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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천시 홈페이지에서 2023년 주요업무계획 파일을 내려받아 보니, 영천읍성(永川邑城) 남문(南門) 복원 사업 진행이 일단 올해는 중단되었습니다. 만일 완전 중지가 아니라 연기된 것이라서 내년 이후에라도 사업이 재개된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면밀한 연구를 거쳐 제대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앞에서 예고하기를 다음 '관아' 카테고리 글에서는 한성부(서울)에 있던 중앙 관청에 대해 다룰 것이라고 하였으나, 삼척시에서 추진하는 삼척도호부 관아 복원 2단계 사업인 동헌(東軒) 복원 공사의 발주 일정이 이르면 5월부터 본격 시작되는 것으로 확인되어 삼척도호부 관아 복원 문제로 주제를 교체하여 간략(?)하게 다뤄보겠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1.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 복원 문제

본 글에서 중점을 두고 다룰 동헌(東軒) 복원 문제에 앞서 삼척도호부 객사(客舍)인 진주관(真珠觀, 眞珠館) 복원 부분을 한 번 더 점검합니다. 삼척 객사 부분에 관해서는 작년 4월에 올린 '관아 건물 복원 이야기 (링크)' 글에서 3번 소항목으로 한 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 당시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본문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3D 복원도 형태'로 1단계 공사가 완료되어 2022년 12월 15일에 준공식 및 현판식 행사가 이뤄졌습니다. 즉, 사업이 완료된 상황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삼척 객사를 촬영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은 앞 문단에 링크한 글을 클릭하셔서 첨부된 이미지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번 글은 그 내용을 풀어서 보완하는 형태입니다.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 복원 도면
1번 그림 -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 복원 부지


위 1번 그림은 삼척도호부 객사 복원 부지에 대한 4개의 이미지입니다. 각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A) 1916년에 측량 및 제작된 지적원도의 객사 인근의 부지(필지)
B) 1931년도 삼척군 청사 증축 계획도
C) 2013년 삼척객사 부지 관아유적 발굴조사 결과 평면도
D) 1931년 증축 계획도의 건물과 2013년 발굴조사 추정 건물 위치 비교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 건물은 1908년부터 삼척군 군청 청사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림 [A]는 객사 부지 지적도이고, 그림 [B]는 국가기록원 소장 1931년 작성 삼척군 청사 증축 도면입니다. 계획도라서 실제로 정면 약 5.45m, 측면 약 7.3m 길이의 12평 면적 사무실이 증축되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가능성 높음). 도면에는 증축 면적이 동서 3k, 남북 4k로 되어 있습니다. k는 間(간)의 일본어 발음인 켄(けん)이며, 일본 단위로 1칸은 약 1.818m입니다. 가로 1칸, 세로 1칸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평(=약 3.3제곱미터)인 것이죠(3x4=12). 어쨌든 객사 건물을 계속 삼척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1934년에 기존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습니다.

그림 [B]의 건물 용도와 면적(평수)은 1931년 증축 계획도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기재한 것인데, 아래의 국가기록원 소장 1917년 삼척군청 건물 목록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번호 구별 구조 평수 필자 추정
1  본관(本館) 조선식
기와집
43.60  객사 정청+동익헌 : 1931년 재무계, 서무계 사무실
2  부속가(附屬家) 상동 18.80  객사 서익헌(西翼軒) : 1931년 군수실 겸 회의실
3  상동 상동 14.00  객사 내행랑의 북쪽(동쪽) 행랑채(동익랑)
4  상동 상동 4.76  객사 내삼문의 동협문(東挾門) 개조 공간
5  상동 상동 4.76  객사 내삼문의 서협문(西挾門) 개조 공간
6  상동 상동 11.94  객사 내행랑의 남쪽(서쪽) 행랑채(서익랑)
7  변소(便所) 일본식
함석지붕
2.00  본관 북쪽 소재 (1931년 도면의 '38평' 아래 지점)


'부속가'는 군청 부속 건물을 의미하며, '조선식 기와집'은 조선식 와즙(瓦葺, 기와지붕 건물)을, '일본식 함석지붕'은 아연판즙(亞鉛板葺, 아연지붕)을 풀어 쓴 것입니다.

1917년 당시 본관 면적 43.5평은 기본적으로 정청(正廳)에 동익헌(東翼軒) 구역을 합친 것으로 보입니다. 정청의 측면 너비는 증축 도면의 치수대로 약 7.3m일 것입니다. 한옥 칸[間]으로는 2칸반에서 3칸 사이 규모에 상당합니다. 서익헌(정면 약 8m x 측면 약 7.3m)을 약간 독립된 공간인 군수실 겸 회의실로 둔 상태에서(1931년 도면에 따르면 정청과 약 1.8m 간격이 있음), 정청과 동익헌의 연결부를 이어서 군청 직원들이 근무할 넓은 사무실 공간을 확보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관 면적 43.5평이 1931년 도면의 38평과 약간 차이가 있는데 1917년 목록에서 군수실과 사무실 사이의 간격 부분을 포함하였던 것인지(유력), 아니면 그 이후 사무실 동쪽이 이런저런 이유로 일부 철거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1917년 목록 작성시에는 건물 주변에 가벽 형태로 설치된 공간, 복도 등을 본관 면적에 모두 포함하였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B] 증축 도면의 위쪽 군수실과 사무실 공간은 객사의 정청 및 동서익헌으로, 그 아래 군청 정문(正門) 부분은 객사의 내삼문(內三門)이 있던 내행랑(內行郞) 부분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군청 정문 너비는 약 3.3m, 내삼문 및 내행랑 건물의 측면 너비는 약 4.6m로 추정합니다.

객사 대문(大門)은 1912년 봄에 붕괴하여 철거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917년 건물 목록이나 1931년 증축 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군청 정문인 내삼문에서 바로 이어지는 경로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 가능합니다. 외삼문(外三門, 대문)이 포함된 외행랑(外行廊) 규모는 내삼문보다 작았을 수 있습니다. 행랑채 없이 외삼문과 담장만 갖추고 있었을 수 있고요.


그림 [C]는 발굴조사 결과 보고서를 1916년 지적도에 겹친 것입니다. 삼척도호부 관아유적 발굴 보고서의 종합 결론에 따르면, 발굴 주관측에서는 그림에서 '정청'으로 표기한 부분을 조선 전기(前期)의 객사 정청 공간으로, '내행랑'으로 표기한 부분을 조선 전기(後期)의 객사 내행랑 공간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정청의 서익헌(西翼軒)-정청(正廳)-동익헌(東翼軒) 정면(正面) 칸이 본래 5칸(서)-3칸(정)-5칸(동)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일제강점기 촬영 사진처럼 3칸(서)-3칸(정)-3칸(동)으로 축소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내행랑의 서익랑(西翼廊)-내삼문-동익랑(東翼廊) 정면 칸 역시 조선 전기에는 5칸(서)-3칸(문)-7칸(동)이었으나 후기에 들어서 유리건판 사진 기록처럼 3칸(서)-3칸(문)-4칸(동)으로 축소되었다고 결론하였고요. 측면은 전기와 후기 모두 정청을 2칸, 내행랑을 1칸으로 분석하였습니다.


그림 [D]는 1931년 삼척군청 도면 기록과 2013년 발굴조사 고찰 결과를 비교한 자료입니다. 1931년 도면에 따르면 '가'열 건물이 객사 정청이고, '나'열 건물이 내행랑, (1912년에 철거된) '다'열 위치가 객사 정문이 있던 외삼문 또는 외행랑 부분입니다. 반면, 2013년 발굴 보고서에서 추론한 바에 따르면 '나'열 자리의 건물이 조선 전기 객사 정청이고 '다'열 건물이 조선 전기 객사 내행랑입니다.

사진 기록과 발굴조사 결과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 발굴 건물지가 각각 내행랑, 외행랑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척시에서는 사진이나 문헌 기록이 아닌, 발굴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 추정 내용을 채택하여 (삼척 고지도, 죽서루를 그린 회화 등을 참작했다고 하지만) 상상이 많이 가미된 건물로 객사 복원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객사 대문이 갈 곳을 잃었고, 정청 측면 규모도 객사치고 작습니다.

사진과 도면 자료를 토대로 진행하면 상당히 충실하게 기왓장 개수까지 맞춰서 조부모, 증조부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조선 후기-대한제국 시기-일제강점기 시기의 삼척 객사 건물을 복원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결론을 도출하고 최종 판단을 내린 것인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0여 년간 군청으로 사용되기까지 한 유서 깊은 건물을 복원할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삼척시 객사 진주관 복원 사진
2번 사진 -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 사진


위 2번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삼척(三陟) 전경 유리건판 사진 가운데 죽서루(竹西樓) 및 객사 일대 지역입니다. 여러 차례 기술한 것처럼 이 당시에는 객사가 삼척군청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올해 초에 삼척을 방문하여 유리건판 사진과 거의 비슷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는데(죽서교 남단 및 삼척문화예술회관 뒷산에서 촬영), 복원된 객사 건물 위치를 보면 건판 사진에 등장하는 조선 후기 객사의 내행랑 소재지에 정청 건물을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번 그림에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만일 사진 자료를 기반으로 복원했으면 중간 사진의 ㉠ 지점(1번 그림의 군수실과 사무실 사이)에 객사 정청 서쪽 지붕이 보였어야 합니다.

이 사진 비교를 통해, 1931년 삼척군청 증축 도면에 있는 각 건물의 위치가 실제(유리건판 사진 모습)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밀 측량을 거친 설계 도면이 아닌 개략적인 증축 계획도이기는 하지만, 건물 위치와 면적을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강원도 삼척군 객사 진주관 (삼척군청 시기)
3번 사진 - 삼척군 군청 시기 진주관 건물


위 3번 사진은 작년에 삼척시청 진주관 복원사업 업무 담당자에게 제보했던,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확인한 삼척군청 자료 사진입니다. 낙찰 금액만 70만 원에 달할 정도로 엽서 가격으로는 고가에 거래되었습니다. 수십 건의 입찰이 이루어질 정도로 치열한 경매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삼척 지역에 관심을 가지 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국내 박물관 또는 개인이 낙찰받았기를 바랄 뿐이네요.)

이 사진은 삼척 진주관 정청에 걸려 있던 녹색 화살표 편액 '진주관'의 글자가 '真珠觀'이었음을 검증하게 해 준 매우 소중한 자료입니다. 문헌에 따라 진주관의 한자가 '眞珠觀', '眞珠觀' 등으로 나뉘었는데, '觀(관)'이 오자(誤字)가 아니라 실제 글자였던 것입니다. 객사에는 '館(관)' 글자가 붙는 것이 상식이었으므로 진주관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요. 참고로 위 사진 자료를 기초로 복원 진주관의 편액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부분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1870년(고종7)에 객사 단청을 보수하면서 '삼척관(三陟館)'이라는 편액을 게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편액은 객사 대문에 걸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을 보면 ①번이 당시 군청 정문이던 객사 내삼문(내행랑)의 바깥 기둥, ②번이 군청 정문(객사 내삼문 정문), ③번이 객사 내삼문 안쪽 기둥입니다. 즉, 내행랑이 측면 2칸으로 추정될 정도로 규모가 꽤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실제 도면상으로도 내삼문 측면은 2칸 너비인 약 4.6m). 그래서 2번 유리건판 사진을 봐도 거의 정청에 필적할 수준으로 중문(中門, 내삼문) 건물 지붕이 두터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위 사진을 봐도 기둥이 둥근 통나무로 되어 있고 건물 중간(?)에 '도호아문(都護衙門)' 편액을 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꽤 넓게 보입니다.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구한말 객사 내행랑의 서익랑, 동익랑 측면을 1칸으로 가정하였던 것과 대조됩니다.

보라색 화살표는 내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이처럼 기단부 위에 내삼문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발굴조사에서 별다른 흔적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근대 건물을 신축하면서 지면을 많이 깎아내고 변형시키기도 했겠지만요.

'도호아문' 편액은 삼척도호부 아문(衙門, 관청)이라는 뜻으로, 앞의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1908년에 삼척군청을 동헌 자리에서 객사 위치로 이전하면서 동헌 외문루(外門樓, 폐문루) 또는 내삼문(내행랑)에 걸려 있던 전통 편액을 옮겨 달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삼문 너머로 편액이 달려 있는 객사 정청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정면 벽체가 이어지도록 개수된 동익헌(東翼軒) 일부가 보입니다. 기와 형태도 뚜렸합니다. 그리고 객사 정청의 열린 문을 통해 정청 건물 너머 후원(後園) 지역이 보입니다.

이러한 사진 자료와 유리건판, 도면, 문헌 등을 종합하면 거의 완전하게 삼척 진주관을 복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춧돌 등의 발굴 건물지 유구(遺構)는 별도로 보존 내지 전시 방법을 강구하고 그 자리에 정청과 내삼문, 그리고 그 남쪽에 있었을 외삼문을 복원했더라면 말이죠. 그냥 정청 영역만 복원하는 방법도 가능했을 것이고요. 복원 사업이 3~4년만이라도 늦게 시행되었으면 어땠을까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다 보면 앞으로 이런 자료가 계속 나타날 것이니,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관아 건축물 복원 사업도 제발 신중하게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2. 삼척도호부 동헌 칠분당 복원 문제

본 글의 핵심 주제로 들어갑니다. 작년에 종료된 삼척객사 진주관 복원에 이어 올해 2023년에는 동헌(東軒) 권역에 대한 복원사업이 진행될 계획으로 있습니다. 조선시대 삼척 고을의 전체 형태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삼척읍성(三陟邑城) 지도
4번 그림 - 강원도 삼척읍성(三陟邑城) 지도


위 4번 그림은 강원도 삼척시의 옛날 중심 지역인 삼척읍성(三陟邑城) 형태를 보여주는 삼척군 성내리(城內里), 성북리(城北里), 읍중리(邑中里) 일대 지적원도(地籍原圖)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객사 공간이 보이고 그 아래 대한민국 보물 제213호 죽서루(竹西樓)가 있습니다. 죽서루 옆을 흐르는 하천은 오십천(五十川)입니다. 옅게 표시된 부분은 1970년대에 오십천 수로(水路) 변경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현재는 (1916년 지적도와 달리) 매립된 지역입니다.

객사 진주관 정북 약 200미터 지점에 '독묘(纛廟)'로 표기한 부분은 추정 위치입니다. 독묘는 군사 관련 제례(祭禮)를 거행하던 공간입니다. 삼척읍성 동문(東門)의 문루(門樓) 명칭은 빙월루(氷月樓)였고, 남문(南門)은 공진루(供辰樓)입니다. 동문루는 1911년에, 남문루는 1913년에 훼철(철거)되었습니다. 남문 오른쪽의 장청(將廳)은 곧 장관청(將官廳)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과 ㉣ 지역을 가르는 골목길입니다. 1910년 일제강점기 시작을 전후로 주요 고을의 도로가 정비되었는데, 골목길 형태를 보면 지적도 작성 시기에 즈음해서 인위적으로 신설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남문 옆의 ⓒ 지역을 보면 주변 필지(부지)가 부자연스럽게 직선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삼척읍 전경
5번 사진 - 1915년경 삼척 전경 사진 일부


위 5번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공개한 1915년경 삼척 전경 사진의 일부입니다. 사진에 표기된 ⓐ, ⓑ, ⓒ 지역을 4번 삼척읍성 지적도와 비교하면 사진의 각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와 ⓑ는 읍성 남문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진 길이 오십천과 만난 지역의 약간 넓은 공터입니다. ⓒ는 남문 안쪽 공터이며, 사진 촬영 당시에는 1913년에 철거된 남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은 삼척도호부 동헌(東軒)으로 추정하는 건물입니다. 동헌은 사또[使道]인 삼척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가 공무를 보던 공간이며, 오늘날의 시청 또는 시장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 삼척부사가 거주하던 내아(內衙)입니다. 일종의 시장 또는 군수 관사(官舍, 살림집)입니다. ㉢은 4번 지적도에서 언급한 장관청이며, ㉣은 동헌 왼쪽(서쪽)의 삼척관아 부속 건물 지역입니다. 사진에서 동헌과 내아 건물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만큼 건물 지체를 보여줍니다. 지방 고을에서는 객사에 이어 동헌(+내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죠.

빨간색 화살표는 당시 일본군 삼척헌병분대(三陟憲兵分隊)가 사용하던 장관청 건물 앞에 세워져 있던 사다리입니다. 망루 역할을 하였으며, 종(鐘)이 달려 있어서 위급한 상황을 전파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헌병분대가 경찰서 기능을 수행하던 시절의 전형적인 지방 읍내 전경입니다.

삼척도호부 장관청(將官廳) 건물
6번 사진 - 삼척도호부 장관청 (삼척군 삼척헌병분대)

위 6번 사진은 장관청 건물을 담은 1910년대 사진엽서입니다. '삼척헌병분대' 현판이 걸려 있고, 오른쪽(동쪽)으로 멀리 건물 한 채가 보입니다. 망루(사다리) 중간쯤에 올라가 찍은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사진 촬영 구도와 5번 사진에 등장하는 건물 형태를 감안하면 사진 동쪽 건물은 내아 및 내아 행랑채로 추정됩니다.

오른쪽 아래 작은 사진은 삼척시립박물관 소장 엽서로, 동일한 장관청 건물을 다른 지점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장관청 건물에서 삼척 지역 민간인의 체격측정 사진을 찍은 결과물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여럿 남아 있습니다. 이 장관청 건물 자리는 현재 도로에 절반가량이 걸쳐 있기 때문에 도로를 이설하지 않는 이상 원위치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실현 계획도 없지만요.


※ 하편 글로 이어집니다 : 글 열람하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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