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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도(成歡道)는 조선시대 역로(驛路) 가운데 현재 충청남도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표적 도로입니다. 한성부, 즉 서울에서 전라도 전역 및 진주(晉州), 사천(泗川), 통영(統營, 삼도수군통제영) 등 경상도 남부 지역을 가려면 거의 필수적으로 이용하게 되는 중심 도로이며, 그 도로 중간에 설치된 수많은 역참(驛站)과 역로에 운용되는 역마(驛馬)를 관리하던 관아(官衙)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각 역도(驛道)에는 역도 명칭을 대표하는 찰방역(察訪驛)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속역(屬驛, 소속 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성환도는 종6품 찰방(察訪)이 근무하는 성환역과 11개의 속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위 1번 지도는 성환도(成歡道)를 따라 배치된 성환도 각 속역의 위치 지도입니다. 행정구역 표시가 1910년 측량 지형도 기준이므로 조선 후기와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1906년(광무10) 9월에 월경지(越境地)와 두입지(斗入地) 정리가 주축된 지방 행정구역에 대한 일부 개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월경지는 따로 떨어진 지역으로 비입지(飛入地)라고도 하며, 두입지는 삼면이 다른 행정구역에 둘러쌓인 곳으로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라고 합니다. 다만 장명역 소재지인 수신면(修身面) 구획 경계선은 원래 청주목 경내로 보정된 상태입니다(1906년에 장명역 소재지인 충북 청주군 수신면이 충남 목천군으로 편입).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간선(幹線) 도로를 제외한 지선(支線, 주변 도로)은 속역 위치 지정에 필요한 일부분만 표시하였습니다.
지도 북쪽의 서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성환역이 있고, 그 아래로 신은, 김제, 광정 등의 속역이 도로를 따라 차례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성환도 소속 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성환역(成歡驛) - 성환도 중심역. 종6품 찰방(察訪) 근무지. 직산현(稷山縣) 소재 : 현재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환리
2. 신은역(新恩驛) - 천안군(天安郡) 소재 : 현재 천안시 동남구 신부동
3. 김제역(金蹄驛) - 천안군 소재 :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4. 광정역(廣程驛) - 공주목(公州牧) 소재 : 현재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5. 일신역(日新驛) - 공주목 소재 : 현재 공주시 신관동
6. 경천역(敬天驛) - 공주목 소재 : 현재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7. 단평역(丹平驛) - 공주목 소재 : 현재 공주시 우성면 (예전 우정면) 단지리
8. 유구역(維鳩驛) - 공주목 소재 : 현재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9. 평천역(平川驛) - 연산현(連山縣) 소재 : 현재 논산시 부적면 반송리
10. 금사역(金沙驛) - 연기현(燕岐縣) 소재 :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해밀리
11. 장명역(長命驛) - 청주목(淸州牧) 소재 : 현재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12. 연춘역(延春驛) - 목천현(木川縣) 소재 : 현재 천안시 동남구 북면 연춘리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성환역, 신은역, 김제역, 광정역, 일신역, 경천역, 평천역 등 7개 역은 성황도 도로[中路]에 있던 중역(中驛)이었고 단평역, 유구역, 금사역, 장명역, 연춘역 등 5개 역은 대로(大路)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주변 도로인 소로(小路)에 위치하던 소역(小驛)이었습니다.
충청감영 있던 공주목 서남쪽에 녹색 원으로 표시한 이인역(利仁驛)이 있습니다. 이인역은 성환역과 동급인 이인도(利仁道)의 중심역입니다. 지도 오른쪽 청주목 글자 위에 '율봉역', 지도 왼쪽 청양현 아래에 '금정역'을 표기하였는데, 각각 율봉도(栗峰道), 금정도(金井道)의 중심역이 청주 북쪽, 청양 남쪽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금정역은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잠시 역임했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때문에 약간이나마 인지도가 있습니다. 천안 바로 아래에 있는 '삼거리'가 눈에 띄네요. 옛날 천안삼거리입니다.
위 2번 지도는 1890년대 성환역 부근 지형도입니다.
왼쪽은 1894년(고종31) 8월말 또는 9월에 일본군 제1군 측량반이 휴대도판으로 측도한 지형도이며, 오른쪽은 1897년(고종34) 5월에서 8월 사이에 재차 측량한 지형도입니다. 두 지도 모두 1894년 7월 말에 있었던 청일전쟁(淸日戰爭) 당시 지상에서 벌어진 제1차 격전인 성환전투(成歡戰鬪)에 대한 기록을 위해 제작된 것입니다. 왼쪽 지도 출전은 지도 하단에 표기된 것과 같으며, 오른쪽 지도는 1904년 출판된 『명치27~8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八年日清戰史)』 수록 부도(附圖) 「성환부근전투도(成歡附近戰鬪圖)」 일부입니다.
왼쪽 위 작은 지도는 1886년(고종23)에 일본군 장교들로 구성된 간첩대가 정탐 및 비밀측량 형태로 작성한 것으로,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된 1886년 5월 일본군 보병대위 미우라 요리타카(三浦自孝) 제작의 필사본 비밀군사지도 「종신원지안성도(從新院至安城渡)」 이미지 일부입니다.
왼쪽 1894년 지형도에서 빨간색 화살표는 성환도 도로, 파란색 화살표는 성환역(成歡駅, 成歡驛) 위치, 보라색 화살표는 성환 남쪽의 남산리(南山里) 지역입니다. 왼쪽 위 1886년 군사지도에서 좌우 반전된 S자 형태의 도로상에 같은 색의 화살표로 표시한 지점입니다.
오른쪽 1897년 지형도에도 파란색 화살표의 성환역, 보라색 화살표의 남산리가 있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에 파란색으로 색을 입힌 건물 2채가 보입니다. 그 건물 위쪽을 지나는 도로 위에 원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성환역 소재지를 표시한 것입니다. 즉, 아래 건물 2채를 중심으로 한 곳에 성환역이 있었습니다. 성환역 소재지 동쪽에 1897년 당시 행정구역인 중리(中里, 성환중리)가 있었고, 중리 동남쪽 지도 바깥에 내리(內里, 성환내리)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다음 3번 지도 오른쪽 1919년 지형도에서 '성월리' 기재 지점).
녹색 화살표로 표시된 곳은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가 구축한 4각형 보루(堡壘)로 판단되며, 위에서 세 번째 보루 안에 '성신'으로 기재한 구릉 지점은 현재 성신초등학교(成新初等學校, 誠新初等學校 )가 있는 곳입니다. 언론 보도에 ' 成新 ', 지형도에 '誠新'으로 기재되어 있는 이 초등학교의 부지는 일제강점기 때 성환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장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었던, 1912년 10월 준공 성환공원(成歡公園) 자리입니다. 청일전쟁 승리의 서막을 장식한 성환전투가 일본에게 가지는 의미가 적지 않았던 탓에 경부선 철로를 놓을 때도 (찰방역이 아닌 기차역으로서의) 성환역을 중요하게 여겼고 주변에 이와 같은 각종 시설을 마련하였습니다.
성환도 찰방역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천안박물관 성환역 관련 전시물에서 '성환역은 성환읍 성환리를 관통하는 1번 국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성월1리(옛 중리) 동성중학교 옛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라고 안내하고 있으나, 성환역 소재지를 다른 곳으로 추정하는 여러 주장이 최근까지 현존하고 있기에 다수 안내문 또는 자료에서 해당 위치를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조선시대 성환역은 왼쪽과 오른쪽 지도에서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지점, 현재 주소로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성환리 286-18 일대에 있었습니다. 도로명 주소로는 성환읍 성월수향길 5 부근입니다. 이곳은 예전 동성중학교가 있던 곳으로서, (각 마을에 전래된 지명 유래를 토대로 위치를 추정한) 천안박물관에서 성환역 위치를 실제에 가깝게 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3번 지도는 1910년대 지형도입니다. 2번 지도의 1897년 지형도와 비교해 보면 약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라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직선 형태의 신작로가 개설되었으며, 다시 약 10년이 흐른 1919년에 들어서는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기존 도로가 아닌 노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신설 도로가 도로 교통의 핵심축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글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1916년 측도 지형도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지도를 비교해 보면 성환면사무소(成歡面事務所)가 처음에는 1919년 지형도의 성환우편소(成歡郵便所) 자리에 있었으며, '경찰'로 표시된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 자리에는 현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있었습니다. 1911년경까지 성환역 청사 공간에는 일본군 성환수비대(成歡守備隊)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6년에서 1919년 사이에 면사무소를 예전 성환역 청사 건물로 이전하고, 빈 공간이 된 면사무소 터에는 그 맞은편 서쪽에 있던 우편소가 옮겨 입주하였음이 확인됩니다. 오른쪽 지도에서 '면소(面所)'로 표시된 곳이 1919년 당시 성환면사무소 소재지이며,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과거 성환도 찰방역 위치입니다.
오른쪽 지도에서 '소학교'는 일본인 학생을 교육하던 성환공립심상소학교(成歡公立尋常小學校), '학교'는 아마도 조선인 대상 학교 시설이거나 일본인 주관 성환학교조합(成歡學校組合) 건물 또는 부지이며, '비(碑)'는 일본군 장교 기념비(성환공원)입니다. 1914년 3월에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목천군(木川郡)과 직산군(稷山郡)이 천안군으로 흡수 통합되기 이전에 소학교, 우편소 등이 있던 이 장소는 직산군 삼서면(三西面) 주막거리(酒幕巨里)였습니다. 개편 후에는 천안군 성환면 성환리가 됩니다.
위 4번 지도는 2번과 3번 지형도에서 살펴봤던 지역을 조망한 국가기록원 소장 1912년 측량 지적원도(地籍原圖)입니다. 신작로 부분을 제거하여 가능하면 2번 지도 오른쪽 1897년 지형도 기준의 조선시대 후기 또는 대한제국 시기 지리를 담고자 하였습니다.
위 지적도에서 노란색 테두리가 있는 대지[垈] 필지는 1912년 측량 당시 국유지였습니다. 건물이 들어서 있는 대지가 이처럼 모여 있는 곳에서 국유지 비율이 이 정도 수준이면 일단 지방관(사또)이 있던 관아 건물이나 첨사, 만호 등의 진영(鎭營)과 같은 관청 건물이 소재한 곳이었다고 간주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앞서 지형도에 이곳 지명이 '성환역(成歡驛)', '성환(成歡)', '성환리(成歡里)' 등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성환도 찰방역 소재지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가장 넓은 국유지에 '성환역'이라고 기재하였습니다. 이곳은 3번 1919년 지형도에서 면사무소가 있던 곳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앞 지형도에서 살펴본 성환도의 중심 도로이며, 파란색 화살표는 직산군(직산현)으로 향하는 길, 녹색 화살표는 직산현 가도(街道)에 있던 국유지, 보라색 화살표는 남쪽으로 향하는 남산리에 있던 국유지입니다. 녹색, 보라색 화살표 지역의 꽤 넓은 대지에는 역마를 교체하던 시설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위 5번 사진은 4번 지도에서 추정한 성환역 위치를 확정 짓는 결정적 이미지입니다. 1905년 8월 출판된 『경부철도안내(京釜鐵道案內)』에 실린 것으로, 사진 제목은 '성환역 고전장(成歡驛古戰場)'입니다. 청일전쟁 당시 승전 전쟁터였음을 기념하고 자랑하기 위해 경부선(京釜線) 개통에 즈음해서 성환역(기차역) 근처의 성환역(찰방역) 전경을 촬영한 사진이며,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08년에 펴낸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 경부텰도노래)〉에도 '성환고전장(成歡古戰場, 성환싸홈터)'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습니다.
ㄱ) 빨간색 화살표 : 성환역 누각인 척수루(滌愁樓)
ㄴ) 파란색 화살표 : 성환역 찰방 근무 공간인 동헌(東軒)
ㄷ) 녹색 화살표 : 성환역 북쪽 다소 높은 곳에 있던 나무 (느티나무?)
ㄹ) 검은색 화살표 : 직산현으로 이어지는 도로 일부 (4번 지도의 검은색 화살표 부분)
ㅁ) 파란색 점선 : 성환역 남쪽에 있던 작은 하천
4번 지도 위에 이 사진의 유력한 촬영 장소를 표시하였습니다. 이 사진과 4번 지도를 비교하면 도로 방향, 논과 밭의 면적과 형태, 하천 및 연못 위치, 건물 필지 모양 등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칸(정면 3칸 x 측면 2칸) 척수루와 10칸(정면 5칸 x 측면 2칸) 동헌 규모 등이 모두 『호서읍지(湖西邑誌)』 제11책 『직산현지(稷山縣誌)』에 수록된 「성환역지(成歡驛誌)」 기록과 일치합니다.
성환리 지명 유래 자료를 보면 '찰방 터' 항목에 '현재 그 터에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주택이 들어섰으며 소규모 공장들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녹색 화살표로 표시한 두세 그루의 나무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지명 유래를 정리할 당시까지 남아 있던 나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척수루 터' 항목에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터 옆에 사정(射亭)의 터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진 해상도가 낮아서 완벽하게 식별이 안 되지만 척수루 앞에 연못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해상도 이미지가 확보되면 동헌, 문루 등의 성환역 건물 배치와 형태 고증에 확실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고을의 관아 전경을 담고 있는 사진은 여럿 전하지만 찰방역을 찍은 것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참고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京釜鐵道案內(南韓旅行記)』는 전혀 다른 자료입니다.
위 6번 지적도는 4번 지도에서 찰방역 부분을 확대한 후, 5번 사진에서 확인되는 건물 및 나무를 배치한 것입니다. 각 숫자는 지적도 제작 당시 지번(번지)이며, '國(국)' 글자가 표기된 곳은 국유지(國有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유지(官有地)였죠.
286번지 성환도 찰방역 터 북쪽에 옅은 녹색으로 채색된 부분은 다음 항공사진에서 보이는 나무 위치입니다. 녹색 화살표로 표시된 큰 나무 두세 그루는 5번 사진에서도 보이는 나무입니다. 또 286번지에서 나무 주변에 옅은 회색으로 채식된 지역은 같은 필지 내에서 다소 높은 (작은) 언덕 지역인데, 현재도 이곳은 주변보다 몇 미터 높은 비탈 지형입니다.
척수루 남쪽 268번지는 지목이 연못[池]으로 되어 있는데, 신작로가 놓인 곳을 감안하면 아마 285번지까지 연못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척수루 앞 연못 옆에 활쏘기를 하는 사정 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연못 위쪽 285번지 공간 또는 연못 아래 국유지(269번지) 혹은 그 인근 280번지 임야[林(樹)]가 활터 공간일 수 있습니다. 문헌 기록상의 면적만 285번지가 유력합니다.
조선시대 성환역 비정시 중요 기준으로 자주 언급되는 한부개제(韓夫介堤, 갯방죽) 위치는 지도 왼쪽 아래의 279번지[田] 일대 또는 그 왼쪽 278번지[沓]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
1872년(고종9) 편찬된 『지방지도』 중 직산현 지도를 보면 성환역 동헌 및 척수루 서쪽에 장청(將廳), 동쪽에 작청(作廳)이 있습니다. 286번지 필지 형태가 이러한 직산현 지도 묘사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기타 국유지에는 형방청, 관청 등의 여타 성환우아(成歡郵衙, 성환역 관아) 건물들이 흩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환역지」 사례(事例) 항목에 수록된 성환역[本驛] 건물 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ㄱ) 동헌(東軒) 10칸[間] : 찰방 근무 청사
ㄴ) 동고(東庫) 6칸
ㄷ) 작청(作廳) 12칸 : 동헌 및 척수루 동쪽
ㄹ) 형방청(刑房廳) 7칸
ㅁ) 삼문(三門) 3칸 : 척수루 1층이 외삼문(外三門) 용도로 사용될 경우 내삼문(內三門)
ㅂ) 누각(樓閣) 6칸 : 척수루(滌愁樓)
ㅅ) 장청(將廳) 3칸 : 동헌 및 척수루 서쪽
ㅇ) 관청(官廳) 9칸
ㅈ) 급창청(及唱廳) 3칸
ㅊ) 사령청(使令廳) 4칸
위 목록을 보면 찰방이 평상시 거주하는 내아(內衙)가 없습니다. 내아는 보통 동헌 근청에 있었으므로, 위 지도에서 동헌 1시 방향에 '(내아)'로 그 추정지를 표시하였습니다.
위 7번 사진은 1948년에 촬영된 성환역 주변 항공사진입니다. 조선시대 후기 또는 대한제국 시기 도로에 추가된 신작로를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하였습니다. 녹색 화살표는 항공사진 촬영 당시에 존재하던 나무 두세 그루이며, 빨간색 화살표는 밭고랑 형태로 보이는 구분선입니다. 상단 화살표 위쪽으로 나무가 있는 지역은 다소 높은 지대입니다. 하단 화살표 부분은 동헌 안팎 구획을 구분하는 「성환역지」의 삼문(三門) 또는 5번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행랑채 일부?) 경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간 지역 역시 그 아래 지대 평지보다 약간 높습니다.
찰방역 동헌이 있던 이곳 286번지에 있던 성환면사무소는 1930년 8월에 경부선 성환역 근처로 신축 이전합니다. 이후 이 지역은 항공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밭으로 용도 변경되어 이웃 주민의 경작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1961년 4월에 제민고등공민학교(濟民高等公民學校)가 들어섰으며, 이 공민학교는 1968년에 동성중학교(東成中學校)로 개편되고 1974년 6월에 현재 소재지인 성환읍 성환1로 138(매주리 435-8)로 신축 이전합니다.
위 사진은 현재 항공사진입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왕복 5~6차선의 천안대로(天安大路)가 성환역 동헌 필지인 예전 286번지를 상당한 부분 잠식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만, 척수루 위치의 일부분이 도로에 접하고 있습니다. 동헌 추정 위치는 다행히 살아남아 있네요. 그러나 큰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발굴조사를 하더라도 의미 있는 결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천안시를 비롯한 관계 당국에 성환역 발굴 또는 복원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요. 이 글을 통해 그동안 논란이 있던 성환도 찰방사(察訪司, 찰방역) 위치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문루와 동헌을 담은 소중한 사진 자료가 발견(?)되었으니, 복원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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