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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광화문 육조거리(세종대로) 동쪽 상단에 있었던 의정부(議政府) 청사의 배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아래 사진은 그해 3월 초에 확인한 것으로, 의정부 본청의 건물인 정본당(政本堂) 사진이다. 출전은 콘스탄스 제인 도로시 테일러(Constance Jane Dorothy Tayler)[각주:1]의 1904년 간행 저작물 『Koreans at home; the impressions of a Scotswoman』.

의정부 본청 건물 정본당(政本堂)의정부 정본당(政本堂) - War Office, Koreans at Home (1904)


2016년 8월경 의정부 터 발굴 착수에 관한 기사가 쏟아질 때 기사에 등장했던 자료이기에 의정부 청사에 관심을 가진 사림이라면 이미 익숙한 사진이다. 『Koreans at home』의 16면에 'WAR OFFICE, SEOUL'이라고 실려 있지만, 군권을 담당하던 군부(軍部), 병조(兵曹), 원수부(元帥府), 예전 삼군부(三軍府) 등의 건물이 아닌, 의정부의 중심 건물인 정본당이다.

정본당의 또 다른 정면 촬영 사진인 '경기관찰부(京畿觀察府) 선화당(宣化堂)'[각주:2] 이미지와 비교하면 지붕의 서까래 숫자와 기왓골 수가 정확히 일치하며, 뜰(마당)에 심어진 묘목이 약 20~30년간 자란 모습도 서로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바깥 기둥에 벽을 올리고 유리창호를 덧붙인 상태에서 찍은 후대의 사진이 아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추후 정본당 복원시 결정적이면서도 거의 유일한 핵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의정부 청사 배치 평면도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1908.01) - 조선시대 의정부 터 부분


위 이미지는 1908년 1월경 제작된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의 의정부 청사 부분이다. 도면 제작 당시에는 문관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吏曹) 관청의 후신인 내부(內部) 청사였다.

의정부 발굴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 의정부 청사 배치에 관한 내용도 기사 본문에 실렸는데, 위 이미지의 '추정A'와 같은 형태의 건물 배치를 주장(?)하였다. 반면, 같은 시기에 의정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필자는 '추정B' 형태로 결론을 내렸었다.


의정부 청사의 주요 건물은 정본당, 협선당, 석화당[각주:3]이며, 각각의 용도는 다음과 같다.

정본당(政本堂) :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공간
협선당(協宣堂) : 좌찬성(左贊成), 우찬성(右贊成), 좌참찬(左參贊), 우참찬(右參贊) 공간
석화당(石畫堂, 석획당) : 여러 재신[諸宰]의 공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정1품 관직이며, 영의정은 조선시대에 가장 높은 관직으로 흔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표현된다. 오늘날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좌찬성, 우찬성은 종1품(부총리급), 좌참찬, 우참찬은 정2품(장관급)으로, 이들 7개 직책은 의정부에 정식으로 설치된 관직이다. '제재(諸宰)', 즉 여러 재신(宰臣)에서 '재(宰)'는 통상 종2품 참판급(차관급) 이상의 신하를 의미한다. 1865년(고종2)에 비변사(備邊司)를 흡수 통합한 의정부에서 겸직으로 근무하던 고위 관료(종2품 또는 최소 정3품 당상관급 이상)[각주:4]를 위한 건물이 석화당이라고 보면 된다.


정본당은 중심 건물이었으므로 제일 위 사진에서처럼 가운데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협선당, 석화당(석획당)의 배치가 된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협선당, 석화당의 위치를 고증할 수 하나의 근거가 바로 석화당을 건축할 때 남겨진 기록인 「석화당기(石畫堂記)」의 본문 중, '命重修議政府左建一堂名曰石畫諸宰之所'이라는 내용이다. 대략 풀어서 설명하면, '(주상전하께서) 명하여 의정부를 중수하고 좌측에 하나의 당(堂)을 세워 이름을 석화(石畫, 석획)라 하여 여러 재신의 처소로 삼았다' 정도가 된다. '의정부좌건(議政府左建)', '좌건일당(左建一堂)'이 바로 석화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어떤 건물의 '왼쪽[左]'이라고 하면 건물 앞(대문)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왼쪽을 생각하기 쉽지만[위 이미지 '추정B'의 파란색 화살표와 글자 참고],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건물에 앉아서 건물 앞쪽(마당)을 바라볼 때의 왼쪽이 바로 좌(左)가 된다[위 이미지 '추정B'의 빨간색 화살표와 글자 참고].

정본당을 중심으로 하는 세 건물이 정확하게 서향이 아니라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각주:5]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이 각각 (약간이지만) 정본당의 서쪽과 동쪽에 위치하는 것도 좌건(左建)을 풀이하는데 약간 참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학계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북쪽에서부터 석화당-정본당-협선당이라는 '추정A' 형태를 의정부 건물 배치라고 결론하고 있는데, 협선당-정본당-석화당의 '추정B' 체계가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2016년 당시 필자 생각이었다. 위 『석화당기』 기록 이외에 다른 문헌이나 발굴조사 결과 등과 같은 어떤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서 세 건물의 배치를 '추정A'라고 결론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좌건(左建) 해석에 따라 좌우되는 위 내용과 더불어, 의정부 정본당, 협선당, 석화당 세 건물 배치에 관해 추가로 고려해야 할 점은 아래와 같다.

1) 육조거리(세종로) 동편의 다른 관청, 즉 이조,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의 경우에는 중심 건물(당상대청) 남쪽에 보조 건물(낭청대청)이 있었으므로, 의정부도 중심 건물(정본당) 남쪽에 제1보조 건물(협선당)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제2보조 건물(석화당)은 북쪽이다. 육조거리 서편의 삼군부(三軍府),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역시 중심 건물 남쪽에 보조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2) 각종 도면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본당의 남쪽 건물 면적이 북쪽 건물보다 약간 넓었다. 협선당이 석화당보다 지체 높은 건물이었으므로, 남측에 있던 건물이 협선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협선당은 의정부 고위 관원 4명의 공간이고, 석화당은 이보다 많은 숫자의 여러 신하(20명 내외)가 필요에 따라 근무하는 곳이었으므로 요구 면적 자체는 석화당이 더 넓었을 수 있다. 즉, 건물 등급과 면적을 일치시킨다면 남쪽이 협선당이고, 건물 용도를 생각한다면 남쪽이 석화당이다.

3) 위 사진 '추정A'에서 빨간색 선으로 표시된 부분을 온전히 장대석 다층기단의 1층(하층 1단) 기단으로 간주한다면, 정본당 남쪽 건물 전면의 기단부 면적이 북쪽 건물의 앞의 기단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넓다. 남쪽 건물 앞의 월랑(月廊, 건물 앞 내삼문 부분의 L자 행랑)이 백관(百官)의 서계(誓戒)가 진행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비슷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공간상의 필요에 따라 기단부를 넓게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관원이 상주하는 건물(의정부 본직 관원의 협선당)이 그러한 행사 진행과 맞지 않다면 남쪽 건물이 석화당(겸직 관원들인 제재의 공간)이고, 건물 지체에 비례하여 각각의 기단부를 조성하였다면 남쪽 건물이 협선당일 것이다.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1580년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 - 일본 경도(京都) 양명문고(陽明文庫)


위 그림은 1580년(선조13)는 과거 시험의 급제자를 축하는 연회 모습을 그린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 科擧恩榮宴圖)〉이다. 알성시(謁聖試)는 국왕이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에 제례를 지낸 후에 시행하는 특별 과거시험이며, 이 시험에 합격한 급제자 50명의 축하 잔치를 당시 의정부 청사에서 열어 주었다.

건물 정면의 기단 위 동쪽에 문과(文科) 급제자 12명, 서쪽에 무과(武科) 급제자 38명이 각각의 급제 등위대로 앉아 있다. 중앙에 문과 갑과(甲科) 제1인, 무과 갑과 제1인 각 1명, 그리고 동쪽에 문과 을과(乙科) 3인, 병과(丙科) 8인, 서쪽에 무과 을과 6인, 병과 31인이 배치된 것이다. 본래 기단은 빨간색 화살표와 선으로 표시한 부분(2번 이미지의 추정A에도 표시)인데, 무과 급제자 숫자가 많아서 공간 제약상 모두 앉을 수 없었으므로 서쪽에만 받침대(노란색 화살표 부분)를 설치해서 기단부를 대문 방향으로 임시 확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문과 급제자는 문관(文官)이 되고, 무과 급제자는 무관(武官)이 된다. 문관은 문반(文班), 무관은 무반(武班)이라고 하며, 이 둘을 아울러 양반(兩班)이라고 한다. 또 문관은 조회(朝會) 자리에서 동쪽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동반(東班), 무관을 반대로 서반(西班)이라고도 하였다. 이 알성시의 은영연에서도 문과 급제자가 동쪽에, 무과 급제자가 서쪽에 앉아 있었는데, 의정부 건물 대청에서 앉아 정문을 바라볼 때의 좌우(동서) 위치에 들어맞는다.


중앙의 의정부 대청(大廳) 왼쪽에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눈에 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행각(行閣), 행랑(行廊)처럼 좁게 묘사하였지만, 건물 앞에 계단(녹색 화살표)이 보이므로 번듯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생략된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청 오른쪽에는 건물 묘사가 없다.

1592년(선조25) 4월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대부분의 궁궐, 관청이 손실되었는데, 의정부 청사도 이때 피해를 당하여 그림 중앙의 의정(議政)이 일하던 대청이 불타 사라지고 찬성(贊成)이 근무하던 건물만 남았다. 그래서 그 청사를 의정부 대신(大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처소로 삼았다. 위 그림처럼 의정부의 중심 건물이 본래 두 채였다면, 즉 남쪽에 생략된 건물이 없었다면 전란 후에 남은 하나는 파란색 화살표 건물일 것이다.


1865년(고종2)에 의정부 청사를 중건할 때 각 건물의 건축과 관련한 기록이 『관각류집(館閣類集)』에 남아 있다. 앞서 살펴본 「석화당기」도 『관각류집』에 실린 기문이다. 의정부 건물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정본당중건기(政本堂重建記)」, 「정본당기(政本堂記)」, 「정본당상량문(政本堂上樑文)」
2) 「협선당중수기(協宣堂重修記)」
3) 「좌성당기(佐成堂記)」, 「좌성당상량문(佐成堂上樑文)」
4) 「숙야당기(夙夜堂記)」
5) 「석화당기(石畫堂記, 석획당기)

정본당은 중건(重建), 협선당은 중수(重修)로 구분된다. 중건은 예전 건물의 자리에 다시 짓는 것 또는 원래 건물을 해체 후 재건하는 것이고, 중수는 이미 있는 건물을 주요 구조부는 그대로 두고 일부분만 고쳐 짓는 것(=대규모 수리)이다.

관련 기록[각주:6]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에 남아 있던 건물은 서벽당(西壁堂)이다. 동벽(東壁), 서벽(西壁)은 관직 서열에 따라 관원들이 앉아 있는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좌석의 동쪽에 앉는 관직을 동벽, 서쪽에 앉는 관직을 서벽이라 하였다. 의정부의 동벽은 종1품 좌찬성, 우찬성이고, 셔벽은 정2품 좌참찬, 우참찬이다. 가운데 앉는 주벽(主壁)은 정1품 의정(議政).

협선당은 서벽당(西壁堂)을 중수한 것인데, 서벽이 비록 같은 방(房) 안에서 서열대로 앉는 위치를 말하는 것이지만, 건물 자체도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 있던 본청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벽당이라 이름을 붙였을 약간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협선당(서벽당)이 정본당 북쪽(우측)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남쪽 건물이 있었는데 그림에서 생략된 것이라면 그 이름은 동벽당일까?)

의정부 대청(大廳) 외형 추정의정부 대청(大廳) - 협선당, 석화당(석획당)의 형태 추정


의정부 청사의 배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확인하던 중,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던 것이 정본당 좌우 건물 2채의 형태였다.

위 이미지에서 1)번은 전통적인 형태의 한옥 건물이다. 용마루를 갖춘 팔작지붕(합각지붕)으로 가장 권위(지체, 위계)가 높은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육조거리 청사의 주요 건물(당상대청, 낭청대청)은 모두 팔작지붕 형태였다.

2)번은 1890년대에 의정부 일대를 촬영한 사진[각주:7]에서 정본당 좌우 건물에서만 보이는 형태이다. 당시 의정부를 원거리에서 촬영한 것밖에 없기에 해상도가 매우 낮아서 정확한 외형을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1)번의 팔작지붕과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보인다. 1915년 촬영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사진에도 이러한 지붕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는데, 본 문서 첫번 째 사진과 대조하여 건물 원형에 대한 면밀한 추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협선당과 석화당(석획당)의 정면을 7칸[間] 규모로 추정하고 있지만, 사진 안에 표기한 빨간색 세로줄 숫자 살펴보면 6칸 규모로 보인다. 측면은 3~4칸일 것이다(3칸 유력).

3)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중 '조선군사령부 부속청사 경기도 순사교습소' 사진 중 하나인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 대청(大廳) 이미지를 참고하여 그려본 것이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그것으로, 일종의 가적지붕, 가첨지붕과 같은 형태로 양쪽 지붕에 처마 같은 것을 덧댄 모습이다. 중앙의 정본당과 이어지는 복도각(複道閣)을 위한 추가 구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여러 사진들로 인해 2)번과 비교하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의정부 정본당은 1)번 형태가 확실하고, 협선당과 석화당은 2)번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2)번 형태가 일반적인 관아 건축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고,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 시기에 주요 관청의 건물 외형이 유리창호 방식으로 변형되기 이전인 1890년대에 촬영된 사진이기에 정본당 복원은 충분히 가능할지 몰라도 협선당과 석화당 복원은 (건물 순서는 차치하고서라도) 현재로서는 그 외형, 규모, 구조와 같은 실체를 확정하기 어려운 이상 극도로 신중하게 추진 여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미군정 시기에 훼철된 정본당과 그 남측 건물(석화당?)에 대한 철거 기록(철거된 건물의 이전, 자재 활용, 관련 도면 등)이 미군 당국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서 의정부 터 발굴조사에 대한 공식 결과 보고서가 나왔으면!



※ 가볍게 쓰기 위해 비교적 간단한 주제를 골랐지만, 역시나 글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주석도 몇 개 첨가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연습이 필요하네요. 다음에는 더욱 간결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참고 자료 링크 : 사이버 조선왕조 의정부(議政府) 홈페이지 - 의정부 안내 화면


2019.08.25 - 처음 등록
2019.09.03 - 2번 이미지 하단의 추가 고려 내용 추가 (추가로 고려해야 할 점 세 가지)



  1. 콘스탄스 J. D. 쿨슨(Constance J. D. Coulson)의 결혼 전 이름 [본문으로]
  2. 1936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 발행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 72면 수록 사진 [본문으로]
  3. 석화당의 한자 '石畫堂'에서 '畫'는 그림 화, 그을 획의 두 가지 뜻을 지닌다. 본 문서에서는 어감이 자연스러운 석화당으로 표기하였으나, '치밀하고 원대한 계책' 한자의 어원을 참작하면 본래 당호의 명칭(한자음)은 석획당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4.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판서와 3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대장, 총융사, 4도유수, 대제학, 호위대장, 좌우포장 등 시기에 따라 20명 내외 (정원은 없음) [본문으로]
  5. 전통 방위법을 적용하면 갑좌경향(甲坐庚向)이 된다. 육조거리의 대부분 관아 본청 건물과 달리, 건물 방향이 약간 남쪽으로 틀어져 건축된 것에는 풍수지리적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 「협선당중수기(協宣堂重修記)」, 「임총부기회(臨總府記懷)」, 「어제중서당술성사(御製中書堂述盛事)」,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경도(京都) 항목 등 [본문으로]
  7.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Isabella Bird Bishop (1987) 및 『서울의 추억(Souvenir de Séoul, Corée : 1900)』, Maurice Courant (19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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