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잠시 격조했습니다. 마지막 글을 올린 지 어느덧 4개월, 그야말로 빠르게 흘러가는 물결 같은 시간의 연속입니다.

본 블로그에서 걱정했던 삼척도호부 동헌(202번 글 새창 열기) 복원 공사가 당초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삼척시청 입찰 공사 문서를 보니 복원 지역 위치가 여전히 성내동 14번지가 아닌 '12-1번지 일원'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죠. 소위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것 때문인지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국민신문고 신청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문화재청 요구로 설계 보완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보도가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블로그에서 제기한 내용이 일부 반영되었을 수 있겠지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얼마 전에 공개한 세종대로 광화문관장 옆 의정부지(議政府址, 의정부 터) 역사유적광장 개방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졸속 복원이 될 수 있는 무리한 공사를 시도하지 않고 주춧돌 자리만 남겨두는 방식으로 발굴조사 터만 정비 후 공개했기 때문이죠. 의정부 핵심 건물인 정본당(政本堂)은 구한말 촬영 사진 등이 전해지고 있기에 그나마 복원을 시도할 수 있지만 그 좌우에 있는 두 건물은 형태와 구조가 불분명합니다(157번 글 새창 열기). 그럴 때는 유적을 최대한 보호한 상태에서 충분한 자료가 확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자 정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설이 길었네요.



2022년 10월에 '경상좌수영 수군 진영에 관한 글(190번 글 새창 열기)'을 올렸고, 다음 해 6월에 좌수영 관하 수군진(水軍鎭) 탐구 제1편으로 '다대포진(多大浦鎭) 수군영(205번 글 새창 열기)'에 관한 글을 게시했습니다. 이번 글은 좌수영 수군진 탐구 제2편으로, 다대진과 동급의 정3품 당상무관(堂上武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부임하던, 그러나 다대포진보다 한층 격이 높았던 부산포진수군첨절제사영(釜山浦鎭水軍僉節制使營)에 관한 내용입니다.

작년 연말에 처음 글을 준비하던 때에는 이미지가 7장이었으나 몇 달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내용이 확인될 때마다 하나둘 늘리다 보니 어느새 11장이 되었기에 각 사진을 중심으로 두고 거기에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는 형태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시작합니다.

동래도호부 소재 부산포진성 전경 (1890년대)
1번 사진 - 동래도호부 부산포첨사진성 전경 (1890년대)


2020년 10월에 올렸던 '경상좌수영, 동래, 감리서, 부산진, 다대진 이야기(167번 글 새창 열기)'에서 부산포진(釜山浦鎭) 객사(客舍, 객관) 공진관(拱辰館) 사진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위 1번 사진의 바탕 이미지는 그 글에서 살펴봤던 프랑스 파리 소재 장식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의 디지털 자료 사진 가운데 한 장입니다(장식미술관 원문 링크). 바로 1890년대 부산진성(釜山鎭城) 전경을 담은 사진이죠. 이미 소개했던 객사 공진관 사진을 오른쪽 아래에 다시 첨부하였습니다.

부산진성 서문(西門)인 금루관(金壘關)이 잘 보이고 지방에 부임한 관원이 의례를 올리고 잠시 들린 관원들의 숙소가 되기도 했던 부산진 객사 건물이 보입니다. 사진 오른쪽이 남쪽이므로 객사는 남향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루관은 '쇠[金]로 된 보루[壘]의 관문[關]'이라는 뜻입니다. 객사 너머로 군영(軍營) 영문(營門, 정문)인 중층(重層, 2층)의 원문(轅門) 제남루(濟南樓)가 있습니다. 제남루 2층에는 성문을 여닫는 것을 알리는 북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폐문루(閉門樓)라고도 했습니다. 특히 읍성이 있는 일반 고을의 동헌 앞 외문루를 흔히 폐문루라고 했죠. 부산포진은 군영이기에 본 글에서는 폐문루가 아닌 원문 표기를 우선합니다.

원문으로 들어가서 왼쪽(북쪽)으로 향하면 부산포진의 동헌으로 가는 길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 동헌 내삼문(內三門, 대문) 및 삼문 행랑채가 있습니다. 내삼문을 지나면 서남향의 동헌 건물이 있는데, 각종 읍지(邑誌)를 비롯한 문헌에는 8칸[間] 규모의 검소루(劍嘯樓)라고 되어 있지만 위 사진이 촬영될 당시인 19세기 후반에는 주해루(籌海樓) 및 함벽당(涵碧堂) 편액(扁額,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건물 규모는 10칸 또는 12칸 반(半)이었으며, 진(鎭, 군영)에 설치된 동헌이었으므로 진헌(鎭軒)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경상좌수영 관하 부산포진(釜山浦鎭) 전경
2번 사진 - 동래부 경상좌수영 부산포진 전경


위 2번 사진 역시 프랑스 장식미술관 등록 앨범에 수록된 것입니다. 현재 증산왜성(甑山倭城) 정상 근처에서 부산포 일대를 조망한 전경 사진을 일부입니다. 각 건물의 배치 형태가 1번 사진보다 명확합니다.

서문으로 진입하면 왼쪽에 객사가 있고 객사 왼쪽(동쪽, 사진에서는 북쪽)에 활쏘기를 하던 관덕정(觀德亭)이 있습니다. 관덕정 동쪽에 군관청(軍官廳)을 비롯한 부산진 관아 건물이 산재하고 있으며, 서문에서 이어진 비교적 넓은 도로를 따라 사진 속 너머 동문 방향으로 걸어가면 원문이 있고 원문 북쪽에 동헌이 있습니다. 1번 사진에서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남문(南門) 진남문(鎭南門)이 보이고 그 위(동쪽)에 멀리 왜미선창(倭未船艙) 포구가 있습니다. 왜미선창은 초량왜관(草梁倭館)에 보내는 쌀을 내리고 싣는 선창(부두)입니다. 서문에서 약 60미터 떨어진 곳에는 '이곳이 부산진성 입구임'을 알리며 서 있던 홍살문[紅箭門]도 있네요.

보통 관아 건물은 주변 건물들과 어울려 같은 방향으로 짓기 마련인데, 이곳 부산진 동헌은 비스듬한 각도인 서남향으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아마도 바로 뒤쪽 자성대(子城臺) 산기슭을 따라 자연스럽게 건물을 짓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각도로 지어진 건물은 동헌 주변 행랑채를 비롯해 몇 채 더 존재합니다.

3번 그림 - 동래 지역 부산포 부산진 개운진 지도
3번 그림 - 동래 지역 부산포, 부산포, 개운진 지도


위 3번 그림은 1913년경 제작된 지적원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부산포 일대 지도입니다. 부산진성에 대한 이야기하려면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 위치에 대한 추론을 빼놓을 수 없죠. 1952년(선조25) 음력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조선 전기, 후기의 부산진성 위치를 표기하였습니다.

전기 부산진성 위치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 부산진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부산첨사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을 모신 제단인 정공단(鄭公壇)의 위치에 관한 설을 참작한 것입니다. 옛 부산진성 남문 또는 서문 터에 정공단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의 규모는 1,689척에서 2,026척 사이였다는 문헌상의 부산진성 축성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다대진성 둘레가 1,806척이었기에 비슷하게 추정하였습니다. 추정 위치 일부가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실제 성(城)은 조금 더 북동쪽으로 넓게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도 왼쪽 위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축성한 일명 '증산왜성'이 있습니다. 지도에서는 전체 왜성 중에 조선 후기까지 성벽이 남아 있던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 즉 일본 성(城)의 중심 건물인 천수각(天守閣)이 있던 곳 일대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증산(甑山) 정상부에 지어진 이 왜성이 본성(本城, 內城)이고, 조선 후기 부산진성으로 활용된 지도 오른쪽의 왜성이 바로 자성(子城, 外城)입니다. 부산포 지역에 있던 2개 왜성을 당시 사람들이 모성(母城)과 자성으로 구분해 부르다가 점차 모성은 증산왜성, 자성은 자성대 또는 만공대(萬公臺), 승가대(勝嘉臺) 등으로 호칭이 굳어진 것이죠.

정공단 남쪽 지역에 종4품 만호(萬戶)가 지휘하던 개운포진(開雲浦鎭)이 있었습니다. 개운진은 조선 전기에 울산(蔚山) 지역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직후 부산 지역의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설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진을 이전하면 이전된 곳의 지명을 따서 새로 진명(鎭名)을 부여하지 않고 명칭과 군사력을 함께 이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개운진과 부산진 사이에는 인근 3개 진에 소속된 함선이 배치된 선창(船艙, 부두)이 있습니다. 부산포진 소속 전선(戰船, 판옥선 및 거북선) 2척, 개운포진 전선(판옥선) 1척, 두모포진(豆毛浦鎭) 전선(판옥선) 1척, 그리고 세 진의 병선(兵船)4척, 사후선 8척이 정박하고 있던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1614년에 관찰사 권반(權盼, 1564-1631)이 포구를 깊게 파서 선창을 만들고 거기에서 퍼 올린 흙을 쌓아 작은 언덕을 만든 것이 이 선창의 유래라고 전해집니다. 이 둔덕[臺]에 세워진 영가대(永嘉臺)는 부산포 선창 주변 바다를 두루 탐망하는 위치에 있던 정자(亭子)였으며, 선창 옆 선소(船所)에는 식파정(息波亭)을 비롯한 건물이 여럿 있었습니다.

부산진성 동문 위에 부창(釜倉) 소재지가 보이네요. 왜관(倭館) 공급용 쌀을 보관하는 동래 지역에서 가장 큰 창고 건물군입니다. 2번 그림에서 살펴본 왜미선창 부두를 통해 각종 물품을 배에 싣고 내렸습니다. 서문 밖 홍살문 위치 서쪽 '장시(場市)' 표기 지역은 조선시대에 시장이 서던 곳입니다. 점차 부산진성 객사 앞, 동헌 터 등으로 그 위치가 이동했죠.

파란색 화살표는 1857년(철종8) 즈음에 이 지역을 방문했던 외국인이 해상에서 그림을 그린 위치(방향)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9번 그림 설명 참조)

동래부 소재 부산포진 성내 전경 사진
4번 사진 - 부산포진성 내부 사진 자료


위 4번 사진은 부산진성 내부를 찍은 사진입니다. 대한제국 또는 일제강점기 때 많이 발행되었던 일본 회엽서(繪葉書, 사진엽서) 일부이며, 서문 문루 위 또는 문루 바로 남쪽 성벽 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문에서 원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길가에 객사 외삼문(外三門, 정문)이 있고 그 문을 들어가면 객사 권역 안에 비각(碑閣) 형태의 작은 건물이 있습니다. 객사와 인접한 곳에 있던 관덕정의 세부 모습도 잘 보이고, 사진을 확대하면 동헌을 이루는 각 기둥이 확인됩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에 부산포진 동헌 건물은 벽체가 거의 사라지고 기둥과 지붕만 남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성대 왜성의 전체적인 형상도 잘 관측됩니다.

부산포진성 원문(轅門) 제남루(濟南樓))
5번 사진 - 부산포진성 원문 제남루 사진 자료


위 5번 사진은 부산진성 내부를 찍은 또 다른 회엽서의 일부입니다. 원문 제남루(濟南樓) 부분을 확대한 것으로 원문 위치에서 서문(금루관) 방향을 바라볼 때 오른쪽(북쪽)을 따라 부산진성 내성(內城) 성벽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입니다. 동헌 건물이 기둥만 남았던 것처럼 원문도 2층 문루의 난간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기와 부분도 많이 탈락한 상태입니다. 이 원문 정면에 부산진임을 나타내는 '해좌주진아문(海左主鎭衙門)' 편액이 걸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좌주진(海左主鎭)은 경상도 또는 경상좌수영 바다[海左]의 선봉 진영[主鎭]임을 뜻합니다.


사진 왼쪽 아래에 있는 이미지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1898년에 출간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 실린 삽화로, 부산진성 원문을 (사진과 반대 방향인) 문루 안쪽에서 그린 것입니다. 'Gate of old Fusan(옛 부산의 관문)'이라는 표제를 가진 이 그림이 어떤 문루를 그린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그림에 묘사된 1층 문 바깥에 보이는 성벽과 문루의 지붕 규모를 참작하면 부산진성 원문임이 확실합니다. 그림에서 묘사된 2층 편액 글자는 '수항루(受降樓)'로 추정됩니다.

책자 기록에 따르면 비숍 여사는 한국에 상륙한 직후인 1894년(고종31) 2월말에 부산진성까지 나들이했습니다. 당시 촬영했던 사진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책자에 수록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시기에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인지는 미확인이지만, 2층에 큰북[大鼓]이 달려 있고 비숍 여사가 간행한 여려 책자에서 일러스트를 담당했던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1840-1911)의 작품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1895년(고종32) 7월을 기해 전국의 수군진이 폐지된 후에는 곧 문루에 달려 있던 북이 철거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흑백 사진을 인쇄하는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사진이나 그림을 스케치로 옮겨 발행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부산진 객사(客舍) 공진관(拱辰館) 전경
6번 사진 - 부산진 객사 공진관 일대 전경 사진


위 6번 사진은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i, 1876-1948)가 1904년 간행한 『꼬레아 레아니(Corea e Coreani)』에 실린 부산진성 내부 사진입니다. '한국의 한 마을(Un Villaggio Coreano)'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같은 사진이 일본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동아시아학 사이트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객사 공진관 일대를 촬영한 것으로 객사 측면 형태가 잘 보이고 멀리 서문, 객사 외삼문, 관덕정, 정면 5칸 규모의 별포군관청 건물도 상세하게 보입니다. 군관청 당호(堂號)는 '백일당(百一堂)'이었습니다. 다른 사진과 비교할 때 관덕정 기둥 구조와 동헌 내삼문 및 행랑채 일부가 잘 관측된다는 점에서 부산진성 구조 파악에 있어 가치가 높은 사진입니다.

부산진성 객사(客舍) 공진관 지역 건물 배치도
7번 그림 - 부산진성 객사(客舍) 일대 건물 배치도


위 7번 그림은 부산진성을 촬영한 각종 사진 및 도면, 기록 등의 자료를 토대로 추정한 부산포진 객사 일대 관아 건물 배치도입니다. 옅은 보라색으로 채색된 부분은 지적원도가 작성된 1913년 당시 국유지입니다. 적색 숫자는 지번, 흑색 숫자는 여러 사진에서 파악한 건물 지붕의 숫기와 규모(숫자)입니다. 각 건물 구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빨간색 건물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서 「부산진불하구성도(釜山鎭拂下區城圖)」 등 도면 자료 기반 (내부 칸은 추정)
파란색 건물 : 박물관, 도서관, 개인 소장 각종 사진 자료 기반 추정 (위치와 규모 모두 추정)
노란색 건물 : 〈동래부사접외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등 회화 자료 기반 (본 객사 일대 배치도에는 없음)
초록색 건물 : 각종 읍지, 「부산진진지(釜山鎭鎭誌)」, 「부산진지(釜山鎭誌)」 등 문헌 자료 기반 (위치와 규모 모두 추정)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경로는 1963년 12월 발행된 『향도부산(港都釜山)』 제3호에 실린 「1910년 이전의 부산의 양풍건축」 논문에서 인용한 일본 『건축잡지(建築雑誌)』 제201호 1903년 9월호 수록 기록에서 주인공이 부산진성을 탐방한 추정로입니다. 논문에 수록된 당시 국역본과 일본 잡지 원문을 참고하여 해당 내용에서 부산진성 건물과 관련된 부분만 간추려 기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위 5번 그림(지도)에 해당하는 경로까지만 옮겼으며, 빨간색 글자 부분은 보충 설명입니다.


(전략) 부산진 해안에 이르며 오른쪽(右)으로 돌아가자[曲] 흑칠한 기둥을 세우고 검형(劍形, 칼 모양)의 장식을 붙인 문(門)이 있었다(부산진성 홍살문 묘사). 그 앞으로 나아가니 금루관(金壘閣)이라 하여 돌을 쌓아 지지하여 올리고[架] 위에 누문(樓門)을 세웠는데 왼쪽[左方] 돌[石]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라 새기고 오른쪽[右方] 석주(石柱)에는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 새겼다(부산진 서문 및 우주석 묘사). (중략) 여기(금루관 2층 문루 위)에서 내려가니 민가(民家)가 여러 채[數軒] 있고 오른쪽[右方]에 정문(正門, 외삼문)과 중문(中門, 내삼문)을 둔 '공진관(拱辰館)'이라는 가옥(家屋)이 있다(부산포진 객사 묘사). 그 구조가 장대미려(壯大美麗)하며 군의평정(軍議評定, 군사 회의)에 사용된 장소일 것이다(건물 용도 잘못 추정). (중략) 흙 묻은 신발[土足] 그대로 들어가니 4-5인의 일꾼[苦力]이 모여 짚신[鞋]을 짜고 있었다. (중략) 이곳(객사)을 나서니 밖[外]에 관덕정(觀德亭) 내(內)에 '반구정(反求亭)'이란 편액[額]을 올린[揭] 집[家]이 있다(객사 동쪽 관덕정 묘사). 그 구조는 기둥 아래[柱下]에 긴 사각형의 화강암[花崗石]을 고이고 그 위에 주칠[朱塗] 기둥을 세웠다. 길에 나오니 오른쪽[右](국역 논문에서는 左로 기재)에 수성청(守城廳), 교련소(敎練所), 별포군관청(別砲軍官廳)[원주(原註). 실내(室內)에 백일당(百一堂) 편액이 있음]이 있고 오른쪽[右](앞의 원문 右가 左의 착오임을 보여줌)에 무사청(武士廳)과 용사불망(勇士不忘)의 비석[碑]이 여럿[數本] 있다(관덕정에서 원문 사이 관아 건물 배치 및 공덕비 설치 공간 묘사). (후술)


이 글은 해당 일본 잡지에 '韓錦 (一名渡韓日誌)'라는 소제목으로 '文苑(문원)' 항목에 수록되어 있으며, 작자의 필명은 '松華生(송화생)'입니다. '한금(韓錦)'은 건축 부분에서 '한국의 아름다움' 또는 '한국의 훌륭한 것'을 의미하고, 대한제국에 건너가[渡韓] 쓴 일지임을 보여주는데, 그 방문 시점이 언제인지는 글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대략 1900년 전후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이 인물의 전체적인 부산진성 방문 경로를 텍스트로 정리하면,

부산진성 해안 → 입구(홍살문) → 서문(금루관) → 객사(공진관) → 관덕정(반구정) → 부속 관아 건물(수성청, 교련소, 군관청, 무사청, 비각 등) → 원문(제남루) → 내삼문(해좌주진아문) → 동헌(주해루) → 부속 건물(양무당) → 자성대 → 영가대

와 같습니다. 초록색으로 표기한 부분이 위 7번 그림의 지적원도 지도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대략적 경로입니다.


글 앞부분에 서문 금루관 성벽 모퉁이[隅]에 세웠던 '남요인후(南徼咽喉)' 및 '서문쇄약(西門鎖鑰)' 우주석(隅柱石)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남쪽 변방의 목구멍[咽喉]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鎖鑰, 빗장]이다' 정도로 풀어 쓸 수 있습니다. 『영남읍지(嶺南邑誌)』 「부산진진지」 서(序, 서문)에는 '부산에 진을 설치한 즉 (그 형세는) 대마도가 그 목구멍이 되고 일관(日館, 왜관)의 자물쇠가 된다[釜之鎭也卽馬島咽喉日館鎖鑰]'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서문 우주석의 두 문구는 부산진성이 일본국 대마도(對馬島)와 해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최전선임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부산진이 초량왜관을 제어하는 곳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실제로 부산첨사는 왜관을 출입하는 일본인을 통제하고 왜관에 지급하는 물품을 관리하며 일본측 사신 접대를 담당하는 등 국방 및 외교에서 일선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특히 초량왜관 시기에 마련된 초량객사(草梁客舍)를 활용하기 이전인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시절에는 부산진성 안에 있는 객사에서 일본 사절의 숙배례(肅拜禮)가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부산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생각하면 '남요인후' 각명석(刻名石, 글자를 새긴 비석)만 세워도 무방하지만 부산포진성 주 출입문이 마침 두모포왜관 또는 초량왜관 방향인 서문이므로 그곳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면서 '서문쇄약'도 써넣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서문쇄약'은 청나라와 인접한 국경 지역인 평안도를 관장하는 관서(關西) 지역의 핵심 요충지 평양에 소재한 평안감영 및 평양성 서문 보통문(普通門)과 해서(海西) 지역인 황해도 황주(黃州) 객사에도 현판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서문루(西門樓)에 걸려 있던 금루관 편액에 '己卯八月日書(기묘년 8월에 씀)'라고 새겨져 있지만 정확한 제작 연대는 미상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금루관 중수(重修) 직후인 1819년(순조19)에 기존의 낡은 편액을 대신해 '새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 건물 안에 '반구정(反求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는 부분이 눈에 띄고, 별포군관청 안에 '백일당(百一堂)' 편액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주요 건물의 내부까지 자세히 둘러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영(軍營)으로서의 기능이 종료된 이후에 부산진성을 방문한 것이었기에 이처럼 자유롭게 성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구정의 '반구(反求)'는 '자기 자신에게서 허물을 찾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반구저기(反求諸己)'에서 비롯된 것으로, 관덕정과 함께 많은 곳의 활터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용(中庸)』에도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 활을 쏴 중심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라는 문장이 있기도 합니다. 지도의 파란색 화살표는 관덕정 사대(射臺)에서 화살을 날리는 방향입니다.

6번 사진을 비롯한 각종 사진 자료에 따르면 321번지에 있던 15칸 건물이 바로 부산포진 군관청(軍官廳)입니다. 1871년(고종8) 『영남읍지』 「부산진진지」, 1895년(고종32) 『영남진지(嶺南鎭誌)』 「부산진지」 등 문헌에 따르면 대일(對日)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서계소(書契所)가 동래부(東萊府)와 별도로 부산진에도 있었는데, 부산진 전경을 담은 사진을 참고하면 군관청 북쪽에 있던 ㄷ자 형태의16칸로 추정되는 건물이 이 서계로로 추정됩니다. 부산진 서계소는 1890년대에 교련소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수성청(守城廳)은 군관청 남쪽 건물로 판단됩니다.

옅은 빨간색이 아닌, 진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경로를 따랐다면 310번지 소재 건물이 8칸 규모의 부산진 무사청(武士廳)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옅은 빨간색 경로로 이동했다면 다음 8번 그림의 325번지에 위치한 건물이 무사청일 확률이 더욱 높아집니다. 통상의 읍치(邑治) 전경을 생각해 보면 각종 공덕비, 불망비가 원문(폐문루) 앞쪽에 세워져 있을 것이기에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310번지와 325번지 사이 구간에 길이 약간 남쪽으로 확장된 곳(311번지 인접 도로)이 있는데 그곳에 공덕비들이 나란히 있었을 수 있기는 합니다. 후자라면 310번지 건물이 유력하겠죠.

㉠과 ㉡ 건물은 용도 미상의 부산진 관아 건물이며, 사진 자료를 참고할 때 우진각 지붕입니다.

동래 부산진성 동헌(東軒) 지역 건물 배치 평면도
8번 그림 - 부산진성 동헌(東軒) 일대 건물 배치도


위 8번 그림은 7번 그림과 동일하게 제작된 부산포진 동헌 일대 관아 건물 배치도입니다. 지도에서 원문 제남루 서쪽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이 5번 사진 속의 성벽입니다. 앞에서 살펴봤던 일본인 탐방 기록을 이어 수록합니다.

(전술) 비(碑)는 모두 위에 작은 비각[小祠]를 세워 우뢰(雨露)를 막았고 기둥은 길이[長] 3분2(三分二) 가량 육각형의 간석(竿石)을 세운 위에 3분1가량 나무기둥[木柱]으로 고여 있다. 길이 끝나는[終] 곳에 제남루(濟南樓)라 부르는[唱] 성루(城樓)가 있다(부산진성 원문 묘사). 뒤쪽[後]에 '수항루(受降樓)'라는 편액[額]을 걸었다(원문 안쪽 편액 묘사). 여기에서 왼쪽[左]으로 꺽으면[折] 양측에 장옥(長屋, 긴 건물) 같은[如] 것이 있어 '해좌주진아문(海左主鎭衙門)'에 다다른다[達](동헌 내삼문까지 경로 묘사). 그 문[扉]은 축조(軸釣, 회전식 개폐)이며 주칠[朱塗]이다. 문 안[門內]에 주해루(籌海樓)가 있는데, 소목조(素木造, 목재 건물) 조아(組雅)의 구조이나 상판(床板, 바닥널)이 절반 넘게[過半] 없어진 것[取去]이 아쉽다(부산포진 동헌 묘사). 당내(堂內)에 함벽당(涵碧堂) 편액[額]이 있다. 왼쪽[左方]으로 돌아서[廻] 2-3의 작은 집[小屋]을 지나서 당후(堂後)로 나와[出] 제남루에 이르러[至] 오른쪽[右方]으로 나가면 양무당(養武堂)이 있다. 그 안에 누군가 와서 살고 있다. (후략)


원문에 제남루(濟南樓) 편액에 대한 부분 없이, 다만 문을 부르는 명칭이 그러하다고만 기술한 점에 주목합니다. 즉, 원문 안쪽(뒤쪽)에는 '수항루(受降樓)' 편액이 있었지만, 이 일본인의 방문 당시에는 원문 전면에 별도로 편액이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있었다면 '제남문 편액을 걸었다'는 식으로 표현했겠죠. 그리고 원문에서 내삼문까지 이어지는 경로에 장옥(長屋) 형태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관아 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긴 행랑채, 즉 장행랑(長行廊)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기에 내삼문에 걸려 있던 편액이 바로 5번 사진 설명에서 잠깐 살펴본 '해좌주진아문'입니다.


삼문(三門)을 들어가면 동헌 건물이 있고 그곳에 주해루, 함벽당 편액(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주해루의 주해(籌海)는 '바다를 헤아린다'는 뜻으로 대왜(對倭) 해안 방어[防倭]를 강조한 편액입니다. '주(籌)' 글자가 전략, 방책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국의 병영(兵營), 수영(水營), 중영(中營, 亞營) 등에 소재한 건물에 운주헌(運籌軒), 찬주헌(贊籌軒) 등 명칭이 관례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국방 중심의 국가 사무를 담당하던 비변사(備邊司)의 별칭도 주사(籌司)였습니다.

탐방기의 동헌 편액 부분은 동래감리서 관원으로 근무하고 다대포진 첨사를 지냈던 민건호(閔建鎬, 1843-1920)가 남긴 『해은 일록(海隱日錄)』에 수록된 1884년(고종21) 1월 15일 일기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전략) 밤에 달빛이 정말 좋을 때 부산첨사가 여러 관료들을 간절히 청하므로 이에 심산(心山), 경농(經農), 춘곡(春谷)과 함께 나란히 부산진에 갔다. 아사(衙舍, 관아 건물)주해루(籌海樓), 함벽당(涵碧堂) 현판이 걸려 있었다. (후략)
[원문] 夜月色正好 際玆釜僉要懇諸僚 故心山經農春谷聯袂而往釜山鎭則衙舍籌海樓涵碧堂懸板


『영남진지』 「부산진지」에 진헌(鎭軒), 즉 부산포진 동헌이 8칸 규모의 검소루(劍嘯樓, 劒嘯樓)라고 되어 있으나 어느 사이에 중건(重建)을 거치면서 10칸에서 12칸 반 규모의 주해루로 변모된 것 같습니다(유력). 또는 아예 다른 건물로 동헌을 옮긴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본래 주해루였다가 나중에 검소루로 변경된 것일 수 있습니다. 『영남진지』 편찬 시기가 지방군대 해체 직전인 1894년 11월에서 1895년 1월 무렵이기 때문에 그렇게(주해루→검소루) 추정 가능하지만, 『영남진지』 편찬 시기가 그렇다는 것이지 그때 제출된 「부산진지」는 그보다 훨씬 전에 작성되었을 것이므로 그 확률은 낮다고 봅니다. 검소루에 걸려 있었던 '완대헌(緩帶軒)' 편액이 임인년(壬寅年) 7월에 걸었던 것이라고 적혀 있기에 더욱 그렇죠. 1895년에서 가장 가까운 임인년이 1842년(헌종8)이기 때문입니다. 「부산진지」 관사(官舍) 항목 일부를 게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관사(官舍). (중략) 부산(釜山)에서는 첨사(僉使, 첨절제사)가 거처[所居]하는 당(堂)을 '검소(劒嘯)' 또는 '호준(虎蹲)'이라고 한다. 완대헌(緩帶軒)은 임인년 가을 7월에 걸어 놓은 것이다[壬寅秋七月所揭也]. 아사[衙, 관아]는 자성(子城, 자성대) 아래에 있는데 평상시에 거처하며 식사하는 곳으로서 승가(勝嘉, 승가정)와 서로 접해 있고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가 있어 경치가 그윽하다. 삼문(三門, 내삼문) 밖에 늘어선[羅列] 각 청사[各廳]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본부(本府, 동래도호부)에 뒤질 것이 없으며, 오히려 수영(水營, 경상좌수영)보다 나아서 충분히 변문(변방 국경)을 진압[鎭壓邊門]할 만하다.'고 한다.
(중략)
관사(官舍)
검소루(劒嘯樓) 8칸[原註. 동헌(東軒)], 삼문(三門) 3칸
제남루(濟南樓) 6칸[原註. 폐문루(閉門樓)]
내아(內衙) 11칸
공진관(拱辰館) 36칸[原註. 객사(客舍)], 내삼문(內三門) 3칸, 외삼문(外三門) 3칸
군관청(軍官廳) 15칸
수성청(守城廳) 8칸

(후략)

동헌인 검소루에는 완대헌 편액 이외에 '웅크린 호랑이'를 뜻하는 호준당(虎蹲堂) 또는 호준헌(虎蹲軒) 또는 호준루(虎蹲樓) 편액이 함께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 중심에 건물을 대표하는 편액이 하나만 걸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중요도가 높거나 풍광이 좋은 곳에 있던 건물에는 마루마다, 방마다 각각 편액(현판)을 걸기도 하였습니다. 완대헌 편액은 동래도호부 동헌인 충신당(忠信堂) 북쪽 건물의 당호이기도 합니다. 검소루와 같은 8칸 규모였죠.


위 기록 이외에 1969년 1월 간행된 『향도부산』 제7호 수록 「개항기 부산 사회상에 관한 자료」에도 부산진성을 방문했던 일본인이 작성한 일종의 여행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일제강점기 때 집필 시도된 부산부(釜山府) 역사서 초고인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앞의 기록보다 앞선 1892년(고종29) 8월에 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한시가(漢詩家) 미광중공(末廣重恭, 스에히로 시게야스 1849-1896)라는 인물이 조선(朝鮮) 시찰을 위해 입국한 후 부산, 원산 등을 방문하고 남긴 『북정록(北征錄)』의 일부분입니다. 부산진이 폐진(廢鎭)되는 1895년 7월 이전 시기의 방문이기 때문에 비록 내삼문 안 구역까지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대략적인 기술 내용은 앞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전략) 민가(民家) 사이에 부호소(釜戶所)[原註. 호장역장(戶長役場)], 공진관(拱辰館)[原註. 큰 손님[大賓]을 영접하는 곳], 교련소(敎練所), 별포군관청(別砲軍官廳) 등이 있다. 거의 허물어졌다. 남문(객사 남쪽의 정문 또는 군관청 권역의 문으로 추정)을 나서면[南門を出づれば] 정면에 큰 문[大なる門]이 있고 '해좌주진아문(海左主鎭衙門)'이라는 편액[額]을 걸어놓았다. 문 앞[門前]을 지나[過] 왼쪽으로 꺾으면[左折]하면 작은 산[小山]이 있고 수목이 울창[樹木鬱蒼]하다. (자성대 정상 부분 생략) 산(山)에서 내려와 귀로에 오르니 마부(馬夫)가 공진관에서 나를 기다린다. (후략)

앞의 기록과 다른 점은 '해좌주진아문' 편액이 동헌 내삼문이 아닌 '큰 문'인 원문(제남루)에 걸려 있었다고 명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부산진이 폐진되기 이전에는 원문(폐문루)이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부산포진임을 드러내는 편액이 제남루 2층 정면에 걸려 있었지만, 1895년 7월에 진이 철폐되면서 진에 소속된 군사들도 함께 흩어지면서 원문이 부산진성 동문과 서문을 잇는 길 사이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관리를 받고 있던 내삼문(대문)으로 옮겨 걸었을 것으로 추정 가능합니다. 즉, 부산포진의 관아 기능이 상실되었기에 청사 정문에 걸린 현판을 떼어 안쪽 건물으로 이전한 것입니다.

원문 제남루에 걸린 편액을 고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95년 7월 폐진 이전 : 원문 제남루 정면에 '해좌주진아문' 편액, 후면에 '수항루' 편액, 내삼문 편액은 미상
1895년 7월 폐진 이후 : 원문 제남루 정면의 '해좌주진아문' 편액을 내삼문으로 이전 (후면 '수항루' 편액은 존치)

만약 '남문'을 원문 제남루(를 부산진성 남문으로 인식했던 이름 착오)였다고 이해하면 '큰 문'을 내삼문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문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작은 산(자성대)이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다소 낮습니다. 위 8번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원문을 지나 동쪽으로 이어지는 직진 길에서 왼쪽 ②번 건물 뒤에 자성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삼문 앞 위치에서는 오른쪽에 있죠. 단, 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문전을 지나'라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내삼문 바로 앞에서 편액을 관찰한 후 우측 관아 건물들 사이 골목 같은 곳으로 진입했을 때는 자성대로 올라가는 길이 좌측에 있기는 합니다. 역사 또는 건축 전문가에 의한 연구 내지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네요.

제남루 안쪽에 걸린 수항루(受降樓) 편액은 '항복을 받는 누각'이라는 뜻인데, 부산포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경상좌수영의 원문(轅門) 명칭 역시 수항루였습니다. 직속 상급 관청의 원문이 수항루인데, 관할 관청의 원문 안쪽 편액이 동일한 수항루인 것이 인상적입니다. 덧붙이자면 경상도 고성(固城)의 통영(統營, 삼도수군통제영)에도 수항루가 있었고 함경도 종성(鐘城)의 3층 누각인 수항루도 유명합니다.

위 1892년 8월 기행 기록에 따르면 서문에서 객사로 가는 중간에 호장(戶長)이 업무를 보던 부호소(釜戶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 고을의 호장청(戶長廳)에 대응하는 공간을 부산포진에서는 부호소로 부르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3칸 규모의 호방소(戶房所)를 지칭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앞의 7번 지도에서 ①번 275번지 공용[共] 대지 또는 ②번 객사 필지 일부를 부호소 위치로 추정합니다.


앞의 일본인 탐방기 송화생(松華生)에서 동헌 주해루 이후 이동로를 분홍색 화살포의 ㉠ 경로과 주황색 화살표의 ㉡ 경로로 가정할 수 있는데, '왼쪽으로 돌아서'라는 부분이 동헌으로 진입하는 방향에서 볼 때 왼쪽이냐, 아니면 동헌 대청에서 내삼문을 바로볼 때 시점에서 왼쪽이냐 하는 문제가 있기에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당후(堂後)'라는 것이 함벽당(涵碧堂)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일 가능성이 보다 높으며, 이 경우 글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양무당(養武堂)은 ①번 또는 ②번 건물일 것입니다. 문맥에 따르면 ①번이 우선이지만, 각종 사진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건물은 ②번입니다.


일본왜성 자성은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정상 부분을 가장 중요한 혼마루[本丸, 主城], 내성벽이 있는 부분을 2급지인 니노마루[二丸], 외곽 성벽으로 둘러싸인 나머지 최외곽 부분을 산노마루[三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혼마루 지역에 1974년 건축한 진남대(鎭南臺)가 있는데, 본래 이곳에 장대(將臺, 지휘소)인 승가정(勝嘉亭)이 있었으므로 2022년에 현판을 진남대에서 승가정으로 교체하였습니다. ②번 건물 바로 근처에 서문 금루관 복원 건물이 있습니다. 위치와 형태 모두 아쉬운 복원입니다.

1857년 조선(Corea) 부산해(Fusankai) 일러스트
9번 그림 - 1857년경 부산진성 일러스트


위 9번 그림은 영국 주간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의 1858년(철종9) 4월 24일 토요일 발행분 5면에 수록된 삽화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미지이며, 신문에 싣기 위해 판화 기법으로 그린 스케치의 원본 그림은 1857년 가을에 부산포 근해를 방문했던 외국인이 그린 수채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어 kai(かい) 발음 단어로 '해(海)'가 있으므로 제목 'Fusankai, Corea'는 '부산해(釜山海), 조선'을 의미합니다.

그림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의심할 수 없는 원문 제남루 측면입니다. 원문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부산진성 성벽이 보이며, 성벽 아래에 초가집이 늘어서 있습니다. 또 오른쪽에는 8번 그림의 ②번 남서향 건물 지붕이 있으며, 그 뒤로 자성대 기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소형 나룻배가 매여 있는 곳에 사람들이 서 있는데, 이곳은 왜미선창 일부로 보입니다.

아마 서양인이 한국의 마을 풍경을 자세히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일러스트 원본은 3번 지도의 파란색 화살표가 있는 해상에서 그린 것입니다. 상륙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부산진 첨사영 관아 건물 배치 지도
10번 사진 - 부산진 첨사영 건물 배치 항공사진


위 10번 사진은 현대 항공사진에 7번과 8번 지적원도 위 각종 건물의 추정 이미지를 겹친 것입니다. 동헌, 내삼문, 원문, 군관청, 관덕정, 객사, 서문, 남문을 비롯한 각종 구조물과 도로, 성벽, 하천, 해안선 위치 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부산진 시장 건물과 왕복 8차선 범일로 도로가 존재하는 한 주요 건물의 원위치 복원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래서 서문 금루관이 저 위치에 복원된 것이겠지요.

부산진성 공원(옛 자성대공원) 또는 부산진 시장 근처를 방문하시면 이 건물 배치 이미지를 참고하여 옛날 부산진성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고 부산진성 규모가 참 큽니다. 「부산진지」에서 부산진 풍광이 경상좌수영에 비견될 만하다는 기술이 그대로 납득될 정도네요.

부산포진수군첨첨절제사영 동헌(東軒) 건물 주해루(籌海樓) 사진
11번 사진 - 부산포진수군영 동헌 주해루(籌海樓)


위 11번 사진은 미국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 도서관의 디지털 컬렉션 사이트 수록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진 제목이 'Roof of temple at village, Fusan'으로 국역하면 '부산 한 마을의 사찰 지붕' 정도가 되는데, 언뜻 보면 염주를 들고 있는 건물 속 인물 때문인지 사찰로 추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부산포진 동헌 건물인 주해루 모습입니다. 빨간색 화살표의 편액 명칭이 '주해루'이고, 파란색 화살표 편액(현판)이 '함벽당'이기 때문입니다. 또 전체적인 건물 높이도 기존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흡사하고, 무엇보다 건물 지붕의 숫기와 숫자가 35개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풍경 사진 '부산진'〉 사진 속의 동헌 건물 숫기와 숫자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리고 건물 각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 글자도 '충(忠)', '병(兵)', '무(武)', '영(營)'이 보이는 등 군사 부문에 관계된 것이죠. 따라서 이 건물은 부산포진 수군첨절제사 진영의 동헌 주해루가 분명합니다.

디지털 컬렉션 사이트의 사진 소개 페이지에 사진 촬영 시기가 1880년대라고 되어 있는데, 동헌 건물이 온전하고 현판과 의자 등을 비롯한 각종 기물이 잘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부산진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을 시기에 찍힌 사진으로 보입니다. 즉, 폐진되기 전인 1895년 이전, 아마도 소개 페이지 내용처럼 1880년대에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검은색 화살표로 표시된 곳에 거문고 또는 가야금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확률 50% 이하). 만약 그렇다면 남자와 같은 방에 있는 사진 속 여자는 관기(官妓, 관청 소속 기생)이거나 기생일 가능성이 있겠죠. 그럴 경우 사진 자체도 부산진에서 주최한 모임 또는 행사에 촬영한 외국인(일본인 또는 영국인)이 찍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추정이네요. 사진 속 두 인물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 점도 눈에 띕니다.


사진 속 동헌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은 2칸 반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12칸 반 건물입니다. 측면 0.5칸(2칸 반)은 마루로 된 전퇴(前退, 전면 퇴칸)로 보이며, 정면 5칸 중에서 왼쪽(서쪽)부터 2칸은 방(房), 나머지 3칸은 대청(大廳, 마루)입니다. 보라색 화살표로 표시한 디딤돌과 건물 4번째 칸에 걸린 주해루 편액을 보면 짐작할 수 있지만 건물 중심부는 왼쪽에서 4번째 칸입니다. 그리고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의 밝기를 조정하면 의자가 1개 이상 보입니다. 투박한 형태로 쌓아 올려진 자연석 기단부의 높이가 거의 1.5미터에 달할 정도라서 계석(階石, 계단돌) 높이가 상당합니다.

일반 고을의 동헌은 대한제국 시기 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군청(郡廳)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아서 사진 및 도면 자료가 꽤 많이 남아 있고 실존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지방에 있던 수많은 첨사진, 만호진 등 진영(鎭營)의 동헌은 현존하는 것이 별로 없고 사진 또는 도면 자료 또한 거의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외국 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나마 이렇게 부산진성 동헌 사진을 확인할 수 있어서 실로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관계 관청에서 의지만 충분하다면 충실한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사진 품질이 좋기도 하고요. 전국의 관아 복원 사례 가운데 '중구난방 제멋대로 복원'의 결정판을 부산광역시 동래구 소재 동래도호부 복원이라고 보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마지막으로, 녹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현판 일부가 보이는데, 완벽하게 식별되지는 않지만 '호소재(虎嘯齋)'인 것으로 보입니다. 「부산진지」에서 동헌 편액을 '검소(劒嘯, 검이 우는 소리)' 및 '호준(虎蹲, 웅크린 호랑이)'이라고 하였는데, 두 개 편액에서 한 글자씩 딴 '호소(虎嘯, 호랑이 울음소리)'입니다. 뜻은 '호랑이 울음소리'인데,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는지 궁금하군요.


본 글에서 새로 확인할 수 있었단 내용을 중요도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부산포진 운영 당시 동헌 주해루 건물을 촬영한 사진 확인
2) 1960년대 국내 논문집에서 인용된 일본인 작성 기록물 2건을 토대로 한 주요 건물 배치 추정 (과거 논문 및 자료 재조명)
3)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실린 '부산 관문' 그림이 부산진성 원문임을 확인
4) 1857년에 외국인이 그린 수채화가 부산포진성 전경을 그린 것임을 확인

글 하단에 코넬 대학교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에 소장된 부산포진 동헌 사진을 링크합니다. 부산진성 서문 사진도 하나 확인되는데, 이 사진을 보면 현재 복원 금루관에 세워져 있는 서문쇄약, 남요인후 우주석이 옛날 우주석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주석의 진품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있기에 개인적인 의견(진품 확실)을 적어둡니다. 참고로, 두 사진 모두 좌우반전 상태로 실려 있습니다.



간략하게 적는다고 나름 노력했음에도 사진이 11장이나 되다 보니 분량이 꽤 길어졌습니다. 단상과 단견으로 점철된 이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이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알아낸다는 것은,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거나 단순 착각일지라도 제법 즐거운 일입니다. 그건 그렇고 경상좌수영 진영에 관한 글 제3편은 언제 또 작성할 수 있을지... 그럼,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장마철 건강에 유의하세요!



※ 부산포진 동헌 사진 링크 : 코넬 대학교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Roof of temple at village, Fusau (Busan)
※ 부산진성 서문 사진 링크 : 코넬 대학교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Village on the eastern coast of Fusau (Busan)


2024.07.01 - 처음 등록
2024.07.06 - 일부 내용 보충, 문맥 보완, 오탈자 수정 등
2024.07.11 - 해좌주진아문 편액 위치 추정 부분 보충 및 오탈자 수정


댓글