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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월 29일, 4년마다 돌아오는 2월 마지막 날입니다. 본래 몇 달 전부터 예고하던 경상좌수영 수군진 글을 올려야 하나 시간이 여의찮고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게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매달 한 편씩 짧은 글이나마 올리지 않을 수 없기에 간략한 다른 내용으로 대신합니다.



약 120년 전에 이 땅에 존재하던 대한제국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식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편성표 숫자를 기준으로 그 규모가 약 30개 대대(大隊) 2만 8천 명을 넘을 정도였죠. 물론, 외형적인 숫자만 그러했을 뿐입니다. 훈련과 무기 및 탄약 자체 조달에 있어 내실이 크게 부족하고 군대 양성과 유지 목적 자체가 외세 침략에 대한 대응보다는 내부 민란이나 반란을 막기 위한 용도가 강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907년 군대 해산 때 시위(侍衛)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 참령(參領, 소령)의 자결이 기폭제가 되어 벌어진 세칭 '남대문 전투' 이외에는 딱히 기록할 만한 교전이 없었죠. 비록 이처럼 정규 군대가 조직적으로 벌인 전투는 거의 없었지만 대한제국에서 양성한 군인들이 이후 국내 의병 항쟁, 해외 대일 항전에 다수 투신했던 것 역시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역사 자료 검색 결과 대한제국 군부대 중에 '사령부(司令部)' 명칭이 붙어 있던 대표적 조직은 아래와 같습니다.

· 헌병사령부(憲兵司令部)
· 경성위수사령부(京城衛戍司令部)
· 시위혼성여단사령부(侍衛渾成旅團司令部)

이들 조직의 지휘관은 당연히 헌병사령관, 경성위수사령관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외에 대한제국 군대 지휘관 가운데 '사령관(司令官)'이라 호칭된 경우가 여럿 있지만 정위(正尉, 대위) 또는 참령이 지휘하는 중대급, 대대급 부대를 지방에 파견하면서 출주사령관(出駐司令官, 출동부대 지휘관)으로 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관찰사에게 해당 지역에 있는 진위대(鎭衛隊)의 지휘를 맡기면서 사령관으로 임명하거나 궁궐 호위 부대장에게 궁성호위사령관(宮城扈衛司令官), 입직수위사령관(入直守衛司令官) 등의 호칭을 붙인 사례도 있죠.

이러한 중앙 사령관과 임시 사령관 외에 특정 지역에서 실체적인 조직과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지방 군부대 사령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한제국 관서사령부(關西司令部)의 사령관입니다.


'관서(關西)'는 평안도 지역의 별칭입니다. 즉, 관서사령부는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구성된 평안도 지역에 주둔하던 진위대를 총괄 지휘하던 사령부였습니다. 전라도 지역의 호남사령관(湖南司令官), 함경북도 지역의 진위대사령관 등 명칭도 있지만 관서사령부, 관서사령관만큼 적극 사용된 예가 없습니다. 실제 예하 대대에서 소관 업무를 사령부에 직접 보고했으며, 관서사령부 수비비 지출 내역을 담은 문서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별도의 사령부 건물도 실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1900년~1901년 관서사령부 소재지 : 평안북도 영변(寧邊), 예전 영변진(寧邊鎭) 또는 당시 평안북도 관찰부 청사 추정
· 1902년~1904년 관서사령부 소재지 : 평안남도 평양(平壤), 예전 중군영(中軍營) 또는 평안감영(平安監營, 당시 평안남도 관찰부) 청사 추정


관서사령관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0년(광무4) 9월 5일이며, 두 달 전인 7월 25일에 평안북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 1848-1909)가 진위대사령(鎭衛隊司令)으로 겸임하여 임명됩니다. 그리고 곧 평안북도 청사가 있던 영변에 영변군출주사령부(寧邊郡出駐司令部)가 창설되었으며, 1901년 12월 이도재 면직 이후에는 평안남도 관찰사 민영철(閔泳喆, 1864-1911)이 검찰사 겸 북도진위대(北道鎭衛隊)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평안북도 진위대 사령관을 맡으면서 평안남도 진위대 통솔권도 맡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서사령관 직함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민영철은 1903년 8월에 헌병사령관이 되면서 면직되는데 이후에도 권섭(權攝, 임시 대리)으로 계속 관서사령관 직책을 유지합니다.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공식 직함 가운데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1901년 07월 12일, 찰변사 겸 관사진위대제대대사령관(察邊使兼關西鎭衛諸大隊司令官) 육군부장(陸軍副將) 이도재
· 1902년 07월 11일, 검찰사 겸 관서사령관(檢察使兼關西司令官) 육군참장(陸軍參將) 민영철
· 1903년 03월 21일, 별난후도령 관서사령관(別攔後都領關西司令官) 육군참장 민영철
· 1903년 12월 10일, 별난후 관서사령관 권섭(別攔後關西司令官權攝) 육군부장 민영철

위 직함에서 '별난후'는 당시 서경(西京)이라 별칭되던 평양에 새로 조성한 이궁(離宮)인 풍경궁(豐慶宮)에 어진(御眞, 황제 초상화), 예진(睿眞, 태자 초상화)을 봉안할 때 행렬 호위에 관계된 직명(별도로 운영한 난후)입니다.


대한제국 계급은 정(正)-부(副)-참(參) 체계로 되어 있었습니다. 정위(正尉), 부위(副尉, 중위), 참위(參尉, 소위)와 같은 방식이죠. 참장(參將)은 종2품 품계이며 오늘날 계급으로 소장(少將), 부장(副將)은 정2품으로 현재 군대의 중장(中將)에 상당합니다. 부장 위에는 정장(正將)이 아닌 대장(大將) 계급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대한제국에서 실제 임명된 인물은 없습니다.

관서사령부에는 사령관을 보좌하는 부관(副官)이 있었습니다. 관서사령부관(關西司令副官)으로 불렸으며, 초대 부관은 1900년 8월에 임명된 장기렴(張基濂, 1853-1919) 참령, 제2대 부관은 1902년 1월 임명된 박문교(朴文敎, 1864-?) 참령입니다. 박문교는 면직과 재임명, 해임, 재임명, 사령관 서리(署理) 임명 등을 거쳐 최종 1904년(광무8) 2월에 해임되는 것으로 부관 직무를 종료합니다. 사령관과 부관 모두 2대(代)를 끝으로 1904년 3월에 사령부 조직이 마감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마도 러일전쟁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관서사령관 임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900년 10월 27일 ~ 1902년 01월 31일, 초대 관서사령관 육군부장 이도재 (평안북도 관찰사)
· 1902년 02월 05일 ~ 1903년 10월 02일, 제2대 관서사령관 육군참장 민영철 (평안남도 관찰사)
· 1903년 10월 02일 ~ 1904년 02월 01일, 제2대 사령관 권섭(權攝)
· 1904년 02월 01일 ~ 1904년 3월 26일, 관서사령관서리 관서사령부관 육군참령 박문교


관서사령부 예하 진위대는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지만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 진위(鎭衛) 제4연대 제1대대 : 평안남도 평양
· 진위 제4연대 제2대대 : 평안남도 평양
· 진위 제4연대 제3대대 : 평안남도 평양
· 진위 제6연대 제1대대 : 평안북도 의주(義州)
· 진위 제6연대 제2대대 : 평안북도 강계(江界)

평양 주둔 진위대 가운데 일부는 도성(都城, 서울) 경비 및 궁궐 경호를 위해 한성부로 옮겨 진주하는 일명 징상평양대(徵上平壤隊)였습니다. 고종 황제가 평안도 출신 병력을 신뢰했기 때문에 1개 혹은 2개 대대를 상경시켰죠.

제6연대 제1대대는 전체 5개 중대 가운데 4개 중대가 의주에 주둔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접경 지역인 삭주(朔州), 창성(厚昌), 벽동군(碧潼郡) 등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강계에 있던 제2대대 역시 3개 중대만 강계 읍내에, 나머지 2개 중대는 국경 지대인 초산(楚山), 위원(渭原), 자성(慈城), 후창군(厚昌郡) 및 후방 지역인 영변(寧邊), 안주군(安州郡) 등에 약 1개 소대씩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 관서사령부 연혁을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900년 07월 25일(양력 10월 27일) - 평북관찰사 육군부장 이도재, 진위대사령(鎭衛隊司令, 초대 관서사령관) 겸임
1900년 08월 21일(양력 09월 14일) - 육군참령 장기렴, 사령부관(司令副官) 임명
1900년 10월부터 12월말까지 - 영변군출주사령부(寧邊郡出駐司令部, 영변사령부)
1900년 11월 24일 - 평안도내출주사령부(平安道內出駐司令部) 표현 : 영변군출주사령부(관서사령부) 별칭?
1901년 12월 22일(양력 1902년 01월 31일) - 관서사령관 이도재 면직
1901년 12월 27일(양력 1902년 02월 05일) - 평남관찰사 육군참장 민영철, 검찰사 겸 관서사령관 겸임 (제2대 사령관)
1902년 01월 10일(양력 02월 17일) - 육군참령 박문교로 사령부관 교체 임명 (박문교 관원이력서는 양력 2월 26일 임명)
1902년초 - 사령관 본직(本職)이 평북(영변)에서 평남(평양)으로 변경됨에 따라 사령부가 평양으로 이설되었을 시기
1902년 02월 12일(양력 03월 21일) - 사령부관 면직
1902년 03월 02일(양력 04월 09일) - 육군참령 박문교, 사령부관 재임명
1902년 09월 29일(양력 10월 30일) - 사령부관 해임
1902년 12월 27일(1903년 양력 01월 25일) - 육군참령 박문교, 사령부관 재임명 : 부친상 기복(起復, 상중 출사)
1903년 08월 12일(양력 10월 02일) - 민영철이 헌병사령관에 임명되나 관서사령관 직무를 '권섭'으로 계속 수행
1903년 09월 26일(양력 11월 14일) - 관서사령관권섭 육군참장 민영철, 육군부장 승진
1903년 12월 12일(양력 1904년 01월 28일) - 관서사령관권섭 육군부장 민영철, 주청(駐淸) 특명전권공사 임명
1903년 12월 16일(양력 1904년 02월 01일) - 부관 육군참령 박문교, 관서사령관 서리(署理) 수행 (민영철 권섭 면직)
1904년 02월 10일(양력 03월 26일) - 사령부관 해임 : 관서사령부의 사실상 기능 소멸 시기로 추정 (또는 양력 4월 해임)


대한제국 강계진위대(江界鎭衛隊) 정문
평안북도 강계군 소재 대한제국 진위대 제6연대 제2대대 - 강계대(江界隊) 원문(轅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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