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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거북선[龜船]'의 정확한 형태가 어떤지에 관해서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철갑을 두르고 있었느냐, 쇠못이라도 꼽고 있었느냐, 거북이 머리에서 연기를 뿜었는지 총통 설치했는지, 2층과 3층의 내부 구조는 어떻고, 크기와 승조원 규모 등은 또 어떠했는지.

이런 논란에 오늘날까지 가중되는 원인은, 실제 거북선의 형태를 확정해 줄 수 있는 사료가 현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북선을 촬영한 사진, 하다못해 실물을 보고 그린 정교한 그림이라도 한 장 전해지고 있다면 논쟁의 대부분이 종식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아쉬움이 크다.

일제강점기, 아니 해방 직후에라도 거북선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조선시대 수영(水營) 인근들 돌아다니며 관련 증언을 채록했더라면 오늘날처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관련 문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의 구체제 군대가 해산되기 전까지는 중앙이든 지방 군영이든 장비와 무기의 법제화된 수량은 대략이나마 갖추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

관원들에 대한 인사 평가, 업무 인계 등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녹이 슬고 망가진 수준이었을망정 문서상으로 규정된 수량은 구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조선후기의 군 편제 체계가 공식적인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은 1895년(고종32) 7월 15일인데, 이때 삼도통제영(칙령 제139호), 팔도의 병영 및 수영(제140호), 진영(제141호), 진보(제142호) 등이 대군주(고종)의 칙령 형식을 빌려 갑오-을미개혁의 연장선상에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곧 근대식 형태의 군대 편제로 중앙군과 지방군(진위대)이 신설된다.

그렇다면,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시대 전선[戰船]은 최소한 이 시점까지는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와해된 것을 칙령으로 공식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고종실록에 전선이라는 단어가 1890년(고종27)까지, 거북선이라는 단어가 1886(고종23년)년까지 보인다.

그 전선이나 거북선에 복무하였던 관리, 군인, 그리고 그 인근 지역에 살던 백성들 가운데 어렴풋이나마 거북선의 모습을 죽는 날까지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만약 1880년대 중반까지 각 수군영에 거북선이 실존하였고, 그 형태를 목격했던 사람의 당시 나이가 20대였다면 얼추 1930-1940년까지는 거북선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수영 인근에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다.

그 증언자가 오래 살았더라면 해방 후에도 충분히 채록 가능했을 것이다.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지, 희미한 추억이었을 것인지는 모르지만.

충무공 이순신이나 거북선에 관해 뜻 있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어서,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에 수군영이 있었던 해안가를 돌아다니며 관련 증언을 채록하였더라면, 거북선의 실제 모습에 관한 많은 의문이 해소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과 조선 후기의 거북선이 다르고, 같은 거북선이라고 하더라도 크기와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상 내지 아쉬움은 거북선에만 그치지 않는데, 아직도 조선 후기에 양반이 70-80%를 넘었다는 글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양반층 급증설은 시카다 히로시(四方博:사방박)라는 일본인 학자의 1938년 논문에서 시작하였다. 아직도 국사 교과서 등에서 이러한 설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카다의 이 논문 내용은 1980년대에 국내 학자들이 논파한 바 있다.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

시카다 논문의 요지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구 지역의 호적 자료인 대구장적을 분석하여 전체 호(戶) 중에 양반호의 비율을 계산한다.

2) 호적의 수록 내용에서 직역(職役:직업)에 따라 신분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직역이 생원, 진사, 유학, 학생이면 모두 양반 신분으로 간주.

3) 이러한 분석에 따라 전체 호 대비 양반호의 비중은 1690년에 9.2%, 1729-1732년에 18.7%, 1784-1789년에 37.5%, 1858년에 70.3%로 급증.

문제는, 2)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유학(幼學)'이 양반 직역이었음은 확실하지만,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중인은 물론 평민층들도 호적에 직역을 유학으로 기재하는 것이 널리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양반인 유학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무늬만 유학도 있었던 것이다.

최근 논문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양반층의 비중은 5% 내외에 불과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폭넓게 늘려 잡아도 전체 인구의 15%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양반은, 조선 후기의 통칭적 양반이 아니라 조선 초기의 실체적 양반층 개념에 따른 것이다.

그럼, 왜 시카다가 쓴 것 같은 논문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 해방 후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상당한 기간 그대로 답습했을까?

그것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사료, 문헌, 장적을 분석한 때문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만약 시카다가 조선시대 사람이었다면, 아니 조선시대 향촌 사회를 경험하기라도 했더라면, 그래서 실제 조선시대 사회의 양반이나 중인, 평민의 생활상을 경험했더라면, 분명 자신의 대구장적 분석 결과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직후까지도 향촌에는 조신시대적 분위기가 농후했음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수긍 가능한 상상이다. 실제 향촌 사회에 대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대구장적에 수록된 마을에 찾아가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라도 수집했었으면, 장적을 정리했던 지방 관청의 관속, 아전들의 경험을 듣고 기록으로 남겨 두었더라면 말이다.

사료, 기록, 문헌에만 의지하여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행동이 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빠져 있는 '대륙삼국설'이라는 것도 책상머리 역사학의 결과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심지어는 대륙조선설도 있다. 임진왜란 직후, 혹은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로 우리 민족이 대륙(중국)에서 한반도로 축출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책상 위에서 몇몇 문헌의 문구만 뒤척이지 말고, 제발 한반도 각지에 남아 있는 우리 조상들의 삶, 그 흔적을 찾아봤으면 과연 이런 대륙삼국설이니 대륙조선설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성립 가능할 것일지?

우리 산하에는 수많은 유적이 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이 아니라도, 국보나 문화재로 지정될 수준의 유물이 아니더라도,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때 흩어지고 사라진 게 많다지만 그런데고 널리고 널린 게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다.

고을마다 전해지는 이야기, 마을 이름에 얽힌 전설, 수많은 사람의 묘지와 비문, 비석, 건축물, 서원, 사우, 사적, 고문서 등.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이어진 옛날 기억들.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고 싶다. "부디 생각을!!"


역시나 횡설로 끝나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냥 몇 자 주절거린 정도로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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