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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4일에 블로그 방문자 20만을 달성했습니다. 10만 달성 때처럼 기념하는 글을 올릴까 하였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수많은 검색 로봇이 들락날락하는 현실 아래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특별한 일일까 싶어 날짜만 기록해 두고 그냥 넘어갑니다.

매월 한 편씩 주요 컨텐츠를 담은 글을 올리려 하고 있는데, 이번 글은 월말이 되어서야 겨우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남쪽 바닷가 끝, 조선시대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지역의 관아 건축물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목은 부산진(釜山鎭)과 왜관(倭館) 사이에 있던 초량객사(草梁客舍) 및 성신당(誠信堂) 건물의 위치 비정에 관한 탐구입니다.

동래도호부 부산진 소재 초량객사 및 성신당 위치 추정 지도
1번 지도 - 초량객사 및 성신당 위치 추정


초량객사 터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에서 이미 두 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 2020년 10월에 올렸던 '경상좌수영, 동래도호부, 동래감리서, 부산진 및 다대포진 객사 이야기([제1차 글] 새창 열기 링크)' 글에서 초량객사 위치를 처음 다뤘고 작년 2022년 10월에 올린 '동래 지역 경상좌수영 수군 진영 변천([제2차 글] 새창 열기 링크)' 글에서 다시 한번 언급했습니다. 이번 글은 왜 그처럼 초량객사 등 위치를 추정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근거, 즉 일종의 정황증거를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초량객사는 부산 초량 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객사(客舍, 客館) 건물입니다. 이 초량에는 일본인 거주가 허락된 지역인 왜관(倭館)이 있는데, 초량에 소재하고 있었으므로 흔히 '초량왜관(草梁倭館)'이라고 불렀습니다.

객사는 지방 관아에 설치되었던 건물로 지방관이 정기적으로 의례를 진행하고 외지에서 온 방문객(주로 관원)이 숙박 용도로 사용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지방관(수령, 사또)이 있는 고을에 반드시 있었고 종3품 첨사, 종4품 만호 등이 지휘하는 외딴곳의 지방 군영에도 대부분 마련되어 있었죠. 초량객사는 일반 관원이 아닌, 조선을 방문하는 왜사(倭使), 즉 일본국 사신(使臣)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공간입니다. 한양 상경(上京)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인 사절 행렬이 왜관을 출발하여 이곳 객사에서 조선 국왕에게 예를 차리는 숙배(肅拜, 절하는 의례)를 행하였습니다. 객사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이처럼 외교 사절을 위해 건축된 객사로 초량객사와 더불어 유명한 것이 명나라 또는 청나라로 향하던 의주로(義州路) 길목에 있던 벽제역(碧蹄驛) 객사인 벽제관(碧蹄館)입니다.

성신당(誠信堂, 훈도청)은 부산훈도(釜山訓導)가 근무하던 공간의 대표 건물 당호(堂號)입니다. 부산훈도는 부산진(釜山鎭)에 소속된 종9품 통역관 관직인데, 부산진이 있던 동래 지역이 대일(對日) 외교의 최일선이었으므로 왜관 바로 북쪽에 훈도의 근무 공간을 마련하고 다른 지역 훈도에 비해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역관은 신분이 중인(中人)이고 훈도 관직도 그 관품이 가장 낮은 종9품이지만, 동래부사 또는 부산첨사의 언행에 권위를 갖추기 위해 중간에서 통역하는 훈도, 별차 등의 관원에게 기본적인 체신을 세워주었던 것입니다.

훈도가 업무를 보던 건물이 성신당이고 그 옆에 동래별차(東萊別差) 건물인 빈일헌(賓日軒, 별차청), 서울에서 파견된 출사역관(出使譯官)이 있던 출사청(出使廳)인 유원관(柔遠館) 등의 관아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이들 건물군을 아울러 훈별소(訓別所) 또는 임소(任所)라고 하였습니다. 1876년(고종13) 10월에 훈도가 판찰관(辦察官)으로, 별차가 역학(譯學)으로 개편된 이후에는 역학임소(譯學任所), 역학소(譯學所), 역학당(譯學堂) 등으로 호칭됩니다.


위 1번 지도는 초량객사 및 성신당 위치 추정에 관한 학계 통설과 필자 추정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현재 역사 및 건축역사 학계에서는 지도 왼쪽처럼 초량객사 위치를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582번지 봉래초등학교 부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초량객사 터를 알리는 표석(설명문)이 봉래초 정문에 설치되어 있고 초량왜관 관련 각종 탐방 경로에 이 초등학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객사 터를 봉래초 부지로 추정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학자 소전성오(小田省吾, 오다 쇼고 1871-1953) 등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 것입니다. 초량객사 위치가 봉래초 자리라고 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위치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덧붙이면, 2013년경 개성학교(開成學校)의 1896년(고종33) 1월 개교 당시 터가 영주동 640번지라고 확인되기 전까지는 현재 봉래초 자리에서 개성학교가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개성학교와 동래감리서의 1890년대 소재지가 봉래초 한 자리에 중첩되었으므로) 개성학교를 봉래초 위치로 보고 감리서가 들어섰다고 했던 초량객사 터를 봉래초 북쪽의 '새영주시장' 또는 동쪽의 구 영주시장 근처로 추론하는 설이 있기는 했습니다. 이후 개성학교 개교식 사진이 확보되고, 그 학교가 처음에 봉래초 남쪽 부지(640번지)에 개교했다가 부산실업학교 및 부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 후, 동래군청이 잠시 있었던 동래감리서 자리(=현재 봉래초 지역)로 이전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재지 중첩 문제가 해소되자 이러한 주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성신당, 즉 임소 위치는 봉래초 남쪽의 640번지(+625, 626번지)라고 추정하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일부는 파란색 선으로 표시한 671번지와 668번지에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는 성신당이 640번지 개성학교 개교 위치에 있었고, 668과 671번지 또는 554번지에 출사청인 유원관이 있었다는 등의 견해도 있습니다.

올해 4월 관련 학술지에 등재된 논문에서도 위 1번 지도의 왼쪽의 '학계 통설'과 같은 내용(582번지 초량객사, 640번지 성신당)을 별다른 근거 제시 없이 답습하고 있습니다.


위 지도 오른쪽은 필자 추정입니다.

초량객사는 현재 새영주시장 북쪽에 1914년 지적원도 기준으로 영주동 14번지에서 19번지 사이에 있었고, 성신당을 중심으로 한 임소는 668번지 및 671번지 일원에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임소 주변에 번지가 표시된 필지(554, 555, 556번지)는 출사청, 통사청(通事廳, 柔遠堂), 사령청(使令廳)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판단됩니다.

이러한 필자 추정에 대한 나름의 주장 근거 세 가지를 차근차근 알아보겠습니다.


1. 부산항 해도를 통한 초량객사 및 성신당 위치 추정

동래 초량객사 일대 해도(海圖)
2번 지도 - 초량객사 및 성신당 터 (부산항 해도 분석)


위 2번 지도는 제1차 글에서 한 번 살펴봤던 1875년(명치8) 일본해군 측량 부산 지역 해도(海圖) 및 동일 지역을 약간 확대한 1899년(명치32) 측량, 1904년(명치37) 간행 부산항 해도입니다.

왼쪽 해도에 '太東館(태동관)'으로 기재된 대동관(大東館)이 바로 초량객사입니다. 충청남도 대전(大田)을 '太田(태전)'으로 적는 등 당시 일본에서는 한자 '大'를 '太'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피휘법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지도에서 노란색으로 강조한 부분은 훈도가(訓導家, 임소)인 성신당 건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크게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도는 특정 지점의 수심을 정확히 기록하여 항해에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주요 이정표, 지형지물 등을 최대한 정밀하게 표기하였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영국영사관 예정 부지 및 해관산(海關山, 해관 예정지 인근 영선산의 별칭) 지역의 암석 돌출 지역 등이 대표적입니다. 위 지도의 왼쪽 1875년 해도에서 임소 앞을 흐르던 개천, 왜관 지역 안팎을 구분하는 돌담 등도 중요하게 드러나는 지형입니다. 이러한 특이 지형 때문에 초량객사, 성신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상대적인 위치가 비교적 명확하게 표시됩니다. 오른쪽 1904년 간행 해도에도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암석 돌출 해안이 있습니다. 바로 왼쪽 해도의 상단 돌출부입니다. 이러한 암반 지형은 1900년대에 본격 시작된 북빈매축(北濱埋築) 및 영선산착평공사(營繕山鑿平工事) 과정에서 사라집니다.


위 두 장의 해도에 동일하게 표기된 돌출부, 해안선, 용두산, 왜관, 부산진성, 두모진 및 부산진 영가대 포구, 절영도 등의 랜드마크(landmard)를 기준으로 두 지도를 겹치면, 오른쪽 1904년 해도에 보이는 것처럼 왼쪽 1875년 해도의 건물이 각각 위치하게 됩니다. 초량객사는 감리서 위 개천 북쪽, 즉 1번 지도의 필자 추정 초량객사 자리에 존재하게 되며, 임소 역시 1번 지도의 필자 추정 성신당 위치인 감리서(현 봉래초) 서남쪽 668 및 671번지 위치에 표시됩니다.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을 보면 객사 터는 1899년 측량 시기에 논밭과 같은 완만한 경작지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초량객사가 동래감리서(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면 왼쪽 1875년 해도에서 ㉠ 위치에 대동관이 표시되어 있었어야 합니다. 또 개성학교 개교 자리에 임소(성신당)가 있었다면 오른쪽 1904년 해도에서 감리서 위치에 1875년 해도의 대동관이 올려져 있는 것과 동시에 그 남쪽 ㉡ 위치에 임소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며, 해도가 가진 최소한의 정확도를 생각하면 이러한 오차는 허용 범위를 크게 벗어납니다. 즉, 초량객사가 봉래초 자리에 있지 않았고, 임소 위치도 학계 통설과 달리 1892년(고종29) 신축 동래감리서(현재 봉래초 부지) 서남쪽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른쪽 해도에서 '화상조계(華商租界)'는 중국 청나라 상인(商人)의 거류 지역을 의미하며, '청국이사부(淸國理事府)'는 청나라 영사관 역할을 수행하던 청국상무공서부산지서(淸國商務公署釜山支署)입니다. 현재도 부산 지역 중국인 최대 거주 지역으로 일종의 차이나타운인 '상해(上海) 거리'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설문(設門)'은 초량왜관의 경계 구역에 있던 조선측 관할 출입문입니다. 이 1904년 해도에 표시한 설문과 돌담 위치는 해당 지역의 주변 능선을 따라 약간 조정된 상태입니다.

초량(招梁) 임소(任所) 성신당(誠信堂) 위치 추정도
3번 지도 - 역학임소 성신당(誠信堂) 위치 추정


위 3번 지도는 1914년 토지조사사업 측량 결과 제작된 부산 지역 지적원도(地籍原圖) 위에 성신당 추정 위치를 표기한 것입니다. 성신당 위치를 668번지 및 671번지로 추정하는 근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1875년 해도(海圖)에서 성신당 추정 건물의 위치가 가리키는 곳이 영주동 668, 671번지 일대이다. [2번 지도 내용]
ㄴ) 역사적 문헌, 회화, 고지도 속 성신당, 빈일헌 등의 건물 규모, 방향이 지적원도의 필지 면적 및 방향과 대체로 일치한다.
ㄷ)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곳에 『초량화집(草梁話集)』 수록 훈도가(家) 도면의 뒷문[小門]으로 이어지는 길이 인접한다.
ㄹ) 1896년 개성학교 개교 사진을 보면 이 필지(부지)에 있는 건물이 전형적인 당시 관공서(역학당? 전보사?) 건물이다.

개성학교가 개교한 640번지를 성신당 위치로 볼 수 없는 이유는, 1892년경 당시 신설 부산항감리서(동래감리서)를 서남쪽에서 촬영한 사진(새창열기 링크)을 볼 때 당시 이 땅이 단순한 밭이었습니다. 사진을 감안하면 감리서에서 개성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도로)도 학교 신축에 즈음해서야 신설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개성학교 개교 부지가 성신당 소재지였다고 하면, 이 자리에 관공서 건물이 있거나 최소한 그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어야 합니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1891년 9월까지 성신당 건물이 존재하였고 그 권역을 지칭하는 역학당, 역학임소 등의 표현이 민건호(閔建鎬, 1843-1920)의 『해은일록(海隱日錄)』 등 기록에 1894년까지 계속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성학교 신설 관련 기록에서 해당 부지를 정부(조정, 관아)로부터 인계 또는 지원 받았거나 불하, 매입했다는 내용이 없는 것도 그 확률을 낮추는 이유입니다.

보라색으로 채색된 668번지와 671번지에서 '조금 진하게 표시된 구역'이 1896년 개성학교 개교 사진에서 돌담으로 구획된 건물이 들어서 있던 곳입니다. 이 지역이 바로 성신당, 빈일헌 등의 임소 터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현재는 영주1동 주민센터, 천주교 영주성당 등의 건물이 현존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하늘색으로 임소 건물 규모를 가늠하여 배치해 보았는데, 실제 면적(담장)은 보라색 테두리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본래 671번지와 668번지가 한 필지였을테지만 1914년 측량 당시에는 두 개 필지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671번지가 성신당, 668번지가 빈일헌 자리인데, 이러한 필지 분할은 중간에 두 건물군의 용도 또는 소유 관청이 달라지면서 생긴 결과일 수 있습니다. 개성학교 개교 사진을 보면 668번지 동쪽 가장자리에 일본인 학자가 1933년 책자에서 성신당 일각에 있었다고 적었던 이팝나무(또는 느릅나무)가 보입니다.

554번지는 성신당 인근에 있었던 출사청(유원관) 소재지가 아닐까 합니다. 1904년 동래군 『양안(量案)』에서 '감리서 내아(內衙)'로 기재된 필지입니다(오판 가능성 있음). 만일 이곳이 예전 출사청이었다면 그 근처 555, 556번지에는 통사청(유원당), 사령청 등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양안』 분석에 따라서는 555 및 556번지와 동래감리서(582, 583번지) 사이의 571번지부터 577번지 사이에 있었을 수 있습니다. 1904년 당시에는 이들 10여 개 필지가 하나로 묶여 '감리서(監理暑) 관유지(官有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역시 오판 가능성 존재).

위 지적도에서 동래감리서 터 일부를 구성하던 583번지는 1908년 11월에 설치되어 1909년 2월 20일부터 사무를 개시한 진주감옥(晉州監獄) 부산분감(釜山分監) 공간이었습니다. 1906년 10월 감리서가 폐지되자 이 자리에 동래부청(東來府廳)이 입주하였으며, 이후 그 공간 일부(감리서 시기 감옥 건물지 일대)에 분감이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1908년 8월에 설치된 부산구재판소(釜山區裁判所), 1909년에 설치된 부산지방재판소(釜山地方裁判所) 등도 이 감리서 터에 들어섭니다. 부산분감 필지 남쪽 636번지도 감리서 관련 건물이 있던 부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측(目測)에 의존해서 작성되었을 1875년 측량 해도의 해안가 구조물 위치 정확성에 일부 의문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를 보완 내지 보강하는 내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 부산항약도를 통한 초량객사 위치 추정

1880년대 부산항약도(釜山港略圖) 청나라 조계 지역
4번 지도 - 부산항약도(釜山港略圖) 초량 부분


위 4번 지도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부산항약도(釜山港略圖)〉 일부입니다. 초량 지역에 중국 상인 거류 지역을 설정하기 위한 용도로 1880년대(1884년 전후)에 작성된 지도인데, '화상지계입표(華商地界立標)'로 표시된 사각형의 왼쪽 위에 '구객사장벽(舊客舍墻壁)'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객사(舊客舍)'는 초량객사를 뜻하며, '장벽(墻壁)'은 담과 벽을 아울러 이르는 단어입니다. 즉, 청나라 상인 거주 구역 왼쪽, 지도 방위로 보면 조계 서남쪽 모퉁이에 바로 예전 초량객사 부지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1880년(고종17) 또는 그 이듬해에 초량객사가 예전 두모포진 동헌 건물에 들어서 있던 판찰소 옆으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초량 화상조계가 설정 및 구축되던 1884년에서 1887년 사이에는 터[址]로 존재하던 상태였습니다.


화상지계 왼쪽(남쪽)으로 넓은 밭[田]이 있는데, 여기에 1892년 부산항감리서(동래감리서)가 신축됩니다. 훗날 부산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는, 현재 봉래초등학교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왼쪽에 역학임소가 보입니다. 임소 남쪽(동쪽)으로 1883년 8월경 획정된 것으로 알려진 영국영사관 기지(基址) 예정지가 있고 그 왼쪽에 해관 기지 예정지가 있습니다. 앞 2번 지도에서 살펴봤던 그대로입니다.

위 지도에서 화상지계 남쪽을 지나는 도로 바로 아래에 '구수설문기지(舊守設門其址)'가 있습니다. 풀어보면 '예전 수문(守門) 및 설문(設門) 터'가 되는데, 수문은 초량왜관 정문이었으므로, 이 표시가 가리키는 것은 설문(設門) 위치입니다. 도로 중앙이나 위쪽(서쪽)이 아닌, 도로 남쪽(동쪽)에 표기되어 있음에 주의하여 2번 지도 오른쪽의 1904년 간행 해도에서 화상조계를 가로지르는 도로 동쪽에 설문을 위치시켰습니다. 물론, 실제는 도로 남쪽에 설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1880년대 도로 위에 있었는데 단지 기재 공간 문제로 그렇게 표시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개략적인 지도이기는 하지만 설문 자리와 초량객사 터, 그리고 역학임소 성신당 소재지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설문과 객사 사이 거리, 그리고 객사와 임소 사이 거리가 비슷하죠. 1번 지도의 필자 추정 위치 및 2번 지도의 오른쪽 해도와 흡사한 형태입니다.

화상조계와 조계 동쪽(북쪽) 초량촌(草梁村) 사이에 통사청(通事廳)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통사청(通詞廳)으로 표시되기도 합니다. 통사청은 본래 임소(성신당) 근처에 있었는데, 어떤 시기에 이곳으로 이전되었거나 청나라 관리와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사청이 별도로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의 『종환일기(從宦日記)』 1881년(고종18) 윤7월 기록에 '판찰아통사청(辦察衙通詞廳, 판찰관아의 통사청)' 내용이 있는데, 만약 이 건물을 뜻하는 것이라면 두모포진 소재 판찰소 시기에 따로 조성된 것일 수 있습니다.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경상도 동래 초량객사(草梁客舍) 위치 추정도
5번 지도 - 동래 초량객사 위치 추정도


위 5번 지도는 1914년 지적원도 위에 4번 지도 〈부산항약도〉의 각 구역을 적용한 것입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도로가 당시 화상지계(화상조계)인 청나라 조계지에 새로 계획된 신작로(新作路)이며, 각 도로가 끝나는 사방 지점으로 크게 사각형 형태의 청나라 조계지가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계지 왼쪽 위에 마침 초량객사의 추정 면적 및 형태와 비슷한 통합 필지가 있습니다. 1번 지도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적원도 기준 영주동 14번지(대지), 15번지(이하 밭), 16번지, 19번지 일대 및 8번지 일부이며, 현재 지번 주소로로 1914년 당시와 동일하게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15번지, 16번지 일원입니다. 2번 지도 오른쪽 1904년 해도에 표시된 바로 그 지점이고, 초량객사 건물이 진사(辰巳, 동남) 방향이었다고 하는 문헌 기록과도 대략 일치합니다.

제1차 글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1892년에 감리서를 현재 봉래초 자리로 신축 이전할 때 그 공사 장소를 언급하면서 '역학당 앞뜰[譯學堂前坪]'과 같은 단어만 있고 '객사 옛터', '구객관(舊客館) 자리' 등의 표현이 『해은일록』 등에 기술되지 않았던 것도 초량객사 터를 비정할 때 고려할 점입니다. 위 추정도대로 객사가 위치했다면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하는 것이 무리 없이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설문 위치에 관한 통설은 노란색 마름모로 표시한 동구 초량동 571번지이지만, 4번 지도를 참작하면 바로 그 아래 형광색 마름모가 위치한 570번지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1번 지도에도 부산화교소학교 오른쪽에 각 마름모를 표시하였습니다. 1914년 지적도에 보이는 도로 자체가 조선시대 길이 아니라 조계지를 만들면서 직선에 가깝게 정비되고 확장된 것일 수 있음에 유의합니다(거의 확실함).

청나라 영사관인 청국이사부는 화상조계 계획 당시 조계지 중앙 위쪽(서쪽)에 신설할 예정이었으나 위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실제 건물이 마련된 곳은 동쪽(북쪽) 끝 지역 584번지였습니다. 현재 부산화교중고등학교와 화교협회가 있는 나름 유서 깊은 공간입니다.


위 지도에 표시된 임소(성신당), 초량객사, 설문 등의 위치는 1875년 해도에 표기된 각 건물의 배치와 잘 들어맞을 뿐 아니라 정조 시대 화가 변박(卞璞)이 1783년(정조7)에 그린 〈왜관도(倭館圖)〉의 각 구조물 간격 및 방향과도 거의 일치합니다.

동래(東萊) 초량객사(草梁客舍) 터 추정 지도
6번 지도 - 동래 초량객사 터 추정지 상세 지도


위 6번 지도는 5번 지도의 초량객사 추정 위치 부분을 확대한 것입니다.

지도 오른쪽 위에 있는 해도는 1890년(명치23) 3월에 일본해군 수로부에서 복판(覆版, 재판)한 것인데, 원판은 영국해군에서 1859년(철종10)에 처음 측량하고 1875년(고종12)에 절영도 북서쪽 부분을 보완한 후, 1879년(고종16)에 대개정(大改正)한 것입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부산항 정밀 해도 중 하나입니다. 2번 지도에서 살펴본 일본해군 측량 1875년 해도와 비교할 때 객사 북쪽 개천이 추가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 개천은 신축 감리서 옆 개천입니다. 이러한 작은 개천은 물이 흐를 때와 건천(乾川, 마른 개천)일 때에 따라 식별 및 표기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북쪽 개천을 설문 돌담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2번 지도의 1875년 및 1904년 해도와 겹쳐보면 위치로 보나 형태로 보나 개천입니다. 왼쪽 1914년 지적원도에서 영주동과 초량동을 경계 짓는 개천이며, 이 개천이 굽어지는 부분에 초량객사 대동관 건물이 있습니다. 해도의 개천 지형을 감안하면 객사 면적만큼 약간 더 북서쪽에 존재했다고 봐야 하나, 그곳에 일치하는 토지가 없이 묘지(무덤) 2개 필지와 산지(임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오차는 상륙하지 못한 채,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고 건물 형태와 위치를 묘사했던 당시 수로 측량 선박(영국해군 포함 HMS Dove 및 측량선 HMS Actaeon)의 여건 한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참고로, 개정 전 해도인 1860년 10월 10일 발행 1859년 해도 원판에는 대동관 바로 남쪽에 성신당 건물군도 표시되어 있었습니다(2번 지도 오른쪽 객사, 임소와 동일한 간격 및 방향 배치).

지도 오른쪽 아래에 『초량화집』에 수록된 자료에 근거하여 초량객사 건물 규모를 재구성한 평면도를 첨부하였습니다. 각 숫자는 건물 외곽 기준 건물 칸[間]입니다. 객사 정청(正廳) 북쪽이 동서 30칸, 대문인 외문루(外門樓)가 있는 아래쪽이 21칸, 서쪽 담장이 남북으로 44칸 규모였습니다. 『초량화집』이 일본측 기록이라서 기재된 칸이 한옥 칸인지, 일본식 칸인지에 따라 그 길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전체적인 비율만 보면 됩니다.

1914년 지적원도 위에 옅은 빨간색으로 표시한 초량객사 건물지 틀을 보면 그 형태가 지적원도의 영주동 14, 15, 16, 19번지 및 8번지 토지 경계와 전반적으로 잘 들어맞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틀은 오른쪽 초량객사 평면도를 조선시대 관아의 통상적인 2층 외문루 규모에 맞춰 적절하게 조정한 것인데, 특히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객사 도면 자료와 매우 근접합니다. 객사 평면도에서 동남쪽 담장 형태가 왜 저런 모습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객사 옆 개천 지형을 따라 담장을 세우다 보니 그렇게 되었던 것이라고 유추 가능합니다.

객사 부지 밖 8번지와 17번지는 청나라 조계지 도로가 나기 전에는 이어져 있었을 것이고 객사 뒷문으로 연결된 것을 볼 때 객사 관할에 포함된 부속 토지였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8, 14, 15, 16, 17, 19번지가 모두 한 필지였겠지요.

하필(何必, 어찌하여 반드시) 객사 위치로 추정한 바로 지점에 이러한 모양의 땅이 있는 것일까요? 본 글에서 검토한 여러 상황을 종합하면 그냥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3. 동래군 양안을 통한 객사 위치 추정

1904년 경상남도 동래군 양안(量案)
7번 그림 - 동래군 양안(量案) 일부


위 7번 그림은 1904년 동래군 『경상남도동래군양안(慶尙南道東萊郡量案)』 일부입니다. 대한제국시대에 전국 각지의 토지 소유관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일명 '광무양안(光武量案)' 문서이며, 이 동래군 지역 양안에 '영주객사곡평(瀛州客舍谷坪)', '영주동임소곡평(瀛州洞任所谷坪)' 등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곡평(谷坪, 골들)'은 골짜기 및 들판을 의미하므로, 전자는 영주동 객사골 일대를, 후자는 영주동 임소골 일대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객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초량객사이며, 임소는 역학임소입니다.

'객사곡평'이 시작되는 지점은 『양안』의 악자(樂字) 제11번 필지 김반송(金班松) 논[畓]부터이며, '임소곡평'은 같은 자(字) 제27번 필지 이경초(李京初) 밭[田]부터 시작됩니다.

1904년 동래군 양안 토지 배열도
8번 그림 - 동래군 양안 토지 배치도


위 8번 그림은 7번 그림의 『양안』에 수록된 토지 배열을 그림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양안에 기재된 토지(필지)의 동서남북 방향이 대략적이고 토지 형태, 면적 기재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토지 각 필지의 배치와 방향 실체는 주변 도로, 하천, 지세 등을 감안하여 파악해야 합니다.

'객사곡평'과 '임소곡평'이 시작되는 지점을 표시하였습니다. 객사곡평 이전에는 청나라 조계지가 '청관(淸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감리서 위(서쪽)에 '감리서 관유지', '감리서 내아' 등이 존재합니다. 개성학교 북쪽에 인접해서 감리서 필지가 있었던 것을 보면 개성학교와 감리서 청사 사이의 넓은 대지(3번 지도의 1896년 신작로 일대)가 모두 동래감리서 소유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에는 관청 관계 건물이, 일부에는 민가(民家)가 들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감리서 동쪽 해안가와 더불어 이른바 서하(署下) 마을이 조성된 곳입니다.

1914년 지적원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필지가 세분되기 약 10년 전의 초량 지역 토지 구획 내역 및 용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동래군 『양안』입니다.

동래군 양안 초량 지역 토지 배열 배치도
9번 지도 - 동래군 양안 토지 배치도


위 9번 지도는 8번 그림에서 정리하였던 동래군 『양안』의 토지 배열 순서를 1914년 지적원도 위에 정리한 것입니다. 초량객사가 있었던 곳을 의미하는 '객사곡평(객사골)'이 시작되는 부분에 (4번 및 5번 지도에서 살펴봤던) 초량객사 추정 부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쪽 나지막한 산지(언덕)를 중심으로 객사 골짜기가 있는 지형입니다. 1783년 〈왜관도〉를 보면 객사 서남쪽까지 산자락이 있는데, 위 지도에서도 산지를 표시한 녹색 채색 지역이 객사 옆까지 살짝 이어집니다. 6번 지도의 '산지[樹]' 부분이며, 1번 지도의 1875년 해도에도 객사 남쪽에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초량객사 터를 지나서 감리서 오른쪽(북쪽)을 흐르던 개천과 맞물리는 곳에 즈음해서야 '임소곡평(임소골)'이 시작됩니다.


1875년과 1904년(1899년) 부산항 해도를 통해 1차 추정하였던 필자 추정 초량객사와 임소 위치가 1880년대 〈부산항약도〉를 통해 보강되었고 1904년 동래군 『양안』을 통해 관련 정황이 거듭 입증(?)되었습니다. 이외에 동래감리서를 촬영한 사진(2종)에도 구객사(舊客舍) 잔존 건물 또는 잔해,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필자 추정 위치에 보이기도 합니다.


본 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동래 초량객사(草梁客舍) 실제 위치는 현재 봉래초등학교 자리가 아니었다. (중구 영주동 15, 16번지 일대 유력)
ㄴ) 성신당, 빈일헌 등의 건물이 중심이 된 역학임소(譯學任所) 위치는 중구 영주동 668 및 671번지 일부로 추정된다.
ㄷ) 출사청, 통사청, 사령청 등은 554번지(내아)를 중심으로 한 555, 556 또는 571~577번지(관유지) 일대에 있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개항 이후 초량객사 및 임소 소재지의 변천 내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각 날짜는 음력 기준입니다.

- 초량객사
ㄱ) 1876년(고종13) 2월 3일, 강화도 조약 체결 결과로 대마도에서 보낸 사신이 숙배하는 초량객사의 핵심 기능이 상실됨
ㄴ) 1880년(고종17) 8월 29일, 초량객사를 판찰소가 있던 두모관(豆毛關), 즉 예전 두모포진 동헌 옆으로 이건(移建)하는 것을 재가함 : 1880년 하반기 또는 1881년 상반기에 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 (두모포진과 개운포진은 종4품 만호진임에도 자체 객사 건물 없이 가까운 부산포진 객사를 사용하고 있었음. 초량객사 터는 1884년경 청나라 조계지로 분할 편입됨)
ㄷ) 1886년(고종23) 5월 17일, 판찰소 청사(두모포진 동헌)를 인계받아 사용하던 부산항감리서(동래감리서)에서 객사 전패를 다대포진으로 이안(移安)함 : 정황상 다대포진이 1885년 12월에 복설된 후, 이때 소용이 없어진 감리서 객사의 전패를 다대포진 객사로 옮긴 것으로 보임. 다대진 객사의 원래 전패는 다대포진이 1883년 4월 폐진되자 동년 10월 21일에 매안(埋安, 땅에 묻음)되었음. (문헌 해석에 따라 다대포진 전패가 감리서로 이안된 것으로 보기도 함)
ㄹ) 1888년(고종25) 7월, 감리서 좌변(左邊, 왼쪽편)에 있던 구(舊) 객사를 7월 25일 만수성절(萬壽聖節, 고종 탄신일) 축하 행사 등을 위한 응접소(應接所)로 개조함
ㅁ) 1891년(고종28) 10월 14일, 감리서 좌변이 있던 응접소 대청(아마 1880년경 이건되었던 초량객사 정청)이 철거됨 : 감리서 신축 이전과 관련된 철거 공사임
ㅂ) 1892년(고종29) 7월 25일, 역학당(임소) 앞뜰에 신축된 감리서 낙성(落成) 연회 개최 : 감리서 구성원 상당수는 3월 30일쯤부터 이미 신축 감리서로 입주하여 업무를 봄 (두모포진 동헌 소재 부산항감리서의 사실상 기능 중단 시점)

- 임소
ㄱ) 1876년(고종13) 10월 22일, 훈도가 판찰관으로 개편되고 훈도 근무처에 판찰소가 설치되었으며, 동시에 별차를 역학으로 개칭하여 임소에 둠 : 성신당이 판찰소, 빈일헌이 역학임소가 됨
ㄴ) 1877년(고종14) 8월 이전에 판찰소가 두모포진 동헌 자리로 이전함 (전 동래부사 홍우창의 어전 보고) : 성신당이 다시 역학임소(역학당) 권역에 포함됨
ㄷ) 1884년(고종21) 7월 7일, 『해은일록』에 '유원각(柔遠閣)' 명칭 등장 (총 3회 등장) : 빈일헌 권역이 역학임소로 개편된 당시에 통사청인 유원관에 걸린 편액이 유원각으로 교체되었을 가능성 있음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와 연관된 호칭)
ㄹ) 1890년(고종27) 윤2월, 『해은일록』에 '전국(電局)에서 역학당을 새로 짓는다[電局新設譯學堂]'는 기록 있음 : 전보국을 지으면서 기존 역학당을 중건한 것인지, 다른 곳에 역학당을 신설한 것인지는 불분명 (감리서 서남쪽에 전보국, 전보국 북쪽에 역학소가 나란히 있는 지도 존재 = 1896년 1월 개성학교 개교 사진 속 건물들과 비슷한 배치?)
ㅁ) 1891년(고종28) 9월 19일, 『해은일록』에 '성신당' 명칭이 마지막으로 등장
ㅂ) 1894년(고종31) 4월 25일, 『해은일록』에 '역학당' 명칭이 마지막으로 등장 (동년 8월 10일, 『해은일록』 저자의 감리서 관직이 면직됨)
ㅅ) 1895년(고종32) 3월 18일, 역학(譯學) 파견이 중지됨 : 역학임소(역학당) 기능 중단 시기로 추정
ㅇ) 1895년 윤5월 1일 감리서 폐지 및 1896년(고종33) 양력 8월 7일 감리서 재설치 이후 과정에서 기존 임소 건물과 부지가 전보사, 감리서 내아 등으로 용도 개편되거나 기타 감리서 관유지로 전환 또는 일부는 민간에 매각되었을 것으로 봄

이상입니다.


과연 초량객사 터에 관한 현행 안내문이 본 글의 고증대로 변경될 수 있을까요?



2023.07.31 - 처음 등록
2023.08.09 - 일부 내용 보충, 문맥 보완, 오탈자 수정, 링크 추가 등
2023.08.11 - 초량객사 추정지 주소 착오 수정, 6번 지도 이미지 및 해당 설명 문단 추가
2023.08.22 - 보완 문장 추가, 오탈자 수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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