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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웹상에서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그 가운데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무과(武科) 과거 급제(합격)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늦게 급제했다 = 무관 소질이 없었다', '합격 등수가 낮았다 = 역시 별 볼일 없었다' 등의 내용인데, 어떤 사람들은 '최하위 등급으로 합격한 것이고, 오늘날 계급으로는 하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03년 8월에 발행한 『군사(軍史)』 제49호에 「무과합격, 군관생활, 전술능력에 나타난 이순신의 무학연구(論.張學根)」라는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의 내용을 토대로 몇 자 적어 본다.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삽화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 1931년 동아일보,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연재소설



1) 너무 늦게 급제했다는 논란

위 논문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급제(及第)[각주:1]한 해당 과거의 급제자 평균 연령은 34세였다. 이순신의 급제 당시 나이가 32세였으니, 평균 연령으로만 보면 오히려 2년이나 빠른 셈이 된다. 인원수를 헤아려 보면 전체 29명의 급제자 가운데 17명이 이순신보다 연장자였고 1명이 이순신과 동년배, 10명이 이순신보다 어렸다(최연소 23세 박대남과 성영길, 최고령 52세 구사직).

급제자 평균 연령이 높은 것은 이순신이 급제했던 과거만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실시되었던 문과, 무과 급제자 및 소과(小科, 생원과 진사 선발 시험) 입격자(합격자) 평균 나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높았다.

일례로, 이제까지 파악된 무과 급제자[각주:2]들의 평균 연령은 33.2세이다. 또 조선시대 전체 소과 입격(入格)[각주:3] 평균 연령은 34.5세, 대과(大科, 문과) 급제자 평균은 33.7세이다. 즉, 이순신의 무과 급제 당시 연령은 그저 그런 평균 연령대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2) 급제 등위(등수)가 매우 낮았다는 논란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이순신 장군의 무과 급제 등급은 '병과(丙科) 제4인(第四人)'이다. 여기에서 '병과'란 '과거 급제 등급'을 말하는데, 등급순으로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로 구분되어 있었다. 단순히 외면만 본다면 가장 낮은 등급인 셈이다. 갑과 1등은 '장원(壯元)'이라고 하고 종6품 품계를 주며, 나머지 갑과 인원에게는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정9품의 품계을 주었다.

그러나 법제상의 선발 인원이 갑과, 을과, 병과 모두 동수였던 것이 아니라, 갑과는 3명, 을과는 5명, 병과는 20명이었기 때문에 병과에서 가장 높은 사람(병과 제1인)은 종합 9위가 되고 최하위자(병과 제20인)는 종합 28위가 된다. 즉, 이순신은 병과 제4인이었기 때문에 전체 12등이다. 28명 중에 12등이면 중간(+) 정도가 된다.

이순신이 급제한 1576년(선조9)의 병자식년(丙子式年) 무과에서는 29명(갑과 3, 을과 5, 병과 21)을 뽑았기 때문에 상위 42% 성적이다. 그리 높은 등급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과 급제자 29인 중에서 이순신 등 4인을 제외한 '25인'이 현직 군관(軍官, 하급 장교 등 현역 신분)이었다. 음직(음서제도), 천거, 자원, 징집 등의 형식으로 이미 군문(軍門, 무관의 길)에 들어섰던 사람들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문과와 무과 과거 시험에는 정3품 당하관 이하의 전현직 관리도 응시할 수 있었는데, 급제하면 정식 관직에 임명하거나 품계를 승진시켜 주는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미' 관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문과 또는 무과에 급제해야 선망받는 관직이나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독학(獨學)으로 (혹은 장인 방진의 조력이 있었다고 해도) 무예를 연마한 이순신이 전현직 군관들 속에서 상위 42%를 차지한 것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실전 무예 기술을 익히기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현직 군관들은 자연스럽게 소속 부대에서 무예를 연마할 수 있었으나, (문과 시험은 동네 서당이나 향교, 서원 등이 있기라도 하지만, 무과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별도의 교육 기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무과 독학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활 쏘는 것이야 그냥 활터에 가서 하면 된다지만, 말 타고 훈련하는 과정은 일단 말(馬)을 부릴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당시 경제적으로 어렵던 이순신 가족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보성군수를 역임한, 재력이 있었다고 알려진 방진)이 이순신의 무과 연마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과는 3단계 시험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방에서 치르는 1단계 시험에서 무예(무술 실력)를 보고 여기에 합격한 인원을 대상으로 중앙에서 2단계 시험을 시행해 무예 + 학문 + 군사학을 본다. 이 2단계 시험에서 급제할 인원 28명을 선발하고(2단계 시험까지 합격하면 과거 급제는 기정사실화됨), 최종 3단계 시험에서 급제 등급만을 결정하는데, 이 3단계 시험이 이순신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던 말 타고 활쏘기, 달려가며 활쏘기, 격구(擊逑) 등으로 되어 있었다. 다년간 말을 타며 연습해야 하는 종목이니, 아마 그냥 활쏘기나 군사학 같은 것으로 등위를 결정했으면 결과는 달랐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간, 이순신의 급제 나이나 등수는 최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낮은 수준 역시 아니었다는 것이 본 글의 결론 되겠다. 설령 나이가 많고 등수가 낮았으면 어떤가.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모두 명장이 아니고, 꼴등 혹은 현지임관을 했어도 명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많거늘.




여담1.

이렇게 따지고 보면,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한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元俊良)은 원균의 무과 급제에 참 큰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원준량의 아들 8인 가운데 장남 원균과 다섯째아들 원지가 무과에 급제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담2.

여건이 되면 「무과합격, 군관생활, 전술능력에 나타난 이순신의 무학연구」라는 위 책의 논문을 구해서 읽어보는 것을 권장한다. 이순신이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둔전관으로 있을 때 상관이 경흥부사 이경록(이순신과 무과 동기생으로, 이순신보다 4년 연하)이었으며, 당시 사건 때문에 같이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는 등... 흥미로운 부분이 여럿 있다. 군사편찬위 서적이 원문 서비스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웹상에서 공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 이 논문에서 '신흠(申欽)'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용은 동명이인에 의한 착오이다.


여담3.

병과 급자자에게 주어지는 종9품 품계와 관직이 조선시대 관직 체계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낮은 관직이었을까? 종9품과 지금 공무원 계급 체계하에서의 9급 공무원이나 하사급 군인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할까? 모든 관리를 문과나 무과 과거로 뽑지 않아서 의외로 관직에 진출하는 길(음서제도나 천거, 수령취재 등)이 많이 있었기는 했지만, 역시 엘리트 코스를 가려면 문관은 소과를 거쳐 문과에 급제해야 했고, 무관은 무과에 급제해야 했다.

그런데 이 문과나 무과라는 것이, 정규 선발 인원은 3년에 30명 남짓이었다. 물론, 왕의 생일이다 뭐다 해서 별시(別試) 같은 특별 과거가 상당히 많이 시행되었고, 무과의 경우에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만과(萬科)라고 해서 1회에 수천 명을 뽑기도 했지만, 적어도 3년마다 시행되는 정기 과거에는 정규 인원(30명 내외)를 선발하려고 노력했다. 이순신은 그러한 무과 시험에 급제한 것이다(병자년 식년 무과).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없었고, 고향 마을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것이나 향리에서 유지 노릇을 하는 것을 나름대로 '좋아라' 했을 수는 있지만, 일단 거의 모든 양반과 상당수 평민이 과거 급제를 통한 '일신의 영달' 쟁취를 위해 매진했다. 전국적으로 아무리 낮게 잡아도 수천, 수만 명의 경쟁자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서 급제하기란, 오늘날에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종9품 무관직에 권관(權管)과 초관(哨官)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초관은 1개 초(哨)의 지휘관으로 대개 80-125명의 군졸로 편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말단 종9품 무관 관직이 지금으로 따지면 중대장(대위)급 장교였던 셈이다.

물론, 이렇게 힘들게 급제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부모의 공로나 연줄을 통해 쉽게쉽게 관직을 얻는 사람들도 있고 또 임진왜란을 전후로 무차별 실시된 무과에 덩달아 급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과거 급제 여부에 따라 관직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본인에게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승진하는 기간에서부터 차이나 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직이나 높은 관직에 부임할 수 있느냐 마느냐가 과거시험 급제 경력에서 갈리니까... 예를 들면, 문과 급제자 출신이 아니고서는 청현직, 청요직이라 불리는 핵심 관직에 임명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중앙 관청의 2품 이상 고위직에 오르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문과, 무과 급제 경력이 필요했다.

終.


· 2004년 11월 20일, 네이버 블로그 등록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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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5일, 티스토리 이전



  1.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과거 시험에 합격한 것 급제(及第)라고 하였다. 장원급제는 1등으로 급제(합격)한 것이다. [본문으로]
  2. 모든 무과 급제자 명단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현재 파악된 인원 가운데 조선후기 16,000명만 분석. [본문으로]
  3.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던 초급 과거 시험 합격자를 입격(入格)이라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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