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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 충청감영, 경상감영, 전라감영 내용을 다뤘던 같은 제목의 전편(새창 열기 링크)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예고했던 것처럼 이번 편에서는 황해감영, 강원감영, 평안감영, 함경감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5. 황해감영

황해감영(黃海監營)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현판) 이미지
해주 황해감영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


황해감영(黃海監營)은 황해도 해주목(海州牧)에 있었습니다. 해주읍성 서문(西門)인 선위문(宣威門)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감영 앞 연못에 있던 부용당(芙蓉堂)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관찰사가 공식 업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 건물은 1927년에 황해도청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민간에 불하(拂下, 매각)되었는데, 1935년에 해주 시장 근처에서 선화당 건물을 바라본 감회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온전히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며, 당시 제대로 보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아마도 한국전쟁 전란 과정에서 소멸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부용당 역시 한국전쟁 때 기단만 남고 파괴되었다가 2003년에 복원되었습니다.

황해감영은 다른 여러 감영과 달리 매우 특이한 진입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청감영, 경상감영, 평안감영이 일직선 진입로 형태로 되어 있었고, 경기감영과 전라감영, 강원감영, 함경감영이 중간에 한 번 꺾는 ㄱ 또는 ㄴ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황해감영은 이러한 ㄱ, ㄴ 구조가 중첩되는 번개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정문인 외문루(外門樓, 포정문)를 통해 경내로 진입한 다음 바로 왼쪽으로 꺾어 중삼문(中三門, 중문)을 지난 후, 다시 오른쪽으로 90도 회전해 내삼문(內三門)을 걸어 들어가면 선화당 건물에 닿습니다.

감영 포정문 편액(扁額, 현판) 명칭은 '해서포정문(海西布政門)'이었는데, 1888년(고종25/명치21)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참모본부 발행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해주목 읍치(邑治) 항목을 보면 '安政布政司(안정포정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백한 오자(誤字)인 공주목(公州牧) 부분 기록의 충청감영 포정문 '湖南布政司(호남포정사, 실제는 호서포정사)' 과 달리 어느 정도 사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政(정)' 글자의 기록 착오로 인한 것으로 본래 명칭은 '안서포정사(安西布政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합니다. 해주의 고려 때 행정구역 명칭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였기에 해주 또는 황해도의 별칭이 '안서(安西)'였기 때문입니다. 1880년대는 일본측 군인, 밀정 등이 조선에 잠입해 지리 정보를 획득하고 각종 목측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으므로 필사(筆寫) 과정에서 이와 같은 오류가 흔히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안정포정사(安政布政司)가 정확한 기록이라면 안서(황해도) 지역의 정치(政治)를 행하는, 또는 황해도 관찰사의 정당(政堂)이 있는 포정사라는 뜻이겠죠. 이러한 황해감영 포정문 편액 문제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1880년대까지는 '안정포정사(安政布政司)', 1890년대에 23부제 해주관찰부 또는 13도제 시행 과정에서 '해서포정문(海西布政門)'으로 변경
2) 1880년대까지는 '안서포정사(安西布政司)', 이후에 위 1)에서 적은 사유로 '해서포정문'으로 변경 [유력]
3) 본래부터 '해서포정문' (안정포정사, 안서포정사 기록은 단순 착오?)

아무튼 현재 사진 자료로 확인되는 것은 해서포정문입니다. '문(門)' 글자가 직설적으로 표기된 것이 특이하죠. 포정문 문루 별칭은 망월루(望月樓)입니다. 중문인 청향문(淸香門)은 기록만 전해지며, 내삼문인 유화문(流化門)은 포정문처럼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진에 내삼문 너머로 선화당 편액이 (해상도가 낮지만) 관측됩니다. 중삼문은 여러 사진 자료를 참작할 때 위 건물 배치도에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은 수양관(首陽館)을 중심으로 한 내아(內衙) 권역을 넓게 본 것이며, ㉠은 징청각(澄淸閣) 예비 후보지입니다. ㉠ 북쪽, 즉 선화당 10시 방향의 한글 '고)'가 겹치는 지점의 ㄱ 형태 건물도 남쪽 일부(2칸?)는 장초석(長礎石)을 갖춘 누각 형태였습니다. 황해감영에는 팔도 감영 중에 유일하게 관풍각(觀風閣)과 징청각 두 건물이 모두 존재했는데, 편액 형태는 미상입니다.



6. 강원감영

강원감영(江原監營)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현판) 이미지
원주 강원감영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


강원감영(江原監營)은 원주목(原州牧)에 소재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도로명 주소로 원주시 원일로 77이며, 지번 주소로는 일산동 54번지 일대입니다. 사적 제439호 '원주 강원감영'으로, 옛 건물 가운데 선화당과 포정문이 현존하고 있고 선화당은 보물 제2157호입니다.

북동쪽을 정면으로 둔 포정문을 들어가면 중삼문이 있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삼문을 통하면 선화당이 나타납니다. 내아는 선화당 동쪽 곁에 붙어 있고 관풍각은 후원(後園) 연못 가운데 누각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관풍각 편액은 누각 외부에 걸려 있었고 건물 내부에 '영주관(瀛洲館)'이라는 편액이 내액(內額, 내부 편액)으로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관풍각 북쪽에 있던 봉래각(蓬萊閣) 편액은 탁본 이미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징청헌(澄淸軒)은 별도 건물이 아니라 선화당의 일부 공간(온돌방) 명칭으로 보입니다.

포정문에는 '관동포정아문(關東布政衙門)' 편액이 걸려 있었고 중삼문에는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 내삼문에는 '징청문(澄淸門)' 편액이 있었는데, 이상 내용은 오횡묵(吳宖默, 1834-?)의 1887년(고종24) 자료 『정선총쇄록(旌善叢瑣錄)』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모두 편액이 전해지지 않는데, 강원감영 관청 기능이 원주에서 계속 유지되지 못하고 1896년(고종33)부터 관찰부(觀察府)가 춘천(春川)으로 이전해서 그 이후 기존 감영 자리에 진위대(鎭衛隊), 일본군 수비대(守備隊), 원주군청(原州郡廳) 등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도중에 다른 현판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석봉(韓石峯)으로 유명한 한호(韓濩, 1543-1605)와 한글 이름이 동일한 한호(韓灝, 1510-?)의 글씨라고 하는 선화당 편액 역시 전해지지 않습니다. 팔도 감영 선화당 편액 가운데 실제 모습이 관측되지 않은 단 한 곳이 바로 강원감영입니다.


7. 평안감영

평안감영(平安監營)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현판) 이미지
평양 평안감영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


평안감영(平安監營)은 평양부(平壤府)에 있었습니다. '평안감사(平安監司)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으로 유명하죠. 대동강 뱃놀이로 상징되는,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기에 유래된 속담입니다. 상당수 건물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거되었고 결정적으로 수많은 공중 폭격이 감행된 한국전쟁 와중에 철저하게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에서 북으로 포정문을 들어가면 곧바로 중문(中門)이 있고 그 위에 선화당이 있었습니다. 선화방 동쪽 곁에 중동헌(中東軒)인 징청헌(澄淸軒)이 있었는데, 징청각(澄淸閣) 또는 관풍각(觀風閣)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내아 남쪽에 영리청(營吏廳)이 있고 선화당 구역 서쪽으로 범련당(泛蓮堂), 연못인 벽월지(壁月池)와 오순정(五詢亭)이 존재합니다.

포정문 편액은 사진 자료는 확인되지 않으나 여러 문헌에서 '관서포정사(關西布政司)'로 기록하고 있으며, 중문 편액은 사진으로 경상감영의 내삼문인 '영남포정아문(嶺南布政衙門)'과 같은 형식의 '관서포정아문(關西布政衙門)'이었음이 확인됩니다. 선화당과 오순정 편액 역시 사진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에 촬영된 러일전쟁 당시 압록강회전(鴨綠江會戰, 압록강 전투) 관련 사진을 보면 중문 안쪽에 '서문쇄약(西門鎖鑰)'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원래는 평양성 서문인 보통문(普通門)에 걸려 있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8. 함경감영

함경감영(咸鏡監營)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현판) 이미지
함흥 함경감영 주요 건물 배치도 및 편액


함경감영(咸鏡監營)은 함흥부(咸興府)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함경북도, 함경남도, 그리고 북한 행정구역인 량강도(兩江道)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죠. 선화당과 징청헌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북한 지역에 있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감영의 수많은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두 동(棟)입니다.

함경감영은 포정문에서 선화당까지 거리가 상당히 멀고, 그 때문인지 중간에 있는 중문인 순찰문(巡察門) 규모가 꽤 큰 것이 특징입니다. 내삼문인 관풍문(觀風門)과 비교되어 제대로 된 외대문(外大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건축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포정문과 중문 사이에 다양한 감영 관아 시설이 들어서 있었고 중문과 내삼문 사이 좌우에 영리청과 비장청(裨將廳)인 추청부(秋淸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화당 서쪽으로 징청헌, 내아 등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죠.

포정문인 '관북포정아문(關北布政衙門)'은 사진 자료가 전해지지만, 순찰문과 관풍문 편액은 여전히 미확인입니다. 선화당은 사진 자료가 있으며, 선화당 동쪽에 있던 유명한 정자인 지락정(知樂亭) 사진 역시 희미하게나마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팔도 포정문 편액 가운데 가장 힘이 넘치고 매력적인 것이 바로 함경감영의 '관북포정아문'이라고 생각하네요. 참고로, 1895년(고종32)에 북병영(北兵營, 함경북도병마절도사영) 있던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가 경성부(鏡城觀察府)로, 다시 1896년(고종33)에 함경북도관찰부(咸鏡北道觀察府)로 개편되었을 때 예전 북병영 외문루(외삼문)에 걸린 편액은 '관북포정사(關北布政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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