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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일러스트 이미지는 1892년(고종29) 7월에 낙성된 부산항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청사의 외삼문(外三門) 문루(門樓) 전경을 감리서 청사 안쪽에서 그린 것입니다. 본래 초량(草梁) 객사(客舍) 문루의 편액도 '공해루(控海樓)'였는데, 감리서 청사에도 같은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추정이지만, 과거 초량객사 문루의 편액을 그대로 옮겨서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의 글 '경상좌수영, 동래도호부, 동래감리서, 부산진 및 다대포진 객사 이야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량 객사 중문에 있던 편액 '영원문(寧遠門)'이 최초 부산항감리서(동래감리서) 내삼문(內三門)에 걸려 있던 것을 참작하면, 초량 객사 외문루(外門樓) → 제2차 부산 판찰소 문루 (= 두모포진 외대문 = 최초 동래감리서 외대문) → 신설 동래감리서 정문 순서로 이 '공해루' 편액이 이동되었을 것입니다.
앞의 일러스트와 동일한 구도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하나는 그림(일러스트), 다른 하나는 사진인 점이 특이합니다. 일러스트는 컬러를 담을 수 있었기에 따로 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문루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자세가 동일한 것으로 봐서 앞의 일러스트는 위 사진을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랑스의 구식민지 박물도서관(Bibliothèque de l'ancien Musée des colonies) 소장 사진이며, 사진 속의 외국인 등장인물은 프랑스인 삽화가인 조르주 페르디낭 비고(Georges Bigot)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설 동래감리서 전경과 '감리아문(監理衙門)' 편액이 걸린 외대문(外大門) 바깥쪽 사진은 앞 문단에 링크한 본 블로그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동래의 부산항감리서는 1895년(고종32) 6월 23일(음력 윤5월 1일)에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동래부(東萊府, 관찰사)가 위치하게 됩니다. 즉, 23부제(府制) 시행에 따라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가 이듬해 8월까지 부산항 감리서 청사를 사용하였으며, 1896년(고종33) 8월 4일을 기해 23부가 13도(道)로 개편되자 동월 7일자로 관찰부가 사용하던 예전 청사 자리에 동래감리서가 복설되었습니다. 다시 설치된 감리서는 1906년(광무10) 9월 24일까지 존속하였으며, 최종 폐지 이후에는 동래부(東萊府, 부윤)가 입주합니다. 이 부분은 앞의 글에서 살펴본 내용입니다.
ps. 티스토리 블로그 기능 개편 이후에 따라 글쓰기를 잠정 중단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것 같아서 이렇게 짧은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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