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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부산광역시 모처에서 부산 지역사 연구단체 회원분께 '부산 초량 지역 조선측 관아 시설'에 관해 소략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발표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표 주제 내용이 주로 소개되었던 지난 2023년 7월 31일자 블로그 글 이후에 '추가 수집하고 확인했던 내용'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차원에서 수록할 수 있었고, 발표가 끝난 지금 간단히 3개 이미지로 축약해 올리는 것으로 약 2년 전에 올렸던 글의 내용을 보충해 봅니다. 이미지 번호는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위 10번 지도는 국가기록원 소장 이미지는 〈대청부산전관거류지전도(大淸釜山專管居留地全圖)〉입니다. '大淸(대청)'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어 있기 때문에 책자 또는 자료로 '편집할 시기'가 1909년이고 실제 '지도 작성 시점'은 청나라 거류지가 처음 조성되던 1884년 무렵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으나 지도 왼쪽에 1909년부터 사용된 청나라 황제의 연호 '宜統(선통)'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문건 생산 연도처럼 1909년경 작성된 지도입니다. 스캔 편집 과정에서 누락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호 앞 두 글자만 적혀 있고 이하 날짜는 없는 상태로 공개되어 있으며, 지도가 수록된『부산 청국거류지 지도 건 』 본문의 청나라측 작성 문서 날짜는 선통2년(1910년) 7월 20일입니다.
이 지도는 본편 6번 지도, 즉 1914년 지적원도보다 한층 자세하기 당시 초량객사 추정 위치의 지형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란색 사각형으로 확대한 부분을 왼쪽 아래에 수록하였는데, 파란색 화살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해당 지역(초량객사 터 추정지)이 직선, 직각으로 다른 곳과 구획되어 있습니다. 바로 옆 다른 토지는 논, 밭의 경계(논두렁, 밭두렁)가 지형지물을 따라 자연스럽게 곡선 형태로 되어 있으나, 이 부분 토지는 직선이 직교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또 빨간색 화살표로 된 부분을 보면 중간에 3개의 구역으로 땅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 비탈 구조의 필지 중간에 가운데 그리고 아래쪽 빨간색 화살표 부분에 각 1개씩 모두 2개 층의 기단부(낮은 옹벽)가 마련되어 있었고, 가장 위쪽 화살표 부분에도 다소 높게 구축된 필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른쪽에 수록한, 본편에서 살펴본 『초량화집(草梁話集)』수록 삽화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초량객사 추정 평면도 최종 보정본의 형태와 거의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외문루(外門樓)인 공해루(控海樓)를 들어간 후, 기단을 올라 중문(中文, 內三門)을 들어가면 다시 기단이 있고, 그 기단을 지나면 객사 정청(正廳)으로 이어지는데, 객사 자체도 계단을 갖춘 기단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1914년 당시 지적원도만 검토했을 때보다 한층 강력하게 초량객사 위치가 영주동 15번지, 16번지 일대였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대청부산전관거류지전도〉 도면입니다.

위 11번 지도는 본편 6번 지도를 앞의 청나라 전관거류지 지도를 참고하여 보정한 것입니다. 2개 기단, 토지 외곽 형태 등을 참작한 결과, 6번 지도와 비교할 때 초량객사 평면도의 면적과 위치가 약간 축소 및 조정되었습니다. 참고로, 1909년 전관거류지 도면과 1914년 지적원도에 모두 청나라 조계지의 도로(노란색 표시 부분)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기에 거의 정확하게 위치를 추정 또는 확인할 수 있으며, 1914년 지적원도는 원도(原圖)라는 글자 그대로 현대 지적도의 원형이 되는 것이라서 당연하게도 현재 지번주소와 완벽하게 대조 가능합니다.
초량객사 규모가 『초량화집』에 실려 있고 이 문서가 일본에서 생산된 것이므로 1칸(間)이 약 1.8미터라고 가정하면 객사 상단부가 1,458㎡, 중간이 875㎡, 하단이 1,088㎡라서 전체 3,421㎡(=약 1,037평) 면적이 됩니다. 시대별 1칸 길이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계산하였으며, 칸 숫자가 정확할 경우에 길이 오차 범위는 약 1% 내외, 면적 오차는 최대 +2%(1,060평?) 수준입니다.
1914년 지적원도에 배치한 초량객사 추정 평면도의 점유 구역을 현대 지도에서 면적 측정 기능을 활용해 측정하면 대략 3,385㎡(약 1,026평)로 나오기 때문에 『초량화집』 수록 초량객사 규모를 토대로 산출한 면적인 1,037평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4년 지적원도 필지 형태를 가지고 추론한 2023년 본편의 초량객사 위치 추정 결과에 꽤나 강력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추가되는 순간입니다.

위 12번 지도는 부산훈도(釜山訓導), 동래별차(東萊別差), 출사역관(出使譯官), 소통사(小通事) 등의 업무 공간이었던 세칭 훈별소(訓別所), 임소(任所)를 구성하는 각 건물지를 1914년 지적원도 위에 배치한 것입니다. 발표 자료에서는 약간의 고찰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결과만 간추려 등록합니다.
훈도가 있었던 성신당(誠信堂)은 영주동 671번지 서남쪽(청색 표시)에, 별차가 있었던 빈일헌(賓日軒)은 668번지 남쪽(녹색 표시)에, 지역에서 양성된 통역관인 소통사 공간이었던 유원당(柔遠堂)은 훗날 감리서 내아(內衙)로 활용되던 554번지(적색 표시)에 있었고, '지금은 없고 밭이 되었다[今無之畠]'라고 『초량화집』에 기록된 서울에서 파견되는 출사역관 근무처인 유원관(柔遠館)은 성신당 앞 671번지 경내(보라색 표시)에, 그리고 이들 관리의 하급 실무를 담당한 사령(使令)들 건물인 사령방(使令房, 使令廳)은 아마도 1904년에 관유지(官有地)로 남아 있던 555번지(갈색 표시) 또는 동헌(감리서) 일부였던 571~573번지 일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통적인 조선시대 관아 건축물의 배치 형태, 건물 및 출입문 방향 등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554번지에 유원관, 556번지에 유원당(통사청), 555번지에 사령방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554번지가 본래 유원당 터였다가 중간에 밭으로 변했고, 여전히 관청 소유 땅(국유지)이었으므로 훗날 유원당을 개칭한 유원각(柔遠閣)이 들어서면서 역학임소(譯學任所) 시기에 통사청으로 불리게 되었을 수 있겠죠. 역시 사학자 또는 건축역사 전공자의 심층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현재 671번지 일부에 영주1동 행정복지센터(671-3번지)가, 668번지 일부에 천주교 부산교구 영주성당(668-3번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공서 건물이 옛날 성신당 소재지(는 아니고 성신당 위치와 유원관 추정지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나름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신당, 빈일헌 등의 건물 배치도를 모형으로 만들어 주민센터 내부에 전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초량왜관의 일본인들을 제1선에서 상대하던 관리가 부산훈도, 동래별차, 소통사 등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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