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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경상좌수영, 동래도호부... 이야기'에서 부산(釜山) 지역에 설치했던 관청인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에 대해 잠시 알아봤습니다. 그 감리서에서 서기관(書記官), 방판(幇辦)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인 민건호(閔建鎬, 1843-1920)가 작성한 『해은일록(海隱日錄)』의 1885년(고종22)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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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2월) 15일 기묘일, 맑고 동북풍이 잠시 불다.

○ 돛을 걸자 곧 남해(南海) 노량포(露梁浦)를 지났다. 포구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사당[祠宇][각주:1]이 있는데, 임진년(壬辰年)에 이 포구에서 일본군[日本兵]을 물리쳤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 하동(河東)과 광양(光陽)의 경계를 지나 곧 순천부(順天府)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 이르렀다. 배치를 잠시 살펴보니, 남쪽으로 형국을 열어 좌우로 감싸안은 듯한데, 객사(客舍)[각주:2]는 가운데 세워져 있고, 빈 관청 건물은 동쪽 가까이 세워져 있다. 서쪽 성 밖에는 민가[人家]가 즐비하였으며, 남문 밖에는 배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충무공이 사용한 거북선[龜船] 1척이 겨우 형체만 갖춘 채 강가[江岸]에 놓여 있다. 항구는 우수영(右水營)보다 낫다.

○ 강의 좌우에는 바닷물이 빠져 포구의 여자들이 무리지어 해초를 캐고, 또 어부들이 작은 배로 낚시를 하는 형상이 또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하루 종일 운항하여 순천 경계를 지나니 흥양(興陽)의 팔량산(八良山)이 보인다. 바람이 좋지 못하여 정박하고서 밤을 보냈다. 이날은 물길[水路] 300리 정도를 운행하였다.


十五日 己卯, 晴東北風乍起.

○ 仍掛帆卽過南海露梁浦. 浦上有忠武公祠宇, 卽壬辰年敗日本兵於此浦 故後人立祠云云.
○ 過河東光陽境 卽到順天府左水營前洋. 暫觀排舖 則南向開局左右如抱, 客舍當中建設 空則近東築之. 西城外 人家比櫛, 南門外 舟揖叢立. 有忠武公所用之龜船一隻 僅具形體 置之江岸也. 港口勝於右水營也.
○ 左右江岸潮落 浦女群群作隊 收海菜, 且漁人以小艇釣魚之狀 亦供可觀也. 終日行船 過順天界 望興陽八良山. 爲風不利 留碇過夜. 是日行水路三百里假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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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작성자인 민건호가 잠시 휴가를 얻어서 근무지인 부산을 떠나 고향인 해남(海南)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전라좌도수군영(全羅左道水軍營, 전라좌수영)이 있던 순천 해안가에서 거북선을 목격한 장면입니다. 음력인 일기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하면 1886년 1월 19일 화요일입니다.

'거북선이 겨우 형체만 갖춘 상태'였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1880년(고종17) 무렵 기록(전남 순천)이나 1883년경 영국 해군의 기록, 그리고 1884년 미해군 소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의 목격담(경남 고성) 전언보다 시기적으로 더 늦습니다. 사용하지 않던 배, 잔해만 남은 선체 등의 당시 거북선 상태 표현은 (목격 장소는 비록 다를지라도) 대체로 일치합니다.

현재로서는 이 기록이 가장 늦은 시점의 거북선 목격 사례인 것 같습니다.



  1. 사적 제233호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본문으로]
  2. 국보 제304호 여수(麗水) 진남관(鎭南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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