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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경상좌수영 수군 배치 지도
1번 지도 - 조선 후기 경상좌도수군절도영 수군진 배치


위 지도는 조선 후기 동래도호부(東來都護府) 지역의 수군(水軍) 배치를 나타낸 간략 지도입니다. 지도에서 '동래도호부'가 표시된 곳은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東萊區)와 연제구(蓮堤區) 일대입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 부산진구(釜山鎭區), 동구(東區), 중구(中區), 서구(西區) 등이 연속해 있습니다. 절영도첨사진 지역은 영도구(影島區), 서평포와 다대포첨사진 지역은 사하구(沙下區), 경상좌수영과 포이포는 수영구(水營區), 그리고 구(舊) 두모포 지역은 기장군(機張郡)입니다.

동래구 명칭은 동래도호부 관아 소재지에서, 부산진구는 부산포 첨절제사의 진(鎭)인 부산진(釜山鎭)에서, 수영구는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서 유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구, 중구, 서구 명칭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거주 중심지였던 빨간 글자의 초량왜관(草梁倭館) 일대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부산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지방 행정구역 명칭을 정할 때 행정 중심이던 부산시청이 옛날 왜관 지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전 부산부청(釜山府廳)이 있던 곳이 그대로 중구가 되고, 그 동북쪽이 동구, 서쪽이 서구로 명명되었습니다. 참고로 부산시청의 후신인 광역시청은 1998년에 연제구로 신축 이전되었고, 1975년 10월 1일에 설치된 남구(南區)는 동구 동쪽의 오륙도 방향으로 돌출된 지역입니다. 1995년 3월 1일 남구에서 수영구가, 동래구에서 연제구가 각각 분리됩니다.


동래부(東萊府) 지역의 수군 편성 체계를 보면 제일 위에 정3품 수군절도사가 지휘하는 경상좌도수군영(慶尙左道水軍營)이 있고, 그 아래에 종3품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는 첨절제사영(僉節制使營, 첨사진)이 있었으며, 다시 그 아래에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는 여러 만호영(萬戶營, 만호진)이 있었습니다.

지휘 병력을 감안하면 만호는 오늘날의 대대장(중령), 첨절제사는 연대장(대령), 수군절도사는 사단장(소장)에 상당합니다. 본래 첨절제사는 종3품 품계의 관원이 임명되는 관직이었으나, 일본과 대치하고 있는 동래 지역은 안보 중요성이 높기 때문에 부산진과 대다포진 모두 정3품 당상관(堂上官)을 보직하였습니다. 지방관인 도호부사도 원래 종3품 관직이지만 비슷한 이유(외교 및 안보)로 동래도호부사에는 특별히 정3품 당상관이 임명됩니다.

1785년(정조9) 9월에 간행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따르면, 경상좌도에는 첨절제사영으로 부산포진(釜山浦鎭)과 다대포진(多大浦鎭)이 있었고, 부산포진관(釜山浦鎭管)에 종4품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인 서생포(西生浦), 같은 종4품 만호영인 두모포(豆毛浦), 개운포(開雲浦), 포이포(包伊浦), 서평포(西平浦) 등의 제진(諸鎭)이 있었습니다.

대대포진은 거진(巨鎭)인 종3품 첨절제사영임에도 불구하고 부산포와 달리 법제상으로 진관(鎭管)에 아무런 소속 진(鎭, 諸鎭)을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대포진 바로 옆에 서평포진이 존재하고 있던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서평진(西平鎭, 서평포진) 만호는 다대진(多大鎭, 다대포진) 첨사의 지휘를 받기 쉬웠습니다(실제 수군 훈련에서도 서평진 만호가 다대진 첨사의 지휘를 받았음). 같은 이유로 좌수영 인근에 있던 포이진(包伊鎭, 포이포진) 만호도 부산진(釜山鎭, 부산포진) 첨사보다는 좌수영 본영으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기 쉬웠습니다(실제 수군 훈련시 포이진 만호의 전선이 좌수영 본영 함대에 편성됨). 서평포진은 처음에는 '구(舊) 서평포'로 표기된 곳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직후 다대포진 영내로 이전하였다가 17세기 중반에 '구평'으로 기재된 곳으로 이설되고, 18세기 중엽에 다시 마지막 위치로 진을 옮겨집니다.


경상좌도수군영 본영[主鎭]에는 전선(戰船, 판옥선) 4척이 편성되어 있었고 이 가운데 1척은 귀선(龜船)인 거북선이었습니다. 첨절제사가 있는 부산포진과 다대포진에는 전선 2척(전선 1척, 귀선 1척), 종4품 동첨절제사진(서생)과 만호진(두모, 개운, 포이, 서평)에는 각 전선 1척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군진이 아닌 울산도호부와 기장현에도 각 전선 1척씩 할당되어 있었으며, 전선 이외에 소형 범노선(帆櫓船)인 병선(兵船), 가장 작은 소형선인 사후선(伺候船) 등도 전선 수에 맞춰 편성되었습니다(전선 1척당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편제됨).

전선과 병선 사이에 중간급 전투선인 방패선(防牌船, 방선)도 있었는데, 조선 후기 경상좌수영은 전선 1척-병선 1척-사후선 2척 체계였으므로 방선은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경상도에서 방선이 있던 곳은 종9품 별장(別將)이 있던 광양(光陽) 섬진(蟾津)의 단 2척입니다. 시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각 군선(軍船)의 규모를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전선(戰船)  방선(防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바닥 길이  약 22m  12~13m  11m  6~8m
 승선 인원  약 170명  약 55~60명
 (소형 31명)
 약 36명
 (소형 17명)
 5~6명
 비고  판옥선(板屋船)  방패선(防牌船)    


이러한 경상좌도 수군 편성 체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진영(鎭營)이 통폐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1890년대에 이르면 위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 있는 것처럼 수군영 본진과 3~4개의 첨절제사진 체제로 개편됩니다(서생포진 여부 미확인). 그리고 1895년(고종32) 7월 25일을 기해 구식 군대 폐지에 관한 칙령에 따라 모두 해산됩니다.

조선 후기 동래 지역 수군(水軍) 진영 변천
2번 그림 - 동래 지역 주요 수군진(水軍鎭) 변천


위 그림은 조선 말엽에 해당하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동래 지역 경상좌도 수군진의 변천을 정리한 것입니다. 주요 내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날짜는 음력입니다.

1) 1876년(고종13) 10월 22일, 두모포진을 폐지하고 그 관할을 이웃한 개운포로 이관 : 판찰소(辦察所) 설치와 연동
2) 1881년(고종18) 02월 26일, 서평포, 두모포, 개운포진을 폐지하고 절영도(絶影島)에 절영도진 수군첨절제사 설치
3) 1883년(고종20) 04월 19일, 다대포진을 폐지하고 부산포로 이관 (다대첨사가 겸직하던 감목관은 절영첨사가 겸직)
4) 1885년(고종22) 12월 19일, 다대포진 복설 및 절영도진 축소 (절영도에 좌수영 수군 우후 배치, 이듬해 4월 별장 배치)
5) 1887년(고종24) 08월 15일, 절영도진 수군첨절제사진 복설
6) 1890년(고종27) 09월 12일, 절영도진 재정 중 일부를 수군영 본영으로 이관 (3개 만호진 통폐합시 포이진 부분)
7) 1895년(고종32) 07월 15일, 구식 군대 폐지로 인해 각 지역의 병마진, 수군진 해산


1876년에 두모포진이 폐지된 것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본인과의 통상(通商) 교섭 대응을 위해 새로 판찰관이라는 직책을 설치하면서입니다. 초량왜관과 두모포진 사이 지역에 위치하던 부산훈도(釜山訓導)의 직무 공간을 판찰소로 승격시키고, 그 직책에 맞는 권한 강화 및 재정 보강을 위해 두모포진을 해체하였던 것입니다. 훈도 집무처에 개설된 판찰소는 곧 두모포진 청사(동헌) 자리로 이전됩니다.

1881년에 서평, 두모, 개운의 3개 만호진을 폐지하고 절영도에 첨사진을 설진(設鎭)한 것은 일본측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조선왕조 입장에서 대마도에서 초량왜관으로 향하는 배편의 길목인 절영도에 수군 부대를 창설하여 군사적적인 대응을 하려는 나름의 조치였습니다. (구식 군대 재배치라서 실효성은 없었지만...)

1883년에 다대포진을 폐지한 것은 2년 전에 절영도진을 설치하였기 때문입니다. 부산진과 대다포진이 서로 보완하는 체제로 경상좌수영의 수군 방어 체계가 작동하고 있었는데, 절영도진이 신설되면서 이러한 역할을 절영진이 대신 감당하게 되었으므로 군비 부담 감소 차원에서 다대진을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약 2년 후인 1885년 12월에 지역 민심이 희망하고 전술적 중요성이 현존한다는 이유로 복설됩니다. 동시에 절영도진은 그 위상과 역할이 폐진(廢鎭)에 가까울 정도로 축소되는데, 이는 절영도 지역 자체가 하나의 진영(鎭營)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절영도는 첨사진을 설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을 기르거나 관청 건설에 필요한 목재를 수급하는 용도로 사용하던 곳이었기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왕 만들어진 군영이었기에 1887년(고종24) 8월에 재설치된 결과, 초량왜관 지역의 일본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을 부산진-절영진-다대진이 삼각형을 이루며 포위하는 형태가 됩니다.

조선시대 동래도호부 부산포(釜山浦) 초량(草梁) 해안 지도
3번 지도 - 조선 후기 동래도호부 부산포 지역 초량(草梁) 해안 일대


위 지도는 1번 지도에서 빨간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부분을 확대한 부산포(釜山浦) 및 초량(草梁) 일대 지도입니다. 1890년대 해안선을 기준으로 제작하였으며, 1916년경 매립 해안선과 현대 해안(부두)을 두 가지 색상의 실선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오른쪽 위에서부터 부산진, 개운진, 두모진, 신초량(新草梁), 초량왜관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각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부산진 : 부산진성이 있는 곳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3품 부산진 수군첨절제사가 있던 진성(鎭城)입니다.
2) 개운진 : 종4품 개운포 만호가 있던 곳입니다. 바로 위에 정공단(鄭公壇), 그 서북쪽에 부산왜성(釜山倭城)이 있습니다.
3) 두모진 : 종4품 두모포 만호가 있던 곳입니다. 초량왜관 이전에 두모포(豆毛浦) 왜관이 있던 곳 근처입니다.
4) 신초량 : 일본인 출입이 제한되었던 돌담과 설문(設門) 바깥쪽에 있던 마을입니다. 원래[舊] 초량은 설문 남쪽입니다.
5) 초량왜관 : 1678년(숙종4)에서 1680년(숙종6) 사이에 두모포 왜관에서 이전된 왜관입니다. (구한말 일본인 거류지)

개운진 정공단 근처의 회색 점선으로 표시된 사각형은 임진왜란 이전의 부산진성 추정 위치입니다. 부산진첨사이던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이 순절한 곳인 부산진성 남문 터에 정발 장군을 모신 정공단(鄭公壇)을 세웠으며, 조선 후기에는 증산(甑山)에 있던 왜성(위 지도의 부산왜성)의 자성(子城)에 부산진이 자리하였습니다. 지도에 '부산진'으로 표기된 곳입니다.


특수문자가 적힌 곳의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 부산훈도 처소인 성신당(誠信堂) 터 : 1876년(고종13) 10월 신설된 초기 판찰소 위치
㉡ 두모포 만호진(萬戶鎭) 터 : 1877년경 판찰소 이전 위치 및 1884년(고종21) 개청 부산항 감리서(監理署) 초기 위치
㉢ 현재 부산 봉래초등학교 터 : 1892년(고종29) 7월 25일 낙성된 부산항 동래감리서 신설 청사 위치

① 초량객사(初梁客舍) 위치 [필자 추정]
② 1896년 1월 25일 개교한 개성학교(開成學敎) 위치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부분(개운진, 두모진 등)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차차 살펴볼 예정입니다.



경상좌수영 다대포진 동헌 객사 건물 이야기 후속편 (클릭) : 2023년 6월 추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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