊) 대청 및 구청사 내삼문을 담은 사진 확인
4) 부산진 객사 정면 사진 확인
5) 다대포진을 담은 사진 확인 (현존 건물이 객사인가, 동헌인가 의문 관련 자료)



[후기] 이 사진첩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날짜가 지난 6일 새벽이었습니다. 약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틈틈이 자료를 찾아 추론하고 편집하면서 글을 썼기에 수록 내용에 오류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글 분량도 처음 기획했던 것에 비해 장황하게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몰랐던 감리서(監理署) 관청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부산의 초량(草梁)과 다대(多大) 지역에 대한 이런저런 탐험을 할 수 있어서 새삼 즐거웠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소개한 사진만으로도 관아건축에 관한 논문 두세 편의 훌륭한 소재 내지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안내] 사진첩 주소를 아래에 링크합니다.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장식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의 디지털 자료입니다. 이 사진첩에는 초량왜관 전관거류지(全管居留地), 서관(西館)을 담은 사진, 부산진성 원경, 제물포 골목, 고종(高宗), 흥선대원군 등의 인물 사진, 궁궐 풍경, 조선군 훈련 모습, 서울(한성부)의 주요 시설을 촬영한 다양한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사진첩 원문 링크 : http://artsdecoratifs.e-sezhame.fr/id_2219429010580886274.html



2020.10.18 - 최초 등록
2020.11.24 - 경상좌수영 내삼문(內三門) 추정에서 외삼문(外三門) 추정으로 수정 [2번 이미지]



  1. 팬저의 국방여행 블로그(http://panzercho.egloos.com)에서는 이미 2010년에 이 사진의 주인공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칙령(勅令) 제140호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의 폐지에 관한 안건[各道兵營水營廢止件]〉 재가 반포, 『고종실록』 권33. 고종32년 7월 15일 계축조. [본문으로]
  3. 언뜻 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진관을 연 사람으로 알려진 지운영(池雲英, 1852-1935)과 흡사합니다. 지운영은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인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의 친형입니다. 만일 사직 속 인물이 일본인이라면 지운영과 함께 국내에 들어온 일본인 혼다 슈노스케[本多修之助]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만약 이들이 사진의 촬영자이고 입국할 때 촬영한 것이라면 그 시기는 1883년입니다. [본문으로]
  4. 철학자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선생의 증조부(曾祖父). [본문으로]
  5. 외삼문(外三門) 안쪽을 자세히 보면 내삼문(內三門) 일부가 보입니다. 사진의 삼문을 외삼문으로 추정하는 근거입니다. [본문으로]
  6. 객사(客舍)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대부분의 지방 관아(官衙) 곁에 객사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7. 각종 고지도에 경상좌수영의 객사(客舍) 모양이 전형적인 형태로 그려진 것은, 지도 작성시에 실제 그런 모양이었을 수 있지만 (실제 건물 외형이 다름에도) 객사임을 지도상에서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처럼 묘사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건물에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8. 본문의 〈경상도좌수영관아배설조사도〉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동헌(東軒)이 관운당(管雲堂), 제승당(制勝堂), 운주헌(運籌軒)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3개 이름이 1개 건물의 별칭인지, 1개 또는 2개 건물에 3개 편액이 걸려 있었음을 의미하는지, 각각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개 건물이 유력함) [본문으로]
  9. 사진에 보이는 문루(서문루)가 동래도호부 관청의 외대문(外大門)입니다. 대문을 들어가 직진하다가 왼쪽에 있는 중문(中門)과 내삼문(內三門)을 거쳐 동헌인 수호각에 당도합니다. 내삼문 편액이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인데, 현재 동래부 동헌 건물지(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60호)에서는 이를 외대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사진의 건물 배치가 국립중앙박물관 및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 묘사된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건물 배치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본문으로]
  11. 자료 확인 과정에서 부산광역시 중구 소재 백산기념관(白山記念館)에 이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만 해당 기념관에서는 이 사진을 동래감리서가 아닌 '1895년경 옛 초량객사(草梁客舍)'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2.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1884년(고종21) 8월 신축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 사진이 이 사진첩에도 실려 있습니다. [본문으로]
  13. 1891년(고종28) 9월 19일 병진일 기록, 『해은일록(海隱日錄)』, 민건호(閔建鎬). [본문으로]
  14. 1892년(고종29) 3월 30일 무자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15. 1892년(고종29) 7월 25일 경술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16. 감리서 문루(門樓) 철거 시기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것은 1906년(광무10) 10월의 동래감리서 폐지 직후이며, 그다음 후보는 감리서가 잠시 폐지되었던 1895년(고종32) 5월부터 1896년 8월 사이입니다. [본문으로]
  17. 초량왜관(草梁倭館)에 거류하던 일본인 재판을 담당하던 일본측 재조선국부산일본재판소(在朝鮮國釜山日本裁判所)가 1908년에 통감부(統監府)에 의해 부산구재판소(釜山區裁判所, 釜山区裁判所)로 확대 개편되었다고 합니다. 1909년에 부산시 서구 부민동(富民洞)에 구재판소가 개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것은 나중의 일(동래감리서 터에 있다가 부민동으로 신축 이전한 재판소)일 것입니다. [본문으로]
  18. 부산지방재판소(釜山地方裁判所) 개청 시기가 1909년 11월 1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부산의 구재판소(區裁判所)가 진주지방재판소(晉州地方裁判所) 관할 아래에 있었습니다(이때 경상남도 전역을 관장하는 재판소가 진주지방재판소에서 부산지방재판소로 변경됨). 따라서 사진 촬영 시점을 더 좁히면 1909년 11월 이후가 됩니다. [본문으로]
  19. 일본인 역사학자 소전성오(小田省吾, 오다 쇼고)의 기록에 따르면 감리서 대청에 걸린 수신당(守信堂) 편액은 권동수(權東壽, 1842-?)의 글씨라고 합니다['受信堂(權東壽筆)']. 다만, 1925년 당시에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부산공립보통학교에 보존되어 있던 이 편액을, 감리서 대청이 아닌 부산훈도 처소인 성신당(誠信堂)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습니다. 권동수는 본관 안동(安東), 자(字) 치영(致永), 호(號) 석운(石雲)이며, 친군전영(親軍前營) 문안(文案), 해삼위(海蔘葳, Vladivostok) 통상사무관(通商事務官) 등의 관직을 지내고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의 암살에 가담한 인물입니다. 당대에 서예가로 이름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20. 1885년(고종22) 7월 18일 갑인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21. 감리서 구청사 동헌(東軒)의 대청(大廳)은 1891년(고종28) 10월 14일에 철거됩니다. (수신당이 구청사 동헌 대청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1891년 10월 14일 을사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22. 감리서 관련 기록에서 당호가 등장하는 건물은 이 수신당(守信堂)이 유일하며, 같은 사진첩에 이 수신당 편액이 걸린 신청사 앞에서 여러 인물이 모여 촬영한 기념사진도 있습니다. 이 기념사진이 『해은일록』의 저자가 같은 신분인 사람들과 모여서 찍은 사진에 불과할 수 있고, 신청사의 수신당 건물이 청사 부지 중앙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다는 점에서 이 수신당을 신설 감리서의 최고 건물(중앙 관아의 당상대청에 해당)이 아닌, 제2건물(중앙 관아의 낭청대청에 해당)이라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5-2번 이미지를 비롯한 다수 정황을 참고하면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구청사 시절에는 수신당이 대청이었으나,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한 단계 낮은 건물로 편액을 옮겨 걸었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본문으로]
  23. 앞의 한 글자가 불분명합니다. '전조헌(靛潮軒)', '청조헌(聽潮軒)' 정도로 보입니다. [본문으로]
  24. 사진 표제는 'Een huis in Korea (한국의 집)', 사진사는 Higuchi. [본문으로]
  25. 완벽한 형태의 내삼문(內三門)은 아닙니다. 문 하나의 기와가 행랑(行廊)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26. 小田省吾, 釜山倭館の変遷と其遺址 3, 조선사학제3호(朝鮮史學第3號), 조선사학동고회(朝鮮史學同攷會), 1926년. [본문으로]
  27. 초량객사의 외대문 문루가 공해문(控海門, 控海樓)인데, 『해은일록』1893년(고종30) 3월 30일 기록의 율시(律詩)에 '공해문'이 보입니다. [본문으로]
  28. 기록에 따라 판찰(辦察), 변찰(辨察)로 표기하나, 판찰로 표기된 기록이 다수일뿐 아니라 한자(漢字)의 의미를 헤아려도 직함으로 '판(辦)'이 어울하므로 본 글에서는 판찰관, 판찰소 등으로 표기하였습니다. 다만 청사 정문에 '변찰아문(辯察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 등을 볼 때, 관아 개설 초기에는 변찰소, 변찰관 등으로 불려지고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문으로]
  29. 초기 판찰소는 부산진 훈도가 근무하던 임소(任所), 즉 7번 이미지의 '성신당 임소' 지역에 위치하였으나, 곧 두모포(豆毛浦)의 두모진 청사[豆毛鎭舍]로 이전됩니다. [본문으로]
  30. 1893년(고종30) 12월 11일 정사일 기록 '신시(申時)에 전(前)판찰소에 도착하였으니, 곧 본서(감리서)이다[申刻到前辦察所 卽本署也].',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31. 두모포에 판찰소가 설치될 때 판찰소 청사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일 판찰관이 두모진(豆毛鎭) 청사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더라도 감리서 수장과 종4품 두모포 만호(萬戶) 사이에는 여전히 위계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32. 감리서 구청사에 내삼문, 외삼문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해은일록』 곳곳에 있습니다. [본문으로]
  33. 민건호(閔建鎬)의 『해은일록(海隱日錄)』에 '문루(門樓)'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또 1878년 11월에 부산 지역을 방문한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매이슨 사토우(Sir Ernest Mason Satow, 1843-1929)는 감리서로 사용되기 이전의 판찰소 시절에 청사를 방문했는데, 이때 2층 대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토우 기록의 출전은 『A Diplomat in Japan, Part II: The Diaries of Ernest Satow, 1870-1883』이며, 앞 28번 주석의 '변찰아문(辯察衙門)'도 이 책에 등장합니다. [본문으로]
  34. 감리서 개설 초기 편액은 '감리통상사무공서(監理通商事務公署)'였습니다. 1885년(고종31) 11월에 감리서 규정이 변경되면서 1886년부에는 대문 편액이 '감리아문'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1883년(고종29) 1월 2일 기록 '외문 현판을 '감리통상사무공서'라 고쳐 쓰고 새겨서 걸었다[外門懸板以監理通商事務公署改書刻掲].', 『부서집략(釜署集略)』, 이헌영(李𨯶永). [본문으로]
  35. 다른 지역은 구한말 당시와 지적원도 제작 시기(1910년대) 사이에 변화 편차가 크지 않은데, 여기에 수록한 부산 해안 일대 지역은 경부선 철도 부설 및 역사 마련, 외국인 계류지 조성, 해안 매립사업 등으로 20여 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 [본문으로]
  36. 현재 지번 주소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288 (도로명 주소 : 부산광역시 동구 고관로 109-5 인근) [본문으로]
  37.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동구 좌천동 514-2 (도로명 주소 : 부산시 동구 정공단로 17 인근) [본문으로]
  38. 지적도상의 인근 여러 개 필지를 합쳐야 관아(군영) 시설을 수용하기에 충분한 면적이 확보됩니다. [본문으로]
  39. '예전 두모진(豆毛鎭)은 지금 판찰관(辦察官) 처소가 되어 있으며[前豆毛鎭 今爲辦察官處所]..', 『승정원일기』 고종14년(1877) 8월 4일 정묘일 기사. [본문으로]
  40. 두모진(豆毛鎭)의 객사(客舍)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1876년(고종13) 10월에 두모진이 폐지되면서 두모진에 있었을 객사의 기능도 중단되었으나, 1880년(고종17) 8월에 초량객사(草梁客舍)를 두모관(豆毛關, 두모진)으로 옮겨 지었습니다. 또 『해은일록(海隱日錄)』에 따르면 1886년(고종22) 5월 17일에 어딘가(초량객사?)에서 옮겨 온 전패(殿牌)를 감리서 경내 또는 인근에 봉안(奉安)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존 두모진 객사를 활용했을 가능성, (판찰관 처소 근처에) 새로 객사 공간을 마련했을 가능성 등에 유의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41. '본서 좌변에 있는 구 객사[本署左邊有舊日客舍]',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발송. [본문으로]
  42. 1876년(고종13) 10월에 두모진(豆毛鎭)을 혁파하여 이웃한 개운진(開雲鎭)으로 소속시키고, 부산진 훈도[釜山訓導]를 판찰관(辦察官)으로 개칭한 후, 부산훈도 현석운(玄昔運, 1837-?)을 판찰관에 명하였다., 『고종실록』 권13. 고종13년 10월 22일 기유조. [본문으로]
  43. 정식 직함은 감리부산항통상사무(監理釜山港通商事務). [본문으로]
  44. 감리서 외대문 밖에 군관청(軍官廳)이 있었다는 『해은일록(海隱日錄)』의 1886년(고종23) 5월 14일 기록이 이러한 추정을 일부 강화합니다. [본문으로]
  45. 판찰소 청사가 두모포에 자리잡을 때에는 두모진 군영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후에 일부 청사의 증축 내지 신축이 있었습니다. '두모포(豆毛浦) 선창(船艙)의 모래를 파내고 변찰소(辨察所) 해사(廨舍, 청사)를 짓는 데 쓸 역비(役費)를 떼어 주었는데[豆毛浦船艙 掘沙辨察所 廨舍修建之役費劃下]..'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만직(李萬稙)의 1878년(고종15) 7월 19일자 보고, 『승정원일기』 고종15년 7월 19일 정묘일 기사. [본문으로]
  46. 감리서가 들어서기 전에 기존 판찰소 청사의 전체 또는 일부가 해관(海關) 청사로 사용된 시기기 있었습니다. 『해은일록』의 1891년(고종28) 9월 14일자 기록에 따르면, 이 때문인지 당시 감리서 부지[本署基地] 문제를 해관을 관장하는 중앙의 총세무사(總稅務司)에 조회합니다. [본문으로]
  47. 학계에서는 부산광역시 동구 소재 수정초등학교 부근을 판찰소와 초창기 해관 위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6번 이미지 좌측 지적도에서 278번지와 249번지 사이에 있는 화살표 지점에서 278번지와 175번지 사이 거리 간격만큼 북쪽으로 이동한 위치(지도 밖에 존재)입니다. [본문으로]
  48. 관청 기능이 중지된 땅이 마땅한 용도를 찾지 못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대지로 유지되지 못하고) 경작을 위한 논밭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참작하면 두모진 위치는 278번지, 249번지 위에 있는 넓은 밭 지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49.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중구 영주동 640-1 (도로명 주소 : 부산시 중구 대영로242번안길 4 인근) [본문으로]
  50.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중구 영주동 671-3 (도로명 주소 : 부산시 중구 대영로224번길 10 인근) [본문으로]
  51. 1891년(고종28) 10월 14일 을사일 기록, 1891년(고종28) 10월 23일 갑인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52.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중구 영주동 554-1 (도로명 주소 : 부산시 중구 중구로188번길 3 인근) [본문으로]
  53. 감리서와 해안 사이에 러시아인 Dolotkevich P.M(多羅威克赤, 다라위극적)의 건물지[基地]]가 표시된 점을 참작한 추론입니다. [본문으로]
  54. 신축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전경을 다른 각도(남쪽)에서 찍은 사진도 한 장 전해지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55. 민건호가 동래부 호방(戶房) 오위장(五衛) 이사훈(李思勳, 1831-?)에게 주는 전별시의 내용이기 때문에 자신이 일하는 수신당과 오위장이 있었던 비장청이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본문으로]
  56. 가능성은 작지만, 583번 필지가 기존 초량객사(국유지) 터이고, 나머지 582번지가 새로 확보된 부지(민유지)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57. 해안실측도에는 '태동관(太東館)'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명칭은 '대동관(大東館)'입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각종 문헌에서 '大'를 기록할 때 '太'라고 기재하였습니다. 대동관은 초량객사(草梁客舍)를 (주로 일본측 기록에서 부르던) 별칭인데, 객사 정청(正廳)에 걸려 있던 편액의 글자(명칭)였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58.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중구 영주동 19-1 (도로명 주소 : 부산시 중구 초량중로 5-1 인근) [본문으로]
  59.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동구 초량동 1210-6 (도로명 주소 : 부산시 동구 중앙대로 169 인근) [본문으로]
  60. 현재 지번 주소 : 부산시 동구 초량동 571 (도로명 주소 : 부산시 동구 중앙대로179번길 16 인근) [본문으로]
  61. 小田省吾, 釜山倭館の変遷と其遺址 3, 朝鮮史學第3號, 朝鮮史學同攷會, 1926. [본문으로]
  62. 토지 1결(結)이 100부(負)이므로, 1결 13부 4속은 1.134결이 됩니다. 조선시대의 토지 면적을 현대 면적으로 변환하는 데에는 자료에 따라 여러 환산 기준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1등전 1결은 약 2,750평, 1902년(광무6)의 1결 면적은 3,025평(1ha)이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전자를 적용하였습니다. [본문으로]
  63. 초량객사(草梁客舍) 터는 약 1천 평 규모였습니다. 신축 감리서의 약 40% 면적입니다. 9번 이미지에 표시된 대동관(초량객사) 면적이 실제에 상당히 근접합니다. [본문으로]
  64. 본 글에서 소개한 사진첩과 여럿 중첩되는 사진이 수록된 31점의 사진이 2013년 12월에 경매되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진들 소개에 '초량객사'로 유력하게 추정할 수 있는 사진이 한 장 실려 있습니다. [본문으로]
  65. 조선시대 객사(客舍)는 문관(文官)이 숙박하던 동익헌(東翼軒)과 무관(武官)이 이용하던 서익헌(西翼軒)을 동일한 규모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서로 규모가 다를 경우에는 대개 동익헌을 더 크게 지었습니다. [본문으로]
  66. 원문(轅門)은 군영(軍營)의 영문(營門) 또는 관문(關門)을 뜻하며,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 원문 명칭은 진남루(鎭南樓)였습니다. [본문으로]
  67. 다대포진성 남문(南門) 명칭은 장관루(壯觀樓)입니다. [본문으로]
  68. 이 선창은 다대포진 동북쪽이 있던 서평진(西平鎭)의 선창입니다. 서평진은 1881년(고종18)에 이미 폐지된 상태였습니다. 다대포진 역시 1887년(고종24) 시점에 편제상 존재해야 했던 전선(戰船)이 없었습니다. (반면, 같은 기록물에서 1885년 12월 15일에 저자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순천(順天)의 전라좌수영에 겨우 형체만 갖춘 상태이기는 하지만 거북선[龜船] 한 척이 강가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1887년 10월 6일 기축일 기록, 『해은일록』, 민건호. [본문으로]
  69. 첨절제사(僉節制使)는 종3품 관직이지만, 경상도 동래 다대포진(多大浦鎭, 수군영)과 평안도 강계(江界)의 만포진(滿浦鎭, 병마영)에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하였습니다. [본문으로]
  70. 다대포진성 동헌(東軒) 명칭은 수호각(睡虎閣)입니다. [본문으로]
  71. 스미스소니언 재단 운영위원회 연간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Regents of the Smithsonian Institution), 1891년판. [본문으로]
  72. 일러스트에는 'Two Views of a Korean Village near Fusan (부산 인근 한국인 마을 풍경 두 장)'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미지에는 'Corean village near Fusan (부산 근처 한국인 마을)'이라고 필기되어 있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73. '다대포객사는 현재 본관 건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되었다. 그 이후 현재 본교 교문 옆 제1학년 1반 자리에 있었던 첨사영 건물을 객사로 활용하였고, 또한 1904년 다대포사립실용학교로 개교할 당시 교실 건물로 활용하게 되었으니...', 『다대100년사(多大百年史)』, 다대초등학교 총동창회, 2004년. [본문으로]
  74. 측면이 3칸[間]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측면에 낸 작은 출입문이 전퇴(前退) 1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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