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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이상길 신도비각충숙공 이상길 신도비각


충숙공 이상길 재사충숙공 이상길 재사


지금은 한성부에 속하는, 옛 양주목 노원면(蘆原面)의 한천(漢川) 오른편으로 태릉(泰陵)과 덕릉(德陵) 사이에 중종 연간에 세워진 한글영비(靈碑)가 서 있는 작은 길목이 있는데, 그 어귀에 즈음하여 충숙(忠肅) 이공(李公)의 묘(墓)가 있다. 충숙 이공의 신도비(神道碑)를 비롯한 여러 기(基)의 묘와 재사(齋舍) 동천재(東川齋)가 있고 그 주변에 몇 채의 가옥이 위치하니, 곧 성주(星州)에서 나온 벽진(碧珍) 이씨의 충숙공파 선조 묘역이다.

충숙 이공, 즉 충숙공(忠肅公)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강도(江都:강화도)에서 자결한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이다.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이며, 명종 병진(1556)년에 태어나 선조 을유(1585)년에 문과(文科) 갑과(甲科) 제2인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호조좌랑, 병조정랑, 회양부사, 안주목사, 호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는데, 관직에서 물러나면 노원의 촌사(村舍)에 거처하였다. 아마도 현재의 묘역 인근일 것이다.

수(壽) 80세가 되던 인조 을해(1635)년 2월에 노직(老職)으로 자헌대부에 올라 6월에 특지로 공조판서에 제수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병자(1636)년에 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에 들어가 이듬해 정월 26일에 자결하였다. 죽기에 앞서 유언하기를 "종묘사직이 끊어지게 할 수 없다. 나는 나라의 정경(正卿)이니, 나라가 파괴되면 마땅히 사직에서 죽어야 한다(宗祀不可殄也, 我國之正卿 國破當死於社)."고 하였다.

사후 의정부좌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문정공(文貞) 잠곡 김육(金堉)이 시장(諡狀)을 지으니 나라에서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문정공(文靖公) 택당 이식(李植)이 공을 위한 제문에 '의리에 입각하여 목숨을 끊었다(引義自靖)'고 평하였으니, 신도비의 비문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친히 짓고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이 정서하고 전자(篆者)가 문충공(文忠) 김수항(金壽恒)인 것은 추앙의 격에 들어맞는 것이다.

문화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에 있지 않다. 가까운 산천 곳곳에 비문(碑文), 비명(碑銘), 비각(碑閣), 정문(旌門), 서원(書院), 고적(古蹟), 사적(史蹟) 등이 남아 있으니, 웅장하게 지어진 궁궐(宮闕)이나 능원(陵園), 국보(國寶), 보물(寶物)만 찾을 일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삶,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이러한 유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수천 년간 이 땅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행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다.

숭례문(崇禮門)주1이 무너진 오늘, 그 참담함을 애써 추스리고자 이러한 글을 써서 남긴다.

무자(2008년) 2월 11일, 선성(宣城) 김하은(金河銀)


주1) 숭례문(崇禮門)은 한성부 성곽의 남문(南門)이다.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1396년(태조5)에 공사를 시작하여 1398년(태조7) 2월 8일에 완성되었다. 1961-1963년에 대대적인 해체 보수가 있었는데, 이때 나온 상량문(上樑文) 내용과 실록 등의 문헌에 의해 1447년(세종29)에 전면 개축되고 1479년(성종10)에 한 차례 중수(重修)되었음이 확인된다. 1907-1908년에 성문의 좌우 성곽이 헐려나갔고, 한국전쟁 기간에 부분 파손된 것을 전쟁 직후에 졸속으로 보수하였다가 1960년대초에 중수하였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경에 방화범에 의해 화재가 발생, 5시간에 걸쳐 불타다 이튿날 새벽 02시경에 편액과 석축을 제외한 본체(목조)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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