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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을 개봉 직후 관람했는데,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였습니다. 일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극적 효과를 위한 각본이었다고 넉넉히 이해될 정도였죠.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고 각종 무대와 소품도 고증에 꽤 충실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내용을 긴박하게 풀어가는 것이 참 좋았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 역사에 대해 관심과 반성을 가지게 하는 좋은 영화였네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과정을 정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많이 늦었지만, 2023년을 마무리하는 날에 올려봅니다. (예고했던 경상좌수영 수군진 글은 다음에...)


12·12 쿠데타(Coup d'État)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약 한 달 보름 전에 일어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 시해 사건인 '10·26 사건'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월 26일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1924-1980)가 10·26 사건이 벌어진 궁정동 안가(安家, 안전 가옥)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 1929-2002) 대장을 초대했고, 사건 직후 중정부장이 참모총장을 대동하고 용산 육군본부로 이동한 후 상황 장악을 시도하다가 다음 날인 27일 새벽에 체포되어 보안사(保安司) 서빙고 분실(分室)에 수감되었기 때문입니다.

10.26 사건 경과 서울시 지도
1979년 10월 26일 사건 경과 지도


위 이미지는 10·26 사건의 개략적인 진행 과정을 당시 서울특별시 지도 위에 표기한 것입니다. 12·12에 영향을 끼친 10·26의 사건 주요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ㄱ) 대통령 유고에 따라 최규하(崔圭夏, 1919-2006)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

ㄴ) 10월 27일 새벽 04시에 내려진 비상계엄령에 따라 비상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육군대장이 임명됨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려진 부분 계엄령이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이 국방부 장관의 지휘 및 감독을 받음)

ㄷ) 같은 날 내려진 계엄공고 제1호에 따라 각 지역에 지방계엄사무소가 설치되고, 수도경비사 계엄사무소장에 수도경비사령관 전성각(全成珏, 1929?-?) 소장이 임명됨

ㄹ) 같은 날 내려진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10·26 사건(대통령 시해) 및 계엄포고령 위반에 대한 수사를 위해 계엄사령부 내에 '합동수사본부(합수본부)'를 설치하고 합동수사본부장에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 1931-2021) 소장이 임명됨

ㅁ) 서울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 일부가 계엄사령관 명령에 따라 계엄군으로 서울 주요 지역에 배치됨 (이후 11월, 12월에 순차적으로 원대 복귀)


계엄(戒嚴)은 전쟁 발발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대로 하여금 해당 지역의 행정, 사법 권한을 행사하게 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계엄사령관이 실권을 행사하며, 국민 기본권이 일부 제한됩니다.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을 따라 행동했던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었는데,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난 26일 당일 16시 15분에 중정부장의 전화 연락으로 궁정동 안가 저녁 식사에 급하게 초대된 것이었을 뿐 직접 연루 사실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에서도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3차례에 걸쳐 정승화 총장을 조사 후, 11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군이나 외부 개입은 없었다"고 발표하여 정 총장의 10·26 관련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서울지역 계엄을 직접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관이 11월 16일 이·취임식을 통해 전성각에서 장태완(張泰玩, 1931-2010) 소장으로 교체됩니다. 김재규가 체포되면서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육군참모차장 이희성 (李熺性, 1924-2022) 중장이 서리(署理)로 임명되자 공석이 된 참모차장에 3군단장 윤성민(尹誠敏, 1926-2017) 중장이 임명되었으며, 다시 빈 자리가 된 3군단장직에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임명한 결과입니다. 장태완 소장의 직전 보직은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이었습니다.

1976년 개정된 「대통령경호실법 시행령」에 따라 대통령 경호실에서 필요시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의 병력 일부를 지휘 및 감독할 수 있었으며, 수경사에는 유사시 다수 공수부대(제1, 제3, 제5, 제9공수여단 등)와 4개 사단(수기사, 제20, 제26, 제30사단)이 배속(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긴급 상황 발생시 대통령-경호실장-경호실 작전차장보(준장)-수경사 파견 작전부대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가 가동되는 식이었습니다. 다만 10·26 사건으로 대통령 경호실이 연관된 대통령 유고 상황이 초래되자 경호실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고, 12월 6일 선출 절차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정식 당선된 후에도 (동월 21일로 예정된 취임식 전까지) 국무총리 공관에 계속 머물러 있었으므로 이러한 경호실법 시행령은 당시 정상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합동수사본부장 자리에 오른 전두환 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1979년 3월 5일이었습니다. 약칭 '보안사'라고 하는 국군보안사령부(國軍保安司令部)는 본래 육군 보안사령부였는데, 1977년 10월 7일에 기존 해군 방첩대, 공군 특별수사대 등의 방첩부대를 흡수하여 확대 개편된 조직이었습니다. 1991년에 국군기무사령부, 2018년에 국군안보지원사령부로 개편되었으며, 2022년 11월 1일에 국군방첩사령부로 다시 개칭됩니다.

계엄령을 통해 보안사령관이 합수본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되자 10·26 사건에 직접 연루되어 사실상 체제가 무력화된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의 정보 수집 기능과 조직을 흡수하고 총괄하면서 보안사가 최고 권력 기관으로 부상합니다. 그리고 그 활동 중심에는 각급 보안부대와 군의 주요 보직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보안사령관인 육사 11기 출신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있었죠.


군 내부에서 '정치군인'을 배제하고 보안사령관 및 하나회의 월권과 전횡을 차단하려는 인사 기조를 실행하기 위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구상이 전두환 소장에 대한 '동해안경비사령관 좌천설'로 수면 위에 떠오르면서 점점 구체화하자 당사자를 주축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실력 행동에 나선 참담한 사건이 바로 1979년 12월 12일 하극상인 '12·12 군사반란'입니다.

12월 12일 수요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약 12시간에 걸친 쿠데타 전개 과정을 4장 이미지로 정리하였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경과 서울시 지도
12.12 군사반란 전개도 #1 - 12월 12일 18시부터 20시까지 경과


위 이미지는 12월 12일 18시부터 20시까지의 사건 경과를 시간 순서로 표기한 지도입니다. 그림만 보셔도 되지만, 추가 설명을 덧붙입니다.

1. 청와대 경호 임무를 위해 경복궁 북서쪽 옛 태원전(泰元殿) 권역에 주둔하던 수경사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제1군단장 황영시(黃永時, 1926-2022)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1929-2011)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927-1997) 중장, 제9사단장 노태우(盧泰愚, 1932-2021) 소장, 제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933-2016) 소장, 제71훈련단장 백운택(白雲澤, 1932-1982) 준장,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1934-) 준장,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1934-) 준장,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1932-) 준장 등 장성 9명과 제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 1935-) 대령, 제33경비단장 김진영(金振永, 1938-) 대령 등 영관급의 하나회 세력이 집결하여 반란군 지휘부를 구성함. 이날 30단 거사 암호명은 '생일집 잔치'.

2.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사전 지시에 따라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부 국장인 허삼수(許三守, 하나회) 대령이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겸 합수부 수사2국장 우경윤(禹慶允, 하나회), 육군본부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成煥玉, 하나회) 대령 등의 인원 및 청와대에 파견된 수경사 제33헌병대장 최석립(崔石立, 하나회) 중령 이하 무장 헌병(군사경찰) 61명을 인솔하고 18시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을 출발하여 19시 10분에 한남동 소재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도착하였으며, 정승화 참모총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총으로 위협하면서 총격전을 감행한 끝에 총장을 납치, 19시 27분에 공관 정문을 통과하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음.

3. 참모총장 납치 과정에서 반란군측 제33헌병대 병력이 한남동 공관촌 정문 초소를 점령하였으나, 같은 공관촌에 거주하던 해군 제2참모차장 김정호(金正浩, 1931-2013, 해병) 중장 지휘로 공관 경비부대인 해병대가 역습에 성공하여 제33헌병대를 무장해제하고 구금하였음. 이 과정에서 33헌병대 소속 박윤관(朴潤官, 1956-1979) 일병이 순직함(상병 추서). 제33헌병대가 해병대에게 포위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반란군측에서는 제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경복궁 제30경비단 1개 중대 80명을 이끌고 한남동 공관으로 출동함. 사건 직후 한남동 공관 정문 앞에 도착한 해군본부와 육군본부, 국방부, 수경사 등의 5분대기조 및 30단 병력이 13일 06시까지 혼잡 대치 상황을 지속함.

4-1. 육군참모총장 강제 연행이 추진되는 시점에 특수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 1926-1989) 소장,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金晋基, 1932-2006) 준장 등이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초대로 연희동에 있는 한정식 요정에 모임. 전두환은 비(非)하나회 인물인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禹國一, ?-2009) 준장을 대신 보내 접대케 하였으며,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趙洪, 하나회) 대령이 참석하여 상황 파악을 주도하였음.

4-2. 특전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시내로 1시간 이내에 급파할 수 있는 4개 특전여단의 최고 지휘관이며, 수경사령관은 평시 서울에 주둔한 실병력(實兵力)을 지휘하면서 주요 길목의 헌병 검문소와 한강 교량을 통제하는 책임자이고, 육본 헌병감은 직속 병력이 국무총리 공관 등 핵심 시설을 경비하고 있었음. 즉, 쿠데타 성공을 위해 반란군측에서 반드시 손발을 묶어 격리해야 하는 보직이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육군본부 헌병감 등 3인. 19시 35분경에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발생하고 총장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각자 부대로 복귀함.

5. 보안사측이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일으키자, 공관촌 내에 거주하던 노재현(盧載鉉, 1926-2019) 국방부 장관은 가족을 데리고 공관에 이웃한 단국대학교 체육관으로 피신 후, 전화로 합동참모본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당직을 서고 있던 합참 작전국장 이경률(李炅律) 소장을 호출함. 1시간 후 이경률 소장이 차량으로 단국대에 도착하자 여의도에 있는 이경률 자택에 가족을 내려놓고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21시 10분경 B2 벙커에 도착. 최초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2시간 경과 시점.

6.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하던 도중 19시 55분에 경장갑차(APC) 1대, 헌병 1개 소대를 한남동 공관으로 출동시키고 예하 단장들을 수경사 상황실로 소집시킴. 20시에 수도경비사령부에 도착한 장태완 소장은 경장갑차 1대, 전차 1대, 앰뷸런스 1대, 헌병 1개 소대 등으로 제2차 특수임무조를 편성하여 20시 10분경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申允熙, 하나회) 중령에게 지휘를 맡겨 출동시킴. 각 검문소 검문검색 강화를 지시한 직후 상황 파악을 위해 한남동 공관촌으로 직접 이동하던 중, 20시 40분경 육군본부의 참모차장과 통화가 되어 '보안사에 의한 참모총장 납치 상황'임을 비로소 인지함. 신윤희 중령은 공관 대치 지역에서 같은 하나회 소속 33경비단장 김진영과 접촉하여 사건 내막을 파악함.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 경과 서울시 지도
12.12 군사반란 전개도 #2 - 12월 12일 20시부터 22시까지 경과


위 이미지는 12일 20시부터 22시까지의 사건 경과를 표기한 지도입니다. 역시 추가 설명이 이어집니다.

7. 육군본부에 집결한 육군 지휘부는 참모총장 납치(유고)에 따라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 지휘하에 20시 10분에 국지적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발령하는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수도권 일원에 발령하였으며, 20분에 제1야전군 및 제3야전군 관할 지역에 '진돗개 둘'을 추가 발령함. 1군은 강원도 지역, 3군은 경기도 지역 부대임. 이어 21시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반란군측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석방과 각 지휘관의 부대 복귀를 명령하였으나 당연히 거부됨. 이에 따라 참모차장은 각급 부대에 육성지시 없는 부대 출동 금지를 명령하고 제9공수여단에 출동 준비를 지시함.

8. 18시 20분에서 43분 사이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수본부장 자격으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한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을 방문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참모총장 연행에 관한 재가를 얻으려 하였으나, '국방부 장관의 결재 없이는 재가할 수 없으니, 절차를 밟아서 오라'는 대통령의 태도로 인해 재가 획득이 여의찮고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발생한 상황을 확인하자, 20시 30분에 제30경비단으로 이동하여 장성 9명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 세력에게 관련 상황을 설명하고 유사시 부대 출동에 대한 약속과 다짐을 받음.

9-1. 한남동 공관으로 출동했다가 21시경 필동 수경사로 복귀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지휘 부대인 수경사 제30경비단에 전화를 걸었다가 반란군측 유학성 중장, 황영시 중장 등과 차례대로 통화하면서 진압 의지를 한층 강화함. "이 반란군놈의 XX들아! 네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모두 날려버릴 테니!"라는 내용의 발언이 나온 전화 통화로 널려 알려져 있음. 통화 시각은 21시 40분께(자료에 따라서는 21시 06분경).

9-2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육군본부와 국방차관, 제3군사령관 이건영(李建榮, 1926-2023) 중장 등에게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수기사), 제9공수여단의 수경사 배속 및 출동을 요청하였으며, 반란군측 군부대 동원에 대비하기 위해 22시경 수경사 관할 한강 교량에 대한 교통 통제를 명령함. 참고로, 유사시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제20사단, 제26사단, 제30사단, 수기사 등 4개 사단이 서울을 방어하는 일명 '방패부대(방패사단)'으로 편입(배속)될 수 있었음.

10.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30단으로 돌아간 직후인 20시 20분경에 전두환의 지시(일부 기록에는 노태우 지시)를 받은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鄭東鎬, 1936-2009) 준장과 경호실 작전과장(작전담당관) 고명승(高明昇, 1935-) 대령이 경호실 휘하 병력을 동원하여 기존 국무총리 공관을 경비하던 병력을 무장해제한 후, 20시 40분에 총장 공관의 경호 및 출입을 장악함. 정동호 준장과 고명승 대령은 모두 하나회 소속.

11-1. 경복궁 제30경비단에 위치한 반란군 지휘부는 필요시 병력을 본격 동원하기로 함. 제9사단장 노태우 소장이 제3공수여단장과 제5공수여단장에게 소속 부대로 가서 부대를 장악할 것을 지시하자 3여단장 최세창 준장, 5여단장 장기오 준장 등이 21시에 각자 부대로 복귀함.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21시 10분에 자신의 지휘 여단에 연락해 부여단장 이기룡(李起龍) 대령에게 부대 출동을 지시하였으며, 노태우 소장도 21시 40분에 자신의 제9사단에 연락해 참모장 구창회(具昌會, 하나회) 대령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함.

11-2. 제30단에 모여 있던 반란군 가운데 전두환 소장, 황영시 중장, 유학성 중장, 차규헌 중장, 백운택 준장, 박희도 준장 등 장성 6명이 21시 30분에 대통령 경호실 병력이 점거한 국무총리 공관을 다시 방문하여 대통령 재가를 압박함. 그러나 이러한 제2차 재가 획득 시도가 실패하자 이들 일행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앞 소격동에 있던 국군보안사령부 상황실로 이동함. 당시 보안사에서는 각급 부대에 대한 도·감청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각 부대에 파견된 보안사 인력과 하나회 중심 인맥을 통해 일선 부대 지휘관, 참모, 장교들을 회유 및 협박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진행하고 있었음.

12. 박희도 준장의 지시에 따라 현재 김포공항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제1공수여단 1개 대대가 21시 20분에 여단 앞 5분 거리 신월동 삼거리 지점에서 출동 대기하다 (육군본부와 특전사령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21시 45분경 여단본부 지시로 일단 복귀하였는데, 이러한 반란군측 움직임을 접한 육군본부에서는 21시 50분에 부평 주둔 제9공수여단을 수경사에 배속시켜 출동할 것을 지시함. 23시에 국방장관이, 23시 30분이 참모차장이 특전사령관에게 재차 명령함.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尹興基, ?-2019) 준장은 비(非)하나회이기 때문에 당시 특전사령부와 육군본부가 신뢰할 수 있는 특전사 병력이었음.

13. 제9공수여단 출동을 명령한 육군본부 지휘부는 1공수여단 중심의 반란군 공격이 있을 경우 자체 시설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22시 15분경에 그나마 병력 자원을 보유하고 있던 필동 수경사령부로 이동함. 육본 지휘부와 함께 있던 노재현 장관은 수경사로 향하지 않고 국방부 건물로 이동하던 중,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헌(柳炳賢, 1924-2020) 대장의 건의에 따라 육본에 이웃한 한미연합사령부 미8군 벙커로 자리를 옮김.

14-1. 한편, 현재 송파구 거여동 소재 특수전사령부에 21시경 도착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상황을 점검하고 부사령관 이순길(李順吉, 1928-2005) 준장 등을 김포 제1공수여단으로 파견하여 1여단의 출동을 저지하고 여단에 배속된 차량을 부천에 있는 제9공수여단으로 보내라고 지시함.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시는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및 부여단장 이기룡 대령에 의해 모두 무시됨.

14-2. 국무총리 공관에서 30경비단으로 돌아온 박희도 준장이 전두환 소장의 명령에 따라 23시에 30단을 떠나 행주대교를 거쳐 자정 무렵 여단에 도착함. 박희도 여단장은 조금 앞선 23시 55분 도착해 있던 이순길 특전사 부사령관의 만류를 뒤로 하고 제1공수여단의 부대 출동을 지시함.

15. 독립문 인근 제33경비단에 배속되어 주둔하고 있던 수경사 전차대대 소속 1개 중대(전차 12대)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와 전차대대장 차기준(車基濬, ?-2000) 중령의 명령에 의해 필동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하던 중, 경복궁 30단에 있던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의 현장 제지로 서대문역 근처에서 독립문 33단으로 회군함.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경과 및 군부대 이동 지도
12.12 군사반란 전개도 #3 - 12월 12일 22시부터 13일 03시까지 부대 이동


위 이미지는 12일 22시 무렵부터 이튿날인 13일 새벽 03시까지 12·12 경과를 표기한 수도권 일대 지도입니다. 12일 상황은 녹색 숫자, 13일 상황은 보라색 숫자이며, 군부대(사단, 여단, 연대 등) 위치는 군사보안 문제로 대략 표기하였습니다.

16-1. 육군 지휘부에서는 육군본부 기동예비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제20사단이 반란군측에 동원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0시 30분경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소준열(蘇俊烈, 1931-2004) 소장에게 20사단에 대한 부대 지휘권 인수를 명령함. 경복궁 30경비단에 있던 제20사단장 박준병 소장이 반란군측 하나회 소속이었고, 참모장 노충현(盧忠鉉) 대령도 '사단장 육성에 의한 지시만 받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음. 따라서 20사단 2개 연대 지휘권이 육본(종행교장)으로 실제 옮겨지지 못했으나, 소준열 소장과 육본 감찰관 권익검(權益檢) 소장 등 육본측 인물이 20사단 임시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부대 동원을 못 함.

16-2. 당시 제20사단 사령부와 제61연대가 남한산성 인근 성남 종합행정학교 영내에, 제62연대가 불암산(제71훈련단 영내 또는 상계동) 예비군훈련장에 비상계엄군으로 주둔하고 있었음. 20사단은 10·26 사건이 발생하자 육본 명령에 따라 서울 태릉으로 즉시 출동했으며, 이에 작전지휘권이 10월 27일 09시부터 한미연합사에서 육군본부로 이관된 상태였음. 이 가운데 1개 연대(제60연대)는 11월 25일에 원대복귀하여 연합사로 작전통제권이 환원되었고, 제20사단의 나머지 제61연대와 제62연대는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John A. Wickham Jr.) 대장이 지휘하는 한미연합사 허락 없이 육군본부가 즉각 동원 가능한 핵심 전력이었음. 병력 규모는 사령부와 61연대 약 1,700명, 62연대 약 1,300명으로 합 3천 명 수준.

17-1.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朴東遠) 대령을 통해 수경사에서 가장 많은 실병력 약 1,000명을 보유하고 있던 야전포병단(야포단)에 22시 30분경 출동 준비를 명령하였으나, 선발대로 나선 정보과장 박성빈(朴成彬) 소령이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가 통행불가 상태임을 전하고 이어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도 같은 상태라고 보고함. 행주대교로 방향을 바꾼 선발대가 '행주대교를 지금 제1공수가 건너고 있다'고 보고하자 즉시 수경사에 보고함. 이에 수경사령관은 모든 야포를 경복궁에 조준하고 대기하라고 명령함. 야포단은 제1공수 주둔지 근처(현 김포공항 인근)에 있었으므로 경복궁까지는 직선으로 약 15km 거리임. 단, 105mm 1개 포대 6문은 경복궁에서 약 4.5km 거리인 효창동에 주둔하고 있었음.

17-2.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국방부 장관과 한미연합사 결심 없이는 5군단의 수기사, 6군단의 26사 등 방패부대 동원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22시 50분경에 수도경비사령부 기밀실로 수경사 소속 장교 60여 명을 소집한 후, 제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헌병단장 조홍 대령의 체포와 반항시 사살을 명령하고 청와대 북쪽 팔각정 주변의 33경비단 병력을 수경사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함. 수경사령관 명령에 따라 독립문 소재 제33경비단의 작전주임(작전참모) 김달련(金達連, 김달연) 소령이 30경비단 배치 구역을 피해 33경비단 3개 중대를 철수시켰으나 이 400명 내외 병력이 필동 수경사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01시 30분으로 상황을 개선하기에는 너무 늦었음.

18.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23시경(23시 15분경)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고 경복궁으로 3공수 병력을 출동할 것을 지시함. 제3공수여단은 특수전사령부와 같은 곳에 주둔하고 있었음. 최세창 준장이 제3공수 제15대대 대대장 박종규(朴琮圭, 1944-2010) 중령에게 임무를 맡겨 자정 무렵에 특전사령관을 체포함. 이 과정에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金五郞, 1944-1979) 소령이 전사함(1990년 중령 추서).

19. 자정 직전인 23시 55분에 김포 주둔 제1공수여단 4개 대대가 여단을 출동하여 00시 05분에 행주대교를 통과하였으며, 00시 45분에 수색 검문소를 지나 01시 15분부터 30분 사이에 육군본부 및 국방부 점령을 시도함. 행주대교 남단 초소는 수도군단 관할, 북단은 제30사단 관할이었으나 모두 손쉽게 점령하고 통과하였던 것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방패부대인 제30사단장 박희모(朴熹模, 1933-) 소장에게 당부한 행주대교 통제 협조가 무시된 결과였음. 각 검문소가 무방비가 된 것에는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으로 있던 작전처보좌관 김진선(金鎭渲, 1939-2014) 중령의 '1공수여단 통과지시'가 유효했음.

20. 부평에 있던 제9공수여단은 23시 30분에 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았으나 병력 이동을 위한 차량 확보가 지체되고 교통량 혼잡 상황 등을 고려하여 자정 통행금지 이후에 출동하기로 하였음. 이에 00시 05분에 1개 대대 병력을 우선 인솔하여 출발하였으나 00시 20분에 육군본부로부터 부대 복귀 명령이 내려오자 부천 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회군하였음. 육본 지휘부와 반란군 사이에 부대 출동을 자제하는 소위 '신사협정'이 맺어진 결과임.

21. 반란군측의 일사불란한 병력 동원이 본격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수경사 참모장인 김기택(金基宅, 1931?-2010) 준장에게 수경사 영내 병력의 출동 준비를 지시함. 사령부 내에 있는 행정병을 포함해 모든 인원을 전투조로 편성하고 공격 개시선을 설정해 경복궁 제33경비단과 보안사령부를 목표로 출동한다는 마지막 명령. 곧 부대 정문을 나와 병력과 임무를 점검하던 중 수경사 비서실장 김수탁 중령이 '수경사령관 사살에 관한 30경비단측 전차대대 무전'이 빗발치고 있다고 전달하자 충격을 받고 01시 30분경 사무실로 복귀함. (김수탁 중령은 훗날 장태완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냄)

22-1. 자정에 제9사단장 노태우 소장이 제30경비단 단장실에서 사단 참모장에게 명령하여 제29연대가 02시 20분에 당시 고양군 벽제읍 주둔지를 출동하였음. 하나회 소속 연대장인 이필섭(李弼燮, 1938-) 대령이 지휘하는 제29연대 가운데 1개 대대가 한강 하류를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이웃한 제30연대에서 1개 대대(하나회 소속 대대장이 있던 제1대대)를 배속받아서 총원 1,300명으로 서울 시내를 향해 진군함.

22-2. 제9사단 소속 제90연대장 김봉규(金奉圭) 대령이 부대 출동 명령 하달을 확인차 제3야전군 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이건영 3군사령관이 9사단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구창회 대령이 "연대 출동 안 합니다"는 허위 보고를 반복한 것은 유명한 장면.

22-3. 제1군단장 황영시 중장이 00시 30분에 제2기갑여단장 이상규(李相珪, 하나회) 준장에게 경복궁 중앙청(中央廳)으로 병력 출동을 지시하고, 01시 10분경에는 제30사단장 박희모 소장에게 고려대학교로 출동할 것을 명령함.

22-4. 특전사령관을 체포하여 특수전사령부를 장악한 제3공수여단은 02시 정각에 2개 대대 규모로 출동하여 02시 20분에 천호대교 및 광진교를 지나 경복궁 중앙청으로 진격함. 장갑차 10대, 2.5톤 군용트럭 26대가 천호대교로 접근한다는 소식이 수도경비사령부에 보고되자 수경사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이 검문소 철수를 지시하고 수경사령관에게는 3공수와 20사단 병력이 통과 중이라고 허위 보고함. 이러한 보고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군사반란 진압 의지를 크게 상실함. 김진선 중령은 이러한 공헌으로 12·12 이후 하나회에 가입된 것으로 알려짐.

22-5. 거여동에서 제3공수가 출동한 02시 무렵에, 앞서 자정에 내려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부평 소재 제5공수여단도 2대 대대 규모로 출동하여 남영동 육군본부를 목표로 진군함.

22-6. 황영시 1군단장의 명령을 받은 제2기갑여단장은 전차 35대와 병력 180명으로 구성된 예하 제16전차대대를 파주군 금촌읍 주둔지에서 02시 30분경 출동시켰으며, 전차대대는 제9사단 29연대와 합류한 후 제1군단 헌병단장 최동수(崔東秀) 대령을 선두로 1번 국도 도로상 여러 검문소를 지나 03시 15분에 구파발을 통과하였음.

22-7. 황영시 1군단장의 출동 명령을 받은 박희모 제30사단장은 송응섭(宋膺燮, 1937-2012) 대령이 지휘하는 제90연대를 고양시 신도읍 삼송리에서 03시 30분경 출동시켜 제29연대와 제2기갑을 후속하여 서울로 진입시킴. 제30사단장과 제90연대장 모두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으나 직속상관인 제1군단장의 명령을 결국 충실히 이행하여 반란군 세력에 가담함.

1979년 12월 13일 군부대 이동 및 12.12 경과 지도
12.12 군사반란 전개도 #4 - 12월 13일 03시부터 06시까지 경과 및 부대 진주 위치


위 이미지는 12월 13일 새벽 03시부터 06시까지 사건 진행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한 지도입니다. 설명이 계속됩니다.

23. 반란군측 제1공수여단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공격하여 01시 50분경에 국방부를, 02시 15분경에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02시 40분에는 국방부 장관실에 돌입하여 합참의장 등을 무장해제함. 국방부 점령 과정에서 국방부 벙커 출입구 초소를 사수하던 제50헌병중대 정선엽(鄭善燁, 1956-1979) 병장이 전사함.

24. 제3공수여단 병력 640명이 03시 정각 경복궁에,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가 03시 25분에 경복궁 중앙청에, 그로부터 5분 후에는 제9사단 29연대 1,390명이 역시 중앙청에 진주함.

25. 전두환으로부터 은밀히 수경사령관 체포 및 연행 지시를 받은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헌병 40명을 지휘하여 03시 30분에 육군본부 지휘부로 사용되고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실로 진입해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함. 이 과정에서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河小坤, 1927-2013) 소장이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 등 계엄군 지휘부가 와해됨. 장태완 소장이 보안사로 연행된 것은 04시 17분.

26. 반란군측 제5공수여단은 육군본부 방향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제1공수에 의해 상황이 완료되었으므로 04시경 효창운동장에 진주함.

27. 제1공수여단이 헌병대와 교전하면서 국방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1층 계단 아래로 피신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공수부대 병력이 의해 발견된 것은 03시 50분경. 곧 장관실로 연행되었다가 02시경 국방부에 도착해 있던 신현확(申鉉碻, 1920-2007) 국무총리,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 일행과 04시에 삼청동 국무총리 관저를 향해 이동함. 국방부 장관은 이동 중간에 보안사령부에서 전두환을 만나 관련 설명을 들었으며, 다시 국무총리 공관으로 이동하여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 대한 연행건 재가를 건의함. 최규하 대통령은 서명과 함께 결재 문서에 재가 시각을 '05:10'으로 기재함.

28. 제30사단 90연대 병력 1,130명이 고려대학교 운동장에 진주한 것은 06시 20분. 앞서 04시에는 통행금지 해제 시각에 맞춰 수경사령관 지시로 한강 교량에 설치되었던 바리케이드(barricade)는 모두 철거되었음.

29. 이러한 일련의 반란군측 부대 출동 및 진주를 통해 군사반란이 사실상 성공함. 13일 09시 군 인사 발표를 통해 노태우 소장이 수경사령관, 정호용 제50사단장이 특전사령관, 황영시 중장이 육군참모차장, 유학성 중장이 제3군사령관, 백운택 준장이 제9사단장, 박희도 준장이 제26사단장, 조홍 대령(준장)이 육군본부 헌병감에 임명되는 등 12·12 직후 대통령의 군 인사권 행사 상당 부분이 반란군 의도대로 이루어짐. 이들 쿠데타 세력은 이전 박정희 시대 군부 집권세력과 대비하여 '신군부(新軍部)'라고 불림.

30. 군사반란이 완결된 것은 비상계엄령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계엄에서 전국계엄으로 확대된 1980년 5월 17일임. 자정을 기해 전국계엄이 적용되면서 국방부 장관의 지휘 없이 계엄사령관이 전권을 행사함.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무기력 상태였고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 역시 신군부가 추대한 인물이었으므로, 이때부터 대한민국 권력을 온전히 신군부가 접수한 상태가 되면서 1979년 12월 12일 이후 157일만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가 마침표를 찍음.

이상 설명 끝.


위 4번 지도에서 부대 명칭 아래 숫자는 병력 숫자입니다. 반란군측이 전차 35대와 병력 약 5,300명을 새로 출동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30경비단 병력을 포함해도 약 6천 명으로 대한민국 군권(軍權)을 문자 그대로 장악한 것입니다. 특히 제9사단에서 1개 연대, 2기갑여단에서 1개 대대, 그리고 전방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경로에 위치한 제30사단에서 1개 연대를 차출한 것은 국가 안보를 생각하지 않고 전방 부대까지 빼낸 것이라서 아무리 비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작전통제권을 가진 한미연합사령관의 허락 없이 부대를 이동시킨 것이라는 지적은 부차적인 문제일 정도이죠.

최종적인 병력 동원 규모를 생각해 보면, 만일 진압군측에서 출동시킨 제9공수여단이 정상적으로 이동해서 다른 부대에 앞서 육군본부, 국방부 등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초 출동 규모가 1개 대대 300명 남짓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제9공수가 먼저 신속히 육본 지휘부를 방어하고 수경사 야포단 700~800명, 수경사가 북악산에서 철수시킨 33경비단 3개 중대 300~400명이 후속해서 육본, 수경사 등에 도착해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육본과 수경사 지시에 따라서 수색 외곽에 주둔하던 제30사단이 행주대교를 견고하게 통제하면서 노태우의 제9사단 부대 이동도 견제했더라면 조금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것은 모두 한낱 가정일 뿐입니다.

육군본부가 한미연합사 허락 없이 즉시 지휘할 수 있었던 육본 기동예비 제20사단 2개 연대 3천 명의 사단장이 하나회 소속이었다는 점은 참으로 뼈아픈 부분입니다. 반란군측에 섰던 3개 공수여단(제1, 제3, 제5여단) 가운데 1명만이라도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죠.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 상황실장, 헌병단 부단장을 비롯해 수경사 내부에 반란군 가담 인물이 적지 않았던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체적인 상황 전개를 헤아려 보면 내부의 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 수 있죠. 참, 우유부단했던 대통령, 국방부 장관, 육본 지휘부 등의 행적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쿠데타) 동원 부대 주요 인물
12.12 군사반란 동원부대 지휘계선 및 주요 인물


마지막으로 12·12 군사반란에 연관된 각급 군부대와 주요 인물 현황을 정리하였습니다. 진압군, 반란군 분류 등과 관련하여 일부 오류 또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위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아래에는 6개 부대가 있었습니다.

1) 제30경비단 : 본부중대 포함 6개 중대 약 1,000명 규모 (경복궁 내 주둔)
2) 제33경비단 : 본부중대 포함 7개 중대 약 1,200명 규모 (독립문 근처에 단 본부 위치)
3) 야전포병단(야포단) : 1979년 7월 1일 1,500명 규모로 창설되었으며, 김포 야포단 본부에 1,000명 가량 주둔
4) 방공포병단(방포단) : 규모 미상으로 서울 시내 및 수도권에 산재한 방공포병 통제 (단 본부는 용산역 근처에 위치)
5) 헌병단 : 약 1,200명 규모로 각종 군사시설 및 교통 통제소, 초소 등에 배치 (단 본부는 필동 수경사 영내)
6) 전차대대 : 3개 중대 전차 35~36대 규모 (대대본부는 필동 수경사 영내)

이외에 청와대 경호실 파견 제55경비대대, 제33헌병대 등이 있었으나 파견부대이므로 청와대가 지휘했습니다.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은 수경사 소속 부대이지만 청와대 경호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와대 경호실의 작전 지휘를 받는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수경사령관이 마음대로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제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지휘부가 되어 있었고 제33경비단은 단장이 경복궁 제30단에 머물러 있었기에 작전주임이 대신 부대를 통제하던 상태라서 수경사령관 명령에 따라 일부라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본문에 기술된 것처럼 제33단 3개 중대 병력이 수경사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서 결국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야포단은 김포공항 근처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바로 옆에 주둔하던 반란군측 제1공수여단이 먼저 행주대교를 건너면서 교통 문제로 끝내 출동이 좌절되었고, 방포단은 서울 시내 곳곳에 조금씩 흩어져 있었기에 활용 불가능했습니다. 헌병단도 방포단과 비슷하게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죠. 그조차 단장과 부단장이 모두 하나회였고, 하나회측에 발을 담궜던 수경사 상황실장 등의 지시에 따라 요충지 초소를 지키던 헌병들이 반란군 부대의 차량 행렬을 막지 않고 철수하는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중무장한 특수전 훈련 병사들 수백 명을 초소에 배치된 얼마 안 되는 헌병(군사경찰)들이 막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만요. 장태완 소장을 체포한 일당이 외부에서 진입한 반란군 병력이 아닌 바로 수경사 헌병단입니다.

수경사 부대 가운데 비록 일부지만 거의 유일하게 수도경비사령부에 집결한 전력이 전차부대입니다. 당시 수경사에 있던 전차대대 본부에 전차 4대가 있었고 나머지 3개 중대는 경복궁 제30단, 독립문 제33단, 헌병단 등에 각 1개 중대씩 분산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30단 배속 전차중대는 거의 곧바로 반란군 수중에 들어갔으며, 33단 배속 전차중대는 수경사령관 명령에 따라 필동 수경사로 이동하다가 배속부대장인 33경비단장의 설득으로 중간에 회군합니다. 감청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보안사 상황일지에 따르면 12일 23시 45분에 전차대대 제3중대가 수경사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회군했던 30단 배속 중대의 재이동인지 아니면 헌병단 등에 분산되어 있던 전차들인지(후자 유력), 그 수량이 몇 대였는지는 미확인입니다. 1개 중대(10~12대)가 모두 도착했어도 상황실장 등 장교가 수경사령관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12·12 관련 자료를 찾다 보면 흔히 '김포 야포단', '김포 1공수'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당시 수경사 야전포병단과 제1공수여단 소재지가 김포군(金浦郡, 현재 경기도 김포시)이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1963년 1월 1일 자로 서울시 행정구역이 대폭 확대되기 이전에는 해당 지역이 김포군이었기 때문에 계속 그처럼 불린 것이죠. 1958년에 국제공항으로 지정된 김포공항 역시 지금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즉, 야포단과 제1공수는 현재 김포공항 주변에 있었습니다. 포병단 일부 포대 또는 공수여단 일부 대대, 지역대, 중대가 실제 김포군에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요.


지휘관 명단 가운데 제1군, 제2군, 제3군 사령관 계급이 중장(中將)인 것이 눈에 띕니다. 그 아래 군단장과 동일한 계급이죠. 현재는 야전군 사령관에 대장(大將)이 임명되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개 중장을 임명했습니다. 중장으로 군사령관이 되어 6개월에서 1년 정도 재직하다 중간에 대장 계급으로 진급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죠. 그보다 더 앞으로 가면 육군참모총장도 중장이던 시절이 있었고요. 사단, 군단의 경우에도 본래 사단장에 준장(準將), 군단장에 소장(少將)을 임명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각각 소장, 중장으로 진급시킨 후 임명하기 시작해서 1970년대에 제도를 정착시킵니다. 오늘날과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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